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20세에 전직을 한 이브 (3/22)

02. 20세에 전직을 한 이브

이브는 어디선가 흘러온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몇 번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손에는 대거의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브는 손에 익은 무게감에 위화감을 느끼며 손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이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브의 꿈이 아니었다. 「주영」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에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의 얼굴 역시 무척 익숙했기에 위화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팀장님, A구역 변종 암컷 물호랑이 사살 완료되었습니다.”

“어어. 수고했다. 지원팀에 클리어 보고 보내. B구역 정찰 나간 애들은?”

“교신 중입니다. 아직까지는 별일 없는 것 같다는데요.”

“물호랑이가 혼자 다니는 개체이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해. 정신 빼놓고 얼타다가 잘못해서 보스라도 건들면 순식간에 장기 털리는 수가 있다.”

“예, 알겠습니다.”

주영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질근질근 씹었다. 기억 속의 던전은 여전히 황폐하고 우울해 보였다. 반파되어 흉하게 철골이 다 드러난 건물들 사이로 메마른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감고 그려보아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질리도록 본 광경이었다.

전 세계가 뒤집어지고 인간의 상식이 무너진 대격변의 날, 퍼스트 웨이브는 일상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버렸다. 무작위로 열리는 차원의 문과 던전 그리고 던전 안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의 등장에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날 주영 역시 단 한 사람뿐인 가족을 잃었다. 주영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지의 범위를 뛰어넘는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인간들은 비정상적인 진화를 겪게 되었다. 이능을 다룰 수 있게 된 각성자가 그것이었다. 초능력과 같은 기이한 능력을 가지게 된 인간들이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일반 시민들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대격변의 날 이후로 생겨난, 각성자들 위주로 이루어진 헌터라는 직업은 소위 말해 고수익 직종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적대적인 흉악한 몬스터들이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것이 주 업무이기에 일을 하다 말고 황천길로 갈 확률이 매우 높은 위험한 직업이기도 했다.

돈만 아니었으면 주영 역시 아무리 각성을 했다 한들 이런 기분 나쁜 공간으로 발을 디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에스퍼 계열도 아닌, 무투 계열의 각성자는 결국 최후의 순간 고기 방패가 되기에 딱 좋았으니까. 그녀는 그저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튼튼하고, 조금 더 빠르며, 조금 더 예민해졌을 뿐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C급 각성자. 그것이 자신이었다.

죽음의 위기가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직업이니만큼 헌터의 수명은 아주 짧은 편이었다. 서른까지 일을 하는 헌터들은 많지 않았고, 마흔을 넘긴 헌터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서른 살 생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주영이 팀장 직급을 달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입사 동기들의 수를 헤아려보던 주영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어 흙먼지들을 털어냈다. 사내처럼 짧게 다듬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B구역 푸른 슬라임 개체 두 마리 확인되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슬라임? 일단 거리 유지하고 대기하라고 해. 정찰조에 화염 능력자 없지?”

“예, 없습니다.”

“강준우 헌터, 이선아 헌터 투입한다. 두 사람 지금 어디 있어?”

“두 사람 다 A구역 진압 마무리하고 복귀 중입니다.”

“음……. 강준우 헌터는 조루라서 두 탕은 무리일 텐데…….”

남자의 보고를 받은 주영이 고민하는 얼굴을 한 채 옆구리에 찬 대검의 검집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주영이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그러면 이선아 헌터는 바로 B구역으로 가라고 메시지 보내고. 김민지 헌터는 지금 베이스캠프에 있지? 민지 헌터한테도 메시지 보내.”

“김민지 헌터는 아직 병아리 아닙니까? 괜찮을까요?”

“선아 헌터가 베테랑이니까 괜찮을 거야. 슬라임 정도면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니까 이참에 현장실습 시킨다고 생각하지 뭐.”

“예, 알겠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명령을 받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영이 입을 열었다.

“선호야. 조심해라.”

“예? 방금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아냐, 인마. 일 봐.”

“예에…….”

남자는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놓고 말을 바꿔 나중에 트집 잡아 갈구기라도 할까 신경이 쓰이는지 힐끔힐끔 주영의 눈치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서른 전에 빡세게 모아 안전구역에 집 하나 사놓고 은퇴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유선호 헌터는 결국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B랭크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복부를 꿰뚫려 죽는다.

