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아, 제발! 오라버니 손님이면 본관으로 꺼져! 왜 여기서 죽치고 자빠진 건데!”
“그거야 내 마음이지.”
“좀! 꺼져! 아니, 이 미친놈이 차는 안에서 들어가 처마시든가 할 것이지 왜 여기 나와서 난리야!”
“이벨린 네가 땀범벅이 돼서 흙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거야말로 최고의 티푸드거든.”
“미친 성격파탄자 새끼…….”
이브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후원에 작은 티테이블까지 마련해두고 이브가 훈련하는 시간마다 꼬박꼬박 내려와 티타임을 즐기는 분홍색 머리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심지어 오늘은 마거릿이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그를 나무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곱슬곱슬한 분홍빛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귀여운 외모의 소년이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은 마치 유명한 화가의 그림 속 천사처럼 보였으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마흔은 먹은 아저씨였다.
젊고 예쁘게 생기면 뭐 해, 알맹이는 40년 묵었는데. 자고로 남자란 영 앤드 리치, 빅 앤드 핸섬이라 하였거늘. 이브는 속으로 우웩, 하고 토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검을 쥐고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어느새 진도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는지 얼마 전 마거릿은 그녀에게 검술의 기본 보법을 알려주었다. 순서가 그리 어렵지는 않아 단숨에 외웠지만, 문제는 검을 든 채로 무게중심을 신경 써가며 스텝을 밟다 보면 간혹 발이 꼬인다는 데에 있었다. 검을 휘두르면서도 자연스럽게 발을 놀릴 수 있으려면 연습만이 답이었다.
‘아니 그런데 저 새끼는 왜 여기 들러붙은 건데? 잘 대해주기는커녕 얼굴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대체 왜 저래? 설마 욕 처먹으면 발정하는 변태인 거 아냐?’
이브는 그녀와 욕설 섞인 막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징그럽게 별관을 찾는 칼리스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와 나누는 격 없는 대화에 재미를 붙인 것 같은 눈치였다.
‘하……. 이게 그건가……. 아무리 원작을 비틀려고 해도 원작에 충실해진다는 강제력……? 진짜 거지 같다…….’
“야, 너 스텝 또 틀렸어. 그 정도 되면 그냥 재능 없는 거 아냐?”
“너 때문이다, 너! 미친 또라이야! 꺼져 제발!”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원래 이렇게 투닥거리다가 드는 미운 정이 무서운 법이었다. 이브는 칼리스토가 제게 이상야릇한 감정을 가지기 전에 얼른 쳐내버려야겠다 마음먹으며 계획을 짰다.
스텝을 배우면서부터는 베기와 찌르기의 횟수가 줄어들어 배우는 것은 많아졌지만 오히려 여유 시간은 조금 늘었기에,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알베리크를 한번 만나야겠다 마음먹은 참이었다.
‘스트레스도 풀어야 하고. 마침 주문했던 것도 도착했고.’
그걸 보여주면 질겁하면서 떨어져 나가겠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한 입 크기로 작게 자른 샌드위치를 보란 듯이 입에 쏙 집어넣는 칼리스토의 가증스러울 정도로 귀여운 낯짝을 보며 이브는 어디 두고 보자고 이를 갈았다.
“너 진짜 개짜증 난다.”
“칭찬인가?”
“성격 파탄자 새끼. 제발 나 좀 그만 따라다녀라. 내가 그렇게 좋아? 주중은 그렇다 쳐. 주말만큼은 나도 좀 쉬자, 응?”
“헛소리 하네. 너 어차피 주말에도 매일 훈련밖에 안 하잖아? 새삼스럽게 바쁜 척하기는.”
“이번엔 진짜 바빠. 넌 프라이버시도 몰라? 제에발, 이제 우리 아는 척하지 말자.”
“흐응……. 갑자기 왜 이렇게 날 떨어트리고 싶어 하는 걸까? 우리 친구가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가 봐?”
“악! 관심 가지지 마! 그냥 우리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 부디 내 일에 신경 좀 꺼줘.”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살살 흘리니 아닌 척하면서도 칼리스토의 눈이 즐거운 기색으로 빛났다. 어째서 그가 매번 툴툴거리기만 하는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치대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브로서는 상당히 거슬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 정도로 미끼를 던졌으니 물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녀는 덫에 사냥감이 걸리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나흘 정도야 순식간에 흘러갔다.
예고한 대로 토요일 오후, 애프터눈티를 마실 시간쯤이 되어서야 이브는 알베리크의 응접실을 찾았다. 미리 「예절 교육 시간」에 대해서 언질을 준 터라 그는 이 시간을 비워두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전에 지시가 있었는지 이브가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을 남겨두고 모든 사용인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브는 응접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어디선가 미약하게 바람이 불어온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붙잡았다.
“따라오십시오.”
“네.”
“……먼저 보낸 물건들은 받아보았습니다. 좋은 가죽을 썼더군요.”
“그런가요?”
“예. 무척…… 기대됩니다.”
그들은 응접실과 연결된 문을 통해 개인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가 예의 책장 앞에서 이것저것을 만지자 눈에 익은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브는 뒤쪽에서 작게 숨 들이켜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사냥감이 미끼를 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체벌실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전 그녀가 요구한 대로 제법 너비가 넓은 3인용 소파가 벽 한 곳을 차지하고 놓여 있었다. 침대를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입구가 넓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들인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밀실 안에 들어왔다고 느낀 이브가 돌연 아, 소리를 내며 다시 뒤쪽으로 가 촛대를 만져 입구를 닫아버렸다. 이제 그 누구도 중간에 도망칠 수는 없다. 이브는 그제야 마음 편히 미소 지으며 눈에 익은 장식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새로 주문한 걸 써보는 게 좋겠죠?”
“지금껏 본 적이 없는 형태군요.”
“이 넓적한 패들은 손바닥으로 맞는 것 같은 타격감을 줘요. 테일 휩은 꼬리가 여러 가닥이라 가볍지만 따끔따끔하고. 그러면 오늘은 이 두 가지로 하죠.”
“알겠습니다.”
이브와 알베리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장식장 앞에서 고민하다가 얼마 전 가죽 공방에서 보내온 넓적한 가죽 패들, 테일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플로거 휩을 골랐다. 이브는 패들과 휩을 손에 쥔 채 알베리크에게 말했다.
“자, 시작할까요.”
그는 이브의 말에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었으나 선선히 무릎을 꿇었다. 이브는 네발로 기는 것이 익숙해진 그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 암갈색 가죽 소파로 가 자리에 앉았다. 알베리크는 그런 그녀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뒤이어 내려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윗옷을 벗을 거예요.”
“아…….”
“싫은가요?”
“그건…….”
“벗어.”
이브는 빙글 웃으며 재차 말했다.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있지만 차갑게 식은 눈빛에 긴장한 알베리크가 손끝을 떨며 코튼 셔츠의 첫 단추를 단춧구멍에서 끌러냈다. 그는 손을 약간 아래로 내려 두 번째 단추에 가져다 댔으나 자꾸만 머뭇거리며 단추 언저리를 매만질 뿐이었다.
짜악!
알베리크는 순간 눈앞에 별이 비치는 환상을 봤다. 벼락처럼 내려온 손바닥이 매섭게 그의 뺨을 후려쳤다. 쓰고 있던 안경은 그의 콧대를 긁으며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그는 물밀듯 밀려오는 두려움 탓에 덜덜 떨리는 턱을 억지로 이를 악물어 막아보려 애썼다.
“좋게 말을 하면 들어야죠.”
이브가 한 손으로 알베리크의 양 뺨을 눌러 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알베리크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알베리크의 뺨이 왼쪽으로 거세게 돌아갔다.
몇 번씩이고 이어지는 따귀 세례에 알베리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양 뺨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뺨을 맞기 전부터 이를 악물고 있었던 탓에 입 안이 찢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파란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얼굴 위로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고인 눈물이었다.
“주제 파악 해야지. 응?”
감정 없이 그의 뺨을 내려치던 이브가 돌연 손등과 손가락 바깥 면으로 부드럽게 그의 뺨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검을 쥐느라 부쩍 거칠어진 손끝이 부드러운 살갗을 타고 그의 턱선을 따라 훑어 내렸다.
알베리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눈물을 꾹 참아내며 얌전히 셔츠 단추 위로 손을 얹었다.
하나 둘 여밈을 풀어나가는 손길에 점차 상의의 앞섶이 흐트러졌다. 앞판의 단추를 모두 끌러낸 그는 작게 숨을 내뱉으며 손목의 단추도 하나씩 풀어냈고, 잠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가 편 후 셔츠에서 팔을 빼내었다. 날이 더워 그랬는지 윗옷을 한 겹만 걸치고 있었던 탓에 그는 바로 맨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브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셔츠를 받아 제 옆에 대충 던져둔 뒤 다시 알베리크의 턱을 틀어쥐고 잡아당겼다. 그는 순순히 이브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왔다. 이브는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참 잘했어요, 하고 속삭여주고는 훅, 뜨거운 바람을 귀 안으로 불어넣었다. 움찔, 알베리크의 몸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킥킥 웃던 이브는 소파에서 일어서서는 알베리크에게 소파에 손을 짚고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그는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조금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몸을 굽혀 손으로 소파를 짚었다. 매끈한 하얀 살결이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다.
흰 눈 위를 처음 밟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이브는 그의 흰 살결 위를 제 흔적으로 붉게 물들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길게 죽죽 그어진 붉은 자국들은 그의 하얀 피부에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이었다.
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흥분하지 말자. 과하게 흥분했다가는 그를 부술지도 모르니까. 살살, 어린 짐승을 다루듯이. 이브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뇌며 소파 위에 얹어두었던 가닥이 여러 개인 플로거 휩의 손잡이를 쥐었다.
“우선 50까지 세도록 할까요. 숫자 똑바로 세고, 자세 무너트리지 마요. 허리가 낮아지거나 손이 등 뒤로 올라오면 그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세게 할 거니까. 알겠죠?”
“네, 네…….”
“좋아요.”
이브는 그의 왼편에 서서 가닥가닥의 테일들을 손으로 매만졌다. 돈을 때려 박았더니 아주 질 좋은 가죽을 쓴 것 같았다. 계속 거래해도 괜찮겠어, 하고 생각한 이브는 채찍의 긴 꼬리 뭉치를 모두 한 손으로 부드럽게 움켜쥐고 마치 발검하듯이 손안에서 채찍을 당겨 뽑아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촤악, 무수히 많은 얇은 가죽끈들이 매섭게 살갗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알베리크는 예상치 못한 통증에 깜짝 놀란 듯 흐윽, 하고 흐느꼈다. 이브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서너 번 정도를 더 채찍질했다. 짜악, 짝 하는 타격음과 고통에 흐느끼는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브는 곤란하다는 듯 움직임을 멈추고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전혀 수를 못 세고 있네. 며칠 사이에 바보가 된 건가요?”
“흐, 으……. 윽…….”
“1부터 다시 세도록 하세요.”
“아……. 으윽……. 네…….”
기껏해야 얇은 나무 회초리나 손바닥으로 맞았던 남자에게 플로거 휩이 주는 자극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그는 새 도구가 주는 낯선 통증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브는 다시 채찍의 꼬리를 좌측으로 빙글빙글 말아 단단히 그러모아 쥐고 그것을 뽑듯이 휘둘렀다. 말려 있던 꼬리들이 단단히 뭉쳐 얇은 가닥의 채찍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타격음을 만들어냈다.
촤악!
“으흐, 하…… 하나…….”
이브는 멈추지 않고 휩을 휘둘렀다. 손목 스냅만으로 슬쩍슬쩍 먼지를 털듯 약하게 등을 간질이다가 등의 근육이 조금 긴장을 풀었다 싶으면 다시 꼬리를 모아 강하게 내리쳤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살갗이 찢기는 듯한 마찰음이 어우러졌다. 그때마다 알베리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애를 쓰는 눈치였다. 어느새 하얗던 등이 새빨갛게 꽃물이라도 들인 것처럼 얼룩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의 등 위로 무두질한 가죽이 수차례 떨어졌다. 알베리크의 살갗 위는 붉은 물이 번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촤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알베리크의 등이 한차례 움찔 떨려왔다. 고통스러운 듯 그는 주먹을 꾹 쥐다가 통증을 참아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소파의 가죽 시트를 손톱으로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세게 주먹을 쥐었던 탓에 손바닥에 얇은 손톱자국들이 새빨갛게 남아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흑, 아……. 서른일, 일곱.”
“허리 제대로 펴요. 무너지면 하나부터 다시 세게 할 거야.”
“아, 죄송, 죄송합…….”
짜악!
“크윽! 으으……. 서른……여덟…….”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강렬한 통증이 등 뒤를 덮쳐왔다. 알베리크는 소파를 쥐어뜯듯 손에 힘을 주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간질간질한 자극에 그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브는 갑작스레 손을 멈추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파요? 그만할까?”
