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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매 맞는 남자 (2/22)

01. 매 맞는 남자

신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브의 소원을 들어줄 신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원작의 강제력인가……. 이브는 자신을 입양하겠다고 찾아온 귀족 부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 정말 로지를 쏙 빼닮았어요.”

“이벨린, 내 조카. 이제라도 내 조카딸을 찾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구나.”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눈시울을 붉히며 이브의 손을 꼭 쥐었다. 이브는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 이브는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뒤집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

게임상에서 베르묄 부부는 고인이 된 전대 백작이 평민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 귀천상혼을 한 막내딸 로잘린을 위해 마련해둔 유산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즉시 로잘린 베르묄의 행적을 추적한다.

그러나 이미 로잘린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그들은 사망한 로잘린을 대신하여 유산을 상속받으려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뒤늦게 밝혀진 전대 백작의 숨겨진 유서에 로잘린이 세상에 없다면 「그녀의 딸, 이벨린에게 재산을 상속한다.」라고 그녀에게 딸이 있음이 명시되어 있었다.

베르묄 부부는 타계한 백작이 남긴 유서에 적혀 있는 단서들과 죽은 로잘린의 발자취를 따라 로잘린의 딸 이벨린을 찾기 시작했다. 정황상 그녀는 13년 전쯤 숨이 끊어지기 이전에 고아원에 아이를 맡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 고아원 후보지는 강 동쪽 인근 지역에 가장 밀접한 세인트 에오실 고아원, 마비스 고아원, 펠버스 고아원 세 곳으로 좁혀졌다.

그들이 이브를 로잘린의 딸 이벨린이라고 믿은 이유는 세 고아원을 통틀어 유일하게 13년 전 위탁된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고아원에 맡겨진 열세 살짜리 아이는 많았지만, 열세 살 소녀는 이브뿐이었다. 그렇게 이브는 베르묄 부부의 손에 이끌려 이벨린 베르묄로 살아가게 된다.

훗날 밝혀지게 되지만 전 백작이 로잘린의 딸이라고 착각한 아이는 그녀가 돈을 받고 돌봐주고 있던 이웃집 아이였다. 태어난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다는 추측 역시 아이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돈을 받지 못할까 염려된 심부름꾼들이 정황을 꾸며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몰랐던 이브는 그저 갑작스러운 신분상승에 기뻐했을 뿐이다.

비록 그녀를 찾은 이유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였다지만 베르묄 부부의 인품이 아주 망가진 것은 아니었던지라, 그들은 그럭저럭 이브를 가문의 아가씨로 대접해주었다. 자신이 로잘린의 친자라고 주장하는 엘베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자랐으며 「이벨린」이라고 불렸다고 주장했다. 고아원에 맡겨질 뻔했으나 중간에 로잘린과 알고 지내던 인심 좋은 부부가 거둬주었다며 그들이 그를 고아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심지어 엘베르는 로잘린의 유품이라며, 그녀의 어린 시절 그림이 담긴 로켓 목걸이를 증거로 내밀기까지 했다.

목걸이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유품이 아니더라도 그는 로잘린을 꼭 빼닮은 밝은 금발과 짙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베르묄 부부는 그야말로 진짜 로잘린의 아이임을 확신했다. 이브를 대하는 부부의 태도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들은 저들이 멋대로 오해했으면서 마치 사기꾼에게 속았다는 듯이 이브를 염치도 모르는 뻐꾸기 새끼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렇게 이브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모욕과 멸시를 당하며 베르묄 가문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쫓겨나게 된다.

베르묄 가문의 비호가 사라진 이브가 남자주인공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떤 남자와 플래그를 세우더라도 이브가 백작저에서 내쫓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저에서 쫓겨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시기에 가장 호감도가 높은 남자가 이브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데려간다. 아마도 주인공이 손쉽게 감금당하게 하기 위한 스토리일 터였다.

‘뭐, 아무튼 갑자기 뜬금없이 엘베르가 튀어나온 것도 트루엔딩에서 다 남주 놈들의 수작질이었다는 전말이 드러나지만 말이야. 물론 아예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엘베르 놈도 가짜였으니까 어쨌든 진짜 이브로서는 좀 억울할 만도 하지.’

엘베르는 이브가 스물두 살이 되는 해, 늦은 겨울쯤 등장한다. 이브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보았다. 역시 가장 손쉽게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베르묄 백작가의 이벨린 영애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브 본인이 거절한다 해도 그들은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백작가의 귀족 아가씨가 되어 빡세게 돈을 모아 엘베르가 등장하기 전, 스물두 번째 생일 전에 국경을 넘기로 마음먹었다.

이웃 나라 부르군트로 도망쳐 빌어먹으며 살다가 병사를 했던 엔딩이 잠시 떠올랐으나 그때는 남자 주조연들에게 잔뜩 시달려 건강하지도 않았던 데다 돈 한 푼 없이 쫓겨나 그랬을 뿐이다. 이브는 가진 재산만 있다면 불지옥에 떨어져도 잘 먹고 잘 산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 자리는 이브의 자리가 아니었다. 「베르묄 백작가의 잃어버린 영애」 란 그저 스스로 레이디라고 생각했던 이벨린을 평민의 위치로 몰락시켜 더 극적인 고통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이브는, 신주영의 삶을 살았던 이브는 가진 것 이상의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는 빠르게 손을 놓는 편이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엘베르가 저택에 찾아오는 것부터가 신분이 몰락한 이브를 손에 넣기 위해 남자캐릭터들이 꾸민 음모였다. 그전에 이브가 사라진다면 백작 부부가 사기꾼에게 걸릴 일도 없을 터였다.

물론 번거로운 일을 딱 싫어하는 성격 탓에 이브가 이벨린임을, 엘베르가 사기꾼임을 증명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어차피 증거를 잡으려 해도 철두철미한 남자 주조연 캐릭터들이 세심하게 증거를 조작해 준비해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브는 철저히 준비된 덫에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편이 모두에게 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백작가에 빨대 꽂아 한밑천 잡아 뜬다……!’

마음속으로 계산을 끝낸 이브는 제 손을 잡은 부부에게 찬찬히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빠르게 서류 몇 장이 오고 갔고, 그렇게 이브는 법적으로 「이벨린 베르묄」이 되었다.

이전 생의 이브, 그러니까 서른 살에 요절한 신주영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속없이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굳이 선빵을 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뺨을 한 대 맞으면 반드시 두 대로 돌려주는 성격이었다는 뜻이다. 타인의 감정에는 무관심하지만 일단 한번 악의를 맞닥뜨려 눈이 돌아가면 사정 봐주지 않고 악착같이 물어뜯는 그녀를 보며 동료는 미친개라고 부르곤 했다.

주영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단둘이서 사는 어린 여자애가 남들에게 얕잡히지 않고 살아가려면 더러운 성격은 필수였으니까. 그녀는 미친개라는 별명을 험난한 과거를 무사히 헤쳐 나온 훈장처럼 여겼다.

게임 속의 이브 역시 마냥 순하고 착하기만 한 여자는 아니었다. 은근히 속정이 깊고 동정심은 많았지만 제 할 말은 다 하고야 마는 야무지고 매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브에게는 가진 것이 없었다. 권력도, 재물도, 하다못해 쓸 만한 재주도 없이 성격만 드센 적당히 예쁜 여자의 팔자가 얼마나 더럽게 꼬일지 이브는 꼭 전생의 기억이 없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브는 다시 미친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최대한 플래그를 피해보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예비 집착남 중 한 명이 이브의 사촌오빠인 알베리크 베르묄 소백작이니, 그와 엮이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의 마수에서 벗어날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브는 우선 스킬 상태부터 점검해보았다. 이전 생에서처럼 눈앞에 스킬창이 떠오른다든가 하는 식은 아니었으나 영혼이 기억하는 느낌을 떠올리며 포크를 쥐자 미약하기는 하지만 포크 표면에 희미한 빛이 일렁이며 맺히기 시작했다.

보통 각성자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었지만, 보통은 영혼이 가진 본연의 잠재력이 극한의 상황에서 폭발한 것이라는 가설이 정설처럼 알려져 있었다. 이브는 아마 모종의 이유로 게임 속 세계에 혼이 옮겨오면서 이전 생의 잠재력이 그대로 유지된 게 아닌가 하고 제 상태를 추측했다.

게다가 꼭 각성한 능력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체술만으로도 일반인 남성 정도는 우습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전생의 그녀는 실력 좋은 싸움꾼이었다.

이브는 과거의 능력 대부분을 이 생에서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라며 열심히 전투에 용이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킬이 받쳐준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근력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평생을 해온 운동이었고, 업으로 삼았다고 해도 좋을 몸 관리였다. 이브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매일 아침과 오후 일정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추가했다.

이 미쳐 돌아가는 각박한 게임 속 세상에서 이브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이브는 좋은 음식을 먹고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7년을 했다. 어지간히 허약한 사람도 근육이 붙을 만한 시간이었다.

물론 저택의 하녀들은 근육이 탄탄하게 붙은 이브의 복부를 볼 때마다 기함했지만 허리둘레가 19인치인,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아가씨로 살다가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남자들의 손아귀에 붙들려 발목이 분질러진 채 속수무책으로 노리개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인생은 자력구제야. 한 손을 바닥에서 떼어 등 뒤로 두른 채 푸시업을 하던 이브는 땀을 흘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상완을 자극하며 운동하던 이브가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이브의 기억 속 신주영은 키가 크고 뼈대가 제법 굵어 언제나 여자치고 덩치가 크다는 말을 곧잘 듣고는 했다. 「여자치고는 큰」 주영이 체육 선생님들의 눈에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창시절 기억은 언제나 갖가지 운동부에 들어가 짧게 친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연습했던 기억뿐이었다.

