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수도, 론디니움
이브는 과하게 푹신푹신하고 편안한 좌석에 앉아 흘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훔쳐보았다. 알베리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론디니움 타임스』라고 유려한 장식체로 쓰인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일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브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며 바로 며칠 전의 일을 회상해보았다.
이브가 수도행에 대한 허락을 구하기 위해 백작부인에게 시간을 청한 그날의 일이었다. 이브가 티타임을 제안한 목적을 틸다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던 아델라이드 백작부인은 이브에게 사전에 통보하지도 않은 채 알베리크를 티타임에 초대했다. 덕분에 이브와 알베리크는 하루에 두 번이나 함께 차를 마시게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아마도 알베리크가 자신의 편을 들며 그녀의 외출을 함께 반대해줄 거라고 믿은 모양이었다.
수도행 이야기를 꺼내자 알베리크가 흔쾌히 허락한 것은 이브도, 백작부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되레 마침 저도 한번 수도에 다녀올 일이 있으니 이참에 이브에게 수도 나들이를 시켜주겠다나 뭐라나 하는 소리를 해가며 백작부인의 복장을 뒤집어놓았다. 차마 귀한 아드님의 의견을 반대할 수 없었던 그녀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우애를 칭찬했다. 이브로서는 잘된 일이기는 한데, 어쩐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베르묄 일가가 주로 묵는 컨트리하우스는 수도인 론디니움에서 기차를 타고 다섯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칼레스령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브는 후에 따로 마련한 자리에서 알베리크에게 수도에는 혼자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고 항변해보았으나 그는 이브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기차의 일등석 칸에 앉아 수도로 향하게 되었다. 길게 뻗은 기차 칸 양쪽으로 나누어진 객실 중에서 방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일등석은 쾌적한 만큼이나 비쌀 터였다. 게다가 백작부인이 걱정된다며 함께 딸려 보낸 틸다에게도 이등석 티켓이 주어졌다.
전에 베르묄 가문의 형편이 어렵다는 내용의 말을 하지 않았느냐며 넌지시 던진 이브의 물음에 알베리크는 「그래서 침대칸의 특등석을 타지 못하고 일등석을 타고 가지 않느냐」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이브는 귀족들의 금전감각은 소시민으로 살아온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곧 머릿속에서 돈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19세기의 기차는 퍽 낭만이 있었다. 투박하고 네모진 모양이나 뾰족한 유선형의 전철만을 보아왔던 이브는 철로 주조된 웅장한 장식물 같은 검은색의 아름다운 기차를 보고 그만 오오…… 하는 탄성을 내뱉고야 말았다. 예술에 대한 조예는 없었지만, 그녀는 이런 것이 고전미인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알베리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대한 기차를 보며 감탄하는 이브를 보고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최첨단의 시대를 살았던 이브에게는 다소 억울한 일이었으나, 기차 안 객실에 들어선 직후 또 오오…… 하고 감탄을 흘리고 말았기에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맨날 다닥다닥 좌석이 붙어 있는 객실만 보다가 이렇게 기차 한 칸의 반절을 통째로 방처럼 꾸며놓고 마음껏 돈 지랄 한 티를 팍팍 낸 객실을 보면 21세기 누굴 데려와도 감탄할걸! 나는 억울하다!’
마치 고급 호텔 객실처럼 고풍스러운 벽지와 가구, 아름다운 장식물들로 꾸며진 일등석 객실을 보며 매우 늦기는 했으나, 이브는 그제야 자신이 정말 「아가씨」가 되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만일 이브가 이벨린 베르묄이 아니라 이브 테루안느였다면 분명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차 다섯 시간을 내리 서서 가야 하는 삼등석 객실을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요행히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공간을 함께 써야 하는 이등석 객실에서 허리를 곧게 편 채 앉아서 가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반쯤 누운 듯이 널브러져 최대한 신체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세는 꿈도 꾸지 못했을 터였다.
‘기차 칸을 반으로 똑 나눠서 쓰는 일등석도 이렇게 쾌적한데, 기차 칸 하나를 통째로 쓰는 특실은 대체 얼마나 으리으리하다는 거야……? 귀족 놈들 돈지랄은 진짜 클래스가 다르시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예? 아, 어. 아뇨. 그냥 오늘도 참 예쁘시구나 싶어서.”
“예쁘……. 됐습니다. 당신은 그냥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칭찬을 해줘도 앙탈이실까?”
“…….”
멍하니 생각을 한다는 게 그만 알베리크가 있는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넋을 놓은 모양이었다. 시선을 느낀 듯 신문 너머로 이브와 눈을 마주친 알베리크가 이브의 능글맞은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의 미모 담당 캐릭터답게 알베리크는 오늘도 예쁘기는 더럽게 예뻤다. 적당히 구색만 맞춘, 장식도 그리 많지 않은 연두색의 외출용 프로미너드 드레스를 꿰어 입은 이브와는 다르게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몹시 신경 쓴 듯한 착장이었다.