“아…… 아닙, 아닙니다…….”
“등이 이렇게 새빨개졌는걸요. 따끔따끔하죠?”
하얀 등 위로 얇은 가죽들이 할퀴고 지나간 붉은 흔적들이 선명하게 죽죽 그어져 있었다. 이브는 그 위에 손을 대고 척추뼈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살갗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물었다.
“따갑고, 아프고, 또 고통스럽고. 그만하고 싶지 않아요? 함께 정했잖아요, 그 말. 기억하고 있죠?”
“으흑……. 아니……. 아니야……. 읏, 괜, 괜찮습니다.”
“괜찮겠어요? 더 맞고 싶어?”
“아……. 부디…….”
일부러 손끝으로 붉어진 등 위를 톡톡 건들며 자극을 주던 이브가 그의 몸 위로 허리를 숙였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알베리크의 목 근처를 간질였고, 그 순간 이브가 이를 세워 어깨 위를 강하게 물었다. 목덜미를 물어뜯길지도 모른다는 생경한 공포가 알베리크의 뇌를 지배했다.
“아아! 아윽!”
“엄살은.”
이렇게 하얀 피부를 보면 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힘주어 문 잇자국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며 손을 뻗어 어깨를 가리고 있는 알베리크를 내려다보던 이브는 괜히 제가 이 남자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허리 펴요.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으읏…….”
“아. 방금 물린 걸로 섰어?”
어쩐지 꾸물거리더라니. 이브는 덜덜 떨고 있는 알베리크의 허리를 잡아 빙글 돌리며 소파 위에 강제로 앉혔다.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성별의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알베리크는 힘없이 그녀의 움직임에 이끌렸다. 과연 그녀의 짐작대로 바지 앞섶이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이브의 구두굽이 거침없이 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알베리크가 뒤늦게 다리를 모으며 황급히 그녀의 발목을 손으로 잡았고, 그 순간 그의 목이 뒤로 휙 꺾였다. 이브는 한쪽 발을 알베리크의 고간 왼쪽 허벅지 근처에 올린 채 무게를 실어 꾸욱 짓밟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푸른빛 도는 은색의 머리카락이 한 주먹 쥐어져 있었다. 이브는 힘주어 알베리크의 머리를 뒤로 당기며 웃어 보였다.
“누가 내 몸에 손대도 좋다고 했지?”
“아아, 아학…….”
“내가 생각해도 테일 휩은 자극이 약해, 그렇죠? 별로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죠?”
“으…….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버릇없이 굴지.”
이브는 한 손에는 가죽 패들을, 반대편 손으로는 그의 머리채를 쥔 상태에서 그대로 알베리크를 소파 아래로 질질 잡아끌었다. 그는 속절없이 그녀가 당기는 대로 네발로 기듯이 끌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곧 카펫 위로 그의 몸이 나동그라졌고, 이브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턱을 괴었다.
“엎드리세요. 개처럼.”
“흐으……. 으…….”
이브는 어느새 뺨이 빨갛게 익어 눈물을 후드득 떨구고 있는 알베리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제 쪽으로 끌어왔다.
“엎드려.”
“우, 읏…….”
“아직도 수치심을 느껴요? 부끄럽고 모욕적인가요? 어째서? 이곳엔 우리 둘뿐인데. 내 말에 복종하는 개가 된다고 해서 부끄러울 일 없어요. 둘만의 비밀이잖아요.”
“아…….”
“내가 말하는 대로 얌전히 따라와요. 이것저것 생각하려 들지 말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요. 지금도 사실 좋아서 발딱 세우고 있잖아요. 흥분했죠? 더 고통 받기를 원하고, 더 짓밟아주었으면 좋겠죠?”
눈물이 또르르, 눈꼬리 바깥으로 떨어지더니 곧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한 푸른 피의 일원인 베르묄 공자의 뒷면에는 엉망일 정도로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사내가 존재했다.
알베리크는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감각들을 일깨우는 그녀가 죽도록 미웠고, 또 기꺼웠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흥분이 밀려들어 왔다. 그녀가 주는 수치심은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녀가 주는 고통은 결국 쾌락이 되었다. 그는 제 영혼의 뿌리가 뽑혀나갈 것만 같은 그 쾌감을 구걸하기 위해 기꺼이 그녀의 발밑에 조아렸다.
“가엽게도. 자기 자신을 속이려 하지 말아요. 머리를 비우고 내 말만 들어요.”
지금만큼은 복잡하게 뇌를 굴리지 않아도 좋아요. 이브가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자, 엎드려요.”
알베리크는 천천히, 하지만 순종적인 모습으로 몸을 낮추었다. 이브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의 등허리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등 위로 올라오는 무게감에 놀란 알베리크가 고개를 돌려 제 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브의 뒷모습뿐이었다.
“개처럼 네발로 섰으니, 개가 되어야겠죠. 한 대씩 때릴 때마다 멍, 하고 짖는 거예요.”
“맙소사, 그…… 그건……!”
“싫어? 그만할까?”
“아…….”
알베리크의 얼굴이 민망함과 수치심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체념의 기색이 서린 목소리에 이브는 킥킥 웃으며 새까만 염색물이 고루 들어 은은하게 윤이 날 정도로 무두질된 가죽 패들을 가벼운 스냅을 이용해 내려쳤다.
짜악!
마찰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타격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거칠고 강렬한 소리가 밀실을 가득 메웠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조절했음에도 소리가 무척 컸다. 이처럼 귀로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가죽 패들의 장점이었다. 이브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짜악, 짜악 하는 격한 타격음이 연이어 알베리크의 둔부 위에서 터져 나왔다. 알베리크는 몸 안으로 충격이 묵직하게 파고들면서도 살갗 위가 따갑고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굳이 표현하자면 손바닥과 굵은 막대로 동시에 얻어맞는 것 같은 괴상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좋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는 척추가 뽑혀나갈 것 같은 쾌감에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흐느껴 울었다.
“으흐, 아! 읏……!”
“짖으라니까, 응?”
“흑, 흐우, 으……. 머…… 으읏…….”
알베리크의 목소리가 치욕과 흥분, 공포로 덜덜 떨려왔다. 이브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패들의 넓적한 면으로 알베리크의 둥근 둔부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다시 매섭게 내리쳤다. 강하게, 약하게, 다시 강하게. 그러다 그의 허리가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듯이 덜덜 떨린다 싶으면 패들의 바닥 면으로 살갗 위에서 원을 그리듯 가볍게 문질러주었다.
“아학, 윽……!”
“짖어봐요. 응? 짖으라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으……. 므…… 멍, 아…… 멍……!”
“아하하하! 응, 잘했어요. 이렇게 잘하는데 왜 그렇게 부끄럼을 탈까 몰라?”
알베리크는 눈을 꾹 내리감으며 우물쭈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냈다. 까르르 웃는 이브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며 알베리크의 귀를 간질였다. 무언가 조금 더 그의 안에서 부서져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알베리크에게 제 마음속에서 조각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브가 휘두르는 팔의 움직임이 조금씩 거세어졌다.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갔고, 쾌감 역시 그에 비례해 몸집을 키웠다. 알베리크는 속눈썹을 적시며 얼굴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 탓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알베리크는 쾌락에 몸부림치며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연신 개처럼 짖었다. 탄탄한 가죽 패들은 쉬지 않고 그를 몰아쳐 갔다. 뇌 안이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곤죽이 된 것만 같았다. 감은 눈 안이 하얗게 그리고 까맣게 점멸했다.
“흐으, 아! 아윽……! 머……멍, 아! 자, 잠깐……!”
패들이 주는 타격음이 점차 빨라지고, 알베리크가 아랫배가 조여드는 듯한 쾌감에 정신 놓고 앓는 소리를 내며 점점 짖는 소리를 잊어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갑작스럽게 그의 허리가 파드득 휘며 엉덩이가 움찔움찔 떨려왔다.
이브는 패들을 쥔 손을 아래로 내려놓고 비어 있는 손으로 그의 둔부 사이, 골이 있을 위치를 슬슬 쓰다듬다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알베리크는 천 위로 허벅지와 성기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에도 반항 한번 하지 못한 채 파르르 허리를 떨며 카펫 위에 고개를 처박고 가늘게 신음하며 흐느꼈다.
그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지 한쪽이, 안쪽의 피부가, 성기가 토해낸 백탁액으로 질척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머리 안쪽이 물감을 마구 짓이겨 뒤섞어놓은 팔레트 같았다. 눈앞이 온통 뭉개져 모든 것이 혼탁하게만 보였다.
“아으, 하아, 하…… 앗…….”
“엉덩이 맞으면서, 거기다 개처럼 멍멍 짖으면서 가버렸네. 완전히 짐승이 된 소감이 어떤가요?”
“웃, 아…… 조, 좋……아…….”
“좋아? 매 맞으면서 질질 싸는 개새끼가 된 게 그렇게 좋아?”
“흐으, 아……. 응, 아, 아아…….”
“앞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싸버렸네……. 진짜 변태 같아.”
“으응, 읏…….”
이브는 킥킥 웃으며 얇은 천 위로 알베리크의 엉덩이를 천천히 힘주어 주물렀다. 매를 맞아 화하게 달아오른 둥근 둔덕을 자비 없이 꾹꾹 매만져오는 손길에 다시금 그가 허리를 덜덜 떨었다.
“흐읏, 으……. 그, 그만…….”
“왜? 또 쌀 것 같아? 멍멍 짖으면 한 번 더 싸게 해주지.”
“으흑…….”
돌연 자리에서 일어선 이브는 등을 둥글게 말고 웅크린 채 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알베리크의 배를 발로 걷어차다시피 밀어 그의 몸을 뒤집었다. 알베리크는 버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몸이 뒤집힌 채로 그는 카펫 위에 늘어져 입술을 연 채 숨을 고르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타액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이브는 몸을 추스를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남자의 다리 사이에 다시 발을 얹어 꾸욱 비비며 짓눌렀다. 놀란 알베리크가 그녀의 발을 잡으려다가 움칫 몸을 움츠리며 머뭇거렸다. 고통은 좋은 학습 도구였다. 이브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멍멍 해봐. 어서.”
“아, 아으. 아……!”
“짖어보라니까.”
“흑, 아……. 머, 멍…… 멍…….”
“후……. 잘 어울리네요. 발라당 뒤집어져서 짐승처럼 짖는 거.”
알베리크는 뒤집어진 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상기된 얼굴로 할딱이면서도 이브가 주는 압박감에 착실하게 앞을 부풀렸다. 자꾸만 다리가 오므려졌으나 그때마다 이브는 강하게 아래를 짓밟아 알베리크가 억지로 몸에 힘을 빼도록 유도했다.
그는 손등의 얇은 살을 이로 꾹 깨물며 애달프게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참아보려 애썼다. 물론 이브는 그의 노력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목소리 내야지. 멍멍 하고. 계속 짖어봐.”
“크, 읏, 으우……. 멍……. 멍멍, 윽……!”
이브가 즐거워 웃는 잔혹한 웃음소리와 남자의 울음기 섞인, 개를 흉내 내어 짖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리저리 뒤얽혔다. 수치심에 몸서리치는 알베리크를 내려다보며 짓궂게 웃던 이브가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달게 속삭였다.
“짖는 게 싫어요? 그러면 지금부터 쌀 때까지 소리 내지 말고 참아볼까? 대신 한 번이라도 입 열고 소리 내면 벌 줄 거예요.”
“제발, 그만…….”
“쉬이…….”
알베리크는 바닥에 누운 채 다리 사이를 짓밟히며 희롱당하면서도 몸은 그것을 쾌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금 이어지는 희롱에 정신없이 휘둘리던 알베리크는 모든 것을 놔버린 듯 눈을 꼭 감고 손으로 입 위를 눌러 막은 채 입 안에서 제 혀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신음 소리를 참았다. 이브는 단단한 구두 끝으로 그의 성기 위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알베리크의 허리가 간헐적으로 움찔움찔 튀었으나 그는 용케 입을 다물고 끙끙댈 뿐이었다.
“잘 참네?”
이브는 후후 웃으며 그의 바지 위를 이리저리 꾹꾹 밟다가 좌우로 짓이기며 농락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알베리크의 얼굴이 조금씩 흥분으로 달뜨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발로 알베리크를 괴롭히면서도 고개를 들어 칼리스토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흘긋 바라보았다. 구석진 곳에서는 작게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나이에 비한다면 꽤 순진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이브는 내심 웃음을 삼켰다.