운동부의 고문 선생님들은 다들 주영을 선수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주영의 집안 형편상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정식으로 스포츠를 배운 것은 고등학생 때까지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즐거웠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것, 먹고 사는 것을 잊고 몸을 움직이던 시절이었으니까.

이브는 똑똑, 하는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운동을 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하녀들이 기겁하니 어쩔 수 없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가씨와 눈이 마주친 틸다가 황급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가와 손에 든 면포를 얼른 건넸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은 모시는 아가씨의 오랜 습관이었기에 틸다는 언제나 아가씨의 방에 들어오기 전 깨끗한 면포를 가장 먼저 챙겼다.

하지만 아가씨가 저택에 들어온 지 7년이 다 되었음에도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귀족 영애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세상 어떤 레이디가 기사님들처럼 몸을 움직여 땀을 내나요. 틸다는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할 타박을 그저 속으로만 삼켰다.

“고마워. 오늘도 식사는 전부 방으로 올려줘.”

“아가씨. 마님께서 오늘 점심은 정찬실에서 들자고 하세요.”

“정찬실?”

“소백작님이 방학을 맞아 돌아오신다고 하셔요.”

“알베리크 오라버니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알베리크 베르묄은 칼레스 영지의 소백작이자 베르묄 가문의 독자인, 게임 속 공략 캐릭터 중 한 사람이었다.

영민하고 계산이 빠르다는 설정에 맞게 남자는 가방끈이 길었다. 알베리크는 귀족 남성이라면 응당 가야 하는 기숙사제 퍼블릭 스쿨을 졸업한 후 브리타니아 남서부에 위치한 대학 도시에서도 가장 입학이 까다로운 세인트 그레고리엄 대학에 다니며 정치학을 전공했다. 부전공으로 여러 가지 학문들을 추가로 익혔다는 설명이 간략하게 나오기는 했으나 이브는 세세한 설정까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는 졸업장을 받은 후 학부의 교수에게 추천장을 받아 바다를 건너 펠랑시에 공국으로 유학을 갔다. 말하자면 대학을 조기졸업 한 후 외국 대학원으로 진학한 셈이었다.

이브는 남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알베리크의 서늘한 낯짝을 저택에서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그의 선택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런 그가 곧 졸업을 앞두고 방학을 맞아 저택으로 잠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겠구나 생각한 이브가 속내를 감춘 채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아무튼 알았어. 일단 목욕 준비부터 해줘.”

이브는 면포를 얼굴에 꾹꾹 눌러 땀을 닦아낸 후 목 뒤에 두르며 가볍게 지시했다. 2년 새 많이 탁해져 부드러운 밀크티 색이 된 머리카락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대충 틀어 올려 묶은 매듭 사이로 삐져나온 잔머리에 맺혀 있던 구슬땀이 똑 떨어지는 것을 본 이브가 목에 둘렀던 면포를 도로 풀어 땀방울이 떨어진 머리카락에 대고 문질거리며 땀을 닦았다. 그러자 물이 다 받아졌다며 틸다가 앞장섰고, 이브는 느긋한 얼굴로 그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이 게임이 상하수도도 설비되어 있고 물 틀면 뜨거운 물도 곧잘 나오는 근대 배경이라 다행이지. 중세시대 배경이었어 봐, 이미 옛날에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인생 3회 차 시작했다.’

게임의 배경은 약 19세기 초중반 무렵의 유럽풍 서양식 국가였다. 석탄 대신 마력으로 움직이는 기차가 다니고 마석으로 빛을 내는 전구가 개발되어 있으며 마법식이 새겨진 전화기와 수도시설까지 갖춰진, 중세보다는 현대에 가까운 게임 속의 환경은 21세기의 기억을 되찾은 이브에게는 조금 불편하지만 그럭저럭 적응할 만한 시대였다.

땀에 푹 젖은 긴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근 이브는 턱이 잠길 정도로 몸을 깊이 담그고는 물속에서 입으로 부글부글 거품을 불며 생각에 잠겼다. 알베리크 베르묄에 대한 생각이 주를 이뤘다.

‘알베리크는 솔직히 쉬운 편이지. 가냘프고 마른 책상물림이라 기습적으로 공격하면 제압하긴 쉬울 거야. 하지만 그냥 겁만 주고 넘어가기엔 좀 아쉽긴 한데…… 어디 잘 써먹을 데가 없을까……?’

이브는 게임의 정보들을 떠올려보았다. 알베리크 루트를 타면서 드러난 그의 비밀들이 어렵지 않게 기억났다. 알베리크는 전형적인 두뇌파 캐릭터로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머리는 좋지만, 모든 에너지를 머리 굴리는 데에 쓰느라 몸 단련에는 소홀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힘쓰는 일에는 완전히 젬병인 사내였으니 꾸준히 체력을 길러온 이브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엄격한 가풍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로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그 당시 가정교사의 도를 넘는 체벌 때문에 트라우마를 얻게 되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매질을 두려워하던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된 후 사용인들을 혹독하게 매질하는 주인이 되었다.

알베리크 루트를 파다 보면 그의 체벌에 대한 트라우마는 훗날 그의 성적 기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실 알베리크는 그저 평범하게 사용인에게 혹독하게 구는 주인이 아니었다.

‘강박적인 가학적 태도는 사실 피학 욕구에서 발현되기도 하는 법이지. 알베리크는 사실 매 맞는 메이드들이나 주인공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했어. 매를 치기는 했지만 알베리크는 엄밀히 따지자면 마조히스트야.’

게임 속 알베리크는 이브가 어릴 때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고부터 부쩍 그녀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평민이었던 이브가 귀족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본인이 이브의 교육을 담당하겠노라 나섰고, 일부러 깐깐하게 굴며 이브가 예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을 하면 무자비하고 엄격한 태도로 체벌을 가했다.

그는 주로 이브의 손바닥이나 발바닥, 종아리, 허벅지를 매질하고는 했지만, 간혹 흥분이 지나치면 그녀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즐겨 들었던 매는 나무 회초리였다. 치마 위로 친다고는 해도 탄탄하고 탄성이 좋은 라탄 케인(종려나무 소재의 얇은 막대 회초리)으로 허벅지나 종아리를 맞으면 금방 살에 붉은 줄이 죽죽 그어지기 마련이었다.

알베리크는 매를 맞으며 고통을 참는 이브의 일그러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남몰래 희열과 쾌감을 느끼고는 했다. 이브에게 매질하고 돌아간 알베리크가 방에서 홀로 몰래 수음하는 이벤트 페이지까지 있을 정도였다. 단언컨대 그는 예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얌전을 떠는 변태였다.

매를 맞고 싶어 하지만 사회적 체면 때문에 그럴 수 없어 대신 남을 때리고, 거기에 자신을 비추어 흥분을 얻는 비틀린 성욕을 가진 남자였다. 이브는 그런 사람을 휘두르고 복종시키는 데에 선수였다. 찬찬히 머리를 굴려 알베리크의 루트를 어떻게 차단할지를 결정했다.

‘그러고 보니 알베리크가 성질머리는 개파탄이 났어도 안경미남 존대캐라 수요가 꽤 있었지…….’

조곤조곤 존댓말로 사람을 후벼 파고 싸늘하고 냉랭한 태도로 벽을 치는 타입의 미인이라 메인남주는 아니었지만 꽤 팬층이 두터운 캐릭터였다. 이브는 게임 속에서 질릴 정도로 본 알베리크의 캐릭터 일러스트와, 백작저에 온 후로 몇 번 보지 못한 알베리크의 3차원 얼굴을 함께 떠올려보았다.

가늘고 섬세한 턱선과 은근하게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 인상을 더욱 이지적이고 냉랭하게 만드는 은테 안경, 어깨너머로 길게 기른 물빛 도는 은발에 가을 하늘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 왼쪽 눈꼬리 아래에 작게 찍힌 눈물점까지 얼굴의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예쁘기는 하지만 진짜 몹쓸 인간이지. 어떤 루트에서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가증 떨다가 이브가 귀족 생활에 적응할 때쯤에서야 진짜 이벨린이 아니라는 걸 폭로해서 이브 멘탈을 탈탈 털기도 했고. 아무튼 여러모로 꼬여 있는 작자라니까.’

이브는 욕조 속의 목욕물이 어느 정도 식은 것을 느끼고는 알베리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몸을 씻은 뒤 바스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틸다와 다른 메이드가 꺼내 온 실내복들 사이에서 한참 고민한 끝에 채도가 낮은 녹색의, 라인이 가볍게 떨어지는 드레스 하나를 고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몸을 치장하는 데에는 이전 생에서나 지금이나 영 재주가 없었다. 이브는 익숙지 않다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메이드들의 도움을 받아 환복을 마치고 화장대에 앉았다.

화장대 위에 화장품을 주르륵 늘어트려놓은 틸다의 손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이브는 눈을 감았다. 적당히 시키는 대로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위로 치켜떴다가 또 감고, 입술을 에 하고 벌렸다가 다시 앙다무니 어느새 얼굴이 전보다 화사해져 있었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땋을까요? 아니면 틀어 올리시겠어요?”

“녹색 리본 장식이 있던가?”

“지금 입고 있으신 원단과 같은 원단으로 만든 리본 장식이 있어요.”

“그럼 틀어 올리고 리본만 가볍게 얹자.”