유난히 자신을 잘 따르던 팀원이자 직속 후배였던 유선호 헌터가 죽은 날은 하필 주영이 높으신 분들의 사정 탓에 팔자에도 없는 고위직 공무원의 경호를 맡은 날이었다. 그의 마지막을 함께해주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아 그를 꿈에 등장시키는 걸까. 주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에 물고만 있던 담배를 다시 가슴 포켓 안에 집어넣었다.

그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아니었다. 주영은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꾹 감았고,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7년간 익히 봐온 천장이 보였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숨을 깊이 내쉰 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실질적인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과거의 삶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었다. 꿈속에서 본 투박하고 거친 상처투성이의 손과는 달리 부드러운 손을 내려다보던 이브는 주먹을 한번 꾹 쥐었다가 편 후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침대맡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하늘은 검푸른빛으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지 않아 아직 어둡기는 했으나, 기억 속의 잿빛 하늘에 비하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게 게임 속 세상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브는 한참 동안 창가에 서서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점차 파랗게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사위가 식별될 정도로 하늘이 밝아진 후에야 몸을 돌렸다. 아침 운동 시간이었다.

이브는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을 마치고 땀을 씻어낸 후 바스 가운을 걸친 채 아침 식사를 했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가운 하나 달랑 걸치고 식사를 하는 레이디를 보며 틸다는 결국 참지 못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처음 맨몸에 바스 가운만 걸친 채 커트러리를 쥐는 이브를 보고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내던 모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체념 역시 발전으로 쳐준다면 말이지만.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간단하게 양치를 한 후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했다. 흰색의 얇고 가벼운 모닝 드레스를 입고 허리에는 손끝에 닿아오는 감촉이 부드러운 연두색 리본을 맸다. 아주 간단한 화장을 얼굴 위에 얹고, 목 뒤로 길게 늘어지는 머리카락이 아직 어색했기 때문에 머리는 평소처럼 위로 틀어 올려 묶었다.

틸다는 이 드레스에는 보닛이 세트인데…… 하며 같은 천을 사용한 흰색의 레이스 보닛을 들고 왔으나 이브는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냐, 그건 아니야. 진짜 아니야.”

실내에서 입는 드레스에 무슨 보닛이야, 이 동네 디자이너들은 다 미쳤나 봐……! 하고 경악하는 이브의 거부에 결국 아가씨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더 장식하겠다는 틸다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다른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들을 모두 물리고 겨우 알이 작은 페리도트 목걸이 하나만을 허용한 이브는 틸다가 걸쳐주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레이스 숄을 어색한 듯 만지작거리다가 틸다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저 씻고 밥 먹고 옷을 입고 치장을 좀 했을 뿐인데 알베리크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갔다. 이브는 자기도 모르게 성큼성큼 군인처럼 걷다가 틸다에게 주의를 받았다. 예절 교육 선생님이 없어도 틸다만 곁에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다시 보폭을 좁히고 우아한 척 걸음을 옮기며 이브가 내심 툴툴거렸다.

선룸 안으로 들어선 이브는 이미 먼저 도착해 티테이블에 앉아 차 시중을 받고 있는 알베리크를 보았다. 늦었다고 지랄하면 어쩌지 싶은 마음에 슬쩍 눈치를 보았으나 그는 이브가 가까이 오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손에 들린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간 간간히 그에게 매너 교육을 받느라 주에 두세 번씩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는 다소 서먹한 데가 있었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알베리크의 태도에 하여튼 재수 없는 새끼라며 속으로 구시렁거린 이브가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니 곧 메이드가 찻잔을 채워주었다.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홍찻물을 내려다보며 잔을 쥐던 찰나, 알베리크는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틸다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곧 선룸 밖으로 나갔다. 선룸 출입구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알베리크가 종이에서 눈을 떼고 이브를 마주 보았다.

“그동안 잘 생각해봤습니까?”

“인사도 없으시네요.”