계속되는 끈질긴 발놀림에 결국 질끈 내리감고 있던 알베리크의 눈이 슬그머니 뜨였다. 파르르 떨리는 색 엷은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울렁이고 있었다. 이브는 그의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튀는 것을 느끼고는 조금 더 힘주어 그의 다리 사이를 짓이겨 밟았다. 어느덧 알베리크의 숨소리가 점차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의 허벅지 근육이 덜덜 떨리며 허리가 사정없이 움찔대는 그 순간, 이브는 돌연 그의 몸 위에서 발을 뗐다. 알베리크는 다급히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아, 아아……! 안, 안 돼……!”
“이런. 소리 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읏, 아…… 제발, 제발……. 흐윽, 흐…….”
“벌 받아야겠네.”
“아, 주인, 주인님 제발……!”
알베리크는 덜덜 떨리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이브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브는 제 발치까지 기어와 잔뜩 일그러져 울상을 한 얼굴로 매달려오는 남자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벌로 오늘은 여기서 끝낼 거예요. 끝까지 꾹 참았어야죠.”
“흑, 흐으…… 싫, 제발…….”
“벌이잖아요. 응? 착하지?”
“으흑……. 이, 이벨린…… 주인님, 주인님…….”
“아무리 질질 짜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오라버니, 놀이는 끝났어요.”
이브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브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움켜쥐고 있던 이브의 치맛자락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알베리크는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시키고는 입술을 꾹 깨물어 억지로 눈물을 멈추려는 듯 보였다.
어느 순간, 밀실의 구석진 곳에서 칼리스토가 서클을 연 듯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이브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빛의 부스러기만이 남아 바닥에 흐트러져 사그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알베리크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고 질린 모양인지 결국 도망쳐버린 것 같았다. 알베리크는 서클을 등지고 있었기에 마법사가 남기고 떠난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이브는 터져 나오려는 비웃음을 꾹꾹 내리누르고는 자상한 미소를 꾸며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로 돌아가죠?”
“읏……. 그렇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돌아오면 잔뜩 예뻐해줄게요. 잘 참고 있어야 해요.”
이브가 마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 달고 부드럽게 웃으며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알베리크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계속 눈물을 흘려 붉게 짓무른 눈가를 엄지로 훑어주자 새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재차 고여 아래로 흘렀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이제 평범한 방법으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거예요.”
“으흑, 흐……욱…….”
“계속 마음속 한구석은 텅 비어 있겠지, 가엽게도.”
“당신, 당신이…….”
“맞아요. 내가 가르쳐줬지, 오라버니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당신은……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아하하하!”
알베리크가 이를 악물며 눈물 고인 눈으로 이브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제야 이것이 덫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덫에 제 발로 기어들어 온 것은 자신이었고, 그는 이 진창 속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실은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것이 독이 든 사과임을 알면서도 결국 자신은 그것을 씹어 넘기고야 말 것이다. 알베리크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이 제 목줄을 직접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말 거라고 강하게 확신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계약서를 쓰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손대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처음부터 계속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를 모르는 척했어야 했다.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결말이었다. 이브가 이브이고, 알베리크가 알베리크였기에.
“귀엽게 굴긴. 졸업하고 오면 원하는 만큼 괴롭혀줄게요. 어차피 이젠 돌아갈 수도 없잖아.”
“…….”
“아니라곤 못 하네. 기대하고 있구나, 당신.”
알베리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곧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그는 현명한 만큼 제 처지를 빠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욕망은 메마른 밭에 번진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알베리크는 더는 이것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살 자신이 없었다. 평생 평범한 척 흉내 내며 비밀을 숨기고 살 자신도, 그렇다고 새로이 제3의 인물에게 이 욕망을 밝히고 쾌락을 구걸할 용기도 없었다. 절망스럽게도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라고는 그녀뿐이었다.
이브는 언제나 웃으며 선택지를 주었다. 그녀는 그가 얼마든지 자기 의지로 진창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게 하였다. 아니, 실제로 알베리크는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알베리크가 놀이를 멈추는 「안전어」를 말로 뱉었다면 이브는 얼마든지 희롱을 그만두고 플레이를 끝내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택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제 손으로 스스로를 망가트렸다. 알베리크의 얼굴이 좌절로 물들어 엉망이 되었다. 이브는 무너져 내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이렇게 뱃속 시커멓고 멘탈은 잔뜩 어그러져 있는 데다 머리까지 좋은 애들이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쉽지. 자긴 아니라고 믿지만 결국 한번 맛 들이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잖아. 초탈한 척 굴지만 사실 욕망을 직시할 용기가 없을 뿐이니까. 아무튼, 알베리크가 진성 변태라서 일이 쉬웠네.’
“움직일 수 있죠? 오늘은 다리는 맞지 않았으니까. 나 먼저 가요. 저녁 일정이 남아 있어서. 그럼, 쉬세요.”
이브는 그의 뺨을 두어 번 도닥여준 후 으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촛대를 꺾어 밀실의 문을 열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의외로 상당히 민감하고 예민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잔뜩 밀어붙여져 「기쁜」 감정을 쥐어짜지면 그만큼 반대급부로 기분이 축 처지며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현자 타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그것을 보통 드롭(Drop)이라고 부른다. 지금 알베리크가 느끼고 있을 부정적 감정들의 원인은 필시 피학과 피지배 성애자가 플레이 후 느끼는 섭드롭(Submissive-Drop)일 터였다.
이것이 제대로 된 관계라면 이브는 알베리크의 곁에 남아 상처를 돌봐주고 괜찮다고 속삭이며 그가 우울함을 느끼지 않도록 보살펴주어야 했다. 그것이 올바른 주인님이 해야 할 일이자, 플레이의 마무리 단계였다.
하지만 뭐가 예쁘다고 애프터케어를 해주나, 이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콧대 높은 남자가 먼저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자발적으로 제 신발 바닥이라도 핥기 전엔 그다지 그를 신경 써주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브는 눈물 흘리는 그의 가련한 얼굴을 봐도 동정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것은 그가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래도 이브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브」에게 저질렀을 죄가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많은 소녀들에게 피해를 입힌 어엿한 쓰레기였으니까.
‘정의구현이지, 정의구현. 그러게 누가 죄 없는 여자애들 붙잡아다 제 맘대로 때리래? 아아, 이것이 「업보」라는 것이다.’
❖
별관으로 돌아간 이브는 간단히 필요한 도구들을 챙겨 본관 방으로 옮겨두었다. 옥타비아가 준 마도구의 프로토 타입은 일회용이었기 때문에 효과를 실험해보지는 못했다. 이브는 옥타비아를 믿었지만,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었기에 그녀는 마도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이중, 삼중의 덫을 놓았다.
그 꼬락서니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으니 당장 달려와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냐고 멱살을 잡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브는 차분히 칼리스토를 맞을 준비를 했다.
‘정 안 되면 그냥 뒷덜미라도 후려치지 뭐.’
이브는 작은 차통을 열고 그 안에 말린 흰 꽃들을 넣었다. 옥타비아의 가게에 처음 갔을 때 가져왔던 「이졸데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하녀를 시키지 않고 꽃을 직접 말렸다. 원래도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달빛 아래에 바짝 말리고 나니 양이 반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꽃송이 두어 개를 뺀 전부를 털어 넣은 뒤 이 정도로도 충분할까 싶었지만 게임의 설정을 믿기로 했다.
비밀스러운 사랑에 빠져 눈물짓는 부인의 이름을 딴 「이졸데의 눈물」은 얼핏 들에 피는 들꽃처럼 보여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실은 낮에 핀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진정제로, 밤에 핀 것은 빠르게 잠에 빠지게 해주는 수면제로 쓰이고는 했다. 그것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마나, 혹은 오라 감응자인 소드 마스터들이나 마법사들에게는 적은 양으로도 효과를 보는 특효약으로 통했다.
맛도, 향도 없어서 차로 우려내면 감쪽같다는 설정 탓에 게임상에서 카스텔이 특히 이 꽃잎에 피해를 많이 보았다. 먹인 것은 주로 황태자 아니면 칼리스토였고. 그렇게나 단련한 소드 마스터도 단박에 잠재우는 꽃이니 병아리 같은 체력을 가진 마법사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었다. 이브는 픽 웃으며 차통의 뚜껑을 닫았다.
이튿날 아침, 이브는 평소 하던 대로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뜨며 스트레칭을 했다. 몸의 근육을 풀고 이것저것 맨손 운동을 조금 하다가 씻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으로는 따끈하게 구워진 시골빵과 약간의 버터, 바싹 구워진 베이컨과 반숙 계란, 샐러드가 나왔다. 평범한 샐러드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볼에 드레싱을 얹지 않은 싱싱한 풀과 채소들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아무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식단이었다.
따끈한 빵 위에 버터를 살살 발라 입에 넣으니 익숙한 식감과 풍미가 느껴졌다. 이브는 빵과 베이컨, 계란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서야 샐러드 볼을 앞으로 끌어왔다. 드레싱이 없어 쌉싸래한 치커리 본연의 맛이 혀끝으로 느껴지자 이브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는 좀 전에 맛본 버터의 풍미를 되새기며 코끼리가 된 심정으로 팍팍 초록색 풀들을 해치워나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 일인지 이브는 한식이 그렇게 그립지는 않았다. 여기서 쌀밥과 김치, 라면 생각이 났다면 정말 죽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몸이 현지화가 잘된 모양이지, 하고 생각한 이브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옷을 갈아입고 오전 훈련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주말 훈련은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다. 마거릿은 어쩐지 토요일, 일요일은 개인적인 일이 있는 듯 어딘가 바빠 보였고 이브는 주말만큼은 쉬고 싶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주말에는 자율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이브는 홀로 베기와 찌르기, 내려치기를 100회씩 끝내고 스텝 연습을 조금 한 뒤, 물이 찬 양동이를 들고 30분간 마보 자세를 유지하는 훈련을 했다.
훈련이 모두 끝나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오늘은 어쩐 일로 칼리스토가 후원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브는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역시, 평안한 일상을 위해서 칼리스토는 꼭 내쫓아버려야만 했다. 그 자식은 말이 너무 많아. 이브는 면포를 목에 두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방으로 돌아가 땀을 씻어낸 후 이브는 아주 가벼운 디자인의 연한 분홍색의 모닝 드레스를 입었다. 넥 라인이 많이 파여 목과 어깨가 시원하게 드러나는 모닝 드레스는 정말 오전에, 그것도 실내에서만 입는 옷이었다. 시간대에 전혀 맞지 않는 복장에도 하녀는 군말 없이 이브가 고른 대로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알베리크가 보낸 하녀는 말수가 없고 명령에 순종했기에 틸다처럼 이브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기겁하지 않았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이브는 틸다의 빈자리가 느껴져 괜히 턱을 긁적였다.
‘딴죽 거는 애가 없으니까 그것도 좀 심심하네. 애가 버릇이 조금 나쁘긴 해도 놀리는 맛이 있었는데.’
아무튼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이브는 아침보다 두 배는 늘어난 샐러드와 산더미처럼 쌓인 고기를 해치우고 해가 점차 기우는 것을 보다가 하녀 하나를 데리고 본관으로 넘어갔다.
슬슬 이쯤 되면 오지 않을까 하는 시점에서 하녀에게 차를 준비해달라고 말했다. 베르가모트 가향차의 향기가 따끈한 수증기를 타고 코끝을 간질였다. 나른한 주말 오후였다.
벌컥, 침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뭐야, 노크도 할 줄 몰라?”
“……이건 뭐냐. 창고?”
“오……. 참신한 개소리였어.”
“아니, 정말 이게 네 방이라고? 응접실도 딸려 있지 않은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하지. 푹신한 침대 있지, 아기자기한 차 탁자 있지, 옷장이랑 장식장 있지. 뭐가 문제야?”
“하…….”
이브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불청객의 방문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제 맞은편에 찻잔 하나를 더 세팅해달라고 지시했다. 칼리스토는 마뜩잖은 얼굴을 하면서도 이브의 맞은편에 앉아 차 시중을 받았다. 이브는 그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녀에게 떽떽거리기라도 할까 봐 칼리스토의 찻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하녀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본래라면 귀족 집안의 아가씨가 샤프론도 없이 이렇게 외간 사내와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서 만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비록 그 사내가 외모만은 10대 소년일지라도. 그러나 이 공간의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내가 왜 왔는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아아. 어제 밀실까지 따라 들어왔더라?”
“……너, 일부러 나를 꼬여낸 거구나.”
“맞아.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지켜봐줄 줄 몰랐지만. 솔직히 중간에 난입하거나 더 일찍 도망칠 줄 알았거든. 어땠어? 좀 꼴렸어?”
“이…… 미친……. 정신 나간 계집.”
칼리스토가 불이 튀는 강렬한 눈빛으로 매섭게 이브를 쏘아보았다. 살갗을 뚫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시선에도 이브는 픽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내가 내 입으로 우리가 뭘 하는지 봐달라고 한 적은 없지 않아?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엿본 파렴치한은 너지.”