고개를 끄덕인 틸다가 머리를 만지는 동안 곁에 서 있던, 더 어려 보이는 메이드가 머리 장식을 보관하는 함에서 리본 장식을 가져왔다. 우유를 탄 홍차처럼 부드러운 색감의 머리칼이 틸다가 만지는 대로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더니 금세 깔끔하게 위로 틀어 올려졌다.

머리의 모양을 잡은 틸다가 어린 메이드에게서 리본을 건네받아 솜씨 좋게 그것을 동그랗게 말린 머리 위에 장식했다. 운동하기 위해 제가 대충 끈으로 동여매었던 머리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해 보였다. 역시 프로의 손길은 남다르다며 감탄한 이브는 멍하니 거울을 통해 틸다의 신들린 손놀림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스물의 이브는 열셋의 이브가 예상한 미래의 어른이 된 자신과는 달리 그럭저럭 예뻤다. 잘 먹고 잘 자고 시시때때로 사용인들이 달라붙어 머리를 손질해주고 마사지를 해주는 데다 매일같이 몸을 움직여 운동하니 적당히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아졌으며 몸매가 탄탄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양이처럼 섬세하게 올라간 눈매, 맑게 빛나는 녹색 빛이 강한 헤이즐넛색의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 장밋빛으로 물든 뺨과 입술. 찬찬히 제 얼굴을 바라보던 이브가 저도 모르게 조금 민망해져 뺨을 실룩였다. 그러자 거울 속의 이브 역시 이상한 표정으로 뺨을 구겼다. 아가씨! 목걸이를 걸어주다 말고 거울을 보았는지 톡 터져 나온 틸다의 주의하는 목소리에 이브는 얼른 표정을 폈다. 하여튼 귀신이야.

“인상 쓰지 마시고요, 이상한 표정도 지으시면 안 돼요.”

“으으응.”

“예쁘게 단장하셨으니까 식사 전까지는 격하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나도 알아.”

“전에도 전적이 있으시니까 드리는 말씀이죠. 운동은 절대 금지예요……!”

“그래, 그래.”

이브는 틸다가 쏟아내는 잔소리에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섰다. 곧 틸다의 어디 가세요? 하는 날 선 물음이 튀어나왔다. 이브는 그녀의 물음에도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덤덤하게 서재에 간다고 대답해준 후 며칠 전 서재에서 꺼내 왔던 책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이 참, 그런 건 저나 다른 메이드들을 시키세요.”

“아냐. 책도 찾으러 갈 겸 겸사겸사 가져다 두면 돼.”

레이디답지 않게 굳이 직접 몸을 움직이는 이브를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틸다는 작게 한숨 쉰 후 앞장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이브는 열린 문틈으로 나가면서 부러 씨익 경쾌하게 웃어주었다.

이브를 전담하여 돌보는 메이드 틸다는 백작부인인 아델라이드 베르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에 알베리크에게 회유되어 이브의 행적 일거수일투족을 그에게 보고하게 된다. 알베리크가 이브를 훈육할 빌미를 만들도록 고자질하는 게 게임 속에서 틸다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이브를 위하여」는 남자주인공들의 인성이 저세상 레벨로 터져 있는지라 주인공 이브를 모함하고 함정에 빠트리고 손찌검을 하는 일반적인 악역 롤까지 모두 남자 주조연들이 담당하는 독특한 게임이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여성 캐릭터는 많지 않았는데 특히 틸다는 그중에서도 몇 안 되는, 그나마 악역이라고 부를 만한 여성 조연 캐릭터였다.

‘뭐, 쟤도 하고 싶어서 고자질을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곧 가주가 될 소백작님이 밥줄 가지고 협박하는데 어떤 사용인이 반항할 수 있겠어. 이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브는 마음속으로 틸다의 입장을 변호하며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을 좋아하는 가문 도련님 덕분에 백작가의 서책들은 특히나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종이 특유의 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히든엔딩 루트를 타기 위해서는 저택에 숨겨진 책을 찾아야 했었지……. 문제는 이 미친 게임이 매번 도전할 때마다 책 표지의 제목을 바꿔버려서 뭐가 진짜인지 확인하려면 일일이 뒤져봐야 한다는 건데…….’

이 수많은 장서 중 잊힌 신에 관해 저술한 책이 있을 터였다. 히든엔딩을 위해서는 그 책의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물론 이브는 게임 내에서 이미 책을 한번 읽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히든엔딩 루트의 기본 조건이었다.

수많은 엔딩 중 진실로 이브를 위한 엔딩은 「히든엔딩」 단 한 가지였다. 트루엔딩 역시도 모든 비밀과 사건의 전말, 흑막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특징이 있을 뿐 게임 속의 이브는 여전히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브는 스물둘 전에 가출해 국경을 넘기로 마음먹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성년이 가까워지니 어쩐지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이브는 혹시나 일이 틀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2년 전부터 가출에 실패하거나 그전에 큰돈을 모으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히든엔딩 루트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이 세계가 정말 게임을 기반으로 했다면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베르묄 부부에다 알베리크까지 등장했으니 「이브를 위하여」가 확실한 것 같긴 한데, 등장인물들이 같다고 해서 스토리 흐름까지 게임과 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일단 닥치는 대로 내 살길을 모색해야 해.’

이브는 가져온 책을 빈 곳에 다시 꽂아 넣고 그 근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히든엔딩을 보기 위해 수십 번을 도전했던지라 그때마다 바뀌고는 했던 책의 제목을 모두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브는 눈에 익는 제목이다 싶으면 일단 가지고 돌아가 밤새 책의 내용을 확인하는 행동을 2년간 반복했다. 서재에 자주 올 수도 없었고, 서재에 오래 체류해서도 안 되었기 때문에 한 번에 한두 권 정도를 가지고 돌아가 확인 작업을 거치다 보니 책을 찾는 속도는 아주 더딜 수밖에 없었다.

백작 부부는 이상하게 이브가 서재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서재에 너무 오래 붙어 있으면 틸다가 아델라이드에게 보고를 할 것이고, 그녀는 티타임을 핑계로 이브를 불러 은근히 눈치를 줄 것이었다. 재빠르게 책의 제목을 훑어나가던 이브가 눈에 걸리는 표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압생트를 요리하는 서른 가지 방법』 이거 분명 거의 마지막쯤 도전했을 때의 책 제목 같은데…….’

이브가 책을 뽑으려는 순간, 작게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이브가 저도 모르게 휙 뒤를 돌아보았다. 연청색으로 언뜻 빛나는 은발. 알베리크였다.

그 역시 안에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이브는 혹여 그가 무슨 꼬투리라도 잡을까 싶어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알베리크 오라버니.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펠랑시에로 떠나기 전에 한번 보고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오랜만이기는 했다. 그간 키가 훌쩍 자란 이브의 변한 모습이 낯설었던지 그는 평소 이브를 볼 때마다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몰골이 지저분한 짐승을 보는 듯한 경멸 섞인 시선이 아닌 어딘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말을 꺼내지 않으니 이브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가족이 나누는 인사치고는 짧은 인사말이 오간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참지 못한 것은 이브 쪽이었다.

“오라버니의 시간을 방해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오랜만에 식사를 함께한다고 들었는데, 그때 뵙지요.”

“…….”

이렇게 무시를 하는 건 또 신선한 반응인데. 이브는 쏟아내듯 다다다 말을 꺼낸 후 살짝 무릎 굽혀 인사하고 알베리크를 지나쳐 서재를 나와버렸다. 이미 성장이 끝난 완성형의 얼굴인지, 그는 한참 만에 보아도 여전히 달라진 부분 하나 없이 아름다웠다. 여전히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끝장나게 예쁜 미인이기는 했다.

서재의 문을 닫자마자 이브는 아차 싶었다. 알베리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책을 꺼내 오는 것을 잊었다.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이브는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래, 올해가 마지막이던가.”

“예. 가을에 있을 졸업시험이 끝나면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는 완전히 돌아올 겁니다.”

“그렇구나. 수고 많았다.”

“정말 고생했구나, 알렉.”

“아닙니다.”

이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하고 우아한 귀족적인 정찬 분위기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아 내심 혀를 내두르며 와인소스를 두른 송아지 스테이크를 슬슬 썰어 입 안으로 가져갔다.

알베리크의 나이가 벌써 스물셋이 되었던가. 석사 학위를 딴 후에는 더 진학하지 않고 영지로 돌아온다는 그의 이야기에 이브는 슬슬 그의 교육을 가장한 체벌에 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생각해둔 방법은 있었지만,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했다.

“내년에 있을 의회부터는 함께 가게 되겠구나. 많이 바빠질 게다.”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알렉. 그간 좋은 소식은 없었니?”

“좋은 소식이라 하시면…….”

“지금까지는 네 학구열도 그렇고, 원하지 않는 눈치라 강요하지 않았다마는…… 네 나이가 나이잖니.”

“부인. 알렉이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소.”

“어머나. 그런 말씀 마세요. 사내들이 혼사 문제에 게을러지면 얼마나 늘어질 수 있는지 잘 아시는 분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머니.”

“일전에 오르토가의 티파티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단다. 그 댁의 영애가 어찌나 영민하고 사려 깊던지. 올해로 열여덟이니 딱 좋은 나이이지 않니?”

백작부인은 그와 붙여놓기에 「딱 좋은 나이」인 베아트릭스 오르토의 이야기를 줄줄이 꺼내며 제 아들을 부드럽게 채근했다. 알베리크의 표정은 식사가 시작되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브는 그가 무척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챘다.