“내가 당신에게 예를 차릴 필요가 있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이브는 할 말이 없어 냉랭한 찬기가 흐르는 알베리크의 시선을 피하며 말없이 호로록 차를 들이켰다. 알베리크 역시 대답을 듣고자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곁에 엎어두었던 서류 뭉치를 건네었다.

“굳이 거절하기 위해 이른 시간에 만남을 청한 건 아닐 테니 읽어보고 수정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십시오.”

“오……. 철저하셔라.”

이브는 종이 묶음을 건네받고 찬찬히 글자들을 훑어나갔다. 이브가 받은 종이는 두 사람 간의 계약조건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알베리크는 이브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에 따라 이브는 성실한 태도로 경호에 임하며 알베리크의 백작위 승계 전까지 그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브의 실력이 요구되는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자연히 이 계약은 폐지된다는 사항이 아래에 딸려 있었다. 이브는 참지 않고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외부의 위협에 대한 범위는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죠? 납치, 살인, 폭행은 막아주겠지만 음독 같은 건 저도 힘들어요.”

“그 문제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을 겁니다. 따로 알아본 바가 있으니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해당 부분은 계약서에 제대로 명시해주시길 바랄게요. 아, 그리고 이 「일정 수준」이라는 건 뭐죠? 테스트라도 받아야 하나요?”

“……당신의 실력을 봐주실 분이 계십니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자신했던 것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당연히 계약은 무효가 되고, 당신은 이 저택에서 죽어서 나가게 될 겁니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잘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마침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을 받은 참입니다. 나 역시 스스로의 안목을 시험받는 기분이 드는군요.”

그러고는 그는 예법서에 나올 만큼 우아한 태도로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뭐라 답할 말이 없어 이브는 슬쩍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려 괜히 선룸을 한번 둘러보았다. 작은 온실처럼 꾸며진 선룸 안은 온통 푸릇푸릇했다.

“이벨린.”

“아, 네.”

“뒤에 계약서가 더 있습니다.”

알베리크의 지적에 이브는 서둘러 종이를 넘겼다. 전부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뒤에 얇은 종이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이브는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알베리크의 뺨이 기대에 차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표정은 무척이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주제에 눈만은 기이한 열기를 품고 빛을 내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먼저 이렇게 문서의 형식으로 정리해서까지 열정적으로 요구를 해오실 줄은 몰랐네요.”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혹시 또 메이드들에게 손댔어요?”

“……맞습니다.”

“하지만 평소처럼 매질해도 원하던 자극은 얻을 수 없었을 테고.”

“그것도, 맞습니다.”

“이 계약은 앞선 계약과는 별개의 것으로 자격을 인정받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행된다, 고요. 그러니 날 죽여서 내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은 거네.”

아하하, 하고 레이디의 웃음이라기에는 다소 경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베리크는 얌전히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브는 얇은 종잇장을 들어 보란 듯이 세로로 길게 주욱 찢어버린 후 의자 등받이 깊숙이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라버니가 원할 때 불려가 매질을 해줘야 한다니, 이래서야 성욕 처리 도구와 별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말이 통해 다행이네요. 다시 쓰죠, 계약서. 이딴 거지 같은 내용 말고.”

서로가 진짜 원하는 방향으로요. 이브가 느긋하게 덧붙인 말을 들은 알베리크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이브는 그의 긴장으로 뻣뻣해진 낯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욕망을 보았다.

“서로가 진짜 원하는 방향……입니까.”

“적어도 누구 한 사람이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내용은 아니죠.”

“……일단은 들어보지요.”

이런 협의야 골백번은 더 해본 일이었다. 이브는 과거라고 말하기엔 다소 모호한, 이전 삶의 경험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계약 이후 이벨린 베르묄은 마스터, 알베리크 베르묄은 슬레이브가 되어 각자의 롤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 모든 플레이는 서로의 협의하에 두 사람 모두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 한해 진행된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요구에 거부할 권리가 있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시나요?”

“그 호칭은……. 아니,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플레이가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원하는 행위와 그 강도를 밝히고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또한, 플레이 도중 생명의 위협이나 그에 준하는 사정으로 도저히 더는 플레이를 진행하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세이프 워드, 즉 안전어를 지정한다. 플레이가 시작되면 슬레이브는 전적으로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야 하지만 슬레이브가 안전어를 말하게 될 경우 거기서 플레이는 중단된다.”