“하……! 그는 네 사촌 오라비다! 짐승만도 못한 자들 같으니라고! 짐승도 핏줄과 교합하지는 않아!”
“아,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배경이 19세기기는 해도 원래 중근세 유럽의 역사를 보면 혈통의 보존을 위해 혈육끼리의 결합도 종종 있었지 않은가. 물론 피가 섞이는 탓에 유전병도 흔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촌지간의 관계는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온 그가 이렇게 파르르 치를 떨며 비난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진짜 피가 섞인 사이도 아니고.’
“친동기지간도 아닌데? 귀족 가문에서 사촌끼리의 결혼은 흔한 거 아니었어?”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지, 이 정신 빠진 계집애야! 너, 설마 미래의 백작부인 자리를 노리는 거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네. 우린 어디까지나 그냥 계약서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을 주고받는 사이일 뿐이야.”
질린다는 얼굴로 귀를 후빈 이브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비밀유지각서에 서명하긴 했지만, 이건 칼리스토가 먼저 알아챈 사실이니까 이 정도 해명은 괜찮겠지 뭐. 그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설명했다. 굴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알베리크와 칼리스토는 같은 편인 듯 보였기에 그나 자신에게 큰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해를 끼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면 된다. 그걸 위해서 옥타비아에게 거금을 쾌척하고 왔으니까.
이브의 주장에 칼리스토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고 그런 교합 없이 정말로 때리고 맞는 관계일 뿐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어린 얼굴로도 칼리스토의 「요즘 애들 이야기는 따라갈 수가 없어」 하고 쓰여 있는 꼰대력 가득한 표정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그런, 그런 게 가능하다고……?”
“순진도 해라. 그 나이 먹고 뭘 하면서 산 거야, 대체?”
“너야말로 대체 어떤 천박한 삶을 살아온 거냐?”
“천박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마법사님.”
킥킥 웃으며 칼리스토의 막말을 흘려 넘긴 이브가 제 몫의 찻잔을 들어 양손으로 쥐었다. 다기의 표면에서 뜨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브는 서두르지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어제 본 일들은 함구해줬으면 좋겠는데.”
“……글쎄. 그건 확답할 수 없다. 모시는 분이 원하신다면 난 모든 걸 고해야 하는 입장이라.”
“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이브는 완강한 칼리스토의 태도에도 별다른 당황한 기색 없이 얌전히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애당초 진지하게 알베리크의 안위를 염려했다면 칼리스토에게 그 모습을 보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담백한 태도로 차를 마시는 이브의 모습을 보던 칼리스토 역시 들끓었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후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겼다. 가향홍차 특유의 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난 원래 남들이 굴욕에 치를 떠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조금 짓궂게 괴롭히는 것도 좋아하고, 가볍게 매를 때리는 것도 좋아하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호 합의하에 주고받는 관계를 즐길 뿐이야.”
“원래, 라니. 네 그 고약한 취향이 강요된 상황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강요? 난 여기 오기 전부터 그랬어. 흔히들 말하는 정복욕, 지배욕 같은 게 조금 더 은밀한 욕망과 얽혀 있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특이한가?”
이브가 이전 생에서의 이야기를 적당히 얼버무리며 설명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는 이브의 얼굴을, 혹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뜯어보던 칼리스토가 돌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약간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이게, 지금……?”
“응?”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도는 현기증을 느낀 칼리스토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현상이 무엇의 전조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 여기에……!”
“많이 졸려 보이네. 한숨 자둬. 다시 일어나면 그때 마저 이야기해줄 테니까.”
“이……!”
칼리스토가 의자의 팔 받침에 기대어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빠르게 서클을 열었다. 붉은색의 빛 무리가 방 전체를 메웠고,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붉은빛을 반사하며 이브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브는 태연한 척하면서 몸의 근육을 움츠리고 바짝 긴장시켰다. 여차하면 창문을 깨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큭, 제길…….”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끈적한 핏빛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졸음을 버티지 못한 칼리스토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마나의 서클이 닫혀버렸다. 이브는 빠르게 잠든 칼리스토의 몸을 받아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와……. 주옥 되는 줄……. 대마법사라더니 진짜 더럽게 예민하네.”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을 팔로 가뿐히 안아 든 이브는 제 침대에 그를 눕히고 옷의 여밈을 하나씩 풀어 헤쳤다. 어린 외모 탓에 괜히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일단 이 겉모습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마음먹은 이브가 방 안의 창문을 모두 닫은 후 옥타비아의 마도구를 꺼냈다. 「일회성 공허(Void) 필드 생성구」라고 이름 붙은 그것은 흰색의 작은 장난감 큐브처럼 생긴 기계였다.
이브는 옥타비아의 설명대로 공허 필드 생성구를 티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붉은 표시가 되어 있는 버튼을 누르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무언가 공기가 빠르게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형의 기운이 마도구의 한 점을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솜털이 오소소 설 정도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흰색의 큐브가 새빨간색으로 변했다. 이제 이 방은, 옥타비아의 설명에 따르자면, 마나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 되었다. 이브는 큐브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제 침대 위로 향했다. 어린 소년은 어디로 가고 키가 큰 젊은 사내가 이브의 침대를 차지한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몸만 커지고 옷은 커지지 않아 벗기지 않고 두었던 속바지가 재봉선이 다 뜯어진 채 너덜거렸다.
“이야, 이게 되네?”
옥타비아가 신체변형 마법의 구조와 마나의 차단, 공허 필드에 대해 한차례 구구절절 설명을 해주었던 것 같지만, 솔직히 이브는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대충 이걸 사용하면 그 공간에 한해서 마나가 사라지고 서클이 열리지 않으며 마법을 사용하거나 유지할 수 없어진다는 것만 이해했다.
만약 이 큐브를 사용했음에도 그대로 육체가 어린아이인 채라면 그의 몸 구석구석을 뒤져 마정석을 찾아야 할 뻔했다. 옥타비아는 마정석을 가지고 있어야만 공허 필드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외에도 옥타비아가 신이 나서 지껄이던 지속 마법의 항상성이 어쩌고, 대기 중의 마나와 신체의 마나가 어쩌고 하는 소리는 이브가 아무리 들어봤자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들이었다. 이브는 이전 삶에서도 화학이나 물리 같은 분야는 다소 약한 편이었다.
인센티브 줘야지, 진짜 많이 줘야지, 하고 생각하며 이브는 주섬주섬 어제 챙겨둔 비단 천 보따리를 풀어 헤쳤다. 길고 검은 가죽 벨트 같은 것들이 각각 포장되어 곱게 쌓여 있었다. 고르게 염색물이 든 가죽 구속구들을 황홀한 표정으로 감상하던 이브는 곧 그것들을 챙겨 침대로 향했다.
‘사실 강제로 어쩌고 하는 게 제 취향은 아닌데요……. 칼리스토 너도 매번 이브한테 강제로 어쩌고저쩌고 했으니까 쌤쌤인 걸로 치자.’
칼리스토는 메인남주였다. 바꿔 말하자면 이 게임을 피폐물로 만들 정도로 이브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또라이 새끼 중 한 놈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의 상식적인 일면을 보았다고 한들 이브는 그가 이브에게 저지른, 혹은 저지를 일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굳게 믿었다.
칼리스토의 루트에서 그는 언제나 이브의 약한 곳을 찌르며 죄책감을 심어주고는 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왜 다른 남자들에게 다정하게 굴어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하는 등의 개소리로 가스라이팅도 서슴지 않으며 제 모든 잘못의 책임을 이브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를 벗어나려고 하는 이브는 불쌍하고 외로운 남자를 버리려는 나쁜 여자가 되었다. 어쩌면 이브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칼리스토에게 유독 약하게 굴었던 것은 지속적인 가스라이팅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끊임없는 멘탈 공격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칼리스토에게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바로 배드엔딩 루트로 빠진다. 그는 온갖 마법을 동원해 이브를 제 아지트로 끌고 가 정신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기는 정신지배 마법을 걸어 그녀를 제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형으로 만들어버린다. 백치가 되어 식사조차 제 손으로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이브를 품에 안으며 행복하게 웃는 칼리스토의 얼굴로 칼리스토 루트의 배드엔딩이 막을 내린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칼리스토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들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이브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 칼리스토는 결국 이브를 독차지하기 위해 그녀를 영원히 잠재우기로 한다.
그는 1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이는 북쪽의 아키디움 산맥 어딘가에 동굴을 만들어 겹겹이 보호 마법을 치고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이브를 집어넣은 거대한 얼음 기둥을 만든다. 깊이 잠든 이브는 결국 언젠가는 숨이 멎을 것이나 수정처럼 맑은, 영원히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혀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칼리스토와 진하게 얽히게 된다면 자아가 무너져 백치로 살게 되든가, 산 채로 얼어붙어 박제가 되던가 둘 중 하나는 당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브는 새삼스레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칼리스토의 루트는 초반에 깬 루트였다. 다른 남캐들에 비한다면 칼리스토의 만행은 「순한 맛」이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황태자 놈이랑 그 누구냐……. 뒷골목 깡패 놈이 진짜 오바육바쌈바였지……. 그나마 칼리스토랑 대공은 양반이었어. 알베리크도 뭐…… 가둬놓고 때려죽이거나 가둬놓고 가축처럼 기르거나 하긴 했지만, 저 두 놈만큼 잔인하진 않았지. 아 생각하니까 또 개빡치네, 이거? 개발자 양반들 대체 무슨 약을 빨고 만든 거야?’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하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브는 마지막으로 칼리스토의 양 손목과 목에 연결시킨 연결구를 잡아당겨보며 점검했다. 가죽 공방의 주인은 친절하게도 수갑에 달린 쇠 자물쇠를 마음대로 풀었다가 고정할 수 있게끔 만들어 이리저리 다양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브가 제안한 디자인보다 두 배는 더 편리해진 형태에 이브는 처음 수갑을 받아보고 연신 대박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양 손목을 목에 채워진 가죽 구속구에 달린 두꺼운 링에 고정시켜 팔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 후, 하체에 채우는 두 개의 구속구를 무릎을 경계로 나누어 허벅지와 정강이에 각각 채워 연결해 무릎을 펼 수 없게끔 오금을 딱 붙여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길이가 긴 쇠사슬을 양쪽 허벅지에 하나씩 채워 각각 침대 헤드의 오른쪽 기둥과 왼쪽 기둥에 단단히 고정했다.
이브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이 만든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위대한 마법사의 몰골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꼴불견이었다. 배를 드러내고 뒤집어진 강아지 같기도 하고, 해부당하기 직전의 개구리 같기도 하고. 잘생기기는 했어도 전체적인 선이 슬림한 편인 그의 외모는 이브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가차 없이 평을 내렸다.
‘대마법사라고는 해도 자연 상태의 마나가 없으면 마법을 쓸 수 없지. 애초에 서클을 열 수 없으니까…….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쉬쉬하는 설정이라니, 트루엔딩까지 보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거야.’
자동적으로 다중 루트를 타는 게임 시스템 덕분에 남주들은 거의 매 플레이마다 치고받고 싸우고는 했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대기 중에 퍼진 마나를 단절시켜버리는 방법은 암흑가를 지배하는 보스, 바실리오가 칼리스토를 죽이기 위해 알아온 방법이었다. 그 싸움에서 마나를 가두는 마도구를 고장 내 칼리스토를 도와주느냐, 그것을 못 본 척해 바실리오를 이기게 내버려두느냐에 따라 러브라인 루트가 갈렸지만, 아무튼 이러나저러나 이브의 인생이 주옥 되는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엿 같은 게임…….”
이브는 중얼중얼 세계관에 대한 쌍욕을 퍼부으며 차통에 넣지 않고 남겨둔 말린 꽃 한 송이를 가지고 왔다. 버석거리는 잘 마른 꽃을 손안에서 짓이겨 가루를 낸 이브가 그것을 들이마시지 않게 조심하며 훅 바람을 불어 칼리스토의 얼굴 위로 뿌렸다. 잠이 든 상태에서 숨을 들이켜다가 그것을 들이마시기라도 한 듯,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스토가 콜록대면서 반응을 보였다.
「이졸데의 눈물」을 가루 상태로 직접 들이켜면 강한 각성제가 된다. 물론 꽃잎 우린 물을 마신 사람이 들이마시게 된다면 그저 서로의 효과를 상쇄해버릴 뿐이지만.
이브는 콜록콜록, 기침을 터트리며 서서히 눈을 뜨는 칼리스토를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았다. 흐리멍덩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동공을 좁혔다가 다시 넓히며 초점을 맞추어가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멍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칼리스토의 인형 같았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분노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튕겨 일어나려고 했다. 물론, 시도는 좋았다. 묶여 있지만 않았어도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삼중영창을 읊어 이브를 단숨에 곤죽으로 만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구속구에 의해 자유를 잃었고, 작은 장난감 큐브에 마나마저 빼앗겨버렸다. 칼리스토는 곧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제 요구에 친절히 응해오던 자연의 마나가 그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손과 발이 잘리고 모든 오감이 마비된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나를 느끼기 시작한 다섯 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독이었다. 칼리스토의 안색이 빠르게 새파란 빛으로 질렸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개 같은 새끼야!”