눈 색과 맞춘 맑고 푸른 리본으로 단정하게 뒤로 넘겨 묶은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깨끗한 흰색 윙 칼라 셔츠와 역시 잘 모양내어 다려 아름답게 굽이치는 흰색 크라바트, 같은 색의 실로 티가 나지 않게 복잡한 문양으로 자수가 놓인 감색의 베스트와 코트, 차콜색의 밑위가 긴 바지와 반짝반짝 깨끗하게 닦인 검은 가죽구두, 게다가 지금은 잠시 벗어둔 새카만 톱해트까지.
한색 계열 위주로 꾸며져 다소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기는 해도 그는 어딜 보나 생전 험한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귀족계급의 신사처럼 보였다.
‘꼬리 깃 고르는 공작새도 아니고……. 이 양반도 은근히 아닌 척 뽐낼 건 다 뽐낸다니까. 앙큼하다, 앙큼해.’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네?”
“……아닙니다.”
“앗, 설마 제가 방금 생각하던 걸 말로 꺼냈나요?”
“당신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사람이 집중 좀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이브는 괜스레 민망해져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너머로 푸릇푸릇한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휙휙 빠르게 뒤편으로 사라졌고, 넓은 평야 저 멀리에는 양처럼 보이는 동물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았던 광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었다. 무려 두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도.
금방 창밖 구경에 질린 이브의 자세가 점점 아래로 무너지며 방만하게 흐트러졌다. 그녀는 무척이나 심심했지만 그렇다고 알베리크를 앞에 두고 퍼질러 잘 수도 없었다. 침이라도 흘리면 틸다가 공들여 해준 화장이 못쓰게 되어버릴 터였다. 알베리크는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꼴사나운 태도를 지적했다.
“아무래도 제 교육이 당신에겐 의미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에이, 사람이 어떻게 한 달 남짓한 시간 안에 변하겠어요.”
“사람? 제 눈앞에는 짐승만 한 마리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니,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왜 또 시비시죠? 어떻게 사람이 다섯 시간 내리 허리를 세우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고요. 심지어 이렇게 푹신푹신 안락한 의자를 두고……! 그건 고문이에요, 고문!”
“고문은 지금 이벨린 당신이 나에게 하고 있는 걸 두고 고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가르친 귀족가 영애가 축사에서 기르는 짐승처럼 늘어져 있는 모습을 강제로 보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말입니다. 곧 눈에서 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에잇, 저놈의 잔소리……!”
일어서지 않으면 알베리크의 잔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이브는 툴툴대면서도 푹신한 좌석에 누였던 몸을 일으켰다. 안락한 등받이 안으로 깊이 몸을 파묻으면서 이브는 생각했다.
‘아, 재수 없어. 하여튼 막말은 기가 막히게 잘해.’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브와 알베리크는 서로 데면데면하게 굴다가도 서로에 대해 나쁜 말을 던질 때면 기가 막히게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나쁜 쪽으로 티키타카가 잘되는 게 어쩐지 기분이 나빴으나 이브는 크게 내색하지 않은 채 대화의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수도에는 무슨 일이세요?”
“당신이야말로. 론디니움에는 무슨 용건으로 가는 겁니까? 어머니의 반대가 있을 거라는 건 뻔히 알았으면서.”
“허, 참.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어느 나라 예절이죠?”
“당신이 내게 예절 운운할 주제나 됩니까?”
“말을 말죠. 전 쇼핑하러 가는 거예요. 살 게 좀 있어서. 아, 생각난 김에 용돈 좀 주세요. 모아놓은 돈이 좀 부족할 것 같아서요.”
“아주 자연스럽게 금품을 갈취하는군요. 이것도 고아원에서 배운 「예절」입니까?”
“이게 다 제게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거랍니다.”
어느새 신문을 접고 속내를 모르겠다는 듯 뚱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알베리크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브가 돌연 생긋 미소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겨 알베리크의 왼편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침없이 앉아 그의 곁에 몸을 붙여왔다. 알베리크는 흠칫 놀라 그녀를 피해 몸을 옮겼으나, 이브는 꿋꿋이 따라붙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센트럴시티에서 강 동쪽, 이스트 플루멘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공방 거리에 그으런 공방이 있거든요. 그…….”
이브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며 알베리크의 귀를 간질였고, 뻣뻣하게 굳어 가만히 그녀의 속삭임을 듣던 알베리크의 뺨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그런 파렴치한……!”
“어머나. 파렴치라뇨. 그것뿐만 아니에요. 더 안쪽 깊이 들어가면…….”
이어지는 이브의 설명에 낯을 붉게 물들인 채 알베리크가 이브를 따라 목소리를 낮추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 그런 것들이…… 이스트 플루멘에는 그렇게 흔합니까?”
“흔하다기보다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거죠.”