“……신선하군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주어지는 「놀이」인 겁니까. 좋습니다.”

“이런 고삐가 없으면 진짜 오라버니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저도 젊은 나이에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

“아니,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하시는 거죠? 당연히 농담이죠.”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도저히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습니다. 자중하세요.”

알베리크는 주먹질 한 번으로 덩치 큰 사내 시종을 기절시킨 여자의 용맹한 모습을 떠올리며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브는 그런 그의 진지한 반응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플레이의 진행 권한은 마스터에게 있다. 슬레이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플레이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은 오롯이 마스터에게 복속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서로가 협의한 시간 동안만 유지되며, 놀이가 끝난 이후의 관계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생각보다…… 내게 유리한 조항들로 가득하군요.”

“이 정도로 슬레이브의 안전을 문서화하지 않으면 아무리 놀이라고는 해도 막상 닥쳤을 때 위험해지는 사람은 오라버니지, 제가 아니니까요.”

“과연……. 이해했습니다.”

“이게 기본이에요. 여기서 더 추가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추가하세요.”

“……어쩐지 이벨린 당신은 「이런 관계」에 익숙한 듯 보이는군요.”

너무 틈을 많이 보인 탓일까. 알베리크의 날카로운 추측이 쿡, 이브를 찔렀다. 이브는 찔끔한 속내를 숨기며, 애써 부정이나 긍정의 말을 주워섬기는 대신 빙긋 의뭉스럽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대충 넘어가도 그는 이브가 이런 저열한 놀이들을 알고 있는 이유를 그녀의 출신 탓으로 넘겨짚을 터였다.

‘그야, 거의 한 8년 가까이 SM판에서 주인님으로 신나게 날뛰어봤으니까 당연한 거지.’

던전에서 본능을 일깨우며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헌터들의 특성상, 대부분의 헌터들은 던전을 나오고 나서도 일정 기간 동안은 과하게 달궈진 감각 때문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성욕의 해소로 발산시키기 마련이었으나 몇몇 헌터들은 일반적인 관계보다도 조금 더 은밀한 행위를 추구하기도 했다.

그녀 역시 막 헌터가 되었을 무렵 동료의 소개를 받아 회원제 클럽에 발을 디디게 된 이후, 던전에 다녀온 후에는 언제나 가학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를 통해 날카롭게 벼려진 본능을 잠재우고는 했다.

이브는 한때 모 회원제 클럽에서 성별을 막론하고 서브미시브(피지배 성향자)들의 러브콜을 받던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성격이 고약한 탓에 과할 만큼 짓궂게 군다는 평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기본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자면 어쨌든 그녀는 꽤 괜찮은 도미넌트(지배 성향자)였다.

일일 플레이는 셀 수 없이 많이 해봤고, 간혹 느낌이 좋은 사람들과 디엣(DS,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 일대일 주종 계약 관계)을 맺어본 적도 왕왕 있었다. 플레이 전 서로 요구사항을 조율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문서화해서 브레이크를 걸어두어도 막상 플레이가 시작되면 서로 흥분이 지나쳐 폭주해버리는 일들도 종종 있었기에 사전 준비는 철저하게 할수록 좋았다.

피지배와 피학 성향을 가진 이들은 아무리 두 사람의 관계를 플레이 한정으로 못 박아둬도 결국 지배 성향을 가진 도미넌트에게 복종하고 자아를 의탁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처음에는 하룻밤의 일탈로 시작해, 양자의 합의하에 본격적으로 24시간 모든 일상을 지배당하고 또 컨트롤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조교거든.’

이브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단지 욕구를 채우기 위한, 브레이크가 존재하는 안전한 놀이 관계인 것처럼 알베리크를 구슬려 유혹한 뒤 결국엔 그가 스스로 제 목에 목줄을 채우고 기꺼이 복종하며 지배당하기를 원하게끔 만들 생각이었다.

원작에서 이브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며 그녀를 옭아매려고 했던 알베리크에게 어울리는 형벌은,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굴종시키는 것뿐이었다.

