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비밀상점 (5/22)

04. 비밀상점

게임 시스템의 꽃은 무엇일까. 이브는 그 질문에 비밀상점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어딘가 비밀스러운 아이템, 정체가 의심스러운 그렇고 그런 물약, 특정 스테이터스를 비약적으로 올려주는 조금 야시시한 의상 등 일반 상점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비밀상점에서는 돈만 내면 구매할 수 있었다.

비밀상점을 열지 못한다 하더라도 게임 플레이에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있으면 확실히 더욱 쾌적하고 흐뭇한 플레이가 가능했기에 그녀는 어떤 게임을 하더라도 반드시 비밀상점을 열고는 했다.

오토메게임, RPG, 하다못해 공주님을 키우는 육성 게임에도 비밀상점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이브를 위하여」 역시 특정 커맨드를 입력하면 열리는 비밀상점 시스템이 있었다.

이브가 굳이 알베리크와의 동행이라는 무리수를 둬가며 수도로 올라온 이유는 비밀상점의 존재 확인을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전에 틸다를 시켜 주문을 넣었던 공방에 직접 방문할 계획도 있기야 있었지만.

이스트 플루멘의 북쪽에 있는 테론 지구에는 개인이 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공방 거리가 존재했다. 일반 공예품이라기엔 어폐가 있는 인가받지 않은 불법적인 마도구들이나 출처가 의심스러운 장물들을 파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고는 했지만, 어쨌든 일상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잡화들을 파는 공방이 대다수였다.

비밀상점은 그 공방 거리 안쪽에 있었다. 옥타비아 크레누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머리의 마법사 NPC가 운영하는 낡고 허름한, 어딘가 불법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간판 없는 마도구상점. 비밀상점을 여는 방법은 그 상점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공방 거리의 모습을 한 미로의 출구를 찾는 미니게임에 성공하면 옥타비아의 마도구상점이 나온다. 상점을 찾는 데에 성공하면 그 안에 들어가 「이졸데의 눈물」을 한 묶음 주문한다. 그러면 마법사는 포장을 해주는 척 꽃 한주먹을 떼어 숨긴다. 그 직후 직접 문구를 입력할 수 있는 커맨드 창이 뜬다.

만약 플레이어가 거기에 올바른 문장을 적어 넣으면 이어지는 대화와 함께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분기점들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통과하는 아주 쉬운 난이도의 선택지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비밀상점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과 미니게임에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과연 이 세계가 게임 속의 세계인지 이브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만약 비밀상점의 주인인 NPC 캐릭터를 만난다면 확신이 설 것도 같았다.

문제라면 이게 게임이 아니게 된 이상, 커맨드 입력창이나 선택지 안내창이 뜰 리가 없으니 모든 선택지를 떠올려 말로 뱉어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브는 기차를 타기 전부터 끙끙대며 머리를 쥐어짜야 했고, 알베리크와 기차를 타야 하는 그날 새벽에서야 겨우 모든 선택지의 대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외우기 쉬운 유명한 대사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브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면 그 대사들을 암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튼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실전뿐이었다.

알베리크와 미리 입을 맞추어 틸다를 떨어트리는 데에 성공한 이브는 해크니 마차를 잡아탈 수 있는 역사 근처에서 알베리크와 헤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이브는 황성으로 향하는 가문 마차의 뒤꽁무니를 잠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검은색 몸체의 해크니 마차를 잡았다.

천장이 낮고 공간이 협소한 바퀴 두 개짜리 마차는 이브를 태운 채 빠르게 내달려 이스트 플루멘의 북쪽으로 향했다. 인파와 마차들로 북적이는 복잡한 거리를 익숙하다는 듯 마치 재주넘듯이 이리저리 피해 가며 앞으로 쭉쭉 나아가던 마차가 이윽고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공방 거리의 초입 부근이었다.

“이제 공방 거리요. 안으로 더 들어가겠소?”

“아뇨. 여기서 내릴게요!”

이브는 재빨리 대답하고 얼른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익숙하게 삯을 계산한 후 좋은 하루 보내라며 마부와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치마 뒤편을 툭툭 털어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며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주영의 자아가 전면에 드러나 있기는 해도 이브는 13년을 수도 근교 고아원에서 자랐다. 수도 한복판은 아니어도 나름 발전한 도시에서 살아온 이브에게는 한적하고 조용한 백작령의 삶보다 모두가 정신없이 움직이는 이스트 플루멘의 삶이 더 친근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에 얼핏 메이드 제복으로 보일 법한 발목 기장의 수수한 검은색 외출용 드레스를 걸친 이브는 수인 노동자들과 어린 소년공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쪽의 거리에 그들의 일원인 것처럼 녹아들었다.