“시끄러워. 조금 반항이 있을 것 같아서 잠깐 네 마나와 육체에 협조를 구했을 뿐이야.”
“이, 이 개자식! 이 미친년아! 이거 풀지 못해! 죽여버리겠어! 갈가리 찢어 죽이겠어!”
“얌전히 있으면 풀어줄게. 귀 따가우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줄래?”
“이거 놔! 당장 풀어! 이 빌어먹을 계집! 결코 편히 죽을 생각 하지 마라! 이, 이이! 죽여버릴 거야!”
생각보다 반항이 거세었다. 칼리스토는 마구 몸을 흔들며 펄떡펄떡 기운차게 날뛰었다. 하기야, 평생을 마나를 느끼며 살아온 마법사를 이렇게 밀폐된 공허 안에 밀어 넣었으니 물 바깥으로 끄집어낸 물고기 같은 반응을 보여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몹시 튼튼하게 무두질해 마감한 가죽은 멀쩡하게 제구실을 다 하고 있었다. 이브는 수도 나들이를 갔다가 방문한 「그렇고 그런」 공방에서 사들여 온 물건들을 침대 곁에 늘어놓고는 그중에서 쇠 재갈을 들어 올렸다. 칼리스토가 여전히 왁왁 소리를 지르고 있는 통에 그의 입을 벌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순식간에 가로로 길게 뻗은 쇠 부분을 입 위로 쑤셔 박듯이 물리고 양 끝에 연결된 가죽끈을 머리통에 당겨 묶어 빡빡하게 고정시켰다. 그는 열심히 고갯짓하며 발버둥 치기는 했으나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사란 그냥 보통 일반인에 가까웠기에 요즈음 한참 훈련에 매진 중인 이브의 아귀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강압적인 방법을 통하기는 했지만, 방 안이 겨우 조용해졌다. 물론 칼리스토가 발버둥을 멈추지는 않았기에 귀에 거슬리는 쇠사슬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기는 했다. 그래도 온갖 난리법석을 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조금 전과 비교하면 천국이었다.
이브는 그가 제풀에 지쳐 늘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사의 체력이란, 기껏해야 알베리크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스토가 잇새로 씨익씨익 숨소리를 뱉으며 헐떡였다. 그의 요란하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칼리스토는 자신이 마치 거미줄에 휘감긴 먹잇감이 된 것만 같았다. 온몸이 꽁꽁 묶여 있어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눈뿐이었다. 신경 한구석이 타들어가는 불안과 공포가 느껴짐과 동시에 어쩐지 발끝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을 했다. 그는 기억 속에 선연히 새겨진 음탕한 장면들을 지워내려 애썼다. 거짓말처럼, 그의 몸은 전신이 속박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와중에도 작은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밀실에서 목격한 은밀한 장면들을 자꾸만 되새기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좀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어? 어차피 대답은 못 할 테니까 그냥 듣기만 해.”
칼리스토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는지, 쇠 재갈에서 드드득 소리가 들렸다. 저런, 이 상할 텐데. 그렇지만 이브가 신경 써줄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으드득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내가 네 약점을 잡을 거거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만한 걸로.”
칼리스토의 희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질색하는 표정에 이브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짜릿함을 느꼈다.
“내가 보니까 너도 꽤 소질이 있어 보이는데. 처음엔 조금 힘들지도 몰라. 모쪼록, 건투를 빌어.”
그리고 가능하면 부디 날 질색하며 싫어하게 되길 바랄게. 이브는 전하지 못할 말을 목 뒤로 삼켰다.
이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드러운 붉은색 천으로 칼리스토의 눈 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는 재차 고개를 털며 이브의 손길을 거절했으나 역시나 반항은 무용했다. 이브는 어렵지 않게 칼리스토의 시각을 앗아가버렸다. 시야가 가려지고 감각 하나가 사라지니 시각 이외의 감각들이 예민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칼리스토의 귓가에 천을 헤집는 소리,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제 옆에 누군가 몸을 내려앉는 듯 침대가 푹 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공포와 긴장 그리고 미약한 기대감으로 인해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했다. 귀 안으로 두근두근, 제 맥박이 요동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칼리스토는 살아생전 이 정도로 극심한 무력감과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들이쉬는 공기에는 마나가 없었고, 양손과 발은 구속구에 묶여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는 그저 앞으로 제게 쏟아질 미지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떨며 희게 질린 칼리스토를 내려다보며 이브가 즐거운 듯이 미소 지었다. 이브가 손에 쥔 것은 작은 연고통과 흰 담비의 털을 모아 만든 손가락 굵기의 붓이었다. 부드러운 담비 털이 이브의 손짓에 따라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윽고 붓끝이 살며시 칼리스토의 목 빗장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그의 육체를 눈에 보이지 않는 물감으로 덧입히려는 듯, 붓이 천천히 목선을 타고 아래로 흐르듯 내려왔다. 다시금 재갈을 문 잇새로 까득, 쇠와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흰 붓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칼리스토의 살갗 위를 노닐었다. 깊게 팬 쇄골뼈 언저리를 쓸다가, 가슴 사이를 타고 내려와 배 위를 간질이더니 갈비뼈 사이사이를 먼지를 털듯 탄력 있게 터치했다. 배꼽 언저리를 따라 둥글게 굴리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근육 위를 이리저리 더듬었다. 너덜너덜한 언더웨어를 밀어 올리며 그 속으로 파고들어 허벅지 더 안쪽 깊은 곳의 근육과 도드라지게 뻗은 뼈를 자극하기도 하고, 그러다 갑작스럽게 발목의 복숭아뼈를 간질이다가 발바닥으로 넘어가 괴롭히기도 했다.
어느 곳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고, 또 어느 곳은 참을 만한 정도로 간지러웠다. 어떤 부분은 절로 발가락이 곱아들 정도로 간지러웠고, 어떤 부분에 가서는 재갈을 물지 않았다면 비명을 터트렸을 정도로 무척이나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그 반응을 기민하게 눈치챈 붓이 한참 동안 간지럼을 타는 부분만을 공략해댄 탓에 칼리스토는 그만 찔끔 눈물을 비치기까지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붓 끝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자 돌연 붓이 그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칼리스토는 간지럼을 참기 위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재갈이 없었다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그는 다시금 재갈을 이로 물며 다시 찾아올 자극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뒤이어진 감촉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생경한 것이었다. 질척한 무언가를 잔뜩 묻힌 붓이 그가 예민하게 반응한 부분만을 골라 그것을 바르고 있었다. 귀 뒤, 목덜미, 가슴과 배꼽 언저리, 허벅지 안쪽과 옆구리까지. 돌연, 가느다란 목소리가 훅 숨소리와 함께 그의 귀를 간질였다.
“이건 기분이 좋아지는 약이래. 조금 있으면 살갗이 간질간질해질 거야. 기대되지?”
칼리스토의 귓가에 작게 숨을 불어넣듯 속살댄 이브는 곧 그의 몸 위에 의미 없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너덜거리는 속바지의 솔기를 잡아 뜯었다. 손쉽게 떨어져 나간 속옷을 뒤쪽으로 휙 던져버린 이브는 축 늘어져 있는 다리 사이의 물건을 감흥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마치 상처를 수습하는 의료인처럼 물렁한 기둥 위에 연고를 처덕처덕 덧발랐다. 민감한 부분에 닿아오는 간지러운 자극에 칼리스토의 허리가 발버둥이라도 치려는 듯 거세게 움직여댔으나 이브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 마법사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안 받지, 참……. 할례를 안 했으니 안 까져 있는 게 당연하지……. 저 나이에 노포라니 완전 설정 에반데.’
이전 생에서 주로 보았던 수술을 한 성기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물건을 보며 붓을 잡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슬쩍 긁적이던 이브는 일단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마저 약을 바르기로 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 작게 곤두서 있는 가슴 돌기 위에 붓끝을 가져다 댔다.
움찔, 칼리스토의 허리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재갈을 문 탓에 그의 목 안쪽에서 으흐윽, 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브는 칼리스토의 곁에 반쯤 누운 자세로 붓 끝을 빙글빙글 굴리며 소곤소곤 속삭였다.
“기분 좋아? 여길 유독 좋아하는 것 같네……? 어때? 간지러워?”
“으흐, 으극…….”
“아, 맞다. 말을 못 하지.”
이브가 일부러 짓궂게 킥킥 웃었다. 붓끝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혀처럼 분홍빛 유륜을 더듬고, 예민하게 선 유두 끝을 살살 간질였다. 칼리스토의 몸이 다시금 한차례 이리저리 꿈틀댔다. 작고 하찮은 벌레를 잡아다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이브의 가학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참을 가슴팍 위를 붓으로 희롱해대던 이브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 알파벳 「M」 모양으로 활짝 벌어져 무릎을 펴지도, 허벅지를 오므리지도 못한 채 구속되어 있는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새 흐물거리던 성기에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몸에 바른 약은 별것은 아니었다. 바르면 약간 화하고 살갗이 조금 아린 정도의 약한 자극을 주며 물로 씻으면 씻겨나가는, 들풀을 고아 뽑아낸 추출액과 라드, 향유를 섞어 만든 연고였다. 굳이 따지자면 현대의 핫젤의 용도와 비슷했다. 하지만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아릿한 자극을 받으면 그것이 무척이나 크게 와닿을 것이었다.
“점점 약을 바른 부분이 간지럽고, 아릿해질 거야. 쾌감이 약에 섞여 조금씩 피부로 스며들어서……. 기분이 좋아지겠지. 조금만 이렇게 만져도 자극이 극대화된 듯이 흥분하게 될 거야.”
이브가 조곤조곤 말하며 붓끝으로 기둥 위 살갗을 살살 쓸어 올렸다. 이에 반응한 다리 사이의 물건이 조금씩 앞을 꺼떡이며 몸집을 부풀렸다. 간지러운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걸 칼리스토는 모르고 있으니 눈을 가린 채 귓가에 속삭여주면 정말 이것이 흥분을 돕는 미약인 줄로 착각할 터였다. 인간의 뇌란 어찌나 이렇게 속이기가 쉬운지.
아니나 다를까 칼리스토의 귓가가 붉어지며 조금씩 그는 몸을 뒤틀어 간지러움을 참아내는 듯 보였다. 붓 끝이 주는 약한 자극과, 가끔가다가 이브가 입술을 모아 훅 부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그의 물건은 꾸준히 부피를 키워나갔다.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이브는 배꼽을 간질이던 움직임을 멈추고 손으로 강하게 칼리스토의 성기를 잡아챘다. 솔직히 손으로 직접 만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칼리스토를 울리고 말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탓에 약간 물렁한 감이 있는 그것을 쥐어 천천히 표피를 아래로 내려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으긋, 흐! 흐으! 으흑!”
“으응, 기분 좋다고?”
강제로 안쪽에 덮여 있던 민감한 살을 끄집어내 그 위에 연고를 듬뿍 퍼내어 붓으로 꼼꼼히 덧발라주었다. 칼리스토의 고개가 격렬하게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마구 몸을 뒤틀었다. 이브는 연고를 바른 후에도 붓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해서 귀두 위를 간질였다. 직접적인 자극에 그의 성기가 순식간에 핏줄을 세워가며 단단하게 발기했다.
“조금만 만져줬는데도 금방 쌀 것 같네……. 조루야? 아니, 여자랑 해본 적이나 있어?”
이브는 무례한 질문을 툭 뱉었다. 물론, 답을 듣고자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이브는 지체하지 않고 손을 뻗어 옆에 잘 두었던 깨끗한 천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어젯밤 열심히 소독해 깨끗이 닦아둔, 윗부분에 작은 자수정이 박힌 얇은 은침이 들어 있었다. 기둥 중간마다 미세한 요철이 있고 침 끝은 둥글게 마무리되어 침이라기보다는 아주 얇은 미니어처 머리 장식처럼 보였다.
이브는 어느새 선단 앞머리에 고인 투명한 점액을 보다가 그 위를 엄지로 뭉근히 문질렀다. 신체에서 가장 민감하고 약한 부분을 붙잡힌 짐승이 허벅다리 근육을 긴장시키며 벌벌 떨고 있었다. 이브는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지금부터 조금 아플지도 모르는데 절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알았지? 앞으로도 계속 다리 사이에 이거 달고 다니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잘못하다간 잘라내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긋한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험악한 내용에 칼리스토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이브는 꿈지럭대던 그의 움직임이 긴장한 듯 단번에 멈춘 것을 보고 만족하며 은침의 앞머리를 분홍빛 살덩어리의 선단에 맞추었다. 둥근 은침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요도구 안으로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칼리스토의 목 안에서 짓눌린 비명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흐으! 흐으극! 긋, 그윽……!”