원래의 이브처럼 그의 상처를 보듬고 어쩌고 할 마음은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었다. 이브는 그가 자발적으로 노예를 자청하게끔 유도해 제 손으로 스스로를 무너트리게끔 하는 것으로 알베리크의 루트를 박살내기로 마음먹었다.

‘괴물 죽이는 도살자에서 사람 지키는 보디가드로 전직이라니, 사람 인생 참…… 모르는 거야.’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잡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이브는 은근슬쩍 대화의 방향을 비틀며 차분히 말했다.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누구랑은 달리 위압과 강압에 의한 강제적인 관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렇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아주 신난 것처럼 날뛰던데요.”

“그때의 그건 그냥 폭압에 대한 보복일 뿐이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난폭하게 굴어야만 해서 제 여린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하.”

가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던 알베리크는 더 이상 그날의 이야기를 입에 담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바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버렸다.

“당신이 말한 사항들에 비밀유지 조항을 추가해 문서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명은…… 다음 수업시간에 하는 것으로 하죠. 계약서는 제가 보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으실 대로요.”

빠르게 두 사람의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브는 그의 코앞에 다디단 덫을 놓았고, 알베리크는 자신에게 유리한 항목들을 곱씹어보고는 곧 제가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확신하며 덫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알베리크가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수록 더 좋았다. 그가 마음을 놓고 있을수록 파고들기는 더 쉬울 터였다. 처음부터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면 반발심만 생기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는 귀족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은 프라이드 높은 푸른 피의 일원이니까.

‘게임 스토리가 대수야,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계약이 성사되면 후에 엘베르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알베리크는 내 편이 되어줄 거야. 조교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간 들인 공이 있으니 아까워서라도 쫓아내지는 않겠지.’

“……그리고 다음 달에는 손님이 오실 겁니다. 귀한 분이니 당신은 손님이 머무는 동안에는 명령 없이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을 자제하세요.”

“손님이요?”

“저택에 마법을……. 아니, 당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보내 부르기 전에는 가능하면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예에, 뭐…….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알 수 없나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예고 없이 불쑥 등장하겠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 확실히 다음 달 안에는 오시겠지요. 손님이 오시면 따로 당신에게도 기별해두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브에게 통보한 알베리크는 이브에게 건넸던 계약서들과 찢어진 종이까지 도로 가지고 가 잘 갈무리한 후 다른 서류들을 챙겨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에도 이브는 자리에 뭉개고 앉은 채 선룸에 남아 차를 더 마시다 가겠다고 했더니 그는 잠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별말 없이 선룸을 떠났다.

알베리크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선룸 출입구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알베리크의 축객령으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워야 했던 틸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안 올라가셔요?”

“응. 모처럼 나왔는데 볕도 좋고 꽃도 예뻐서 차나 좀 더 마시다가 올라가게.”

“그러면 시중은 제가 들까요?”

“그래.”

이브는 짧게 대답하고 찻잔에 남은 식어버린 홍차를 단숨에 비웠다. 레이디보다는 차라리 해적에 더 가까운 호탕한 자세에 결국 아가씨이…… 하고 울상이 된 틸다가 주의를 주었으나 이브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녀의 반응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원래 이 시기에 칼리스토가 방문하던가……? 게임이 대충 이브가 스물둘 무렵부터 시작하니까, 그 이전 시간대에 대해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답답하네.’

과거의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스토리상에서 캐릭터들의 대사나 스크립트로 지나가는 말들로 설명되고는 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게임 초반에 칼리스토가 백작저를 제집처럼 익숙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에도 몇 번 저택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택에 마법을 건다고? 안전에 엄청 신경 쓰네. 아무튼, 다음 달이라 이거지……. 칼리스토, 그 싸가지 없는 마법사 놈은 또 어떻게 처리한담.’

이브는 멍하니 찻잔을 만지작대면서 생각에 빠졌다.