이브가 생글생글 웃으며 은근슬쩍 손을 알베리크의 왼쪽 허벅지 위로 올렸다. 움찔하고 그의 허벅지 근육이 잔뜩 경직하는 게 느껴졌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조금 더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귓가에 닿아오는 달콤한 숨소리와 아래에 슬며시 닿아오는 가는 손가락의 짜릿한 감촉에 알베리크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긴장으로 메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작게 속삭여오는 목소리가 알베리크의 상상력을 자극한 듯 그의 뺨과 귓바퀴가 뜨겁게 익었다.
“제가 저 혼자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이브는 수월하게 묵직한 지폐 다발과 금화 주머니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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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들어선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완전히 멈추어 섰다. 알베리크는 톱해트를 집어 든 후 객실 안에 비치되어 있는 벽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모자를 고쳐 썼고, 옷매무새를 한번 단정히 정리한 후 뒤를 돌아 여전히 나태하게 늘어져 있는 이브에게 말했다.
“우선은 웨스트 플루멘의 타운하우스로 갈 겁니다.”
“네엥…….”
“곧 수행원들이 올 겁니다. 자세를 바로 하세요.”
“옙.”
“……적어도 마차에 오를 때까지는 버티세요.”
“넵.”
“오늘은 베르묄의 타운하우스에서 여독을 풀고 당신의 용무는 내일부터 보는 걸로 하세요.”
“그래서 말인데요, 잠시 틸다를 떨어트려둘 방법이 없을까요? 아무래도 그…… 공방에 틸다와 함께 가는 건…….”
“나와 동행한다고 하고 그녀에게는 다른 명령을 내려두면 됩니다.”
“오오……. 역시…….”
별일 아닌 것에 감탄하는 이브의 태도가 오히려 조롱이라고 여겨졌는지 알베리크는 잠깐 미간을 움찔 좁혔으나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을 폈다. 알베리크의 수행원 몇 명과 틸다가 객실의 문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언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입을 다물고 수행원의 안내를 따라 기차에서 내려 빠르게 센트럴시티의 메인 역사에서 빠져나왔다. 역사 밖에는 마차 대기소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듯, 가문 문장이 걸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실력 좋은 마부의 운전 솜씨 덕에 정기 역마차와 몸집이 작은 해크니 마차, 거대한 다인승 옴니버스 마차들 사이를 요령 좋게 피해가며 눈 돌아갈 정도로 혼잡한 센트럴시티의 도로를 빠져나갔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도로 위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도로를 따라 세워진 화려한 건물들이 휙휙 뒤로 지나가더니 어느 순간 마차 밖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는 반듯한 저택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줄지어져 있는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잘 관리되어 있는 듯 보이기는 했어도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던 시장통 같은 시티 중심부와는 다르게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끔 창밖으로 빠르게 스치는 사람들도 다들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하인들이었다. 이브는 대충 눈치껏 강 서쪽 지역으로 진입했구나 하고 짐작했다.
수도 론디니움은 브리타니아 제국 내에서도 가장 빈부격차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황제와 황족들이 기거하는 궁성 옆을 지나 수도의 반절을 가르듯 흐르는 폭 넓은 강, 그랑 플루멘과 강을 끼고 있는 수도의 중심부 센트럴시티를 사이에 두고 강 서쪽과 강 동쪽으로 계급에 따라 철저히 거주 지역이 나뉘었다.
그랑 플루멘의 서쪽 지역인 웨스트 플루멘에는 궁성과 의사당을 비롯해 귀족들이 이용하는 시설들과 작위를 받은 귀족 가문들이나 궁성 고위직 공무원들, 대지주 같은 젠트리 계급들이 기거하는 저택들이 있었고, 동쪽 지역인 이스트 플루멘에는 주로 자유민들이 이용하는 시설들과 수인, 혼혈, 이민자, 가난한 노동자, 소상공인, 일부 중산층의 거주지가 밀집되어 있었다.
중앙의 시티는 조금 더 서비스업에 가까운 은행이나 출판업체, 호텔, 고급 백화점 등 귀한 신분의 사람들도 이용하는 시설들과 일반직 공무원, 부유한 중산층들의 저택, 사무실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철로 만든 기차가 다니고 전구를 밝혀 밤에도 낮과 같은 자유를 얻은 시대에도 여전히 신분과 빈부에 의한 격차는 존재했다. 가난하고 작위 없는 이는 절대 서쪽으로 올 수 없었고, 부유한 귀족들은 동쪽으로 갈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편견은 공고해져만 갔고, 양극화는 점점 심화하였다.
이브가 막무가내로 과거의 주영처럼 건들거리며 다녀도 주변인들이 그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이스트 플루멘 지역에 인접한, 수도 근교에 있는 고아원에서 노동계급 사람들과 뒤엉켜 자랐다는 배경 때문이었다.