부인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갓 성년식을 마친 오르토의 영애 이야기를 꺼냈다. 이브는 가니시로 나온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씹으며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낯을 가려 식당에 잘 내려오지 않는, 오랜만에 함께 오찬을 들게 된 조카딸은 이미 그들에게 잊힌 지 오래인지라 이 자리에서 그녀의 태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마침 영애의 혼처를 찾고 있는 듯해서…….”

“어머니.”

알베리크가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차게 그녀를 불렀다. 어지간하면 부모의 말을 끊는 일이 없었던 알베리크의 호명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부인이 으응? 하며 굳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잔소리가 길었구나.”

그리고 한동안 이어지는 정적. 이브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분위기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포크로 으깬 감자를 떠먹었다.

이 집안은 어딘가 이상했다. 얼핏 보기에는 아들이 부모에게 깍듯하게 구는 듯 보였으나 사실 아들인 알베리크가 부부를 장악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브는 부부가 베르묄의 가산을 이리저리 낭비하고 다닌 것 역시 알베리크의 타지 생활이 길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그가 저택에 딱 붙어 있었다면 두 사람이 돈을 마구 써대다가 죽은 여동생에게 남겨진 유산을 탐내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입을 이상한 모양으로 우물대며 웃음을 참고 있던 이브는 순간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알베리크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이브의 표정에 스쳐간 흥미를 읽어낸 듯 그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도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벨린이 베르묄의 사람이 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응?”

“이벨린. 올해로 몇 살이지요?”

여태 단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을 퍽 친근한 척 입에 올린 알베리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브는 황당한 기색을 숨기고 스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브가 고아원을 떠나 백작저에 살게 된 이후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 없던 알베리크가 사촌 동생에게 관심을 드러내자 백작 부부 역시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벌써 성년이 지난 지가 한참이건만 아직 백작가에 걸맞은 품위와 기품이 느껴지지 않아 그렇습니다. 지금 이벨린을 담당하는 가정교사는 누굽니까?”

그간 대체 뭘 한 거냐는 질책 섞인 목소리에 이브는 입을 다물었고, 아델라이드 부인이 대신 대답했다.

“마담 아르투아가 매주 한 번씩 와주신단다.”

“주에 한 번이요.”

썩 마뜩잖다는 듯이 미묘한 어투로 부인의 말을 되풀이한 그가 잠깐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번 방학 동안은 쭉 영지에 있을 생각이었으니 차라리 잘되었군요. 한동안 이벨린의 교육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허어…… 알렉 너도 바쁠 텐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

“그래. 네가 정 신경이 쓰인다면 마담의 방문일을 조율해보마.”

“사정 때문에 데뷔탕트가 늦어지고 있지만 베르묄의 사람인 이상 사교계에 선보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혹여라도 저 애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라도 할까 두렵군요.”

예민한 얼굴로 적나라한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지랄하는 알베리크의 모습에 부부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베르묄이라는 이름에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소백작이 모자란 사촌 동생 때문에 창피라도 당할까 봐 히스테리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평소 그의 태도를 보자면 무척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러면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벨린.”

“……예.”

“내일 로 티(Low Tea) 시간에 맞추어 제 방 응접실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로 티면 한 4시 전에 가면 되려나. 느긋하게 생각하며 이브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부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두 사람을 보았다.

부부는 이브에게 귀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에 대해 크게 강제하지 않았다. 교양과 예법을 알려주는 가정교사를 붙여주기는 했지만, 주에 한 번인 데다가 그리 빡빡하거나 매섭게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자유롭게 살던 이브에게 너무 큰 압박을 주고 싶지 않다고 자애롭게 말한 부부였으나, 이브는 때때로 그들이 그저 자신을 사육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브는 온종일 놀고먹는 듯 보였다. 그래도 괜찮다는 듯 방만하게 풀어두는 분위기가 그녀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종용했다. 그 어떤 의무 없이 주어지는 자유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다. 직접적인 학대는 없었지만 어떻게 보자면 학대에 가까운 방임 아래에서 그저 백작가의 아가씨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만을 누리며 자라온 이브가 알베리크가 요구하는 「귀족 영애의 몸가짐」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할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저 로잘린 베르묄의 딸, 이벨린 베르묄이라는 사람이었으니까. 진짜 귀족 영애 이벨린이 필요한건 아니었을 테지. 아마 데뷔도 제대로 시키지 않을 거야. 만약 엘베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노처녀 꼬리표가 붙을 정도로 나이를 가득 채워 데리고 있다가 지참금을 많이 보내지 않아도 되는 한미한 가문에 적당히 시집보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게임 안에서도 이벨린이 데뷔탕트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었다. 아예 데뷔탕트 자체를 치르지 않았거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대충 체면치레를 할 정도로만 작은 규모로 열어주었을 것이다.

본디 데뷔탕트는 귀한 핏줄의 아가씨들이 궁성에 가서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며 잘 배운 궁정 매너를 선보이는 것을 말했다. 그 관례도 8년 전 황후 샤를로테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제대로 치러지는 일 없이 귀족들끼리 모여 알음알음 서로를 소개하며 지나갈 뿐이었다.

게다가 이 집의 사람들은 이브를 다른 귀족 가문에 선을 보일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게임 속의 이브는 그것이 저를 모욕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사교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운 게 없었을 테니.

지금의 이브 역시 사교계 데뷔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언젠가는 이 나라를 뜰 예정이니까.

‘그게 안 된다고 해도 스물두 살 되는 해엔 쫓겨나게 될 테니까 결국 이러나저러나 의미가 없는 짓이긴 매한가지지…….’

오찬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 가운데 끝났다. 이브는 제 방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서재에 들렀다가 가기로 마음먹은 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있을 일들을 미리 정리해보고 있었다.

첫날은 아마 가볍게 겁을 주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선제압. 아마 그는 온갖 귀족적이고 고풍스러운 표현들로 빙빙 돌려가며 자신을 글러먹은 구제불능인 것처럼 비웃은 후 제 말에 얌전히 따르게끔 조종할 것이었다.

게임 속에서 본 알베리크는 가스라이팅에 아주 소질이 있어 보였으니까, 아마도 자아와 자존감을 꺾어 결국엔 작은 실수를 저질러도 그에게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세뇌를 시킬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브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던 방법이기는 했다. 게임 속의 이브는 폭력이 주는 고통은 두려워할지언정 폭력에 지배되어 굴복하지는 않는 기가 센 사람이었다. 물론, 현재의 이브에게 역시 통하지 않을 방법일 터였다.

“이벨린.”

덥석, 예상치 못하게 손목을 쥐어 잡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이브가 저도 모르게 붙잡힌 쪽의 팔을 빠르게 바깥으로 돌리며 반대 손으로 매섭게 제 손목을 쥔 손을 내리쳤다. 재빠르게 손아귀를 뿌리치고 몸을 뒤로 두어 걸음 물린 이브는 그제야 알베리크가 냉랭한 표정을 깨고 어딘가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로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그만 저도 모르게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절도 있는 호신술을 선보이고 말았다. 이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써 침착한 표정을 해 보이며 물었다.

“알베리크 오라버니. 무슨 용건이신가요?”

“…….”

“오라버니?”

“아…….”

아닙니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리듯 말한 알베리크는 재빠르게 뒤를 돌아 사라졌다. 황급히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브가 버릇처럼 뒷머리를 긁적이려다 말고 전문가의 솜씨로 올려 묶은 머리가 생각나 아차 싶어 손을 내렸다.

‘뭐 하자는 거야, 저 새끼…….’

항상 차갑게 굳어 있어야 하는 알베리크의 어딘가 얼빠진 듯한 표정을 보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갑작스러운 캐붕을 목격한 이브는 잠시 황당해했으나, 곧 2D가 3D가 되면서 생긴 캐붕인가 보다 하고 대충 납득하고 다시 서재로 향했다. 그러나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간 이브는 곧바로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인기척……. 한 명인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누군가가 서재 안쪽에 기척을 지운 채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알은척을 해야 하나, 모르는 척 책만 찾아서 돌아가야 하나 잠깐 망설이던 이브는 곧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오전에 책을 발견한 자리에서 『압생트를 요리하는 서른 가지 방법』과 그 언저리에 있던 다른 제목의 책들을 뭉텅이로 네댓 권 정도 함께 꺼내 들었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이브는 정체 모를 낯선 인기척을 무시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책을 품에 안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서재의 문을 닫은 순간부터 점점 이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혹여 뒤에서 누군가가 덮쳐오더라도 한순간에 뿌리치고 달아날 수 있을 정도로 기감을 곤두세운 채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다행히 방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브는 그제야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을 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기척을 지우는 데에 능숙한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피 냄새나 살기가 느껴지지는 않았으니 아마도 세작, 그러니까 스파이로 심어지는 종류의 훈련을 받은 사람일 것이었다.

어째서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서재를 기척까지 숨겨가며 뒤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브는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낯선 사람의 정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잠입한 세작이라고 쳐도 어차피 몇 년 지나지 않아 남의 집 일이 될 터였다. 이브에게는 정체 모를 침입자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보다는 내일 있을 일에 대비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이브는 가만히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던 리본을 떼어내고 있던 틸다에게 말했다.

“틸다, 전에 주문했던 거 어디다 뒀어?”

“전에…… 아, 그 마편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지고 올게요.”

선물용으로 말채찍을 하나 주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틸다는 약간 이상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녀를 대신해 순순히 공방에 주문을 넣어주었다. 이브는 틸다가 가져온 적보랏빛 실크 주머니를 받아 들고 그 안에서 염색이 잘된 묵빛의 크롭 휩(끝에 네모난 가죽이 붙은 얇은 막대형 채찍)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얇은 나무 심이 들어가 있어 휘두르면 유연하고 탄력 있게 휘었다가 다시 본모습을 되찾는 것에서 장인이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을 휘둘러 막대 끝에 붙어 있는 손가락 세 마디만 한 길이의 가죽으로 반대편 손바닥을 두어 번 내리쳐본 이브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단단하게 무두질이 된 가죽의 상태 역시 몹시 마음에 들었다.

