소설리스트

07. 게임을 시작하지(2권) (8/22)

07. 게임을 시작하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하녀 하나가 돌멩이 하나를 하늘 위로 던졌다. 돌멩이가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이브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새파랗게 날이 선 진검이 마거릿의 목으로 빠르게 짓쳐들어 갔다. 가볍게 검을 막아낸 마거릿은 그대로 이어 들어오는 상단 베기를 재차 흘려냈다. 괜찮은 연계 동작이었다. 챙, 챙, 챙! 맑은 쇳소리가 서너 번 빠르게 들리다가 돌연 두 사람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약간의 차이를 두고 이브가 있던 자리를 마거릿의 강렬한 발차기가 훑었다.

돌덩어리 같은 다리가 만들어낸 풍압을 피해 거리를 둔 이브는 검을 한 바퀴 휙 돌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신중하게, 자세를 낮추어 마거릿의 주위를 맴돌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사냥하던 시절의 습성이 조금 남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마거릿도 크게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해 떨어지겠다.”

“네에, 네. 들어갑니다!”

신중하게 습격할 타이밍을 노리던 이브는 그대로 짧게 소리치고는 번개처럼 마거릿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송곳 같은 날카로운 찌르기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예리한 기세의 베기가 푸른 궤적을 남기며 마거릿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아주 가끔은 마거릿마저 놓칠 정도로 빠른 공세가 마치 불꽃이 터지듯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이브의 골격은 나쁘지 않은 편이기는 했어도 타고난 검사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전투 센스는 신이 내려준 것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수십, 수백 번이고 죽음 위에서 줄타기를 해왔던 칼잡이들이나 가질 법한 기민한 판단력은 결코 검을 잡은 지 고작 두 해가 지난 초심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브가 이토록 짧은 기간 동안 검을 연마하며 오라에 감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이전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성취였지만 이브는 마치 마거릿에게 검을 사사하는 동안 오라에 감응한 것처럼 꾸며냈다.

이미 긴 시간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체득해온 이브는 마거릿이 생애 내내 익히고 보완해온 검술의 정수를, 마치 마른 수건이 물을 머금듯이 게걸스레 빨아들였다.

그런 의미로, 결국 마거릿은 그녀를 천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빨리! 네 검은 쾌검이라니까!”

“다시 갑니다!”

이브는 본능을 좇아 상대의 목줄을 물어뜯는 사냥꾼이었다. 마거릿은 그런 그녀를 두드리고 연마해 그럴듯한 기사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 수려하면서도 번개처럼 들이치는 그녀의 검격은 마거릿이 그간 갈고닦아 만든 노력의 산물이었다.

힘을 빼고 이브의 검을 받아넘기던 마거릿이 돌연 기세를 바꾸어 강하게 이브의 검을 받아쳤다.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강렬한 소리가 후원을 가득 메웠음에도 이브는 큰 흔들림 없이 재빠르게 무너진 자세를 갈무리했다. 힘이 모자라 나동그라지곤 했던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신체적 자질을 가지고 그녀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한 덕분이었다. 아무리 센스가 좋아도 그것을 뒷받침해줄 만한 체력과 근력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마련이다. 이브는 제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최선의 노력을 들일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었고, 마거릿은 그런 그녀의 노력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마거릿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삼키며 짐짓 엄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타이밍을 노리는가 싶던 이브의 검이 재차 독사처럼 재빠르게 파고들어 왔다. 하체를 노리며 찔러 들어오던 검이 돌연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이며 상체를 아래에서 올려 베어왔다. 마거릿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마주 대고 이브의 검을 받아쳤다.

그러나 이브의 검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이브는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마거릿이 내지른 검을 타고 올라가 크게 검을 뒤집어 휘둘렀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마거릿의 대응이 한 박자 늦어지자마자 이브의 검 끝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어 있는 마거릿의 목 줄기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순간, 마거릿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발을 굴러 마치 공중제비를 돌듯이 이브의 머리 위를 큰 궤적을 그리며 뛰어넘은 마거릿이 이브의 목에 검을 슬쩍 가져다 댔다. 말도 안 되는 변칙 기술이었다.