가물가물하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임의 맵을 머릿속으로 더듬어가며 한참이나 여기저기를 빙글빙글 도는 등 길을 헤매면서 시간을 허비한 끝에서야 이브는 목표했던 공방을 찾을 수 있었다.

솔직히 10분, 아니 5분만 더 헤맸더라면 ‘아 게임이랑 현실은 완전히 다른 거구나, 역시 이건 「이브를 위하여」랑은 좆도 관계없는 환생이었어……! 난 게임 세상에서 태어난 게 아니야!’ 하고 정신승리를 할 뻔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가 슬슬 포기할 때쯤에야 게임 일러스트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의 낡은 가게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브는 환희의 눈물을 삼키며 간판 없는 가게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냄새인지 모를 이상야릇한 풀 냄새와 비릿한 기름 냄새, 톡 쏘는 시약 냄새들이 이브의 비강을 자극했다.

“계세요?”

이브는 카운터로 보이는 낡은 원목 테이블 앞에서 두리번대며 주인을 불렀다. 세 번 정도 애타게 부르자 갑자기 카운터 안쪽 바닥에서 불쑥, 불에 타는 듯한 새빨간 머리카락이 솟아올랐다.

지하와 연결된 문이 그쪽에 있는 모양이지, 하는 생각을 하던 이브는 갈색의 칙칙한 로브를 둘러쓴 붉은 머리의 마법사에게 말했다.

“「이졸데의 눈물」 한 묶음 주세요.”

“낮에 핀 것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밤에 핀 것으로요.”

“앗, 그러면 가격이 이 정도에서 이렇게 뛰는데…… 괜찮으신가요?”

붉은색의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턱 아래 라인까지 짧게 자른 호리호리한 체격의 마법사는 넓은 소매 안쪽에서 작은 계산기를 꺼내 들더니 이내 계산기의 버튼을 톡톡 누르며 이브에게 화면을 슬쩍 보여주었다.

21세기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 계산기는 그녀의 발명품 중 하나로, 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같은 제품은 찾을 수 없다는 설정이었다.

이브가 비밀상점을 뚫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시대에 맞지 않은 물건들은 오로지 세기의 천재 발명가이자 마도공학자, 옥타비아 크레누의 발명품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존재를 허락받았다.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밀상점과 상점 주인을 얻어야 했다. 이브는 투지를 불태우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괜찮아요. 주세요.”

“생으로 가져가시는 거죠? 그러면 포장해 드릴게요. 포장 비용은 요만큼 추가됩니다.”

“좋아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이브가 별다른 흥정을 하려 들지 않자 마법사의 짙은 녹색 눈이 반짝 빛났다.

‘호구 봤다는 눈빛이네.’

이브는 내심 픽 웃었다. 부산을 떨며 가게 이곳저곳을 뒤지던 마법사는 새카만 포장지를 찾아와 「이졸데의 눈물」, 흰색의 다섯 잎짜리 꽃 한 묶음을 싸매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가락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끈으로 포장지를 감는 그 순간, 이브는 잽싸게 마법사의 손목을 움켜쥔 후 첫 번째 커맨드 문장을 읊었다.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일순 가게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이브와 마법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곧이어 옥타비아가 자신이 기대한 그대로의 대사를 읊는 것을 들으며 다음에 이어질 대사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뭐, 뭐야?”

“내 「이졸데의 눈물」 한 줌을 밑에서 뺐지?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이 새꺄?”

“하! 증거 있어?”

“증거? 증거 있지. 너는 나한테 9그램을 줬을 것이여. 그리고 이 소매 안쪽에. 이거 이거, 1그램짜리 숨겨둔 거 아녀? 소매 안에 따악 숨겨놓고 이 거래를 끝내겠다, 이거 아녀?”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새끼가……!”

마법사는 팔을 빼내기 위해 몸을 뒤틀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선택지의 대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브는 여유롭게 으허허허, 하고 산적 같은 작위적인 웃음을 뱉었다. 공기가 급속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브와 마법사는 서로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주 쏘아보며 칼날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움직이지 마! 손모가지 날아가붕게. 해머 갖고 와!”

“잠깐, 그렇게 피를 봐야겠어?”

“구라 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안 배웠냐?”