알베리크 역시 갓 스물 먹은 여자가 기이할 정도로 외설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단순히 그녀가 강 동쪽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던가. 이브는 이들의 선입견과 편견에 감사하면서도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내가 그냥 평민이었으면 애초에 빠알간 단체 하나 만들었다. 이 양반들, 아래 계급에 대한 차별을 아주 숨 쉬듯이 한단 말이야. 듣는 소시민 기분 잡치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느라 얌전해진 이브를 알베리크가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기본 바탕이 나쁘지 않은 탓에 그럭저럭 어느 집안 아가씨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문제는 그 입이었다. 백작 부부의 앞에서 걱정한 바대로 사교계에 내놓기에는 몹시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는 차라리 입에 아교를 발라놓고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라고 소개를 할까 하는, 이브가 들었다면 제정신이냐며 입에서 불을 뿜을 정도로 과격한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브를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던 알베리크는 모자도 없이 덜렁 급이 낮은 진주 핀 하나만 꽂은 머리와 가느다란 줄에 엮인 알 작은 페리도트 목걸이,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별다른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은, 심지어 버슬 장식조차 하지 않아 단출하기 짝이 없는 외출용 드레스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집에서 내놓은 구박데기인 줄로만 알 것이었다. 제 부모의 방임이 귀족으로서는 학대에 가깝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바깥에 내놓아 자랑할 일은 아니었다. 이런 꼴로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가는 가문의 위신이 떨어질 터였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마차는 열심히 내달려 어느덧 베르묄 가문의 수도 저택에 도착했다. 알베리크가 국내 대학에 다닐 무렵에는 방학 기간에도 영지로 내려오는 대신 주로 수도 저택에서 기거했던 탓에 평소에도 관리가 잘되어 있어, 급한 전보에도 타운하우스의 사용인들은 능숙하게 저택을 정돈하여 두 사람을 맞이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먼저 내린 알베리크가 이브를 에스코트했고, 그를 그냥 무시하고 펄쩍 뛰어내릴까 잠시 고민하던 이브는 보는 눈도 있는데 좀 심한가 싶어 얌전히 그의 도움을 받아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손을 떼어버리고는 알베리크가 약간 더 앞선 모양새로 저택 앞까지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두 사람이 다가오는 속도에 맞추어 포치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풋맨이 정문을 열자 미리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연배가 제법 있어 보이는 집사가 대표로 인사했다.
문 안으로 들어선 이브는 기차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오오 하는 탄성을 내뱉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높은 천장, 빛나는 샹들리에, 집사의 뒤로 죽 열 맞추어 서 있는 시종과 하녀들. 이브는 접어두기로 했던 베르묄가의 재정 상태에 대한 의문을 다시금 상기하고 말았다.
‘돈 없다며! 집에 돈 없다며!’
이브가 돈을 처바른 듯 보이는 저택의 자태에 속으로 열심히 태클을 걸고 있는 와중에, 알베리크는 중년의 집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벨린. 이쪽은 타운하우스의 총 책임자이자 집사장인 조제프 루어입니다.”
“아. 반가워요, 조제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제프, 이벨린에게 방을 안내해주고 내 방으로 오세요.”
“예.”
이브는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눈앞의 주종을 보았다. 알베리크는 분명 경어를 쓰는데도 묘하게 하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말했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알베리크는 이 정도면 제 의무를 다 했다는 듯 짐을 들고 온 수행원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렸고, 이브는 제 짐을 들고 가까이 시립한 틸다와 함께 집사장 조제프의 안내를 받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급하게 준비해야 했을 텐데, 미안하게 됐어요.”
“모시는 데에 소홀한 점이 있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집사 아저씨네……. 워우…….’
얼핏 흰 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밤색 머리카락을 깔끔히 뒤로 넘긴, 조금 딱딱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성이 이브의 겸연쩍은 사과에 정중하게 답했다.
그는 3층의 남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방으로 그녀를 안내한 후, 잠시 후 아가씨를 모실 메이드 몇 명이 방문할 거라며 일러주고는 절도 있는 자세로 인사한 뒤 침실 문을 닫아주었다.
집사장이 사라진 후 틸다는 텅 비어 있는 옷장에 챙겨 온 드레스들을 걸고 흰색 화장대 근처에 액세서리들을 정리하며 짐을 풀었고 그동안 이브는 침대 가에 슬며시 엉덩이를 대고 앉아보았다. 햇볕에 잘 말린 침구가 폭신하게 몸을 감싸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빨리 드레스 벗고 침대에서 뒹굴고 싶다.”
“아직 저녁도 들지 않으셨잖아요. 소백작님과 함께 식사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방으로 올려달라고 할 거야. 아까 점심도 오라버니 얼굴 보면서 기차에서 해결해야 했는데 저녁도 같이 먹으라니, 분명 체하고 말걸.”
다리를 까딱이며 퉁명스럽게 답한 이브는 뒤이어지는 틸다의 진한 한숨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메이드들이 곧 올 거라더니, 틸다가 얼마 되지 않은 짐을 반쯤 정리해가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것은 틸다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메이드 두 사람이었다. 그녀들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저는 안나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저는 마리아예요.”
“응, 반가워. 두 사람이 저택에 있는 동안 나를 담당하는 건가?”
“네. 저는 주로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방의 관리와 가벼운 심부름을 도맡게 될 예정입니다.”