“악!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 미친 망겜 물리엔진 고장 났나 봐!”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이 애송이 녀석아.”

“아니 진짜 이게 된다고요? 뭐예요! 저도 알려줘요!”

“아서라. 백 년은 일러.”

마거릿이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이브의 요청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하체나 더 단련하라고 구박을 한 마거릿은 검집으로 이브의 허벅지를 한 대 툭 후려쳤다. 그녀의 가차 없는 대답에 이브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아직 검에 오라를 씌우는 건 성공을 못 했나 보지?”

“으음, 어느 정도 비슷하게 따라 하기는 했는데……. 마거릿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형태가 일정하지가 않더라고요.”

전에는 그저 스킬명만 외치면 저절로 칼에 무형의 기운이 덮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그 요령을 찾아 익혀야만 했다. 이브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마거릿이 입을 열었다.

“흠…… 아, 곧 수도에 간다고 했지.”

“맞아요. 이번에 건국절 기념행사 때문에 올라가야 한대요.”

“이 말괄량이가 데뷔탕트는 치르려나 모르겠군.”

“데뷔탕트는 무슨요, 오라버니 호위로 가는 건데.”

“수도에 가게 되면 내 아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래, 미리 말해둘 테니 그 애에게 오라 수련법에 대해 조언을 좀 들어봐라. 오라를 다루는 솜씨만큼은 나보다 그 애가 더 훌륭하거든.”

“아들이요? 설마 카스텔 비텔스바흐 경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이브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아니, 지금 「그」 카스텔 비텔스바흐 경을 무슨 동네 아는 애 얘기하듯 말씀하시는 거예요?”

“만나서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

이야기는 본인이 알아서 할 테니 수도로 올라가면 그를 만나보라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마거릿은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검집을 검집대에 채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작별해야 할 때가 오는구나.”

“아쉽네요. 마거릿님께 배울 게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살아만 있다면 또 볼 날이 오겠지.”

“불길한 플래그 세우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신다고 하셨죠? 도시락 준비해두라고 말해놓을게요.”

마거릿이 픽 웃으며 이브의 뒤통수를 친근하게 헤집었다. 성장기 동안 마치 콩나물이 자라듯 키가 몰라보게 자란 이브는 어지간한 남성보다도 키가 큰 마거릿과 어깨높이가 거의 엇비슷할 정도가 되어 머리를 쓰다듬는 자세가 조금 어색해졌다.

“다음에 다시 뵐 땐 꼭 마거릿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잘라내고 말겠어요. 기대하세요.”

“그거 꼭 살인 협박처럼 들리는구나. 기대하마.”

두 사제가 씩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단단히 맞물린 손아귀가 두어 번 흔들렸다. 두 사람은 이것이 끝이 아니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졌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이브에게 스물두 번째 봄이 찾아왔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브는 마차가 속도를 줄이는 것을 느끼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2년 전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베르묄의 타운하우스가 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마차의 움직임이 멈추었고,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튀어나온 이브는 알베리크를 향해 손을 내밀며 웃어 보였다.

“내리실까요, 신사분?”

“하…….”

알베리크가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로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브의 손끝을 잡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브는 퍽 능숙한 자세로 알베리크를 에스코트한 후 그의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걸었다.