“쉬잇……. 잘못 찔리면 너 진짜 좆 잘라야 해. 얌전히 있어.”
“끄으…….극…….”
“옳지……. 가만히……. 지금 반 들어갔어. 응, 잘 참네.”
이브는 자수정이 달린 은침의 손잡이 부분을 손끝으로 잡고 천천히 빙글빙글 돌려가며 쿠퍼액을 윤활제 삼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칼리스토의 귀두 끝에는 그의 눈 색과 꼭 맞춘 듯한 자수정이 반짝 빛을 내며 꽂혀 있게 되었다.
칼리스토는 겨우 비명을 억누른 채 덜덜 떨며 정체 모를 물건이 몸 안을 파고드는 감각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깨끗한 피부는 부끄러움과 모욕감, 약간의 쾌감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가슴 위 양쪽 돌기를 무언가 꾸욱 짓누르는 고통이 찾아왔다. 칼리스토의 허리가 움찔 떨렸으나 그의 유두를 양껏 문 집게는 떨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살을 손끝으로 꼬집히는 것 같은 감각과 민감한 부위를 틀어막고 있는 얇은 침의 존재감이 그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했는지 재갈 안쪽에서 다시 짐승 우는 소리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으흑, 흐으……! 흐…….”
“이런……. 많이 아파? 엉엉 울고 있네.”
이브가 말한 대로였다. 붉은 천으로 가려진 눈 안쪽은 온통 눈물로 젖어들어 있었다. 완전히 피부에 밀착되지 않아 슬쩍 벌어진 틈 사이로 미처 천에 스며들지 못한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돌연, 칼리스토의 머리 뒤쪽으로 손이 들어와 꾹 조여져 있던 가죽끈을 풀어주었다. 비릿한 쇠 맛이 나던 재갈이 입 밖으로 빠져나가자 칼리스토가 입술을 덜덜 떨면서도 소리를 악 내질렀다.
“다, 당장! 이거 풀지 못해!”
“이 정도면 조금 조용해졌을 줄 알았더니.”
“이 빌어먹을, 아악!”
“너는 너무 말이 많단 말이야. 시끄럽고,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아흑, 으흣……! 그, 그만……! 그마안!”
이브가 심드렁한 얼굴로 칼리스토의 유두를 강하게 틀어쥐고 있는 은제 집게를 손으로 꾸욱 잡아 눌러 힘을 가했다.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이기지 못했는지 칼리스토의 뺨을 타고 다시 눈물방울이 줄줄 새어 나왔다.
“제발, 아아! 아팟! 그만해, 그만!”
“소리 지르지 않을 거지?”
“아, 아악! 알았, 알았어, 알았으니까…….”
“자꾸 화내고 소리 지르면 다시 여길 꼬집어줄 거야. 얌전히 있어야 해, 알았지?”
“흐으, 흣……. 안, 안 할 테니까 빨리 이것 좀……!”
집게를 쥔 채로 이리저리 흔들자 칼리스토의 목소리가 다급히 터져 나왔다. 두세 번씩 확답을 받고서야 이브는 집게를 그의 몸 위에서 떼어주었다. 집게를 떼어도 남아 있는 잔통증에 파르르, 칼리스토의 몸이 떨렸다.
“미, 미친…….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닌 짓을 당하면서 아래를 발딱 세우는 너는?”
“무슨……!”
얼굴 근처에서 이브가 낮은 소리로 쿡쿡 웃는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함과 거의 동시에, 민감한 사타구니 안쪽 살갗 위를 거친 손가락이 쓰다듬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칼리스토는 다리가 구속되었다는 것도 잊은 채 허벅다리를 당겨 모으고자 힘을 주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시도는 두 줄의 사슬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브는 칼리스토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다가 돌연 꼿꼿이 서 있는 성기를 와락, 거세게 쥐었다. 조심성 없는 움직임에 칼리스토가 흑,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를 흘렸다. 단단히 서 있는 기둥을 엄지로 짓누르듯이 힘주어 문지르며 이브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아프다며? 젖꼭지 괴롭혀져서 너무너무 아프다며. 아픈데 이렇게 세웠어? 막아주지 않았다면 앞으로 질질 쌌을 것 같은데.”
“아……. 아니, 아니야…….”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나 봐? 내 손의 감각이 느껴져? 이쪽에서 두근두근 맥박 치고 있어. 네가 이렇게 흥분했다고 네 자지가 말해주고 있잖아.”
“흐, 우으……. 아냐……. 이상, 해……. 이거 놔……!”
“정말? 내가 정말 놔주길 바라는 거야?”
이브의 손가락이 두툼한 귀두 바로 아래에 걸렸다. 민감한 부분을 가둔 손가락이 빙글빙글 연한 살덩이를 굴리자 칼리스토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의 반응에 이브가 재차 짓궂게 물었다.
“아프다며? 싫다며? 놔달라며? 자지는 아니라는데……? 핏줄 서 있는 것 봐, 잔뜩 성이 나 있네?”
“아냣, 시, 싫어……! 으흐, 흣……! 아, 아아……. 놔, 놔줘……!”
쾌감의 파도가 칼리스토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는 가는 손가락이 주는 쾌락에 턱 끝까지 잠겨 허우적댈 뿐이었다. 그러나 정을 바깥으로 토해낼 수 없어 쾌감은 자꾸만 쌓여만 갔고, 점점 흥분이 몰려올수록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마구 온몸을 긁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브의 손아래에서 그녀가 휘두르는 대로 희롱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감이 칼리스토의 숨통을 짓눌렀다.
“흐으, 하, 아! 안, 안 돼……. 아……. 제발…….”
“정말 싫은가 보네?”
갑작스레 이브의 손이 칼리스토의 성기에서 떨어졌다. 거센 노도처럼 밀려오던 쾌감이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렸다. 칼리스토가 허리를 움츠리며 울음소리 비슷한 것을 토해냈다. 그는 순간적으로 아쉬움을 느낀 제 머리에 구멍을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경멸을 느꼈다. 칼리스토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더는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한참이나 그를 괴롭혔던 붓이 다시 그의 몸 위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질척한 약이 묻은 붓끝이 기둥 뒤의 주머니를 잔뜩 헤집더니 그 뒤로 넘어가 회음을 더듬었고,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더 아래쪽 깊은 곳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밑살 가득 연고가 발려졌다. 이브는 뒷문 주변의 꾹 다물린 살을 꼼꼼히 문지르다가 붓을 뒤로 돌려 붓 손잡이 가득 연고를 발랐다. 칼리스토가 허리를 뒤틀고 다리를 버둥거리는 바람에 쇠가 맞물리는 날카로운 소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이브는 그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천천히 얇은 붓대의 끝을 칼리스토의 둥근 엉덩이 사이 작은 입구에 맞추었다.
“싫어! 그, 그만! 그만둬! 제발, 아! 제발! 아, 아아……! 아아!”
평생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던 부분으로 이물질이 밀고 들어오는 생경한 감각에 칼리스토가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단단한 붓대는 그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꾸물꾸물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붓대의 마디마디마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꾹 다물린 입구와 민감한 내벽을 긁었다. 두께가 두껍지 않은 탓에 금방 붓의 절반이 칼리스토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브는 그대로 붓대를 빙글, 돌리며 안쪽 내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흐, 학! 싫! 아! 그만, 그마안……!”
“뒤로 먹는 재능이 있네, 칼리스토. 엉덩이에 이런 걸 쑤셔 넣었는데도 멀쩡히 앞을 세우고 있는 걸 보니까.”
“말, 도 안 되는……! 아! 돌리면, 아! 싫엇! 하으, 아!”
“여기지? 여기가 이상하지?”
뒷문을 열고 들어온 붓이 집요하게 배 앞쪽 방향 어느 부분을 지그시 짓누르고 쿠욱 쿡 찌르며 괴롭히자 칼리스토는 척추 끝부터 전기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아릿한 쾌감을 느꼈다.
“아으, 큿! 아! 잠, 잠깐!”
강제적으로 뇌에 꽂히는 폭력과 같은 쾌감에 칼리스토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 소리를 억누르려 입술을 마구 짓씹었다. 자꾸만 원치 않는 애달픈 울음이 목을 타고 흘러나갈 것만 같았다. 칼리스토의 성기는 완전히 배 위로 올라붙어 투명한 액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그러다 배 안쪽의 어느 부분을 짓눌릴 때마다 꺼떡거리며 움찔움찔 스스로 움직였다.
이어지는 마찰로 인한 극심한 쾌감이 칼리스토의 뇌 안을 마구 헤집었다. 칼리스토는 잔뜩 흥분해 앞을 막고 있는 막대를 치워버리고 바짝 올라붙어 단단해진 성기를 마구 틀어쥐고 문질러 배 안에 잔뜩 고여 있는 흥분을 몸 바깥으로 토해내 버리고 싶었다. 손목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만 아니었다면 정신을 놓고 그녀의 앞에서 자위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곧 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칼리스토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열락에 빠져들었다.
칼리스토는 저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추삽질을 하듯 움찔움찔 허리를 흔들었다. 엉덩이가 자꾸만 침대 시트 위에서 튕겨 올랐다. 이브는 육욕에 절어 정신을 놓고 허리를 뒤트는 칼리스토의 추태를 무감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무생물을 보는 듯한 감정 없는 시선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디달았다.
“싸고 싶어?”
“아, 으응, 하으……! 제발! 아아! 아, 이것, 좀! 싫어, 으읏!”
“싫어?”
“흐, 아아……! 죽을, 죽을 것…… 같, 아! 싫어어……!”
돌연 붓의 움직임이 멎었다. 둑 앞 가득 쾌락이 고여 있는 채로 갑작스럽게 모든 자극이 사라지자 칼리스토의 엉덩이가 저도 모르게 힘주어 안의 것을 꾹 물었다.
“아, 으으…….”
“싫다니 뭐……. 어쩔 수 없네. 싫지 않아지면 다시 부르도록 해. 역시 강제로 마구 휘두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칼리스토의 귀에 사박사박, 실내화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가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제 주위를 맴돌던 인기척과 온기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곧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제 요동치는 맥박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뿐이었다.
가득 쌓인 쾌감은 오래도록 몸에 고여 그를 괴롭혔다.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특히 가슴의 작은 돌기와 성기 그리고 엉덩이 안쪽이 근질거려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조금씩 칼리스토의 몸이 저절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발발 떨리고, 엉덩이가 괜히 움찔움찔 조여들었다.
칼리스토는 다시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제 욕망을 힘겹게 내리눌렀다. 반응하지 않으면 금방 질릴 것이다. 참고 있으면 재미가 없다며 자신을 놔줄지도 모른다. 칼리스토는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꾸만 몸이 강한 자극을 원했다.
사실은 뒤를, 앞을…… 누군가가 잔뜩 만지고 긁어내리며 괴롭혀주었으면 했다. 방치된 몸뚱이가 애달파 덜덜 떨려왔다. 사정을 하고 싶었다. 강한 자극을 받아 몸 안에 고여 있는 애액을 모조리 토해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칼리스토의 목 안에서는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한 달뜬 신음 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브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의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 지나지 않아 칼리스토의 입이 떨어졌다.
“이, 벨린……. 제발……. 이제, 더 이상은…….”
“제발?”
“아, 흐으……. 나……. 나 좀 어떻게……. 어떻게 해줘…….”
이브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녀의 기척이 가까워진 것을 눈치챈 칼리스토가 주먹을 꾹 쥐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네가 바라는 대로 할 테니까, 이거……. 이것 좀……. 아…….”
“싸게 해줘?”
이브의 적나라한 말에 입술을 우물대며 머뭇대던 칼리스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가 조금 더 침대 안으로 들어와 칼리스토의 눈을 가리고 있던 긴 천을 벗겨냈다. 온통 눈물로 범벅되어 있던 그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머리카락의 색과 꼭 닮은 분홍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들어 올려지고, 눈물이 가득 고여 울상이 된 보랏빛 눈동자가 울렁울렁 물기를 머금은 채 이브를 올려다보았다.
이브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작은 영상구였다. 자연의 마나가 모두 틀어막혀 있는 탓에 긴 시간을 기록할 수는 없었으나 짧은 시간 정도라면 내장되어 있는 마정석만으로 충분히 기록이 가능했다. 영상구의 작은 불빛이 칼리스토의 치태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지 꾹꾹 주물러서 정액 싸고 싶어?”
“으흑, 하…….”
“얼른. 잘 대답하면 앞에 막고 있는 거 빼줄게. 자지 뒤쪽 꾹꾹 눌려져서 잔뜩 사정하고 싶지 않아?”