“좋아. 오래 있지는 않을 테지만 그동안 잘 부탁해. 아, 이쪽은 틸다. 대저택에서 함께 왔어. 나에 대한 건 틸다에게 묻도록 하고 일단 목욕부터 준비해줄래?”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나 쪽이 조금 더 오래 일을 한 선배인 모양인지, 주로 이브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안나였다. 마리아는 안나의 옆에서 눈치를 보는 듯이 티 나지 않게 데구루루 눈을 굴리고 있었다. 조금 어수룩해 보이기는 해도 어쩐지 순박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이브는 빙긋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다행히 모시기 어려운 분은 아니라고 느낀 듯 두 하녀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이브는 바로 틸다에게 손짓해 화장을 지워달라 부탁하고 마리아에게는 짐 정리를 끝내달라고 말했다.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방 어딘가로 들어간 안나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목욕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하며 이브를 이끌었다.
이브는 목욕을 하는 동안 세 사람이 좀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안나의 도움을 받아 탈의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준비하려는 안나를 밖으로 내쫓고 홀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긴장했던 몸의 근육들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는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맡기고는 욕조 바깥에 팔을 걸친 채 느긋하게 늘어져 눈을 감았다. 딱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늘어져라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퍼질러져 있던 이브가 목욕을 마치고 욕실 바깥으로 나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녀 셋이 달라붙어 머리를 말린다, 옷을 입힌다 하며 부산을 떨었고 그 와중에도 이브에 대한 정보들을 틸다에게서 전해 들었는지 두 메이드들은 이브의 얼굴에 화장하려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임에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맑은 흰색의 긴 원피스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브는 메이드들에게 부탁해 식사를 방으로 올려 받아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한 후 일찍 잠들 예정이라는 말로 모두를 방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그녀는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의 하늘을 구경하기 위해 침실 안에 갖추어진 스툴 하나를 끌고 와 창가에 놓고 앉았다. 창이 거리 방향으로 나 있어 창밖으로 저택 앞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정원과 으리으리한 대문, 그 너머 대로변이 보였다.
어느새 겨울이 지나고 바깥 공기가 훈훈해지고 있었다. 브리타니아는 겨울이 짧고 봄과 여름이 긴 편이었다. 게다가 이 세계의 여름은 다소 덥기는 했으나 습도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그럭저럭 팔이 긴 옷을 입어도 버틸 만했다.
살짝 열어둔 창 사이로 미세먼지가 없어 깨끗하고 상쾌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노을 진 하늘이 조금씩 쪽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날씨만큼은 만점인 세계였다.
한참을 창가에 팔을 괴고 앉아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침실 문 쪽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제프였다. 이브는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들어오라고 말했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조제프는 도련님께서 찾으십니다, 하고 방문 목적을 알리고는 이브가 숄을 걸치지도 않은 채 그를 맞이할 거라는 충고를 미리 들은 듯, 이브의 예의에 맞지 않은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따로 챙겨온 짙푸른 외출용 숄을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지금 당장이요?”
“예, 아가씨.”
이브는 속으로 이 양반이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으면서도 스툴 아래에 벗어두었던 실내용 슬리퍼를 꿰어 신고는 잠자코 조제프의 뒤를 따라나섰다.
집사장이 이끈 곳은 집무실이나 서재가 아닌, 알베리크의 침실 방향이었다.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응접실로 이브를 안내한 그는 무뚝뚝하고 단정한 얼굴 어딘가에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을 비치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알베리크가 응접실로 나오는 인기척에 말씀 나누시라며 빠르게 인사하고 응접실에서 나가버렸다.
“왔습니까.”
“조제프씨 반응이 묘하던데요.”
“아아…….”
침실 쪽에서 응접실로 나오는 알베리크를 보며 이브가 묻자 알베리크는 대답 없이 이브가 앉은 의자 건너편에 마주 보고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그는 가벼운 흰색 만다린 칼라 셔츠에 잘 다린 갈색 팬츠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뒤로 묶은 채였다. 잠을 잘 때도 옷을 갖춰 입고 잘 것만 같은 깐깐한 사내가 허리를 펴고 반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앉아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답지 않게 약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조제프는 나의…… 다소 엄격한 훈육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허……?”
“내가 사촌 동생에게까지 심하게 굴까 걱정이라도 한 모양이군요. 뒷수습하기에는 아무래도 귀족보단 평민이 더 쉬울 테니.”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지간히도 저택의 여종들을 괴롭혀댔구나 하는 생각에 이브의 얼굴이 질린다는 듯 일그러졌다. 아마 알베리크가 일을 저지른 후 뒷수습은 대부분 그와 가까운 집사장이 도맡았을 터였다.
이브의 앞에서 노련한 집사답지 않게 이유 없이 입술을 달싹이던 조제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브는 그 중년 사내의 눈에서 희미한 염려의 기색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그것은 수습을 걱정한다기보다는 그녀의 안위 자체를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역시 이 저택에서 제일가는 인성 쓰레기는 알베리크, 이 자식이었어. 이브는 속으로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것보다는 내가 왜 당신을 호출했는지 더 궁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래요. 무슨 용건이시죠? 테이블에 찻잔 하나 없는 걸 보니 다 늦은 이 시간에 뭘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따라오십시오.”