칼리스토 랑그라다의 이름 뒤에 오는 꼬리표들은 무수히 많았다. 국립 헤스티아 아카데미 최고의 아웃풋, 열세 살에 서클을 연 천재 마법사, 전무후무한 전 속성 마스터, 어쩌고저쩌고. 그 대부분은 칼리스토의 마법적 성취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뭐…… 그 미친놈한테 광천사라는 말을 면전에다 대고 할 수는 없으니 다들 나쁜 별명은 쉬쉬했겠지만. 아무튼, 개싸가지인 데다가 또라이인 주제에 남주 캐릭터들 중 스탯으로만 치면 제일 강해서 한번 집착하기 시작하면 여간 번거롭고 귀찮은 게 아니었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계파 하나를 이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인 그는 이브에게 흥미를 느끼면서 본인이 가진 능력들을 거리낌 없이 이용해 그녀를 스토킹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냥 게임 스토리 진행상 강제적으로 발생하는 이벤트 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나 후에 그는 제 입으로 이브에게 갖가지 추적 및 탐지, 도청 마법 등을 걸어두었다는 것을 밝히게 된다.

칼리스토 루트로 들어가게 되면 프라이버시라는 것은 사라지게 될뿐더러, 도주는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그가 추적 마법을 걸어 시시때때로 뿅 하고 등장해 이브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들과 무슨 말이라도 섞을라치면 어디선가 바람처럼 달려와 패악을 부리는 통에 게임을 진행할 당시에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이브는 칼리스토 루트의 시작점과 그와 관련된 세부 설정들을 떠올려보았다. 아주 초반부에 공략했던 루트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제법 오랫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려야 했다.

칼리스토는 현 트레베 공작의 조카이기는 했지만, 공작보다도 세 살이 많았다. 트레베 공작이 누이와 스무 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늦둥이이기도 했으나 칼리스토의 어머니가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남편이나 피앙세도 없이 홀로 그를 낳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랑그라다라는 성은 그저 황실에서 위대한 마법사에게 내리는 호칭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칼리스토의 이름은 칼리스토 랑그라다 트레베였다.

칼리스토의 나이에 대해 정확히 언급이 된 적은 없었으나 게임 진행 당시 바스티안 트레베 공작의 나이가 대략 40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으니 칼리스토 역시 40 중반 정도로 보아야 했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 묘사된 칼리스토의 얼굴은 40대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라를 다루는 소드 마스터나 마나를 다스리는 마법사들은 육체의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는 설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쳐도 칼리스토는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 외향을 하고 있었다.

160센티미터를 조금 넘을까 싶은 작은 키에 솜사탕처럼 포근해 보이는 연한 분홍빛의 굽이치는 곱슬머리, 자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보랏빛의 눈동자는 앳된 그의 얼굴을 더욱 사랑스럽고 신비로워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의 어린 소년 같은 외모는 사실 스스로 건 신체변형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앳되어 보이는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무시하게끔 유도한 후 트집을 잡아 상대를 괴롭히는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탓에 언제나 외모를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게끔 마법을 걸어 소년 행세를 하고는 했다.

마법의 효과를 제거해도 노화가 더디게 진행되는 마법사의 특성 덕분에 고작해야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보였으나 칼리스토는 아주 어린 소년의 모습이어야 사람들이 자길 무시할 거라며 킬킬 웃고는 했다. 정말 성질머리가 고약한 남자였다.

그가 이브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는 계기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브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칼리스토를 보고 그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정중하게, 하지만 퍽 친근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고아원에서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자란 이브는 칼리스토 또래의, 물론 가짜였지만, 소년들이 얼마나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았다. 게다가 저택 내에서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에 그녀는 칼리스토를 그저 저택에 새로 들어온 어린 사용인 정도로 생각하고 이리저리 챙겨주면서도 그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결국 살갑게 아는 척을 해오는 이브에게 점차 호감을 느낀 칼리스토가 그녀에게 뒤틀린 집착의 감정을 가지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칼리스토는 평생 누군가를 소중히 여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공작가의 영애를 어머니로 두었으나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였고, 그것은 귀족사회에서는 꽤 치명적 결함으로 여겨졌다.

그가 일찌감치 사교계를 떠나 국립 아카데미에 진학하면서 마법에 뜻을 둔 것 역시 자신과 어머니를 헐뜯는 자들과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존중하는 척 껍데기를 두른 채 은근한 멸시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보아왔으니 그의 성격이 멀쩡할 리 없었다.

공격적일 정도로 예민하고 난폭한 성격은 8할이 그가 손가락질을 받던 유년기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다.