“흐…… 싸고, 싸고 싶어…….”
“어디 만져줬으면 좋겠어?”
“거, 거기…… 앞에…….”
“앞에 어디?”
“아……. 으……. 자, 자지…….”
“칼리스토 자지 만져주세요, 하고 귀엽게 빌어봐.”
“으, 우욱…….”
음란한 단어들이 그의 귀를 마구 헤집었다. 갑작스레 서러운 마음이 올라와 울컥, 칼리스토의 눈 위로 다시 눈물이 고였다. 칼리스토는 재촉하는 이브의 얼굴과 기묘하게 생긴 기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붉은빛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칼, 리스토…… 자지…… 만져주세요…….”
“잘 안 들리는데?”
“으윽……. 칼리스토 자지, 만져주세요……!”
그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목청을 높였고, 깔깔 웃은 이브는 그대로 영상구의 녹화를 종료했다.
이 영상기억 저장 마도구 역시 옥타비아의 발명품으로 마정석의 힘으로 원하는 장면을 아무 때나 담아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재생하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한 고화질로 녹화된 화면을 볼 수 있는 것이 카메라의 기능을 꼭 닮아 있어, 어쩐지 필요해질 날이 올 것 같아 옥타비아의 가게에서 먼지가 잔뜩 쌓여 처박혀 있는 것을 돈다발을 안겨주고 뜯어 온 물건이었다.
이브는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영상석을 옷 주머니 안에 넣어놓은 뒤 칼리스토의 다리 사이로 몸을 옮겼다. 원하던 것을 얻어냈으니 슬슬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이브는 왼손으로는 단단히 힘이 들어간 기둥을 쥐고 문지르며 오른손으로는 칼리스토의 앞을 막아놓은 은침의 보석 부분을 쥐고 빼냈다가 다시 안으로 밀어 넣으며 피스톤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 으흣, 하! 잠, 잠깐! 아아! 너무, 아아……!”
“너무 좋아?”
“흐으, 하! 아, 아! 이상, 이상해! 제발, 이벨, 린!”
오돌토돌한 침이 바깥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사정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완전히 빠지지 않아 정액이 계속 기둥 근처에 걸려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칼리스토의 입이 한껏 벌어진 채 헐떡헐떡 가쁜 숨을 토해냈다. 이제는 신음을 막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아흐, 흐응, 읏! 싸고 싶, 어어……! 그만, 아! 제발, 으흑……!”
“글쎄……. 어쩔까…….”
“제발, 뭐든! 뭐든 할게! 아아……!”
완전히 기가 꺾여 배를 드러낸 채 복종하고 있는 칼리스토의 절박한 목소리에 이브는 킥킥 비웃는 듯 소리 내 웃으며 가느다란 은침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천천히 끄집어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칼리스토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사출에 대한 욕망만이 가득했다.
“아! 아아! 쌀, 것 같……! 흐, 아, 아흑!”
이브는 칼리스토의 엉덩이에 꼬리처럼 비죽 삐져나온 붓을 이리저리 돌리며 동시에 바짝 성이 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이미 잔뜩 쌓여 있던 쾌감은 약간의 자극만으로 폭발하듯 밖으로 터져 나왔다. 붓을 물고 있던 뒷구멍의 근육이 잔뜩 오므라들면서 동시에 발가락이 마디가 희게 변할 정도로 곱아들었다.
칼리스토의 성기 앞머리에서 흰 액체가 쏘아지듯 내뱉어진 것은 그때였다. 그의 배 쪽으로 누르듯 쥐고 있었던 탓에 강하게 터져나간 정액이 칼리스토의 배를 가득 적시다 못해 가슴과 뺨 언저리까지 튀었다. 한참이나 사정하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인지 강하게 토정한 후에도 질척한 백탁액이 질금질금 선단에서 흘러내렸다.
그토록 원하던 사정을 마친 칼리스토는 축 늘어져 할딱할딱 밭은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브는 한참이나 시달려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분홍빛 머리의, 잘 빚어놓은 인형 같은 외모의 청년에게 웃어주며 손과 다리를 고정하고 있던 구속구들을 풀어주었다.
“수고했어. 싫다고 엉엉 울던 것치고는 괴롭힘 당하는 데에 소질이 있어 보이던걸.”
“너…….”
“너무 좋았다고? 응, 알았어. 피곤할 텐데 일단 한숨 자둬.”
“죽…… 일…….”
“죽을 것같이 좋았다고?”
“……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을 만큼 쥐어짜진 칼리스토가 웅얼웅얼, 이브를 노려보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스르륵 눈을 감고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무척이나 고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브는 그제야 칼리스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게임 일러스트로 몇 번 보았던 성인 버전 칼리스토의 얼굴은 3차원에서 보아도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곧게 뻗은 콧날, 단단한 턱선 같은 곳은 남성미를 자랑하면서도 길게 뻗은 속눈썹이나 붉고 도톰한 입술 같은 곳은 묘하게 여성적이라 얼굴만 보아서는 성별을 특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생김새였다. 게다가 이런 복슬복슬한 분홍색 머리털이라니, 마치 흰색 푸들의 털을 분홍빛으로 염색이라도 한 것 같았다.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쓰다듬어본 이브가 곧 그의 머리털 몇 가닥을 투두둑, 가차 없이 뜯어냈다. 좀 더 필요하려나. 칼리스토의 머리통에 큰 땜빵이 날 뻔했으나, 고민하던 이브는 그냥 지금 손에 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머리카락을 잘 챙겨 담아 장식장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둔 이브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구속구들과 「그렇고 그런」 공방에서 구입한 이러저러한 소품들을 모두 챙겨 치워둔 후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바깥에서 시원한 밤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옥타비아의 마도구에서 쩌적,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마도구가 「일회용」이자 프로토 타입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회성 공허 필드 생성구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만 제대로 작동했다. 공간에 구멍이 생기는 순간 마도구는 과부하를 일으켜 망가져버리니 작동 전 반드시 문과 창문을 모두 꼭 닫아두라고 신신당부하던 옥타비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브의 최종 목적은 특정 한 사람의 마력을 추적해 목표물의 주변에만 공허 필드를 생성하는 마도구, 혹은 그에 준하는 마나 차단 기능을 가진 마도구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그것이 가능한지는 옥타비아가 고민할 일이었다. 이렇게 원한을 적립했으니 칼리스토를 무력화할 도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아니,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러고 보면 알베리크 때도 그랬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조금 흥이 오르면 눈이 뒤집혀서 그만 조금 짓궂게 대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이브 본인도 붓을 넣은 것은 조금 오버였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손을 넣은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냐, 역시 뒤쪽 소질이 있는 칼리스토가 나빠! 누가 그렇게 싫다고 울면서 만지는 대로 느끼래? 다 쟤 잘못이야, 나는 아무 죄도 없어……!’
가볍게 현실도피를 한 이브는 얼른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치맛자락을 툭툭 털어 구겨진 옷자락을 정돈했다. 그러다가 잠깐 체액으로 얼룩져 더러워진 칼리스토의 몸을 내려다본 이브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싶었으나 곧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굳이 제 손으로 뒤처리를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방 밖을 나선 이브가 알베리크의 집무실을 찾았다. 시종이 대신 노크를 해주고 방문을 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이브는 알베리크의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한쪽에 놓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해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브의 방만한 태도에 짧게 한숨을 쉰 알베리크가 피곤한 얼굴로 안경을 벗어 데스크 위에 올려둔 후 집무실에 있던 시종과 비서를 잠시 물렸다.
“또 무슨 일입니까?”
“마법사가 날 찾아왔어요.”
“그건 또 무슨…….”
“어제 그걸, 봤다더라고요.”
여상하게 흐르는 이브의 담담한 목소리에 이어 끼익, 의자가 뒤로 거세게 밀리는 격한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킨 알베리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그걸……. 어떻게……!”
“마법사잖아요. 모습을 감추는 마법이라도 걸고 몰래 뒤를 밟았겠죠. 제가 본관에 있는 게 이상했나 봐요.”
“하…….”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느냐, 언제부터 눈치챘느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알베리크는 깊이 숨을 내쉬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 위를 감쌌다. 칼리스토가 차라리 저 여자가 아닌, 저를 먼저 찾아왔다면 이 정도로 긴장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던 알베리크는 곧 감정을 갈무리한 듯 매섭고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와 안경을 코 위에 걸치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브에게 물었다.
“그가 찾아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오라버니와 저 사이에 강압적인 요구가 있었는지를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했죠?”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어요. 서로 계약에 따라 즐거움을 주고받는 관계일 뿐이라고. 아, 이건 칼리스토가 먼저 우리 뒤를 밟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 비밀유지 조항을 어긴 건 아니라는 거 알죠?”
알베리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리통 안이 팽팽 돌아가며 칼리스토의 입을 막을 방법을 쥐어짜내고 있는 것이 이브에게도 느껴졌다. 이브는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려워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브가 날 선 그의 목소리에 킥킥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민하긴. 소파 등받이에 깊게 등을 파묻은 이브가 알베리크를 불렀다.
“여기까지 기어서 오면 좋은 걸 줄게요.”
“제길, 당신 지금 제정신입니까?”
“오라버니도 그의 약점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알베리크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을 치는 그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밀실이 아닌 공간에서 그녀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배덕감이 그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야 한다는 치욕이 그의 숨통을 죄어왔다. 그러나 결국 그는 무릎을 바닥에 꿇고 몸을 낮추었다. 자신 역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브는 주춤거리면서도 착실히 네발로 기어와 제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대로 손을 내려 가느다란 뺨과 턱선을 매만져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움찔거리면서도 알베리크는 얌전히 이브에게 제 얼굴을 내주었다. 그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어딘가에 공개할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협박하는 정도로는 가능할 거예요. 뭐, 거래를 한다든가. 「마법사의 약속」을 제안해보는 것도 좋겠죠.”
이브는 주머니에서 영상석을 꺼내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재생 버튼을 작동시키자 영상석의 작은 구멍 위로 홀로그램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알베리크는 이브의 발치에 앉아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영상석 위에 떠오른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눈물범벅이 되어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음탕하기 짝이 없는 저급한 단어를 내뱉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칼리스토의 본래 모습을 본 적은 없었으나 바로 이 사내가 칼리스토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는 칼리스토의 얼굴은 과연 어딘가에 공개적으로 내보일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혹여 신문사에 제보라도 한다면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 죽일 겁니다.”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있죠? 모시는 분에게도 악영향이 갈 거고요.”
“……맞습니다.”
“윗선에 찌르겠다고 맞불이라도 놔요. 도움을 주러 와서는 사촌 동생에게 손을 댔다고.”
“이것만 보자면 손을 댄 것은 당신처럼 보입니다만.”
“아하하, 뭐……. 사용 방법은 알아서 고민해보시고. 그 양반, 마법서만 끼고 산 사람처럼 영 어수룩하던데.”
이브가 알베리크의 뺨을 손끝으로 두어 번 툭툭 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베리크 역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의 문을 나서려던 이브가 깜빡했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맞다. 지금 제 방에 나체의 남자가 외설스러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거든요.”
“하…….”
“알아서 뒤처리 잘 부탁해요. 아마 뻗어서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것 같긴 한데.”
“당신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 겁니까? 이렇게 대책 없이……. 적어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먼저 제게 언질이라도 주었어야지요, 이렇게 통보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오라버니 사정을 봐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뿐이에요. 마법사 하나 따먹는 게 계약 조항을 위배한 것도 아니잖아요?”
“마법사 하나? 진심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대마법사를 적으로 두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의 무모한 행동이 가문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일이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실패하면 뭐,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잔소리는……. 내가 죽게 된다면 죽는 거고, 당신들이 거기에 휘말린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거기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잖아?’
이브가 입꼬리를 싸악 들어 올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순간 알베리크는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 소름 끼칠 만큼의 공허함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영혼이 텅 비어 몸만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아무튼 뭐, 독단적으로 움직인 건 미안하게 됐어요. 앞으로는 가능하면 오라버니에게도 상황 공유를 해보도록 노력할게요.”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칼리스토를 제압할 수 있다는 건 게임을 통해 보았기 때문에 9할쯤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베리크의 말도 맞았다. 게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이브가 되어 살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무의식중에 이것이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마는 것도 일단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고 보는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자신이 사냥이 끝난 이후의 대처를 딱히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이브는 뭐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하고 생각하며 뒤처리를 모두 알베리크에게 떠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서로의 비밀을 한 가지씩 알게 된 두 남자가 이브는 한쪽에 제쳐놓고 저들끼리 서로 이를 드러내며 싸우는 것이 이브가 그리는 최고의 그림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나 모시는 분, 정치 같은 것들은 이브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게임 속 남자들의 플래그를 멀리 치워버리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 개싸가지 칼리스토가 「분」이라는 존칭까지 써가며 말할 정도면 황족이겠지. 하지만 칼리스토의 설정을 생각해보면 황제랑 2황자는 절대 아닐 테니 아마 저 두 사람이 모시는 사람은 황태자가 맞을 거야. 끽해야 공작이 끼어 있나 했더니 완전히 거물이 있었네.’