대답을 마치자마자 알베리크는 몸을 일으켰다. 이브는 그를 따라 침실 안으로 들어섰고, 거기서 알베리크가 규모가 크지 않은 책장 속 책 몇 권을 뒤로 밀어내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든다 싶더니, 어디서 많이 본 밀실이 책장 뒤쪽으로 드러났다.
“세상에, 수도 저택에도 만들어뒀어요? 당신 정말 장난 아니다…….”
“…….”
말없이 밀실 안으로 들어가는 알베리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과연 눈에 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창 없이 천장에 달린 전구 하나로만 빛을 밝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은 천장과 바닥을 제외하고 붉은 벽지가 발린 벽과 검은색 벨벳 암체어, 어두운 암갈색 장식장 안에 장식품처럼 전시되어 있는 갖가지 체벌도구들로 인해 위압적이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고 뒤를 따라온 어린 소녀들이 겁을 집어먹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순순히 그의 명령에 따랐을 만한 분위기였다.
“왠지 이쪽 인테리어에 더 신경을 쓴 것 같네요?”
그러나 이브는 긴장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제 방인 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비밀스러운 체벌실 안을 탐색했다. 바닥에 깔린 어두운 붉은색 카펫 위로 발을 툭툭 굴러도 보고, 장식장 앞을 서성이며 다양한 굵기와 재질의 회초리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벽에 고정되어 있는 쇠사슬과 사슬 끝에 매달려 있는 가죽 재질의 손목 구속구를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어쩐지 테마 호텔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야, 본격적인데? 이거 써본 적은 있어요?”
“몇 번 정도. 하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네요. 하지만 그냥 관람시켜주려고 데리고 온 건 아닐 테고.”
“……당신이 먼저 날 충동질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성큼 한걸음 가까이 다가온 알베리크의 눈빛이 새파란 욕망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낮에 한번 보았던 그의 열기를 가득 담은,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 보던 이브가 씨익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늘은 얼마나 맞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백 대에 다시 도전해보겠습니다.”
“아하. 그동안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네요. 괜찮겠어요? 쉽지 않을 거예요.”
이브가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물었다. 알베리크는 조금 수줍은 듯이, 하지만 결연하게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반응을 지켜본 이브가 킥킥 웃더니 돌연 안색을 싹 바꾸어 표정을 굳혔다.
“자세가 덜됐네. 정 그렇게 매를 맞고 싶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애절하게 빌어봐요.”
“……아.”
“내 마음이 동하면 뭐, 어울려줄 수도 있고.”
알베리크는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는 어색한 몸짓으로 몸을 낮추어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꿇어앉은 후에도 잠시 어찌할 줄을 몰라 우물쭈물한 알베리크는 눈치를 보듯이 이브를 올려다보며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저, 를…… 때려주십시오.”
“바보같이 굴지 말고 똑바로 말해. 누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지?”
“……저를, 회초리로 잔뜩…… 매질해주세요.”
“으음, 어째 확 와닿지가 않네요.”
“아……. 부탁드립니다.”
우물대던 알베리크가 겨우 말을 끝내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던 이브가 돌연 몸을 돌려 뒤쪽에 있던 암체어 쪽으로 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쳐 기대어 섰다.
“이리로.”
이브의 나긋한 목소리에 알베리크는 작게 한숨 쉬며 다리를 굽혀 일어서려고 자세를 바꾸었다.
“기어서.”
그러나 이어지는 명령에 알베리크는 그대로 흠칫 몸을 굳히고 아래로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이브는 지루하다는 듯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안경을 한번 고쳐 쓴 후, 다시 몸을 낮추어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카펫 위를 무릎으로 기었다.
피학 성향은 있으나 피지배 성향은 그다지 없는 그에게 이런 치욕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수치스러울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양 뺨을 빨갛게 물들인 알베리크가 이브의 발치 가까이에 와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무릎 꿇어앉았다.
“다시 빌어봐.”
“저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매질해주십시오.”
“당신?”
“그……. 읏, 주, 주인님…….”
“좋아. 잘했어요. 이제 일어서세요.”
제 입으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도 휘청거리며 모욕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두 뺨에 만족스럽게 웃은 이브는 의자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건 무슨 용도로 둔 거죠?”
“매질을 하다 지치면…….”
“아. 앉아 쉬려고 놔뒀다? 자기 몸은 어지간히도 챙기네. 음, 뭐……. 좋아요. 그러면 오늘은 좀 다르게 써볼까. 의자 위로 올라가 무릎 꿇고 앉아요. 아니, 반대로. 등받이와 마주 보게끔. 그대로 허리 들고. 음, 좋아요. 자세 흔들리지 않게 팔 받침이나 등받이를 붙잡고 있어요.”