드레스도, 승마복도 아닌 후줄근한 남성용 베이지색 셔츠와 짙은 갈색 베스트, 얇은 갈색 면바지를 입고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뒤로 모아 질끈 묶은 이브의 모습에서 「레이디」다운 구석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라리 마부나 젊은 시종처럼 보일 법한 복장을 갖춘 이브의 허리께에는 긴 장검이 매달려 있어 그녀가 어째서 남복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정문 앞에 당도하자 풋맨이 문을 열어주었고, 마치 오래전의 광경을 녹화했다가 재생한 것만 같은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열 맞추어 서 있던 고용인들이 두 사람의 방문에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브는 엄격한 인상의 집사장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조제프.”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노련한 중년의 사내는 이브의 꽤나 파격적인 복장에도 눈매 한번 꿈틀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사를 되받았다.

“조제프. 바로 식사를 준비시키세요. 그리고 이벨린의 짐은 내 침실 건너에 풀도록 지시하세요. 이벨린, 당신은 잠깐 나를 따라오세요.”

“예, 도련님.”

알베리크는 조제프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린 후 이벨린을 끌고 수도 저택의 제 집무실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무실 내부에 들어선 알베리크가 방 안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손님맞이용 소파에 앉았다. 이브는 눈치껏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전하께서 당신이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알베리크는 골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 근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수도로 올라오면 건국절 연회 시작 전 당신과 함께 잠시 방문하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오…….”

“그런데 당신이 가진 의복들로는 입궁은커녕 변경 지역 지주의 작은 티파티에도 참가하기 힘들겠더군요.”

“예에, 뭐.”

“여성용 드레스는 하루 이틀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 수개월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요. 건국절 행사가 있다고 작년부터 언질을 주었던 것 같은데, 왜 당신 클로젯은 그 모양 그 꼴인지 내게 설명해야 할 겁니다.”

“아니……. 막판에 오라 수련을 받느라 좀 바빴고…….”

“애초에 당신을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리석었군요.”

‘아, 에반데. 대체 내가 챙겨 온 옷들은 언제 확인한 거야……?’

이브는 도깨비처럼 흉흉한 눈빛을 하고 저를 압박하는 알베리크의 시선을 피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갑자기 하늘에서 파티용 드레스가 뚝딱 만들어져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이브가 돌연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알베리크에게 물었다.

“혹시 연미복은 맞추는 데에 오래 걸리나요?”

“드레스보다야 훨씬 빨리 받아볼 수 있습니다만.”

“여성이 남복을 하고 궁성에 입궁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죠?”

“그 꼴로 황성에 가겠다는 겁니까, 지금? 평상시에 남장을 하는 것이야 당신이 치마를 입고 검을 휘두르기 불편하다고 생떼를 부리니 어쩔 수 없이 허락한 일입니다만, 황성은 안 됩니다. 그런 여성은 생전 본 적이 없습니다.”

“마거릿님도 현역 때 기사단 정복을 입고 연회에 참석하고는 했다는데요?”

“그건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까.”

“아무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네요? 테일러를 불러주세요. 연미복으로 가죠.”

알베리크가 아연한 기색을 띠고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스러운 표정에 질려버린 그는 길게 장탄식을 내뱉으며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알베리크는 이브에게 제 의지를 관철할 만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 일로 수도의 이야기꾼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댈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다 아팠다.

“그러십시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조제프에게 이야기해두면 되죠? 다행이네요, 해결책이 생겨서.”

이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알베리크의 두통을 부채질했다.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던 알베리크가 손짓하며 이브를 내쫓아버렸다. 이브는 킥킥 웃으며 쉬세요,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그래. 황태자 플래그도 박살 낼 겸, 바지 정장을 입고 가야겠다. 이야, 내가 생각한 거지만 진짜 완벽한 아이디어인데?’

황성의 대연회장, 황제가 기거하는 글로리엄 궁의 메인 홀에서 열리는 건국절 연회 이벤트는 게임 초반부에도 등장하는 이벤트였다. 무도회가 아니라 만찬회라는 것이 조금 특색이 있어 게임 초반부에 진행된 이벤트였음에도 어느 정도 기억이 생생한 편이었다. 기억이 모조리 휘발되기 전에 작은 수첩에 대략적인 타임라인과 큰 사건들을 기록해두기는 했으나 벌써 몇몇 자잘한 디테일들은 인지의 구역 저 너머로 날아가버린 것에 비하면, 건국절 만찬회는 확실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편에 속했다.