“좋아. 나한테 빼돌린 「이졸데의 눈물」이 없다는 데에 이 가게하고 내 손모가지를 건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이 씨벌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씨발, 귀한 집안 아가씨가 혓바닥은 왜 이렇게 길어? 후달리냐?”

역시 게임에서처럼 그녀는 제 정체를 얼추 눈치채고 있었다. 이브는 작은 화면으로 수십 번은 보았던 이 상황에 꾸며내지 않아도 웃음이 절로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고운 얼굴의 여성 둘의 대사라기엔 무척이나 원색적이고 품위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후달려? 으하하하! 오냐. 내 재산 모두하고 내 손모가질 건다.”

“그래! 뒤집어봐! 어디 뒤집어보라고!”

“준비됐어? 까볼까? 자, 지금부터 확인 들어가겄습니다잉~.”

이브는 선택지 대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아주 익숙하다는 듯 따라란 따라란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마법사의 로브 소매를 뒤집어 깠다. 뒤집어진 소매 안은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는 페이크다!”

여기서 선택지의 문장들은 모두 끝났다. 이브는 마무리를 위해 번개같이 마법사의 반대편 손목을 잡아챈 후 반대쪽 로브의 소매도 마저 걷어냈다. 팔랑, 흰색 꽃잎이 다섯 겹인 작은 꽃 이파리 몇 개가 후드득 떨어져 나왔다. 마법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이브는 사람 한두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운 시선으로 옥타비아를 노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씨익 웃어 보였다.

“손모가지, 찍어야겠네?”

히이익! 그제야 마법사 아가씨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질겁하는 소리를 토해냈다.

“똑바로 적어. 나 옥타비아 크레누는 내 신체의 권리를 이브 테루안느에게 이양한다.”

“흑…….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하. 씨앙, 그러게 누가 손님 물건에 장난치래? 이게 진짜 뒤질라고. 어허, 무릎 제대로 꿇어!”

“히잉…….”

“팍 씨! 손이 쉰다. 싸게 싸게 써라, 응? 우리 그냥 좋게 가자. 내가 손모가지도 봐주잖아. 알몸으로 내쫓는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까지처럼 가게 운영 잘하다가 한 번씩 내 부탁 좀 들어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흑…… 흑흑…….”

“지금 우는 척하는 거 다 알아. 귀 따가우니까 입 다물고 신체포기각서나 마저 작성해.”

“흑흑……. 경비대에 신고할 거예요.”

“그래? 그럼 나도 너 불법 영업으로 신고하지 뭐. 여기 중앙상인회에 등록 안 된 미등록 영업점이지? 다 알고 왔어. 영업장 평생 접을래, 내 부탁 들어줄래?”

“아이, 씨.”

“이야, 가게가 공짜로 생겼네. 난 참 운이 좋아.”

흐느끼는 척하던 옥타비아가 신나서 흥얼대는 이브를 뭐 저런 게 다 있느냐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옥타비아는 이브에게 두어 번 정도 뒤통수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지고는 다시 흑흑 소리 내며 각서를 작성했다.

“아 그리고 그거. 그거 해.”

“네?”

“그거. 그……. 뭐냐. 아, 「마법사의 약속」.”

“악! 아가씨! 주인님! 마님! 선생님! 제발 그것만은!”

“약속할래, 지금 뒈질래?”

“어헝허엉……. 저 진짜 마법사 인생 끝나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오…….”

“응, 그래서 할 거야, 뒈질 거야? 참고로 난 손가락 하나면 널 저승으로 보낼 수 있다는 걸 알아둬. 너 인간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모르지? 머리통에 작은 구멍만 나도 황천행 특급열차 타기 십상이라고. 심지어 너같이 육체 단련이라고는 요만큼도 안 한 연구자 나부랭이? 우습지.”

“끄흑……. 하…… 할게요…….”

「마법사의 약속」은 말 그대로 마법사가 마나를 걸고 하는 맹세로, 간단한 과정과는 달리 이를 어기게 되면 다시는 마나를 다룰 수 없다는 무거운 제약을 짊어지게 되는 금제의 일종이었다.

옥타비아는 눈앞의 어린 소녀가 붙들었던 제 손목에 남은 시커먼 멍을 잊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잔뜩 기가 질려 울상을 짓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이브가 조건을 걸었다.

“대신 기간 제한을 두도록 하지. 2년. 더도 덜도 말고 따악 2년만 날 성심으로 모신다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줄게.”

“2년이요……?”

“그래. 딱 내가 스물두 살이 되는 해까지만. 물론 그 2년 동안은 월급도 줄 거야. 그 이후엔 뭐…… 알아서 살도록 해.”