알베리크가 그녀의 지시에 따르며 순순히 허리를 들어 의자 위에 무릎으로 선 자세를 하자 이브는 그의 허리를 안다시피 팔을 둘러 팬츠의 단추와 끈 여밈들을 모조리 풀어 헤쳤다.
진한 갈색 바지가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리자 속에 받쳐 입은 기장이 긴 흰색의 드로즈가 보였다. 속옷이라기에는 밋밋한 바지에 더 가까운 형태의 언더웨어가 밖으로 드러나자 알베리크는 파드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듯 허리를 뒤틀었다.
“자, 잠깐……!”
“쓰읍, 자세 풀면 혼나요.”
“이, 이벨린. 바지는…….”
“끝내주게 두들겨줄 테니까 좀 닥쳐봐.”
“아, 윽…….”
이브는 알베리크의 뒷머리를 강하게 휘어잡은 채 움직임을 봉쇄하고는 그대로 손바닥을 약간 구부린 채 빠르게 그의 속바지 위를 후려쳤다. 둔부에 닿는 찌릿한 통각에 그제야 알베리크는 움찔하며 버둥거리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브는 손바닥으로 다시금 그의 봉긋한 둔덕 위를 내려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얌전히 굴란 말이야, 응? 여기까지 와서 주제 파악 못 하고 자꾸 자기 입맛대로 굴면 어떻게 해요.”
“으읏…….”
“변태면 변태답게 때려주는 대로 얌전히 질질 싸면서 감사하다고 인사나 하라고.”
“흐으, 으…….”
귓가에 속삭여오는 이브의 목소리에도 알베리크는 별다른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고스란히 엉덩이를 내주었다. 철썩철썩, 마치 가죽으로 내려치는 듯한 마찰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과 도톰한 손바닥 살이 주는 믿을 수 없는 고통에 알베리크는 힉 하고 숨을 들이켜며 파르르 허리를 떨었다. 의자의 등받이를 힘주어 꾸욱 잡은 그의 두 손은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까지 몇 대 맞았죠?”
“하, 아으…… 열…… 열아홉.”
“하하, 진짜 쓸데없이 머리 좋네.”
스무 대를 한 대 남겨두고 손을 멈춘 이브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놔주고는 이어 자신이 내려치던 둔부의 둥그스름한 라인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읏, 으응…….”
“징그럽게 앙앙대지 말고. 아무튼, 어떤가요? 아파요?”
“아……! 읏, 네…… 아픕니다…….”
“아프기만 해요? 지금 이렇게 만지면…… 엄청나게 뜨거워요. 아, 따가워요? 만지니까 자꾸 움찔움찔하네.”
“웃……. 화끈거리고…… 아, 따갑습니다…….”
알베리크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다시금 철썩 살갗을 호되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릿한 통증 탓에 저도 모르게 허리가 휘려고 하는 바람에 알베리크는 의자 등받이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부여잡고 손톱을 세웠다.
또다시 10여 차례 정도 얇은 천 위로 마찰음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알베리크는 이를 악물며 무너지려는 허리를 간신히 바로 세운 채 등받이를 지지대 삼아 버텼다. 하체를 후벼 파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고통과 살이 징징 울리는 여운이 둔부와 그 아래 회음, 더 깊은 안쪽을 간질였다.
퍽퍽 내려치는 손힘에 어쩔 수 없이 몸이 앞으로 밀리면서 의자에 배 아래 은밀한 곳이 짓눌려 뭉개졌다. 강렬한 자극이 그의 척추뼈를 타고 등 위로 내달렸다. 쾌감으로 변해버린 고통 탓에 드러나지 않은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브는 그의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다시 손을 멈추었다.
“아. 오라버니, 지금 기분 엄청 좋구나.”
“하아, 으읏……. 아…….”
“더 맞고 싶어요? 지금 한 서른 대 맞았나?”
“서른, 둘……입니다.”
“으음. 슬슬 다른 걸로 바꿔야겠다. 어떤 게 좋아? 얇은 회초리? 나무로 만들어진 거, 어때요?”
“뭐든, 아……. 뭐든…… 좋습니다…….”
긴 입덕부정기를 마치고 통증을 쾌감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 알베리크는 처음 매를 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지독하게 몰려왔던 쾌락이 일순간에 멈추자 그는 안달 난 것처럼 허리를 뒤틀며 이브를 졸라댔다. 제발, 빨리……. 이브는 속으로 킥킥 웃으며 그런 알베리크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넓은 장식장 앞으로 가 고심 끝에 매를 골랐다.
손가락 굵기 정도의 편백나무 케인은 탄성은 그리 뛰어나지 않으나 무척 탄탄했다. 잠깐 손으로 슬쩍 힘주어 휘어보던 이브는 자기 손바닥에 두어 대 툭툭 휘둘러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고는 알베리크를 불렀다.
“오라버니, 이리로.”
이브의 목소리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알베리크가 머뭇거리더니 바닥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다리 사이에 아래로 흘러내린 바지가 걸려 있어 기어오는 것이 영 엉거주춤해 보였다.