아무리 귀족 영애의 딸이라고 포장을 해보아도 푸른 피의 귀족네들에게 있어 이브는 로잘린 베르묄이 평민과 붙어먹어 낳은 귀천상혼의 결과물이요, 교잡종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고아원에서 평민들과 함께 어울려 자란, 귀족이 지녀야 할 품위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씩씩한 성격의 아가씨란 도마 위에 올리기 좋은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다.

원래의 스토리대로라면 이브는 어찌어찌 대충 최소한의 구색만 갖춘 채 백작 부부와 알베리크를 따라 만찬회에 첫선을 보인다. 물론 놀랍지도 않게 만찬회에서 그녀를 하찮게 여기는 몇몇 귀족들에게 멸시와 비웃음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말의 칼에 잔뜩 상처를 입은 이브는 낯선 이들의 악의에 분노해 참지 못하고 그만 맞서 싸운다.

이브는 자신의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지적하며 급이 낮다는 식으로 모욕을 준 모 백작 영애에게 기죽지 않고 되레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어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고, 이것을 중재하려 끼어든 황태자와 마주치며 그를 처음 만난다.

베르묄의 사람들조차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영애는 그들의 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대거리를 하며 당당하게 맞선다. 황태자는 그런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같은 이브에게 신선함을 느끼며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이 황태자 루트의 도입부였다.

여기서 자신을 모욕한 백작 영애를 그냥 무시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비록 기분은 조금 더러우나 황태자 루트를 피할 수 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만찬회라면 이브는 루트 자체를 와장창 박살 내 깽판 쳐버릴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상하단 말이야. 고작 귀족 아가씨들 말싸움에 황태자씩이나 되는 거물이 와서 싸움을 말리다니. 물론, 황태자의 대외적 이미지가 부드럽고 상냥한 교회 오빠 스타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럴 군번은 아니지 않나……? 황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가씨들 싸움에 남자가 낀다니. 이 세계 상식으로는 좀 납득하기가 어렵지……? 역시 황제랑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아빠 시다바리나 한다는 설정 때문인가?’

브리타니아의 현 황제 프레데리크 3세는 황태자 출신의 황제가 아니다. 다섯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대공위를 물려받아 적당히 황실에서 주는 품위유지비나 받으며 놀고먹는 미래를 꿈꾸던 야망 없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비밀스럽게 만나던 자작가의 영애이자 황궁 시녀인 연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황태자가 제위를 물려받고 나머지 황자들이 대공 작위를 받아 황궁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는 날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반지를 나누었다. 두 남녀는 여유가 날 때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훗날 있을 혼인서약을 흉내 내기도 하고, 배를 타고 해외를 돌아볼 계획을 짜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황자의 연인인 헤스티아 클레페가 선황 게오르크 4세의 첩지를 받기 전까지는, 두 사람은 함께 미래를 꿈꾸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자세한 내막은 아무도 몰랐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마음 깊이 사랑한 연인을 아버지에게 빼앗긴 사내가 피눈물을 삼키며 복수를 다짐했다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실패를 점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수는 완벽히 성공했다. 너무나도 완벽하여 그날의 사건을 입에 올리는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황궁에서 오래 근무한 이들은 그날을 대학살의 밤이라고 칭했다. 그 밤, 대학살이라는 단어가 무색치 않게 황자궁과 황제궁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무섭도록 정확하고 신속한 반란이었다. 프레데리크 3세는 제 형제들과 아버지의 피를 받아 마시고 그들의 피로 얼룩진 관을 스스로 머리 위에 올렸다. 패륜왕 프레데리크 3세는 그렇게 제위에 올랐다.

무도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 막냇동생뿐이었다.