“소백작님께 선물하시게요?”

“응.”

“승마를 그리 즐기시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뭐, 신사라면 아무리 승마를 즐기지 않아도 고급 말채찍 한두 개 정도는 기본일 테니까. 원래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사긴 아깝지만 있으면 좋은 걸 받는 게 최고야.”

“그런가요…….”

이브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대충 둘러댄 후 다시 실크 주머니 안에 마편을 잘 갈무리하여 넣어두었다. 특별히 주문한 디자인이라 말에게 쓰기에는 다소 애매한 길이와 생김새였지만 승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틸다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소화도 시킬 겸 운동이나 해야겠다. 화장 좀 지워줄래?”

“또요?”

“에이. 뭘 또 그렇게 기겁을 해. 땀 흘리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할게.”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으나 결국 백기를 든 틸다는 세안수를 가지러 바깥으로 나갔다.

대충 이쯤이면 되겠지 싶은 시간에 알베리크를 찾은 이브는 응접실 안으로 안내받자마자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흠칫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다기가 세팅되어 있었고 알베리크는 장의자에 허리를 세우고 고아하게 앉아 소리 없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브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미리 이야기되어 있었던 듯 차를 따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응접실 안에는 차 시중을 들기에는 알맞지 않은 듯한 덩치 큰 사내 시종 한 사람만이 비어 있는 장의자 뒤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알베리크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이브는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메이드는 물론이고 문 앞을 지키는 경비조차 죄다 물렸네. 설마 오늘 당장 손을 댈 생각인가.’

한동안 안에서 어떤 소음이 들려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시종 하나만을 둔 채 모두를 물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좋은 뜻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이브는 가만히 알베리크를 바라보았다.

“늦었군요, 이벨린.”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3시 정각에 맞추어 오도록 하십시오.”

“네, 오라버니.”

가볍게 대답한 이브는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티푸드를 즐기지 않는지, 아니면 굳이 대접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테이블 위에는 고급 다기만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이브의 찻잔은 텅 비어 있는 채였다.

이브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티포트를 들어 제 잔을 채웠다. 거침없는 그녀의 움직임에 알베리크는 눈썹을 한번 꿈틀거렸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용한 적막 가운데 이브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들고 알베리크를 마주 보았다. 주눅 든 기색 하나 없는 그녀의 시선에 다시 한 번 알베리크가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마담이 뭘 가르쳤는지 모르겠군…….”

“사교계 예절이나 테이블 매너, 다도 예절 같은 걸 조금 배우긴 했지만 사실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네요.”

“다도 예절을 배운 것치고는 아주 형편없군요. 식사 예절 역시 마찬가지 수준이겠지요. 모두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대체 그 긴 시간 뭘 했습니까?”

“순진한 척 구시네요, 오라버니. 정말 백작님께서 제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셨을 것 같나요?”

직설적으로 와 꽂히는 이브의 말에 알베리크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 말없이 쏘아보던 알베리크는 곧 칼 같던 시선을 거두고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브 역시 그를 따라 찻물을 머금었다. 한참 만에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망상이 지나칩니다, 이벨린. 당신이 아무리 돼지축사 같은 더러운 곳에서 자랐다고 한들 이제는 베르묄의 사람입니다. 백작가의 영애로서 갖추어야 할 품위와 몸가짐을 배워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야, 길 밖의 천박한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하…….”

“우선 그 예의 없는 말투와 태도부터 고쳐야겠습니다. 일가의 소가주를 대하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버릇이 없군요. 복종하는 것을 배우면 조금은 그 방만한 태도가 고쳐지겠지요.”

“복종은 어떻게 가르치실 건가요?”

“데릭.”

이브의 물음에 알베리크가 내놓은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뒤에서 건장한 사내가 이브의 팔을 꾹 쥐고는 의자 밖으로 당겨 빼내었다. 이브는 크게 저항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남자에게 이끌려갔다.

“그건 지금부터 알게 될 겁니다.”

뒤늦게 나지막이 대답한 알베리크가 몸을 일으켜 앞장서 걸었다. 한쪽 팔과 어깨를 강하게 짓눌러오는 시종의 손길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뒤에서 미는 대로 뒤따른 이브는 곧 응접실과 연결된 작은 개인 서재에서 알베리크가 책 몇 권을 순서대로 만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그가 책장을 뒤로 밀어내자 무거워 보이던 책장이 순식간에 뒤로 밀리며 안쪽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창 하나 없는 밀실이었다. 알베리크는 익숙한 듯이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밀실은 이브에게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게임 속에서 처음 이브가 알베리크에게 체벌을 받을 때 끌려가는 장소였으며, 알베리크 루트의 배드엔딩을 보게 될 경우 이브가 갇혀 살게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안을 살펴보느라 이브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다시금 뒤에서 재촉하듯 밀어내는 힘이 느껴졌다.

시종에게 떠밀려 밀실로 들어선 이브는 양손을 뒤로 붙잡힌 채 밀실 한가운데에 오금이 발로 채여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조금씩 인내에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이브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생각이시죠, 오라버니?”

“이벨린. 당신의 방약무인한 태도를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매라도 치시려고요?”

“버릇없는 짐승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체벌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부디 당신이 빠른 시일 안에 귀족으로서의 몸가짐을 갖추기를 바랍니다.”

딱딱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기묘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저 답도 없는 변태 새끼. 얼굴만 반지르르하면 뭐 해. 속으로 욕설을 쏟아 뱉던 이브는 어느새 시종이 제 손목을 끈으로 묶고는 밀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책장과 연결된 문이 닫혔다. 아마도 제 욕망을 채우는 모습을 아랫사람에게 보이기 싫어서 내보낸 것이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브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뒤틀었다. 일부러 틈이 생기도록 손목을 겹쳐 묶이게끔 유도한 탓에 이리저리 팔을 뒤트니 끈 사이에 어느 정도 틈이 벌어졌다.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명령할 때까지는 문은 열리지 않을 테니까. 얌전히 있어요. 귀찮게 굴지 말고.”

“제가 얌전히 있는다고 오라버니가 절 안 때리진 않을 텐데요?”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았군요……. 좋습니다. 당신이 울며 비는 모습이 퍽 기대가 되네요.”

알베리크가 입꼬리를 비틀며 미소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외모 탓에 비웃는 듯이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려 웃는 모습조차도 무척 그럴듯해 보였지만 외모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저건 식인 꽃이었다. 알베리크가 벽에 장식되어 있던 얇은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그는 완전히 방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브는 알베리크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쏘아지듯 몸을 일으켜 주먹으로 알베리크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퍼억, 하고 제법 묵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알베리크는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 정도 결박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느새 이브가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에는 손목을 묶었던 끈이 떨어져 있었다.

‘제대로 들어갔네. 이건 숨도 못 쉴 정도겠는데.’

이브가 생각한 대로 알베리크는 명치를 감싼 채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리고 컥컥 숨이 틀어막힌 듯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제대로 숨도 들이켜지 못하는 그의 앞에 다가간 이브가 알베리크의 머리채를 휘어 쥔 채 그대로 거세게 뒤로 젖혀 들어 올렸다.

침도 삼키지 못하고 입을 벌려 끅끅 소리를 흘리고 있는 알베리크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무심하게 내려다본 이브는 예쁜 애는 침을 흘려도 예쁘네,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꿇고 있던 그의 허벅지에 발을 올려 꾸욱 짓누르듯 지르밟았다. 일부러 가진 신발 중 그나마 굽이 뾰족한 것을 신고 왔기에 제법 고통스러울 터였다.

“크흑, 컥……! 무, 무슨…….”

“저도 동의해요. 버릇없는 짐승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매질도 때때로 필요하다는 말.”

“커헉……. 이, 이거 놔……. 큭…….”

“오라버니.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꾸욱. 허벅지를 밟은 발에 무게가 실렸다. 동시에 알베리크의 입에서도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브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

“아주 제대로 꾸며뒀네. 체벌실? 고문실? 뭐가 됐든 간에……. 하나뿐인 사촌 여동생을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싶었어?”

“크읏……. 손, 손 놔……!”

“건방지게 굴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밀실 꼬락서니를 보니 새로 지어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얼마나 이 짓거릴 한 거야? 사람들을 끌고 와서 때렸어? 혹시 죽이기도 했나?”

게임 스토리대로 흘러왔다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때때로 심한 매질을 버티지 못하고 죽은 하녀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짐작이 맞는 듯, 알베리크는 돌연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 개새끼네. 인성 보소…….”

“……고작해야 하녀들일 뿐이었습니다.”

“응, 알았어. 아무튼, 오늘 너는 좀 맞아야겠다.”

알베리크의 변명 아닌 변명에 싱긋 웃은 이브는 한번 크게 털듯이 그의 머리채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고쳐 잡은 후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좋아하잖아. 매 맞는 거.”

“……!”

“다 알아요, 오라버니. 실은 누군가가 이렇게 숨통을 쥐고 자비 없이 매섭게 때려주기를 바라고 있었죠?”

“그…….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매를 맞는 하녀들을 보면서 사실은 오라버니가 대신 맞는 것을 상상했잖아요.”

“허튼소리!”

“너 섰어, 이 변태 새끼야.”