“으……. 2년……. 좋아요……! 까짓 거 입대한다고 생각하죠, 뭐!”

“잘 생각했어! 옥타비아, 너 아주 호탕하구나!”

옥타비아는 이브의 협잡질에 넘어가 2년간의 노역살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말았다. 최악을 제시한 후 그다음 차악을 내민 이브의 수를 눈치채지 못한 마법사는 결연한 표정으로 기다란 완드를 집어 들었다.

옥타비아는 완드를 눈앞까지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마나를 개방해 서클을 열었다. 마법사의 서클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마나 운용의 범위를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 같은 것이었다.

붉은색의 둥그런 빛 무리가 천천히 바닥에서 떠오르며 순식간에 이브와 옥타비아를 감쌌다. 바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실내에서 옥타비아의 불꽃을 닮은 새빨간색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앞서 작성한 계약서에 따라 마뉴스 레지나의 종, 사체르도스 옥타비아 크레누는 이브 테루안느에게 향후 2년간 사체르도스 본인의 자유를 종속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빠른 결재 처리 부탁드립니다.”

마법사의 주문은 신비롭다기보다는 마치 회사원이 상급자에게 보고서를 올리는 것 같은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결재 처리」가 필요한 과정인지 옥타비아의 목소리가 끝난 후로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이브와 옥타비아의 손등에 붉은색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올랐다가 피부 안에 스며들듯 스르르 사라졌다.

“와, 약속이 이렇게 빠르게 처리된 적은 본 적이 없어요! 세상에!”

마나를 갈무리하고 두 사람을 묶어두었던 서클을 거둔 옥타비아가 언제 울적해했느냐는 듯 흥분한 얼굴로 콧김을 뿜어댔다.

“마뉴스 레지나의 총아라고 불리는 칼리스토 랑그라다도 약속 사항에 대한 인가를 받기까지 20분도 더 넘게 걸렸다고요! 이건 학계에 보고할 만한 엄청난 사건이에요!”

“보고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아무튼, 다 끝난 거지? 각서 이리 내. 조만간 또 올 거야. 그동안 가게 청소도 좀 해놓고. 이게 뭐냐? 돼지우리도 아니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먼지가 폴폴 날리네.”

“에헤헤헤…….”

“웃지 마, 정들어. 그 뭐냐……. 원거리 통신구 같은 거 없어? 전화 말고 따로 쓸 만한 거.”

“헉, 어떻게 아셨죠? 마침 제가 어제 새로 발명한 브랜드 뉴 아이템이 있다는 걸!”

씨익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갑자기 카운터 뒤 지하로 연결된 출입구로 쏙 들어간 옥타비아는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신상 마도구를 자랑하기 위해 안달이 난 듯 눈을 반짝이며 이브에게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짜잔! 「원거리 비대면 양방향 통신용 마도공학기계」 마크1이에요!”

휴대폰이었다.

그것도 주영이 10대 때나 보았던 버튼 꾹꾹 눌러가며 쓰는 폴더폰.

이브는 잽싸게 옥타비아의 손에서 원거리 어쩌고 하는 기계를 잡아채 덮여 있는 폴더를 펼쳐 들었다. 네모난 화면이 있는 상단부와 열두 칸의 조막만 한 버튼이 있는 하단부로 이루어진 폴더폰 그 자체였다.

“양방향이라는 건 쌍으로 이루어진 짝이 하나 더 있다는 거지?”

“맞아요! 각각의 기계는 한 쌍이 페어여서 특정 암호를 입력하면 페어로 연결된 기계와 통신 연결이 가능하게끔 설계되어 있어요. 두 기계가 직접 연결이 되어 있어 중앙 통신국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도청의 염려도 없죠! 실험해봤는데, 이스트 플루멘 끝에서 웨스트 플루멘 끝까지는 일단 무리 없이 연락이 터져요. 계산상으로는 수도에서 북쪽 국경 지역까지도 연락할 수 있어요.”

“흠……. 성능은 나쁘지 않네. 하지만 굳이 기계를 한 쌍으로 연결해야 할까? 그것보다는 각 기계별로 고유 번호를 부여해서 해당 고유번호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통신이 가능하게끔 하는 방법은 어때?”

“……세상에! 아가씨는 천재예요!”

옥타비아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충격 받은 얼굴을 하다가, 곧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며 초롱초롱 빛을 뿜었다.