‘그래서 대공이랑 황태자랑은 사이가 미묘했지. 황제가 대공을 대놓고 예뻐하는 건 아니었지만, 황태자를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엄청 너그러웠으니까.’

트루엔딩에서 드러난 실상은 이랬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선황은 제 아들들의 혼처마저 자신의 권력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했다. 비정한 아버지는 강력한 병권을 가진 군벌귀족 카스타 후작과 모종의 계약을 통해 현 황후인 당시의 샤를로테 카스타 후작 영애를 프레데리크 3세의 짝으로 밀어 넣었다. 그 혼인으로 프레데리크 3세는 그녀와 제 아비가 연인을 해쳤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카스타 후작과 그녀의 딸은 게오르크 4세가 짐작한 것 이상으로 야망이 큰 사람들이었다. 샤를로테 황자비는 황자비 그리고 훗날 오르게 될 대공비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황후와 그녀의 친정은 선황과의 줄을 자르고 프레데리크의 반란을 도왔다. 계약의 조건은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 그리고 그녀의 아이가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이었다.

복수를 위해 강력한 병력을 가진 카스타 후작가의 손을 잡은 사내는 황후를 내치지는 못한 채 그저 몹시 미워할 뿐이었다.

샤를로테 황후는 황위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저를 밀어내는 지아비의 태도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되레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내아이를 가졌다. 프레데리크 3세가 어느 날 반쯤 실성해 제 양물을 자르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황제궁에서 일하던 궁인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에게 있어 황후는 자신을 겁간한 죄인이었고, 제 맏아들은 그 죄악의 산물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황제가 갓 태어난 황자의 목을 조르려 했다는 소문 역시 궁성 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그 후 프레데리크 3세는 돌연 죽은 연인의 여동생을 입궁시켰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아들을 하나, 딸을 하나 보았다. 긴 시간 사내의 곁을 독차지한 것은 엘리자베스 비,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후궁에게 황제의 총애란 곧 권력이었다. 황제를 등에 업은 엘리자베스 비는 곧 궁성 내에 제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봐란듯이 황후에게 냉랭히 구는 황제와 공식석상에서조차 황제의 곁을 지키고 선 후비의 모습에도 샤를로테 황후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샤를로테는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게 광영을 가져다줄, 황제의 세 자식 중 유일하게 관과 홀을 쥘 권리가 있는 적장자뿐이었으니.

그러나 그녀가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상황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적법한 권리를 가진 장자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황태자의 즉위를 쉽사리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친 황제와 그를 통제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여인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황태자비 자리가 여태 비어 있을까. 혹여 판세가 뒤집힐까 눈을 부라리는 엘리자베스비와 위의 눈치를 살피며 간만 보는 귀족들 그리고 혼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황태자의 쿵짝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엘리자베스 비에게서 본 둘째 아들도 그리 예뻐하진 않았어. 2황자 레이놀드가 외탁보다는 친탁을 해서 그랬겠지. 오히려 죽은 헤스티아를 쏙 빼닮은 건 대공이랑 막내딸 아멜리아였지. 그래서 아멜리아가 여인의 몸임에도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거였을 거야. 황제의 강력한 지지 없이 어떻게 이 거지 같은 성차별 국가에서 여제가 나왔겠어.’

만일 줄을 서려면 황녀 아멜리아를 선택해야 했다. 이브는 시종이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서다 말고 응접실에서 멈추어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복잡한 머릿속을 차근히 정리해나갔다.

‘지금이야 아무도 아멜리아를 주목하지 않지. 아무리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라고 해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승계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황태자나 2황자나 남자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난리 치다가 뒤통수 후려 맞는 거 아냐. 알베리크 이 등신 새끼, 하필 잡아도 참수당하는 애 줄을 잡을 게 뭐야.’