귓가에 달게 속삭인 이브가 킥킥 비웃음을 흘리자 알베리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붉게 물들었다. 치켜 올라간 고양이상의 눈꼬리에 약간이지만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그는 수치심에 턱까지 바들바들 떨어가며 이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거세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새빨갛게 물들어 치욕에 떠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바지춤 허벅지 한쪽이 약간 부피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브는 아까 알베리크가 보여주었던 비웃음을 그대로 따라 그린 듯한 미소를 보여주며 날카로운 콧날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온 얇은 은테 안경을 벗겨 휙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그대로 손등으로 매섭게 그의 뺨을 내려쳤다. 머리채를 쥐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고개가 홱 돌아갔을 정도로 거센 따귀였다. 밀실에 퍽! 하는 거친 마찰음이 울려 퍼지자 알베리크의 버둥거리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얌전히 굴어야죠.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너, 너…….”

“생각보다 훨씬 비실거리네. 나도 이렇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알베리크 오라버니, 너 정말 책상 앞에서만 살았구나?”

이브가 피식 웃으며 그의 허벅지를 짓눌렀던 발을 옮겨 반대편 허벅지에 올렸다. 미묘한 부피감이 느껴지는 방향이었다. 알베리크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어머나. 아닌 척하더니 어린 동생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흥분하셨나 보네요.”

“읏, 크윽…….”

“고분고분하니 좋네.”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제 점수는 별점 4개입니다. 스타일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째려보는 눈빛만으로 밥 세 공기는 먹겠는데.’

이브는 그대로 발을 좌우로 비비며 허벅지를 짓눌렀다. 싸움박질에 익숙하지 않은 문인답게 그는 이브가 한 대로 이브를 후려쳐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발밑에서 몸을 떨며 속박되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이후로 직접 폭력을 접할 일이 없었던 탓인지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에 몹시 약한 듯 보였다. 이브는 제 팔을 강하게 쥐고 있던 알베리크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때요? 아픈가요? 아프기만 한가요? 척추 아래에서 찌릿한 감각이 올라오지는 않나요?”

“노, 놓……으십시오…… 제발…….”

“하하, 씨발.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흐윽, 읏……. 이…… 이벨린, 이것 좀…….”

“한 번쯤 꼭 당신을 때려주고 싶었지. 뒷배도 없는 어린 여자애들 데려다가 트집 잡고 괴롭히고 짓밟는 거, 즐거웠어? 그 애들이 살려달라고 빌지는 않았어?”

“잘…… 잘못…….”

짜악!

다시금 거센 마찰음과 함께 그의 고개가 요동쳤다. 심지어 이번에는 입을 열고 있어 분명 입 안이 찢어졌을 것이다. 이브는 폭력이 주는 공포에 젖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남자의 푸른색 눈동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뺨을 맞아 터진 입술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 아아…….”

“제법 깜찍하게 구네요. 그 여자들도 당신이 하는 것처럼 울면서 용서를 구했겠지.”

“대체……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이브는 달달 떨며 소리를 지르는 알베리크를 내려다보며 그의 「트라우마」를 상기했다. 어린 알베리크를 담당했던 가정교사는 몰락귀족 출신의,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사내였다. 그 사내는 고귀한 집안의 소년들에게 교묘하게 트집을 잡아 가혹한 매질을 하는 것을 즐기던 자로, 소년들이 귀족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이 겪는 불합리를 밝히지 않는 점을 악용해 과도한 체벌을 하고는 했다.

훈육과 체벌을 가장한 무자비한 폭력에 무너졌던 어린 알베리크의 마음은 겹겹이 갑옷을 두른 채 타인에게 폭력을 대물림하는 것으로 어긋나버렸다. 그러다가 점점 그것이 비틀린 성욕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는 결국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부정하는 일그러진 사람으로 자라버린다.

알베리크 루트는 그런 그의 비틀린 마음을 눈치챈 이브가 알베리크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감싸 안으며 보듬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가만히 무심한 듯 그를 바라보던 이브의 얼굴에 돌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오라버니가 하녀들을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나랑은 상관없어.”

“그…… 그러면, 대체 왜…….”

“내가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 잊었어요? 네가 먼저 날 건드렸잖아요. 덤벼드는 개에겐 매가 약이거든.”

알베리크의 붉은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파르르 떨렸다. 그의 긴 속눈썹 역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깊이 새겨진 공포에도 이브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만 느낀다면 후에 반발심 역시 강하게 치고 올라올 터였다. 초장에 완벽하게 꺾어야만 했다.

이브는 발에 힘을 약간 빼고 허벅지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다시금 알베리크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지만, 그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기 불편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브는 그의 머리카락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좋아요. 타협하죠.”

이브의 목소리에 꾹 감겨 있던 알베리크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이브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퍽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딱 백 대만 맞읍시다. 날 먼저 공격한 거, 그걸로 봐줄게요.”

“그게 무슨…….”

“더도 덜도 말고 백 대만 맞아요. 매는……. 오라버니가 날 때리려고 가져왔던 저 케인으로 하죠.”

“큭…….”

“더 험한 꼴 볼 바에는 남자답게 맞고 끝내는 게 낫지 않아요?”

알베리크의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이브는 다시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알베리크는 나른하게 웃는 여자의 미소가 마치 오래 굶주린 악마의 그것과 같다고 느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제야 알베리크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틀어쥐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좋아요. 그러면…… 여기 벽에 양손을 짚고 서세요.”

“…….”

“꾸물대지 말아요. 빨리 끝내버리는 게 서로 좋지 않겠어요?”

“……하.”

“그래요, 그렇게. 다리는 더 벌려요. 어깨너비 정도로……. 됐어요. 그대로 허리를 숙여요. 더. 더 내리세요. 좋아요. 그대로 자세를 유지하세요.”

이브는 어느새 알베리크가 들고 있다가 놓쳐버린 회초리를 주워다 그의 다리나 허리를 툭툭 치며 자세를 잡아주었다. 알베리크의 얼굴은 수치심에 다시 빨갛게 익어 있었다. 아마 고귀한 귀족 가문의 소가주로서 생전 처음 겪는 모욕일 터였다.

어느 정도 자세가 잡혔다고 생각한 이브는 회초리 끝을 반대편 손으로 쥐고 더듬다가 이리저리 휘어보며 탄성에 감탄했다. 변태치고는 안목이 괜찮네. 이브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이제 매를 때릴 거예요.”

“읏…….”

“한 대 맞을 때마다 숫자를 세어주세요. 제가 중간에 까먹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무…… 무슨…….”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맞아야 하잖아요. 오라버니는 머리가 좋으니 잘 셀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아마도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압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공격하고 달아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브는 내심 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케인을 그의 등줄기를 따라 꼬리뼈 위치까지 대고 선을 긋듯 쓸어내렸다. 알베리크의 허리가 놀란 듯이 움찔 떨려왔다.

“겁먹지 마세요. 생각보다 백 대는 금방 지나가니까.”

그대로 탄성 있는 나무 회초리가 후웅, 하고 바람 가르는 위압적인 소리를 내며 알베리크 엉덩이 위로 떨어졌다. 옷 위로 내려친 덕분에 맨살에 맞는 것보다는 덜 아프겠지만 갑작스러운 통증에 그의 허리가 괴로운 듯 뒤틀렸다.

“윽…….”

“뭐 하세요? 숫자 세셔야죠.”

“진, 심입니까……?”

“숫자.”

“읏…… 하, 하나…….”

이브의 입술이 만족스러운 듯 호선을 그렸다. 뒤이어 철썩철썩 하고 얇은 회초리로 맞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음이 들려왔다. 팔뚝과 손목의 스냅을 적절히 이용해 절도 있게 끊어 치며 매질을 하는 이브의 폼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 보였다.

알베리크는 살갗에 날카롭게 떨어지는 통증에도 눈을 꾹 내리감은 채 더듬더듬 숫자를 세어나갔다. 마른 체형치고는 동그랗게 보기 좋게 살집이 붙어 있는 엉덩이 중간 부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일정한 부분만을 후려치는 바람에 고통을 꿋꿋이 참으며 숫자를 세던 알베리크는 결국 스무 번째 매질부터 자세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흐으, 윽……. 스…… 스물……셋…….”

“허리가 내려가네요, 오라버니. 자세 다시 잡으세요.”

“읏…… 으…….”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몸을 뒤틀자 이브는 잠시 매질을 멈추고 회초리를 이용해 그의 배를 위로 밀어 올렸다. 알베리크는 자신이 손톱으로 벽을 긁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입술을 앙다물고 이브의 지시에 따라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얇은 케인이 바지에 감싸인 엉덩이 라인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듯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꾀부리지 마세요. 아주 얇은 매라고요.”

“…….”

“자. 스물셋까지 셌어요.”

다시 매질이 이어졌다. 얇은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천 위로 살을 매섭게 후려치는 소리,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숫자를 세는 소리가 밀실을 가득 메웠다. 이브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정말로 게임을 하는 내내 이 미친놈들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타인에게 떠넘겨버리고는 제 악행에 대해 이리저리 변명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게임 속의 이브에게 관용과 애정을 요구하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남자 캐릭터들에게 질색하면서도 게임을 끝까지 붙잡은 이유는 주인공 이브를 위해서였다. 이 거지 같은 게임 속에서 어떻게든 이브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서. 그녀의 최애는 명실상부 「이브」였다.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거든. 너 같은 개새끼들 때문에 죄다 말아먹었지만.’

“하……. 서른 하, 윽, 하나…….”

“오라버니. 자꾸 허리가 내려가네요. 한 번만 더 자세를 무너트리면 바지를 벗길 거예요.”

“아으…… 으…….”