마음의 크기가 10대 시절에서 멈춘 채 자라지 못한 남자의 사랑이란 지독한 방향으로 곪아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이브에게 참견하고, 제 마음에 차게 행동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이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수록 괜히 더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그러다가 이브가 칼리스토의 패악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눈물을 보이면 되레 자신이 상처 받은 얼굴을 한 채로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굴었다. 그러면서도 이브의 눈치를 보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게 대환장 포인트였다.

칼리스토 루트에서 게임 속의 이브는 그의 곁에서 자신의 자아를 꾹꾹 누르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의 변덕을 모두 받아주다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위병을 앓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브는 게임 속 이브처럼 병에 걸릴 정도로 제 멘탈을 갈아가며 그 남자를 보듬어줄 생각 따위는 개미 오줌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어려 보인다고는 해도 「이브」의 두 배도 더 넘게 나이 먹은 남자였다.

나이 많은 남자가 딸뻘인 어린 여자에게 껄떡거린다니, 어딘가 대단히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10대 소년 꼴을 하고 이브의 약한 마음을 마구 찌르다가 이브를 힘으로 제압해야 할 때만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다 자란 사내처럼 굴던 것이 떠올라 몹시 가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여튼 이놈의 게임엔 정상적인 남자가 없지.”

“예?”

“으응. 아냐, 신경 쓰지 마. 혼잣말이야.”

하지만 알맹이가 늙었다는 건 이브 자신 역시 마찬가지인 일이라, 그녀는 나이에 대한 힐난은 접어두기로 했다. 굳이 나이를 따지지 않더라도 칼리스토는 흠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그 겉보기엔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남자의 까다롭고 더러운 성질머리를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될 정도였다.

‘무릇 남자라면 얌전하고 조신하며 고분고분하고 상냥해야 하는 법이지. 칼리스토는 진짜 아니야. 조신남이 대세인 시대에 츤데레가 웬 말이람. 패스, 패스.’

호로록호로록 채신머리없이 소리 내 차를 마시던 이브는 어차피 원래의 스토리를 부수게 된 것, 아주 착실히 어긋나버리자고 마음먹었다. 마구 어린애 취급을 하면서 괴롭히고 놀려먹는다면 금방 정체를 드러내고 개지랄을 떤 후에 자신을 막돼먹은 여자라고 치부하고 무시하겠지. 얼추 가닥이 잡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브는 이전 생에서도 언제나 덫을 여러 개 놓던 사냥꾼이었다.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고, 대비책은 많을수록 좋았다.

“수도에 다녀오려면 누구에게 이야기하면 될까?”

“예? 수도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신데요?”

“그냥 뭐, 너무 오래 영지에 박혀 있었더니 심심하기도 하고.”

“수도까지 가시려거든 일단 마님께 허락을 구하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허락해주실지는 모르겠네요…….”

“아니, 길 잘 닦여 있고 기차도 다니는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도시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잖아요.”

“강 서쪽으로만 다닐 테니 괜찮아. 교양 있는 귀족들이나 젠트리 계급만 거주하는 지역인데 설마 무슨 문제라도 있으려고.”

“하지만…… 젠트리 계급 사람들 중에도 출신 성분이 분명치 않은 사람들이 있는걸요. 정말 꼭 가셔야겠어요?”

“틸다. 그게 네 의견이야, 숙모님의 의견이야?”

계속되는 만류에 슬쩍 짜증이 솟구친 이브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저택에서 오래 일한 노련한 메이드답게 틸다는 아가씨의 심사가 꽤나 뒤틀려 있음을 빠르게 눈치채고 깊이 허리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됐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

“네에…….”

“좋아. 그러면 우선 숙모님께 말씀드려봐야겠다. 틸다, 숙모님께 식후에 오후 차 한잔 어떠시냐고 여쭤보고 와줘.”

이브의 명령에 틸다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곧 네, 하고 대답하고는 선룸을 나섰다. 이브는 틸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의 모습이 문 바깥으로 사라진 후에야 시선을 돌려 다홍빛 홍차를 내려다보았다.