그냥 무전기를 전화기로 바꿔보자고 제안했을 뿐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감탄을 무시한 이브가 폴더폰을 드레스에 달린 주머니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좋아. 그러면 일단 마크1은 내가 가져가겠어. 암호는 뭐야?”

“1234765예요!”

“단순해서 좋네. 아, 그리고 가장 먼저 제작해줘야 하는 물건이 있는데…….”

이브는 목소리를 낮추고 옥타비아에게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집중해서 듣던 옥타비아의 눈빛이 다시 별처럼 빛났다.

“가능하겠어?”

“대단해요! 마법사의 마나를 그런 식으로도 이용하다니. 설명하신 방식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다만 대상자의 신체 일부가 좀 필요한데…….”

“머리카락이나 손발톱, 체액 같은 거?”

“네……!”

“그건 내가 알아서 구해볼게. 일단 그 직전 단계까진 빠르게 마무리해줘. 아, 그리고…… 이건 좀 천천히 만들어도 되는 건데…… 그…….”

이브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작아졌다. 이번에는 보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민망해서 목소리가 작아진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옥타비아도 점점 뺨을 발그스레하게 붉혔다.

“어머. 어머어머. 그게…… 이론상으로는 완전 가능하거든요.”

“기간은 넉넉하게 잡아도 돼.”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아직…… 한 번도 그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아니, 그 나이 먹고 뭐 했어?”

“그 나이라뇨! 저 아직 스물하나밖에 안 먹었거든요?”

“그으…… 으음……. 굳이 실물 모양이 아니어도 되니까…… 이러엏게 유선형으로…… 부드러운 라인으로다가…… 응? 길고 둥근 원기둥 모양인데…… 그 있잖아, 약간 휘어져서 이렇게…….”

“오……. 오호…….”

이브는 손으로 열심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설명했고, 스물하나 먹은 천재 발명가 아가씨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래서 따로 허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전원을 켜면 단계별로 그렇게 상하 좌우로…….”

“아하……. 오……. 와우…….”

“이게 진짜 중요하거든, 앞뒤로 진동하는 동작이…….”

“워후……. 오오……!”

한참 설명이 이어진 후 두 사람은 뿌듯하게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열성적인 이브의 설명과 역시 열정적인 옥타비아의 도전정신 덕분에 어쩐지 성공적인 시제품이 나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비록 반절은 협박 때문에 이브에게 매이게 된 옥타비아였으나 그녀는 태생이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실험을 하고 발명을 하는 마도공학자이자 마법사였다.

새로운 발명 소재와 탐구할 만한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옥타비아는 계약서를 쓰기 전 무시무시하던 이브의 모습을 모두 잊었는지 호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브는 그녀의 이런 원인 모를 변화 역시 이 세계가 게임 속의 세계이기 때문이라 믿었다.

뛰어난 발명 실력에도 그녀가 빛을 보지 못하고 이스트 플루멘 구석진 곳에서 낡은 마도구상점을 운영하며 비인가 약초나 시약 따위를 팔아 근근이 먹고살아야 했던 이유는 그녀의 마법적 성취 자체가 2서클에 그쳤기 때문이며, 또한 그녀가 고양이 수인인 캐트시의 혼혈이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게임상에서는 옥타비아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나오지 않았으나, 상점을 이용할 때마다 뜨는 상점 NPC와의 대화 스크립트로 충분히 그녀가 그간 받았던 무시와 멸시에 대해 유추가 가능했다.

게임에서처럼 실력만 확실하다면 혼혈이고 나발이고 간에 옥타비아를 적어도 약속한 2년간은 호강시켜줄 의사가 충분히 있었다. 이브는 옥타비아가 쓴 계약서를 접어 품에 챙기고는 지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러면, 부탁한 건 최대한 빠르게 제작 들어가줘. 만약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고. 그리고 이건 개발비.”

지갑 안에서 지폐 다발 뭉텅이가 튀어나왔다. 옥타비아는 석 달간 열심히 물약과 약초를 팔아도 구경하지 못할 두께의 지폐를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상품 개발에 돈 아끼는 거 아니야. 재료 아끼지 말고 팍팍 연구해. 물론 품질만 만족스럽다면 완성 후 인센티브도 줄 거야.”

“이…… 이렇게나 많이……. 정말 제가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내가 원하는 건 최고품질의 물건이야.”

“세상에, 아가씨! 평생 주인님으로 모시겠어요!”

감격으로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옥타비아의 충성을 외치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이브는 상점을 빠져나왔다.