이번에는 케인의 위치를 조금 내려 허벅지와 엉덩이가 만나는 부분의 연약한 살을 때리기 시작했다. 역시 정확히 같은 위치만을 반복해 때리는 통에 맞은 부위에서 마치 인두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알베리크는 결국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아윽! 그, 그만……!”

“숫자를 세야죠.”

“제발, 제발……! 그만……!”

“오라버니. 백 대 채우기로 했잖아요.”

“으읏…… 흐…….”

“씨발…… 숫자 세라고. 말 안 들려?”

화가 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진 이브의 저열한 욕설에 흠칫 몸을 움츠린 알베리크가 벌벌 떠는 목소리로 다시 숫자를 세어나갔다. 머리가 좋다는 설정에 맞게 그는 자신이 말해야 하는 수를 잊지 않고 있었다. 까먹었으면 처음부터 다시 세게 만들 텐데. 이브는 내심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팔을 휘둘렀다.

“윽, 읏…… 마흔……일곱…….”

“이제 곧 반이에요.”

“마흔, 마흔여덟……! 악……!”

계속해서 같은 세기로 내려치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세게 쳤더니 그대로 알베리크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벽에 손을 짚은 채로 주르륵 미끄러져 헉헉 밭은 숨을 내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알베리크를 내려다보던 이브가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만,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오라버니.”

“더는 못하겠습니다……! 더는……. 윽…….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여기서 멈춰주…… 크으……!”

이브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통수를 쥐고 그대로 반들반들한 석벽에 가져다 박았다. 상처가 날 정도로 강하게 박았다기보다는 거의 벽에 짓눌렀다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로 힘을 뺀 탓에 그리 아프지는 않았겠지만, 알베리크는 공포에 젖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아까 자세가 무너지면 뭘 벗기겠다고 했죠?”

“크윽…….”

“바지 벗고 다시 자세 잡으세요.”

“이벨린! 아아……! 제발 그만!”

“꼴랑 백 대를 못 맞아서 지금 이렇게 벌레처럼 빌빌 기고 있는 거야? 부끄러운 줄 알아요. 빨리 일어서세요.”

“싫…… 싫어……! 용서를……. 용서…….”

“일어서라고.”

폭력과 강압에 감각이 마비된 채 알베리크는 두려움에 떨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눈에서 흐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은색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들어 무척이나 매혹적이게 보이기는 했으나, 이브는 미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알베리크는 젖은 얼굴을 간신히 들어 이브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녹갈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얽힌 순간, 결국 그는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천천히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알베리크가 하의 벗는 것을 주저하며 머뭇거리기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끝에 결국 이브는 한 발 양보하기로 했다. 솔직히 다 큰 남자가 속옷을 적시는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매질이 이어졌다. 엉덩이 위로 떨어지던 가는 회초리는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뒤쪽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한참 팔을 휘두르던 이브는 어지간한 여자들의 것만큼이나 가는 허벅지가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알베리크는 매를 맞은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발발 떨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바지 앞섶이 팽팽해질 정도로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내뱉는 흐느낌과 울음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신음 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달뜬 한숨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각하지 못한 마조히스트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 열 대 남았네요, 오라버니. 백 대는 금방이라고 했잖아요.”

“흐으……. 하……. ”

“자, 조금만 더 참으면 금방 끝날 거예요. 앞으로는 이렇게 매 맞는 일도 없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봐요.”

“아, 아아…….”

그의 몸이 매질을 거부하듯 자꾸만 비틀거렸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천 한 장 아래의 사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희고 깨끗한 피부에 찍힌 낙인처럼 가로로 길고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줄 사이사이로 보랏빛 멍 자국이 물감이 번진 듯 퍼져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브는 충분히 얇은 회초리로도 그의 허벅지를 터트려 생채기를 내고 피를 볼 수도 있었기에, 이 정도면 사정을 많이 봐준 셈이었다.

“많이 힘들어요? 더는 못 맞겠어요?”

“그…… 읏, 그게…….”

“그럼 여기서 그만할까요?”

휙 소리가 날 것처럼 알베리크의 고개가 황급히 돌려졌다. 이브는 딱딱하게 굳어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남자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된 모습을 내심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무 케인이 아닌 손으로 직접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의 완만한 라인을 따라 살살 쓰다듬었다. 회초리가 남긴 붉은 자국을 따라 찌릿한 고통이 번지자 알베리크가 다시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여전히 이브를 향해 있었다.

“아, 아파……. 아픕니다…….”

“그러네요. 많이 아파 보여요. 그럼 우리 그만 맞을까요?”

“흐윽, 흐…… 네……. 부디…….”

“정말 더 버티기 힘든가 보네요. 앞도, 뒤도.”

허벅지 뒤쪽을 매만지던 이브의 손이 슬쩍 허벅지 사이 안쪽으로 뱀처럼 파고들었다. 알베리크는 예상치 못한 침입에 놀란 듯 크게 움찔거렸으나 벽을 짚고 있는 손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 사이가 다급히 오므려졌으나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단지 허벅다리 안쪽 연약한 살이 있을 부분을 엄지로 약하게 힘주어 문지를 뿐이었다.

“으흑……. 그, 그만……. ”

“좋아요. 열 대가 남긴 했지만 봐드릴게요. 대신 앞으로는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하게 사셔야 해요. 아셨죠?”

“아……. 읏…….”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어준 동생에게 감사해야죠. 그게 오라버니가 주야장천 떠들던 예의 아닌가요?”

“우읏……. 가, 감사……합니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듯이 알베리크는 벽에 기댄 채 스르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오는 고통 때문인지 그의 다리가 간헐적으로 움찔움찔 떨렸으나 그는 흐트러진 몸을 가눌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잔뜩 몸을 긴장시킨 채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게끔 버티고 있었던지라 그의 몸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으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알베리크의 이마에도 역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약골이었다. 하기야, 군벌 귀족이나 기사가 아닌 이상 귀족 집안의 도련님이 하는 운동이라고 해봐야 사냥이나 승마밖에 더 있겠는가.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가끔 심심풀이로 말을 타는 남자의 체력이라니, 알 만한 수준이었다.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고통을 삭이고 있는 알베리크 앞에 가까이 다가간 이브는 허리를 살짝 숙여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며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열이 올랐는지 손에 와닿는 정수리 부근이 따끈따끈했다.

“잘 버텼어요. 참 착하네요, 말도 잘 듣고.”

“아…….”

“모두 채우지는 못했지만……. 처음에 이 정도면 아주 잘 맞은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

어쩔줄 모르고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이브의 느긋한 손길에 결국 슬쩍 위로 들어 올려졌다. 눈치를 보는 듯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본 알베리크는 나긋하게 웃고 있는 이브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알베리크의 뺨이 수치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남은 열 대는 달아두기로 할까요.”

“그, 그건……!”

“아. 봐주기로 하지 않았느냐고요? 오라버니가 자꾸 아프다고 아기처럼 앙앙 우니까 어쩔 수 없이 넘어가준 거잖아요. 원래는 백 대였는데. 그러니까 남은 열 대는 나중에 오라버니가 맞아도 좋을 것 같다 싶을 때 제게 청하시면 맞는 걸로 해요. 괜찮지요?”

“……알, 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슬슬 나가도록 할까요.”

이브는 알베리크의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뺨과 턱 라인을 따라 한번 쓰다듬어준 후,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이 엉망진창이네요.”

“그, 그건 당신이……!”

“봐줄 만한 거라고는 미끈한 얼굴뿐인데 잘 관리해야죠. 어린 동생에게 몇 대 맞았다고 참을성 없이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면서 아래를 발딱 세우는 게 오라버니가 말한 귀족다운 몸가짐인가요?”

“으읏…….”

이브는 아까보다 더 새빨개진 알베리크의 반항을 무시하며 얼굴을 꼼꼼히 닦아내었다. 민망한지 제가 하겠다며 그가 이브의 손목을 잡았지만, 이브가 한번 털어낸 것으로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매질을 당하느라 진이 빠져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 보였다. 픽 웃으며 얼굴을 닦아주던 이브의 시야에 문득 피딱지가 앉은 입술과 붉게 부어오른 뺨이 시야에 들어왔다.

“맞은 부분은 차가운 수건으로 오래 찜질해줘야 해요. 뺨은…… 잘 조절해 때려서 멍이 들진 않을 테지만 입 안이 찢어진 거나 부기는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당신은 대체…….”

“자, 깨끗해졌어요.”

타액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대충 바닥 어딘가로 던진 이브는 그의 뺨을 때릴 때 내던진 은색 테두리의 안경을 찾아와 직접 씌워주기까지 했다. 알베리크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게임을 플레이했던 플레이어들이 본다면 캐붕이라고 울부짖을 만한 모습이었다.

이브는 다리가 풀려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하는 알베리크를 부축하며 그의 지시대로 출입구 근처 벽에 어울리지 않게 박혀 있는 촛대를 꺾었다. 그리고 벽을 옆으로 밀자 그리 어렵지 않게 문이 열리며 알베리크의 개인 서재가 드러났다. 명령이 있어야지만 문이 열리네 어쩌네 한 것은 아마 섣불리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지 싶었다. 그의 얄팍한 수에 이브는 속으로 픽 웃어버렸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시종, 데릭은 문이 열리는 낌새에 자연스럽게 한 발짝 왼편으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뒤에서 튀어나온 흰 손에 목 뒷덜미를 얻어맞고 그대로 꼬로록 신형을 무너트리며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몸집의 두 배는 더 되는 덩치 큰 남자 시종을 발을 한번 굴러 도약해 단숨에 제압해버린 이브를 뒤에서 아연한 얼굴로 지켜보던 알베리크는 잠시 자신을 벽에 기대두었던 이브가 도로 안으로 들어와 저를 부축하는 것을 보며 몇 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그냥 꾹 다물어버렸다.

