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 프롤로그
이브는 13년의 짧은 생애를 수도 변두리에 있는 세인트 에오실 보육원에서 보냈다. 유일신 데우스를 섬기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은 비록 신에 대한 믿음과 교리 공부는 강제할지언정 아이들의 배를 곯리는 일은 없었기에, 이브는 세인트 에오실 고아원 대문 앞에 갓난아이를 버리고 간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감사했다.
버리지 않았다면 더 감사했겠지만 주머니 사정이 빈곤한 고아원에 버려진 것보다는 나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더 나았다.
이름은 성경에서, 성은 무덤에서 가져오는 고아의 삶이란 대개 그렇듯이 큰 이변이 없는 이상 크고 작은 결핍이 생애 내내 함께하기 마련이었다. 갓난쟁이 무렵에 입양 가지 못하고 고아원에 남게 된 이브 역시 소소하게 고달픈 유년시절을 보냈다.
제 평생 눈에 띄게 뛰어난 미모도, 걸출한 재능도 가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일찍 깨우친 이브는 평범한 고아 소녀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다소 염세적인 사고관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은 지금껏 그래왔듯 잔잔하게 고단할 것이고, 수녀가 되는 것이 가장 출세하는 방법일 터인 그저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브는 포기가 빠른 아이였다.
일평생 「평범한 고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이브가 열세 살 생일 아침, 불현듯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간 염세적이고 다소 비관적이기는 했어도 또래 아이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자아 위에 순식간에 성인 여성의 자아가 덧입혀졌다. 떠올리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마치 맑은 물에 물감이 번지듯 전생에서의 기억이 그녀의 정신을 잠식해 들어갔다.
‘하하하, 차원 이동? 환생? 게임 빙의? 2000년대 구닥다리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자라면서 점차 탁해지겠지만 그래도 블론드에 가까운 밝은 머리카락 색이 그나마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던 열세 살 고아 소녀는 21세기 무렵 작은 반도국가에서 살다 요절한 서른 살 여성, 신주영의 이지에 녹아 사라졌다.
자신의 것이 아닌 30년분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어나가던 이브는 이번엔 13년 동안의 시간을 반추해보았다. 위화감과 기시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물러났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이브는 자신이 누구이고 또 무엇인지 확언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브. 이브 테루안느. 곧 이벨린 베르묄이 될, 이 게임의 주인공.’
이브의 녹갈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그녀는 이전 삶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빠르게 이해했다.
몸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물속에서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기억의 마지막은 식도와 기도로 들어오던 검은 물, 발목을 붙들던 강한 힘, 수면으로 향하는 길이 위인지 아래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던 혼돈 같은 것뿐이었다.
전생의 자신이 아무리 일반인보다 튼튼하고 건강한 각성자였다고는 해도, 물속에서 숨을 쉬는 스킬까지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예견된 사고였고, 각오했던 죽음이었다. 제 능력 밖의 일임에도 떠밀리듯 맡아버린 그 순간부터 이브는 제가 죽을 자리를 알았다.
다시금 그녀는 웹소설에서도 쓰지 않을 한물간 설정이라며 툴툴거렸다.
‘아니면 누군가 결국 날 구해 병원에 입원해서 혼수상태로 기절해 있는 걸 수도 있지. 이건 코마에 빠진 내 뇌가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꾸며낸 망상이고.’
하지만 이브는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기로 했다. 그편이 더 행복할 테니까.
신주영의 삶은 이브의 삶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외롭고 매우 지난했다.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발버둥 치던 별 볼 일 없는 인생. 심지어 그 마지막이 혼수상태에 빠져 호흡기를 달고 누군가가 숨을 멈춰주기 전까지 끝없이 스스로 꾸며낸 환상에 갇힌다는 결말로 끝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이브는 차라리 행복회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정신승리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필수 요소였다.
‘하지만 익사라니.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마흔 전에 요절할 거라고 막연하게 각오는 했지만, 기껏해야 괴물한테 배를 뚫리지 않을까 생각했지. 익사는 예정에 없었다고.’