양손을 꼭 모아 쥔 채 이브가 낡아빠진 입구의 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옥타비아가 여전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중얼거렸다. 여자의 얼굴은 온통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드디어, 예언이…….”

2년간의 종속 계약을 강제당했음에도 별반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얼굴로 감격에 차 중얼거리던 옥타비아는 제게 내려온 「말씀」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예언이 인도한 교회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마차 삯을 계산하며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한편, 이브는 일 하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남은 일은 가죽 공방과 어른의 장난감을 다루는 상점을 찾는 일뿐이었다.

그 정도는 가뿐하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으나 이브는 가죽 공방의 주소가 적혀 있는 종이쪽지를 한번 보다가 다시 주변 풍경을 한번 둘러보았다. 부정해보려고 애써보았지만 결국 그녀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 여기가 맞는데……. 이상하다……. 분명히 이 근처인데…….”

이브는 종이쪽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이스트 플루멘 테론 지구 마뉴 스트릿 319번지…….

‘아니, 여기가 320번지니까 분명 근처에 319번지가 있어야 하는데! 왜 없어! 왜! 왜 나는 햄보칼 수 없어! 왜!’

약한 패닉에 빠진 이브가 320번지라고 적힌 푯말과 쪽지를 다시 번갈아 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제 즐거운 한때를 보낸 직후 손바닥으로 치는 스팽이 힘들어 패들(긴 직사각형 형태를 띤 노 모양의 스팽 도구)을 주문할 마음이 만만이었건만, 공방을 찾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었다.

크롭 휩은 그래도 말채찍과 비교해가며 비슷하게 설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패들은 주걱을 만들어주는 공방을 찾아가라는 답변이 돌아올 가능성이 컸기에 직접 가서 돈을 면전에 뿌리며 꼭 가죽으로 만든 패들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게다가 지갑 사정이 여유롭다면 패들뿐 아니라 두 가닥이 연결된 플로거 휩(여러 갈래의 꼬리가 끝에서 하나로 뭉쳐 있는 채찍)과 테일이 여러 가닥인 플로거 휩까지 주문을 넣을 생각이었다. 빨리 주문을 넣고 「그렇고 그런」 장난감들을 다루는 상점에 대해서도 수소문해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 이브가 다시 몸을 움직여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금씩 이리저리 기웃대며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대로변과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골목 안쪽으로 진입했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아닌 듯해 다시 되돌아 나가려던 그때, 저 멀찍이에서 껄렁해 보이는 수인들에게 둘러싸여 난처한 일을 당하고 있는 신사가 보였다.

강 동쪽에는 올 일이 없을 법한 어수룩한 신사 하나를 거리의 왈패들이 에워싼 모습은 앞구르기를 하며 보아도 삥을 뜯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호구 하나 잡았구나 하고 무심하게 지나치려던 이브는 문득 허름한 복장을 한 남자들 사이에서 눈을 굴리고 있는 키 큰 신사가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저거 윌리엄 아냐……?’

이윽고 이브는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내는 게임의 메인남주이자 북부의 대공, 황태자의 숙부인 윌리엄 랭커스터였다. 게임에서 수십 번은 더 보아왔던 얼굴이기도 했다. 2D가 3D가 된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대체 저 귀족 양반이 무슨 용무로 강 동쪽까지 기어 나온 거지, 생각하면서도 이브는 재빨리 남자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는 게임 속에서 마탄총을 다루는 기술이 수준급인 명사수로 묘사되었음에도 지금 그의 몸 어디에도 화기로 보이는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못 본 척 무시하고 지나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무장하지 않은 그를 둘러싼 수인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하자 이브는 결국 짧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이브는 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그들에게 접근했다. 납작한 모직 플랫캡을 쓴, 허름한 복장을 한 왈패의 뒤통수가 정확히 시야 안에 들어왔다.

이브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서 주먹 절반만 한 돌덩어리를 하나 주워 들어 그대로 그의 뒷머리에 집어 던졌다. 어깨의 힘을 사용하며 우둘투둘한 돌을 냅다 내던지는 그 폼이 마치 야구공을 던지는 투수의 것과 같이 완벽했다.

따악!

“끄윽…….”

“뭐야?”

“어떤 새끼야!”

뒤통수에 돌덩어리가 꽂힌 늑대 머리의 남자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를 본 나머지 둘이 기세를 일으켜 으르렁대며 뒤를 살펴보았다. 이브가 서 있는 쪽은 사각이라 저쪽에서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이브는 골목 어귀에서 조심스럽게 허벅지에 감아두었던 거친 삼을 꼬아 만든 로프를 풀어 손에 쥐었다.