내실을 따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도달한 알베리크의 침실은 이브의 방에 비하면 세 배는 되어 보였다. 방 주인의 성격에 꼭 맞춘 듯이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침실이었으나 이브는 안을 구경할 새도 없이 제 어깨를 짚고 쩔뚝이는 알베리크를 부축해 침대에 앉혀주었다.

그새 감정 정리가 끝났는지 표정을 갈무리한 알베리크가 슬쩍 미간을 좁히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지만, 매를 맞으면서 내지른 비명에 비하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신음이었다.

그는 두어 번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통을 참아내는 듯하다가, 쓸데없이 친절을 베풀며 머리 하나보다도 더 키가 큰 자신을 침실까지 짊어지다시피 부축하고 온 이브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뭘 원하는 겁니까.”

“뭐가요?”

“어차피 이런 건 약점조차 되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디 가서 베르묄의 소백작을 매질했다고 떠들어본들…….”

“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오라버니가 엉덩이를 맞으며 흥분하는 변태라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태도가 귀족 영애답지 못하다는 겁니다.”

“오라버니가 지적했다시피 저는 13년을 돼지축사 같은 보육원에서 근본도 모르는 아이들과 뒹굴며 자랐어요. 게다가 백작님과 부인께서는 제가 진짜 백작가의 영애처럼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죠. 아마 제가 머리가 굵어지면 그분들이 저와 제 어머니에게 주어진 할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될까 봐 두려우신 모양이에요. 오라버니도 적당히 눈치껏 제게서 손 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전 아마 평생 귀족답게 살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알고 있었습니까?”

대체 어떻게? 하는 의문이 그의 눈에 언뜻 비쳤다. 이런. 너도 아는 이야기였구나. 이브가 그 반응을 보고는 그의 곁에 풀썩 앉았다. 알베리크의 눈꺼풀이 경련하듯 움찔했으나 그는 꺼지라고 소리를 지른다든가, 이브를 밀쳐낸다든가 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저도 여기서 평생 신세 질 생각은 없어요. 적당히 머무르다가…… 대충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아 제 앞가림할 수 있을 만할 때쯤엔 나가줄게요. 몇 년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오라버니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생각까진 없었어요. 그냥 조금 겁만 준다는 게 오라버니의 체벌실에 가득 전시된 컬렉션들을 보니 그만 오랜만에 흥이 올라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겁, 이라고요.”

“저는 오라버니가 생각하신 것만큼 여리고 연약하지 않아요. 절 무릎 꿇리고 싶으시다면 죽일 각오로 준비하셔야 할걸요. 저 데릭이란 친구도 오라버닐 보호해주진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 당신의 역량을 드러내도 괜찮은 겁니까.”

“대신 절 죽일 생각이라면 오라버니도 목숨을 걸어야 할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알베리크는 이브의 대답에 숨을 들이켜며 입을 다물었다. 한순간 이브의 눈가에 어린 것은 지독한 살기였다. 스물 남짓한 레이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래 묵은 살기가 잠시 그의 숨통을 죄었다. 그러나 언제 흉흉한 기운을 드러냈느냐는 듯 이브가 생긋, 가면 위에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포와 수치로 얼어붙어 있던 알베리크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만에야 다시 이브에게 물을 수 있었다.

“……이벨린. 돈이 필요합니까?”

“필요해요.”

“그렇다면 나를 따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하, 헤드헌팅?”

“헤드……?”

“헛소리였어요. 그것보다 오라버니를 따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세요.”

“계약서를 씁시다. 나는 당신이 몸을 쓰는 데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당신에게 걸맞은 지원을 약속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소백작인 내 안위를 책임져주십시오.”

“지금 오라버니의 볼기를 찰싹찰싹 때린 버릇없는 여동생에게 당신의 호위가 되어달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눈에 보이는데 그것을 그저 개인적인 사감으로 무시할 정도로 머저리가 아닙니다. 졸업을 하고 돌아오면 아마 3년 이내로 내 목을 노리는 시도가 빈번해질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르묄은 오래전 황실과 맺은 맹약 때문에 사병을 제대로 기를 수가 없는지라……. 외부에 돈을 주고 의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암살에 대응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백작 부부가 막냇동생에게 주어진 유산을 가로채야 할 정도로 주머니 사정도 엉망이고요?”

이브가 그의 말에 끼어들며 깐죽대듯 던진 말에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한숨처럼 깊이 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조부께서 살아 계셨던 때에 비하면 아주 엉망이지요. 개인적으로 수습하고 있으나 소백작의 권한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속사정을 일일이 저에게 설명하는 이유는 뭐죠?”

“당신도 이제 베르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 이제 남 일이 아니게 될 거다?”

알베리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게임의 스토리를 떠올리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이브가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승계 싸움인가요?”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베르묄 집안의 승계 싸움은 아니고요.”

“……당신이 저와 계약서를 쓸 때까지는 그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거절한다면?”

“바라던 대로 머지않아 이 저택에서 나가게 될 겁니다. 시체로 말입니다.”

“단호하시네요. 으음…… 그러면 일단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해요.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오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알겠어요. 결정하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아, 그런데 제게 이런 요구를 하기 전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셨어요?”

“트레베 공작에게 백작위를 승계하기 전까지 보호를 청하려 했습니다.”

‘이거구나, 대마법사 칼리스토 랑그라다가 백작저로 오는 이유가.’

다시금 이브가 침묵했다. 게임 스토리는 이브가 보는 관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속사정까지는 플레이어들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베르묄의 유산에 관한 이야기 역시 진행 당시에는 모르고 있다가 엘베르의 등장 이후에나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칼리스토 랑그라다는 게임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메인남주 중 하나였다. 갑자기 백작저에 불쑥 찾아온 칼리스토 랑그라다는 마치 저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제집처럼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며 패악을 부렸다. 그는 뛰어난 마법 실력에도 까칠하고 잔혹하며 예민한 성격 때문인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없이 늘 혼자 다녔다.

대마법사를 모실 기회가 흔하게 오는 줄 아느냐며 까다로운 요구들로 모두의 골머리를 앓게 하던 칼리스토가 우연히 저택 내에서 이브와 마주치며 저택 내에 아예 눌러앉게 되는 게 칼리스토 루트의 시작이었다. 물론 필사적으로 저택 내에서 그를 피해 다닌다면 그와 만나게 되는 것은 베르묄 가문에서 쫓겨난 후가 된다.

칼리스토 랑그라다의 어머니는 트레베 공작 바스티안 트레베의 손위 누이다. 트레베 공작의 부탁이 있었다면 칼리스토가 아무 연고도 없는, 베르묄 가문의 칼레스 백작령에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갔다. 그가 왜 백작저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다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이브는 문득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 본인도 아닌, 아직 백작위를 승계받지 못한 소백작일 뿐인 알베리크의 요청에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흔쾌히 대마법사를 보내준다니. 무언가 숨은 이야기들이 더 있는 듯한 냄새가 났다.

의문투성이인 대화였으나 더 깊이 파고들었다가는 빠져나오지 못할 터였다. 지금도 아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브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알베리크 역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지 꾸물대다가 말고 윽, 하고 작게 신음성을 뱉었다. 이브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일어나지 마세요. 아, 아마 오늘은 엎드려 주무셔야 할 거예요. 정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하게 됐어요.”

“아닙, 니다.”

알베리크의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으드득 이를 악문 것처럼 느껴졌으나 이브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열감이 떨어질 때까지 꼭 차가운 수건으로 맞은 부위를 찜질해주시고요. 혹시 모르니 주치의에게 물어 멍이 빠지는 연고 같은 게 있으면 받아서 바르세요. 음……. 아무래도 상처를 봐야 정확히 알 것 같은데…….”

“보긴 뭘 봅니까……!”

“아니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너무 그렇게 아낙네 추행하는 동네 건달 보듯 보지 마시고요. 으음……. 맞은 데엔 멘톨 성분이 들어간 연고가 딱 좋은데……. 아무튼, 몸 잘 추스르시고. 혹시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지고 그러면 괜히 다른 하녀들 잡지 말고 그냥 저 부르세요.”

“하……. 됐습니다. 나가십시오.”

“아, 다음 「수업」은 언제죠? 그때는 제대로 된 예절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는데요.”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어요. 기다리죠. 아, 맞다. 선물을 드린다는 게 그만.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네.”

이브는 실내복 드레스에 붙어 있는 주머니에서 적포도줏빛 실크 주머니를 끄집어냈다. 이브의 손끝에서 팔꿈치 정도 길이는 되어 보이는 정체 모를 물건에 알베리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라버니를 위해 준비했어요. 받아주세요.”

“이건 또…….”

뭡니까, 라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브가 주머니를 열고 안에 든 것을 빼내어 그의 무릎 위에 올렸다. 조금 독특한 디자인의, 새카맣게 고루 염색되어 있는 잘 빠진 말채찍이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말에게 쓰기에는 그 길이가 약간 짧다는 것이었다.

알베리크는 곧바로 이 채찍이 말에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직 열 대 남았잖아요.”

“…….”

“생각 있을 때 말씀하세요.”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소곤 속삭인 이브는 입을 열지 못하고 못 박힌 듯 무릎 위의 물건을 내려다보고 있는 알베리크에게 그럼 진짜 가볼게요, 하고 인사한 후 가볍게 몸을 돌려 그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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