그 어색한 움직임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는 이브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위험한 빛으로 빛났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알베리크의 참을성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렸고, 결국 먼저 입을 뗀 것은 알베리크였다.
“주…… 주인님…… 제발, 제게 매질을…… 부탁드립니다.”
“후후……. 착해요. 아주 잘했어요.”
이브는 몹시 만족스러워하며 손을 내려 알베리크의 뺨과 턱을 마치 짐승을 어르듯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이 쾌락에 약한 남자 같으니라고. 이브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이브는 알베리크의 뺨 위를 더듬던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물린 입매를 덧그리듯 쓰다듬자 이브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눈치챈 남자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서 입술을 살그머니 열었다.
이브는 작게 열린 입 안으로 검지와 중지를 느긋하게 밀어 넣었다. 예기치 못한 침입에 알베리크는 당황한 눈빛으로 이브를 올려다보았으나 이브는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핥아봐요. 혀를 내고 천천히, 부드럽게.”
입 안을 채운 손가락의 부피에 입을 다물 수도, 무어라 의사 표현을 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알베리크는 우물쭈물하는 낯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체념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혀를 움직여 입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감싸듯 문질렀다.
“응, 우, 흐으, 우흐…….”
“혀 전체로 쓸듯이 손가락 끝부터 뿌리까지 핥아요. 혀를 감은 채로 입을 모아 약하게 빨아들이고, 삼킬 듯이 목을 조여보세요.”
영 어색한 혀의 움직임에도 이브는 끈기 있게 어떻게 혀를 움직이고 빨아들일지를 지시했다. 곧 알베리크의 혀가 입 속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그럭저럭 적응한 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베리크는 학습능력이 좋을 뿐 아니라 생각보다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다. 한번 분위기를 타면 제법 그럴듯하게 슬레이브의 역할을 해낼 줄 알았다. 후에 자신의 말과 행동들을 돌이켜 생각하며 홀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핸드워십이라고 불리는, 손을 핥는 행위의 기본적인 혀 움직임을 자상한 태도로 알려주던 이브는 알베리크가 조금씩 열중하는 얼굴로 그녀의 손가락을 정성스레 핥아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으흐, 컥……! 커허, 흐!”
“목구멍 더 안으로 삼켜야지. 깊게, 목을 열어서.”
“흐우, 우욱!”
알베리크는 목 깊이 들어오는 손가락에 강렬한 구역감을 느끼며 이브의 손을 잡고 목 바깥으로 꺼내고자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거칠게 도리질 치며 어떻게든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대는 남자를 발로 밟아 제압하고는 머리채를 강하게 휘어 쥔 채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이 끄르륵, 하고 알베리크의 목 안에서 잔뜩 짓눌린 목 울림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차올라 굵은 방울방울이 뺨 위로 후드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브는 적당히 정말로 그가 토사물을 올려내기 직전에서야 목 안을 자극하던 손가락을 입 밖으로 꺼냈다.
“커헉, 콜록, 크흑! 컥, 커흑……!”
이브는 남자의 타액으로 질척해진 손을 한번 털어낸 후, 거세게 기침하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있는 알베리크의 뺨 위에 축축한 것들을 문질러 닦았다.
“한 번 더?”
“컥, 흐윽, 안, 안 돼, 안…….”
“틀렸어.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해야지.”
이브는 그의 태도를 지적하며 타액을 문지르던 손을 거칠게 놀려 그의 뺨 위를 매섭게 내리쳤다. 삽시간에 알베리크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일어서. 벽에 손 짚고 서세요.”
화끈거리는 뺨의 통증과 아릿한 목구멍 안의 감각이 알베리크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목젖을 자극당해 자연스레 차오른 눈물 탓에 눈앞은 희뿌옇게 변해 잘 보이지 않았고, 뇌 곳곳을 물들인 두려움과 흥분 때문인지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그가 겪는 모든 고통들이 결국에는 쾌감이 되었다. 허리 줄기를 타고 꼬리뼈 아래까지 찌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이것은 그의 짧은 생에서 결코 겪어본 적 없던 쾌락이었다.
이브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알베리크의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에서 초조함과 공포 그리고 기대를 읽었다. 이브의 입매가 뒤틀려 위로 올라갔다.
남자의 감각이 그녀가 주는 고통과 치욕, 즐거움으로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이 선연히 보였다. 이브는 그가 제 모든 것을 이브의 발치에 내어놓고 그녀에게 스스로 종속되기를 바랄 날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매섭게 허공을 가르는 나무 회초리의 강렬한 파공음과 살갗을 내리치는 마찰음이 내실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매가 동그란 둔덕 위로 떨어질 때마다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신음 소리와 흐느낌, 헐떡이는 숨소리가 마치 노랫가락처럼 느껴졌다.
이브가 알베리크를 부축한 채 체벌실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최초의 매질과는 달리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놀이」였기에 이브가 그를 크게 무리시키지 않아 알베리크는 그럭저럭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밀실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에도 백 대를 채우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