이브가 된 이후 실전은 처음이었다. 이브는 긴장으로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히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심장이 펌프질하며 손끝까지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은 천성이 싸움꾼이었다.

와이어나 로프를 이용한 육탄공격은 주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하는 대인전에서 그녀가 애용하던 방법이었다. 로프의 양 끝을 두 손에 감아 쥔 이브가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를 귀로 감지하며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대략적인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낸 이브는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난 후 재빠르게 발을 굴러 낡은 돌벽을 빠르게 차고 올라가 먼지가 잔뜩 앉은 창틀을 붙잡고 재주넘듯 창에 달린 비좁은 난간에 매달렸다.

이브가 낸 소음을 감지한 듯 수인 중 한 명이 이브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건물 벽에 붙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뻥 뚫린 거리만을 살펴보고 있었다.

모자를 뚫고 삐져나온 털이 복슬복슬한 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이브는 그의 귀가 그녀가 있는 방향의 정반대 방향을 향해 쫑긋거리는 것이 보이기 무섭게 비좁은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투박한 로프가 짐승 귀를 한 남자의 목 위로 마치 올무처럼 휘어 감겼다. 순식간에 목과 등 뒤로 떨어지는 묵직한 무게에 수인 사내는 꺽꺽 소리를 내며 팔을 마구 휘둘렀지만 그의 손은 등 뒤에 매달린 이브를 붙잡기에는 너무 짧았다. 남자의 몸이 이리저리 마구 뒤틀리며 퍼드덕거리기도 잠시, 결국 그는 꼬르륵 눈을 뒤집으며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죽일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숨통을 죄었던 끈을 풀어낸 이브가 다시 가만히 숨을 죽이고 기척을 읽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기세를 숨기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브는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타이밍을 맞추어 땅을 박차고 골목을 돌아 걸어오는 자의 머리를 노려 발을 휘둘렀다. 뻐억! 사람의 살과 살이 맞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막혔다.’

이브는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을 눈치채자마자 재빨리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엇.”

제 공격을 받아낸 것은 수인 사내가 아니라 밤하늘을 꼭 닮은 긴 남색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트리고 있는 창백한 낯의 남자였다. 그 역시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내비치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인과 이브가 쥐고 있는 로프를 번갈아 보고는 대충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한 듯 입을 열었다.

“아까 돌을 던진 것도 혹시……?”

“예에…….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긴 하네요.”

“아닙니다. 고마워요. 아니……. 고맙네. 으음.”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대충 넘겨 정리한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다가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뭐어? 고마워요오? 게다가, 윌리엄이 웃는다고? 지금 너 웃었어?’

대단한 캐붕을 목격하고 말았다. 이브는 말랑한 남자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이브가 기억하는 윌리엄 휴 랭커스터는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지도, 사근사근하게 웃지도 않았다. 게임 속의 대공은 언제나 새하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싸늘한 태도를 고수했었다.

‘도플갱어?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셋은 있다더니, 설마 그런 건가?’

이브가 게임 캐릭터의 캐붕에 패닉하건 말건 윌리엄은 난처한 기색으로 웃어 보이며 퍽 친근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다리 힘이 꽤 좋던데.”

“그냥 뭐, 조금 단련하고 있어요.”

“흐음……. 로프로 뒤에서 목을 조른 겁, 조른 건가? 키가 맞지 않았을 텐데.”

“아. 저 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렸어요.”

“2층 창으로? 각이 안 나오는데……. 너무 좁지 않아요?”

“아뇨, 이렇게 창틀을 먼저 잡고…….”

이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차분히 동선을 설명했다. 그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가며 이야기를 듣더니 뒤이어 말했다.

“역시 아가씨 체구가 작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닙, 아닌가?”

“거 참. 말을 올리려면 올리든가, 놓으려면 놓든가 하나만 해요. 헷갈리게.”

“하하하, 미안해요. 요즘 말투를 고치라는 구박을 듣고 있어서.”

“아무튼, 이렇게 좁은 틈 위에 올라타는 건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거든요. 덩치랑은 상관없어요.”

이브는 제 말에 그렇구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윌리엄을 무척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딘가 무척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어리바리 떠는 후배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브가 그에게 무언가를 묻고자 입을 달싹인 그때, 대로변과 연결된 골목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검으로 무장한 두 남자와 금색 테두리의 동그란 안경을 쓴 갈색 머리 남자가 윌리엄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주인님!”

“세드릭.”