곧 이브는 과거의 자신에게 미련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그저 죽고 죽이기에 바빴던 황폐하기만 한 지난 삶이 딱히 그립지 않았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기로 했다. 미래에 있을 일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이브는 이 세계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던전 들어가기 전까지 밤새도록 했던 게임이었지. 「이브를 위하여」. 히든엔딩 깨는 게 진짜 제일 힘들었는데. 그래도 엔딩은 보고 죽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역하렘 고수위 연애 시뮬레이션 오토메 게임인 「이브를 위하여」는 모든 엔딩이 감금, 고문, 살인으로 점철된 극피폐 스토리와 하드한 난이도로 많은 플레이어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조금만 선택지를 잘못 골라도 바로 게임오버나 배드엔딩 루트로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해피엔딩이라고 쳐줄 만한 엔딩 역시 주인공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 국경을 건너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고독하게 혼자 여생을 보내다 병사하는 엔딩이나 자신을 감금 및 강간하며 집착하던 남주인공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감금당하는 엔딩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미친 짓들을 겪어놓고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주인공 이브는 생불이었다.
그 외에도 도망치다 잡혀서 팔과 다리가 잘린 채 평생 남자 주인공에게 돌봄을 당하며 살아간다거나, 이어지는 폭력과 집착에 결국 정신을 놓고 이지를 상실해 백치가 된다거나, 그도 아니면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에게 복수하겠답시고 동반자살을 해버린다거나 하는 다양한 배드엔딩이 도사리고 있었다.
50개의 엔딩 중 배드엔딩은 서른여덟 가지. 심지어 배드엔딩의 절대다수에서 주인공이 처참하게 죽는다. 공포게임도 아니면서 게임오버는 또 얼마나 잔인하게 묘사되는지. 잔혹한 묘사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게임오버를 「장기자랑 엔딩」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게임 내내 수십 번은 봤을 게임오버 화면을 떠올린 이브는 진저리를 쳤다.
이브의 인생을 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미친놈은 많았다. 그중 메인남주는 총 세 명이었다. 각각 이 나라의 황태자, 대공, 대마법사. 그리고 서브남으로는 황태자 루트를 타면 만날 수 있는 황태자의 호위 기사와 이브의 사촌 오빠인 소백작, 암흑가의 보스 정도가 있다. 하나같이 돈과 권력, 능력이 뛰어난 쟁쟁한 남자들이었다.
「이브를 위하여」의 난이도를 극악한 수준으로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그중 제일 심각한 것은 플레이어가 원치 않아도 자동으로 다중 루트를 탄다는 데에 있었다.
루트를 탈 수 있는 남주들이 다들 돈과 권력은 기본 스펙에 집착 얀데레 기질까지 필수로 장착하고 있어 한 놈만 걸려도 피곤한 인생일 텐데, 아무리 한 우물만 파고 싶어도 기본적으로 두 놈 이상과 플래그가 서버리니 집착을 기본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남캐들이 흑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본적으로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기 때문에 비록 남주, 남조 캐릭터들은 죄다 인성이 터져버린 미친놈들뿐이었지만 외모만큼은 다들 훌륭했다.
조각 같은 금발 벽안의 왕자님,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미모를 자랑하는 쇼타계 미소년, 쭉쭉빵빵 몸매의 흑표범을 닮은 나른한 나쁜 남자, 말수는 적지만 처연한 인상의 쿨데레, 이지적이고 냉철한 안경 미남, 근육이 두툼한 남성미 넘치는 도베르만과 미남 등등 스타일 역시 다채로워 취향껏 골라잡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생겨봤자 이 게임 안에서 잘생긴 남자는 하나같이 사이코패스에 미친놈이었고, 만에 하나 인성이 나쁘지 않을 땐 명줄이 짧았다.
취향껏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것도 게임일 때에나 해당되는 일이지 그게 현실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브는 흐린 눈으로 남자 주인공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자신은 이번 생에서도 남자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브는 전생에서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 두 달여간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의 욕설을 퍼부어가면서 무수히 많은 배드엔딩과 노멀엔딩, 해피엔딩, 트루엔딩, 가짜 트루엔딩을 섭렵하였으며 죽기 전 개발자가 SNS에 슬쩍 흘린 「히든엔딩」까지 정복했다. 그녀는 개발자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보다 「이브를 위하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게임이라니.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이브를 위하여」라니. 암만 인생이 거지 같았어도 이 미친 게임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범하게 알콩달콩 연애질하는 게임도 아니고 대체 어떤 얼빠진 사람이 수틀리면 납치하고 강간하고 그것도 안 되겠다 싶으면 다 죽이는 게임에 들어가고 싶겠냐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장르를 바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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