그렇다면 역시 알베리크가 끼어든 남의 집 승계 싸움은 제위 다툼일 것이었다. 이브는 혀를 쯧쯧 찼다.
‘완전히 썩은 동아줄을 잡았네. 황태자는 쪽박인데.’
이브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어떤 루트에서도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엔딩은 없었다. 히든엔딩에서는 그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났는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외의 모든 엔딩에서 그 남자는 처절하게 몰락한다. 그것도 제 동생의 손에 의해.
‘이 게임이 괜히 피폐물이겠어.’
황태자의 마음을 받아주는 루트를 타게 되어도 이브는 결국 목이 잘려 죽는다. 그의 총첩이라는 이유로.
‘황태자랑 같이 목이 잘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알베리크 이 자식, 가문이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그렇게 퍼붓더니만 자기는 한술 더 떠서 완전 글러 먹은 줄을 잡고 있었네. 멍청한 새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으니 어느새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브는 선선한 밤공기를 맞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별관으로 돌아갔다.
칼리스토가 알베리크의 침실에 들이닥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다짜고짜 내실로 쳐들어와 이제 막 일어난 알베리크의 침의를 잔뜩 구기며 멱살을 잡아 쥔 남자는, 알베리크가 영상으로 보았던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바로 그 남자였다.
“죽여버리겠어! 너와 그 빌어먹을 계집애 둘 다!”
“진정하십시오, 칼리스토님.”
“진정? 개소리 집어치워! 이 역겨운 인간들!”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스토가 소란스럽게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몇몇 하인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활짝 열린 침실 너머에 모여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귀한 손님이라고 말해둔 통에 두 사람의 언쟁에 끼어들지는 못하고 그저 문 앞에서 제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베리크는 칼리스토의 어깨너머로 그들을 흘긋 바라본 후,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칼리스토는 그 나직한 목소리에 어젯밤 몇 번이나 깨물어 상처 난 입술을 다시금 질끈 깨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은 알베리크의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 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겨우 간단한 소세만 한 상태로 잠옷 위에 로브 하나만을 걸친 채 응접실에 자리를 잡은 알베리크가 길게 한숨을 쉬며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간단한 티테이블 세팅을 부탁했다.
칼리스토의 상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다행히 자란 몸에 맞춘 옷을 갖추고 있었는지 가벼운 리넨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붉게 짓물러 약간 부어오른 눈두덩이와 상처가 나 부푼 입술이었다. 누가 봐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 거울 한번 들여다보지 않은 채 정신을 차리자마자 옷만 꿰어 입고 알베리크를 찾아온 듯 보였다.
응접실의 공기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끓어올랐던 감정이 한 김 식은 두 남자는 조용히 마주 보고 앉아 잠시 말을 골랐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칼리스토였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닌,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내보인 채 험상궂은 표정을 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무슨 속셈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깟 걸로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해? 이제 어쩔 생각이지? 날 쥐고 흔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칼리스토님.”
고상한 자세로 홍차를 마시던 알베리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힐끔, 칼리스토의 찻잔을 보니 그는 홍차나 티푸드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첫날, 무례할 정도로 제멋대로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던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이벨린이 멋대로 남긴 영상은 돌려드리겠습니다.”
“…….”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들으셨을진 모르겠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스트 플루멘 인근의 고아원에서 자라 귀족으로서의 의식도 예절도 갖추지 못한 철없는 어린애입니다. 그 아이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진심인가? 그대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그걸 나더러 믿으란 말이야?”
“일이 터지고 나서야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
“대신 그 애가 칼리스토님께 불민하게 굴었던 일은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일은…… 전하께 보고를 드린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지요.”
알베리크는 매끄럽게 말을 마무리 짓고 영상구가 담긴 작은 금속함을 티테이블에 얹어 칼리스토 쪽으로 밀었다. 장식 없는 밋밋한 은색의 상자 뚜껑을 열어 그 전날 보았던 기계인 것을 확인한 칼리스토가 상자를 닫고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잠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만에야 칼리스토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당신들은, 그런 걸…… 대체…….”
“전하께 말씀드려도 좋다고 했지만, 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고작해야 스물 먹은 여자가, 그토록 지독하고 고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말 공자가 뭘 한 게 아닌가?”
알베리크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함이 슬쩍 스쳤다. 제 말을 무시하는 칼리스토에게 그는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두 번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뭐?”
“후회하게 될 겁니다.”
작은 소리로 덧붙인 알베리크는 시선을 내리깔며 부드럽게 찻잔을 들어 올려 제 입가를 가렸다. 알베리크는 제 심상을 숨기는 데에 재능 있는 남자였으나, 칼리스토는 순간 그의 낯을 스치고 지나간 공포와 불안감을 보았다. 그제야 칼리스토는 두 사람의 먹이사슬 구조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아름답고 영리한 사내는 피식자였다.
“……우선 에드워드가 직접 물어올 때까지는 보고를 보류하겠어. 사적인…… 일이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 계집애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
“음탕하고, 천박한……. 하.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군.”
이미 영상의 내용을 확인한 알베리크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 다시금 찻물을 마시지 않은 채 찻잔을 슬쩍 입으로 가져가 입매를 가렸다. 정말로 분노를 참지 못했다면 이벨린을 찾아가 저에게 한 것처럼 멱살이라도 쥐었을 테지. 알베리크에게는 칼리스토가 이를 드러내며 펄펄 날뛰는 모습이 마치 싸움에 진 개가 꼬리를 말고 몸을 움츠린 채 으르렁대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야 에드워드의 비호가 있다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반드시 그 계집을 찢어 죽이고 말 테니.”
“……부디, 뜻하신 바를 이루시길.”
“그대도 속히 그 정신 나간 여자의 마수에서 벗어나길 바라.”
칼리스토의 말에 알베리크가 쓴웃음을 삼켰다. 그럴 수 있다면야 바랄 게 없겠습니다마는.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의 파편은 이내 흩어져버렸다.
알베리크는 이브가 영상석을 주고 간 의도를 빠르게 눈치챘다. 아마도 그와 저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었던 거겠지. 이브의 만행은 중간에 흐지부지된 채,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된 두 남자가 물고 뜯는 것을 바랐을 것이었다. 비록 육신은 그녀의 종이 된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체스판의 말처럼 다뤄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그대가 해줄 일이 있어.”
“……예.”
“그…… 어제, 크흠. 어제 이벨린 그 여자가 영상을 저장하는 기계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나를 공격했어. 문제는 나도 정확히 무슨 짓을 당한 건지는 모르겠네. 가능하다면 그게 뭔지 알아봐줘. 다른 곳에 넘어가면 무척 골치 아파질 테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나를, 대기 중에 퍼진 자연의 마나를 지우는 종류의 무언가였어. 마법사는 외부의 마나가 없이는 서클을 열 수 없으니 아주 치명적이지.”
“마법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알베리크의 답을 들은 칼리스토가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베리크는 그가 바로 저택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북쪽으로 가십니까?”
“그래. 어차피 슬슬 대공저의 동태도 확인해야 하고. 이제 베르묄이라면 치가 떨리는군. 두 번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
“……살펴 가십시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작게 펼쳐진 서클이 화려한 붉은 색채의 빛을 퍼트리며 방 안을 붉게 물들였다. 잠시 후 빛 무리가 사그라지자 칼리스토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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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를 모두 마친 후 사후 보고를 들으러 온 이브가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벌써 갔어요?”
“예.”
“도망쳤구나, 그 새끼. 아쉽네. 마지막까지 한 번 더 놀려먹었어야 했는데.”
“……제가 뒷수습을 하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십니까.”
“오구오구, 잘했져요. 오구오구. 칭찬의 박수 짝짝 짝짝짝!”
알베리크의 표정이 숫제 오물을 보는 듯 썩어 들어갔다. 이브는 냉랭한 표정을 넘어 경멸하는 얼굴을 하는 알베리크의 반응에 모르는 척 티푸드를 집어 먹었다.
“다음에 또 마주치면 그땐 진짜 혼쭐을 내줘야지.”
“하아……. 당신은 정말……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르는군요.”
“다아, 방법이 있답니다.”
“칼리스토님을 제압한 것도 그…… 강 동쪽의 그 마법사에게서 구입한 마도구의 힘입니까?”
“으흠.”
양 볼 가득 버터쿠키를 밀어 넣은 이브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알베리크의 안색이나 멀쩡한 응접실의 집기들을 볼 때 이야기가 원만하게 잘 통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칼리스토가 알베리크를 통해 마나 단절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했을 것이 뻔했다.
“그겅 머, 다으메 셜명해 듈게여.”
“……대체 제 수업시간에 뭘 배우고 있는 겁니까? 입 안에 작게 한입 베어 무는 양 이상을 집어넣지 마십시오. 음식물은 입술을 닫고 잘 씹어 삼킨 후 입을 여세요. 이런 기본적인 상식까지 다시 알려주어야 합니까?”
이브는 퍽퍽한 입 안을 홍차로 씻어 넘기며 짜증을 내는 알베리크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일단 이걸로 말을 돌렸으니 이대로 다른 주제를 꺼내야겠다 마음을 먹은 이브가 쿠키를 모두 꿀떡 삼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어떻게 원만하게 넘어갔나 보네요? 솔직히 오늘 아침에 갑자기 방에 공격 마법이 퍼부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도 태평하게 잠만 잘 잤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별관은 마거릿님도 계시니까 들키지 않으려면 몸을 사려야 했겠죠. 그 양반, 마거릿님을 엄청나게 신경 쓰는 눈치던데. 설마 그렇고 그런…… 그런 건 아니죠?”
“대답할 가치가 없는 물음이군요.”
“어휴, 이런 걸 무서워서 마거릿님한테 어떻게 여쭤봐요? 오라버니한테나 묻지.”
“말을 맙시다.”
알베리크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혀까지 차며 몸을 등받이 깊이 몸을 묻었다. 그가 제법 풀어진 자세로 등을 뒤로 기대어 앉는 것을 보니 오늘 하루가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수고 하셨고요. 대충 일단락된 것 같으니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다른 이야기라면……?”
“전에 말한 승계 싸움이요. 황실 이야기죠?”
이브의 말에 알베리크는 한참 전에 이브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녀와는 이미 계약서를 나누었기 때문에 알베리크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황태자가 가장 윗줄이에요?”
“……후. 맞습니다만, 부디 언사를 조심하십시오.”
“본인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좀 할 수 있는 거죠. 아무튼,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어쩌다 황태자 줄을 선거냐고요.”
이브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알베리크는 잠깐 고민했으나, 그는 적당히 말을 추려 간략히 설명했다.
“원래 대대로 베르묄 가문은 황가에 가진 재능을 바쳐오고는 했습니다. 조부께선 선황의 지낭이셨고, 현 백작님께서는…… 수학에 뜻을 두지 않으셨지만, 아무튼 황가에서 제 충성을 바라는 것은 별일도 아닙니다.”
담담한 어조로 자연스럽게 제 칭찬과 아버지 욕 그리고 가문을 칭송한 알베리크가 찻잔에 따라진 카밀러 티를 한 모금 넘겼다.
“아하, 그쪽에서 먼저 콘택트가 들어왔다…….”
이브는 턱을 매만지며 게임에서의 진행도 이와 비슷하게 흘러갔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역시나, 게임의 시작 시점은 이브가 열일곱일 때부터였기에 정확한 정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마거릿님도 황태자…… 아, 전하께서 보내주신 거겠네요?”
“그렇습니다.”
“이상하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요? 오라버니가 그 정도로 대단한 인재인가?”
“…….”
마치 저를 깎아내리는 듯한 이브의 말에 알베리크는 잠깐 차가운 눈빛으로 이브를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브는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뭐지? 왜 이렇게 기분이 드러울까? 황태자가 알베리크를 이 정도로 챙겨줬던가? 아니, 애초에 게임상에서 둘이 만나는 건 본 적도 없는데. 접점이 있었나? 아닌데…….’
게임과 결이 같으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찝찝하지만 이렇다고 콕 집어 말하기에는 또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게임이 시작되는 시점이 오지 않은 이상 이야기의 흐름을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이브는 자신이 이미 많은 것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녀가 바꾸어버린 것들로 인해 흐름이 뒤바뀌어 그녀가 미리 알고 있던 스토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아예 완전히 판을 뒤집어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전에 적어도 어느 정도의 대비책은 마련해두어야 했다.
“한동안은 좀 바쁠 것 같네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이브가 한참 만에야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은, 숨을 죽이고 발톱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