이브는 골치 아프다는 듯 끄응,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한참 만에야 생각을 정리하고는 응접실의 소파에서 일어서서 방과 이어져 있는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우선은 환복을 하고 씻고 싶었다.

이브는 높으신 양반들의 권력 싸움에 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권력자들에게 있어 자신 같은 사람들은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냥이 끝나면 가장 마지막에 잡아먹히는 것은 사냥개가 아니던가. 이브의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정쟁, 권력 다툼 뭐 그런 건 저들끼리 알아서 하라 그러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슬슬 옥타비아한테도 들러봐야겠는데.’

“저어, 아가씨.”

“어억……! 아, 놀래라.”

“죄송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환복을 어찌 도와야 할지…….”

“아냐, 아냐. 환복은, 음. 내가 알아서 벗을게.”

완전히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하녀들이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이브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자 메이드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것이, 재작년 저택에서 이브의 시중을 들었던 안나와 처음 보는 소녀였다.

“앗, 안나. 맞지?”

“네, 아가씨.”

“이쪽은?”

“안녕하세요, 아가씨. 메리입니다.”

“반가워, 메리. 안나도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반갑네!”

“네. 오랜만에 뵙지요? 어째 키가 더 크신 모양이네요.”

“하하. 아직도 성장기인가 봐. 안나는 별일 없었지?”

“네에. 그럼요.”

“그, 전에 함께 전담해줬던……. 마리아! 그 애도 잘 지내?”

“아. 그게…….”

하녀의 안부까지 챙기는 이브의 넉살에 부드럽게 웃던 안나의 안색이 돌연 어두워졌다. 곁에 서 있던 메리의 안색도 썩 좋지 않았다.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안나가 고민 끝에 사정을 털어놓았다.

“갑자기 사라져?”

“예에. 하녀장님도 무척 당황하셨어요. 그럴 애가 아닌데…….”

“사라지기 전에 특별히 뭔가 한 건 없었고?”

“아무런 전조도 없었어요. 그날은 마리아와 몇몇 아이들이 쉬는 날이어서 다 같이 강 동쪽 공방 거리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갔는데……. 마리아 혼자 돌아오지 않았어요.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게 아닐지…….”

“수사국에 신고는 했고?”

“하기는 했는데요…….”

점점 더 나빠지는 안나의 안색에 이브는 대충 일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눈치챘다. 아무리 귀족가의 메이드라고는 해도 나이 어린 평민 여자의 실종사건을 그들이 진지하게 받아주었을 리가 없었다. 개놈의 새끼들……. 작게 중얼거린 이브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안나의 등을 토닥였다.

“일단 나도 따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볼게. 너무 염려하지 마. 큰일 아닐 거야.”

“예에……. 어휴, 내 정신 좀 봐. 씻으셔야죠? 목욕 준비 할게요.”

“으응, 그래. 메리는 갈아입을 옷 좀 챙겨주겠어?”

“네, 아가씨!”

두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시야에서 벗어나자 이브는 침대 가장자리에 슬쩍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이런 사건은 몰라. 「이브를 위하여」는 이브나 남캐들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들만 다루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못 들은 척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힘없고 뒷배도 없는 소녀들의 고통은 이브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되고 배제되는 삶이란 지독할 정도로 무력감을 안기고는 했다. 이브는 도저히 그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비록 자신이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유가 있음에도 모르는 척 눈을 감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옥타비아에게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브는 목욕 준비가 끝났다는 안나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실 안에 들어가 훌러덩 셔츠와 바지를 벗어 던진 이브는 머뭇거리는 안나를 부드럽게 웃으며 바깥으로 내쫓아버리고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니 잠이 절로 쏟아졌다. 밥 먹어야 하는데. 애써 눈을 떠보려 했으나 결국 가물거리던 눈이 스르르 아래로 감겼다.

욕실에서 한참이나 나오지 않는 아가씨를 걱정한 안나가 결국 안으로 들이닥친 후에야 이브는 겨우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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