‘그전에야 굳이 말리는데도 부득불 나갈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긴 했지만, 부인이 자꾸 외출을 막는 건 좀 이상하긴 하단 말이야. 공부하는 것도 싫어해, 외출하는 것도 싫어해. 날 여기다 가둬놓고 사육이라도 할 셈인지, 원.’

마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는 임무라도 받은 것처럼 틸다는 대부분 시간을 이브의 곁을 지키는 데에 쓰는 데다가, 제자리를 비우는 것을 아주 꺼리는 듯 보였다. 차라리 방 한구석에 박아놓고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서로 편할 텐데도 이상하게 백작부인은 자신의 동태를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유산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런다고 하기에는 당위성이 부족했다. 부인과 틸다는 마치 이브가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브에게 유산에 대해 귀띔해줄 만한 사람이 있던가? 사람과 정보를 차단하려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아무튼 준비를 좀 해둬야 하는데. 슬슬 틸다를 따돌릴 방법 좀 생각해둬야겠는걸.’

그건 뭐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하며 입 안으로 중얼거린 이브는 틸다와 아델라이드 부인의 감시를 머리에서 지워낸 후 이내 다른 생각을 꺼내보았다.

‘다행히 잊힌 신에 관한 책은 찾았지. 그날 의심받지 않으려고 마구잡이로 꺼내온 책 중에 월척이 있었을 줄이야.’

왠지 눈에 밟혔던 『압생트를 요리하는 서른 가지 방법』은 이브가 찾던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작위로 꺼내 온 책들 사이에 잊힌 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었으니 더는 서재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이…… 뭔가의 떡밥 같단 말이야……. 트루엔딩이나 히든엔딩에서도 이런 내용의 책은 없었는데.’

『압생트를 요리하는 서른 가지 방법』은 요리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그리 두껍지 않은 책 안의 모든 페이지가 여섯 자리의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520413, 091309, 470716, 622001…….

일견 아무런 정보값도 없어 보이는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처럼 보였지만 이브는 빠르게 이 책이 암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숫자를 훑어나가던 이브는 곧 여섯 자리 수들이 특정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 책 한 권만으로는 암호를 풀 수 없어. 아마 페어를 이루는 책이 한 권 더 있을 거야. 총 80장에서 90장 분량 정도의, 한 바닥은 30줄이고 한 줄은 20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 책. 이거 완전 스파이용 암호 책이잖아. 갑자기 분위기 에스피오나지 장르?’

혹시나 싶어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책인 성경과 비교 대조를 해보았으나 아쉽게도 성경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경은 400에서 500장에 달하는 분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건에 맞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날 본 스파이가 이 책을 찾기 위해 서재에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네. 스파이와 지령을 내리는 암호 책이라니, 꽤 그럴싸한 조합인걸.’

알베리크의 말을 들어보면 적이 많을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저택 안에 사람이 심어져 있다는 증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암호 책의 존재는 게임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아이템으로도, 하다못해 스크립트 한 줄로도 묘사된 적이 없었던 정체 모를 책이라니. 이브는 책의 처리 방법을 고심해야만 했다.

‘그냥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기에는 어쩐지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보관하고 있자니 괜한 일에 얽힐까 봐 불안하고. 그냥 알베리크한테 말해볼까……? 아냐. 그 변태 새끼를 믿을 바엔 차라리 책을 불태우고 말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움직임을 멈춘 이브가 곧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오, 불이라……. 괜찮은데. 쓸데없이 미스터리어스한 떡밥 같은 건 게임에서나 쓸모 있는 아이템이지, 현실에서는 그저 화근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역시 그런 건 재빨리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게 최고지.’

그녀가 책을 어떻게 처리할지 마음을 굳힌 순간 선룸의 문이 열렸다. 이브의 심부름을 하러 다녀온 틸다였다.

“마님께서 아가씨의 청을 받아들여 오늘 애프터눈티는 함께하자고 하셔요.”

“으흠……. 좋아, 좋아. 그럼 슬슬 올라갈까.”

“네, 아가씨.”

이브가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민이 해결되어 홀가분해진 그녀가 느긋하게 웃음 짓자 틸다는 아가씨의 기분이 다시 좋아진 것 같아 보인다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곧바로 이브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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