“개인 행동은 자제하시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세드릭이라고 불린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긴 남자가 이를 꾹 악물며 윌리엄을 타박하듯 노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이브가 없었다면 막말이라도 쏘아붙일 기세였다.

“그렇게 되었네. 무사히 만났으니 된 것 아닌가?”

“전…… 주인님……. 돌아가서 봅시다.”

아래로 처진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큭큭 웃는 남자는 도저히 이브가 게임을 통해 보았던 윌리엄 랭커스터와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어쩐지 뱃속이 꼬이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도와주어 고맙네. 사례를 해야 할까?”

“아뇨.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이브는 어딘가 복잡한 마음에 일부러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황급히 그 자리를 떠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원래 저런 성격이었다가 게임의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차갑고 냉정한 성격으로 변하게 되어버리는 걸지도 몰랐다.

어쩐지 궤도를 크게 이탈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브는 심란한 속내를 애써 갈무리하며 골목을 떠나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브는 한참을 더 공방 거리에서 발품을 판 끝에야 겨우 가죽 공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브는 어렵사리 찾은 공방에서 마치 한이라도 풀듯 원래의 목적이었던 패들뿐만 아니라 플로거, 거기에 손목과 목 그리고 오금을 연결하는 가죽 구속구까지 추가로 특수 제작 주문을 넣고야 말았다.

가죽 공방의 주인은 용도가 심히 의심스러운, 다소 외설스러운 요구에도 눈앞에 뿌려지는 거액의 돈다발에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히며 최단기간 제작을 약속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브가 찾던 「다소 그렇고 그런」 상품들을 제작 판매하는 공방을 연결해주기까지 하며 이브와 이브의 돈에게 몹시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어쨌든 오늘 목표했던 일들은 모두 달성했다.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만족스러운 외출이었다.

집무실의 어두운 적갈색 윙백 체어에 앉아 보고를 받던 사내가 난데없이 등장한 단어에 눈썹 사이를 찡그리며 물었다.

“베르묄?”

“예. 그 여자가 방문했다는 공방에 가 알아보니 칼레스 백작저로 물건을 배달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수령인은 이벨린 베르묄이라고 합니다.”

“흐음……. 베르묄이면…… 황태자 쪽에서 요즘 키우고 있는 그놈이었지.”

“맞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그쪽과 손을 잡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넘기려다가 베르묄이라는 성씨가 거슬려서 알아보니 그 집안이 확실했습니다.”

“황태자와 손을 잡은 놈들이 대공과 접촉을 했다는 이야긴가.”

남자가 턱 근처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그의 뇌에는 이거다 싶을 만큼 짚이는 구석이 떠오르지 않았다.

베르묄은 유명한 문인 집안이었다. 현 칼레스 백작은 비록 돈만 쓸 줄 아는 아둔한 사내지만 전대의 백작은 한때 선황의 두뇌 역할을 했을 정도로 지략이 대단한 자였다.

칼레스의 소백작인 알베리크 베르묄 역시 16세의 나이에 금융제도와 관련된 논문 세 개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그 집안은 한 번씩 멍청이들이 태어나며 삐끗하기는 해도 대대로 책략가를 배출하며 이름을 알린 가문이었다.

몸집의 두 배쯤 되는 덩치를 가진 사내를 두들겨 패는 여자라니, 그만큼 베르묄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는 없을 터였다.

“그 집안에 그렇게 무력이 강한 사람이 있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일단 그 쥐어 터졌다는 새끼들 잡아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얼간이들 패트런이 누구지?”

“필리파입니다.”

“대충 들을 이야기 다 들으면 다 죽여.”

“예, 보스.”

아무리 가장 말단의 수금원이라고 할지라도 조직의 이름에 먹칠을 한 머저리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이것은 파밀리아의 구성원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일종의 보여주기 식 처형에 가까웠다. 밖에서 또 멍청한 짓거리로 조직을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머저리들의 뇌에 확실히 새겨주어야만 했다.

“용모파기는 알아왔나?”

“예. 화가를 불러 목격자들과 공방 주인의 말을 토대로 얼굴을 그리게끔 지시한 상태입니다.”

“완성되면 내 쪽으로 올려. 어떤 아가씨인지 정말 궁금하군.”

아마 뺨 몇 대 맞은 걸로 기가 죽은 피라미가 제멋대로 꼬리를 말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일반적인 「아가씨」라면 그마저도 꽤나 용기가 필요했을 일이었다. 시두스의 알파 늑대, 바실리오 루치아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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