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 * *
“그럼 이건 어떨까?”
붉은 하늘을 가르는 검은 혜성.
지면으로 추락하는 재앙을 마주한 카일론은 들고 있던 방패를 집어 던졌다.
회전하며 혜성들을 깨부순 방패는 파편이 되어 쏟아졌다.
“후훗.”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쥬다스.
파편이 되어 쏟아진 방패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카일론의 신체 조각.
닿는 것만으로 몸이 썩어 들어가는 재앙의 씨앗이었다.
“그런 게 나한테 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쥬다스가 꼬리를 살짝 흔들자 둘 사이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형태의 문.
쏟아지던 파편들은 망자들의 물결에 휩쓸려 모두 사라져 버렸다.
“물론.”
클레이모어를 움켜쥔 카일론이 가로 날을 그었다.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잘려 나가는 차원.
우뚝 솟아 있던 민둥산은 차원과 함께 반으로 잘려 나갔다.
“그래? 그런데 잠깐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준 것 같은걸. 몰아치는 실력이 예전만 못해.”
지면에서 솟아오르는 기습적인 일격.
하반신을 꿰뚫린 카일론은 자신을 꿰뚫은 꼬리들을 단번에 잘라 냈다.
‘망각은 이제 없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군.’
쥬다스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저쪽에 생긴 변화를 카일론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용주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에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레귤러. 그 여자가 발목을 붙잡진 않을까 했는데, 그 반대인가.’
땅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쥬다스.
그의 머리가 바닥을 향함과 동시에 손톱을 세운 카일론은 지면을 뜯어냈다.
하늘로 내던져진 거대한 행성의 조각.
행성 표면을 순식간에 뒤덮은 하얀색은 쥬다스의 몸통까지 잠식해 갔다.
하얌의 정체는 구더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보통 생각하는 구더기와는 결이 다른 종이었다.
위험도로 따지자면 S급.
카일론이 직접 창조해 낸, 다른 곳엔 존재하지 않는 개체들이었다.
이 녀석들에게 한번 물리면 인간의 DNA는 영구적으로 재생 불가능한 피해를 입게 된다.
실력 좋은 의료 헌터가 근처에 없다면.
방사능에 피폭된 것 같은 끔찍한 고통.
경험해 보지 않은 인간이 과연 그걸 상상할 수나 있을까?
“이런 먹히지도 않을 잔재주나 부리고.”
머리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라져가는 하얀 물결.
산불처럼 번져 나간 죽음에 모든 구더기는 불살라졌다.
“앞으로 몇 분 주면 날 더 즐겁게 해줄 거지?”
세 방향으로 입을 찢는 쥬다스의 입가로 죽음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파장.
지평선까지 뻗어 나간 브레스는 직선상에 있던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대지에 남은 죽음의 상처엔 강물이 흘렀는데, 검게 물든 강물 속엔 방금 사라진 언노운들이 고통스럽게 뒤엉켜 있었다.
“10분? 20분?”
카일론을 휘감는 쥬다스.
뒷발굽을 든 카일론은 쥬다스의 몸통을 올려 찼다.
산산조각 부서지는 쥬다스의 몸.
포위망을 빠져나간 카일론은 세포를 변형시켜 만든 장창을 집어 던졌다.
쥬다스의 이마 정중앙을 꿰뚫는 일격.
순간 뒤로 젖혀진 그의 머리는 끝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정도면 되나?”
뒤로 넘어갔던 그의 얼굴은 금세 제자리를 찾아왔다.
반대편 풍경이 보이던 빈 구멍은 벌써 사라져 있었다.
‘그럼 나도 슬슬 템포를 더 올려야겠군.’
뒷발로 지면을 박찬 카일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카일론의 손에 들린 무기는 데스사이드.
가볍게 휘저은 한 획에 지면은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쥬다스를 쫓는 시선.
카일론이 한 번 사이드를 휘두를 때마다 지형이 바뀌었고,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단층이 요동쳤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사방으로 펼친 꼬리.
자신의 몸을 고정한 쥬다스의 입가로 다시 한번 죽음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맞부딪치는 죽음과 부패.
상쇄되어 흩날리는 두 힘 사이를 강하한 카일론은 쥬다스의 목에 칼날을 욱여넣었다.
키이잉~!
그와 동시에 카일론을 강타하는 섬광.
몸통 곳곳에 나 있던 날개에서 사출된 힘은 카일론의 몸에 크고 작은 바람구멍을 선사했다.
휘익~!
기습에 아랑곳하지 않은 카일론은 준비해 둔 두 번째 공격을 선사했다.
입속에 자리한 머리를 꿰뚫는 카일론의 손.
쥬다스의 머리를 과일처럼 으깬 카일론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
크게 뒤로 물러난 카일론은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왼쪽 어깨 아랫부분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부서진 팔은….
우적우적…. 까드득!!
굳게 닫힌 녀석의 입속에 들어 있었다.
결정적인 일격.
방금 그건 누가 봐도 그렇게 보였겠지만, 쥬다스는 그렇게 간단히 죽어 줄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끝날 거였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고.
꿀꺽!
쩝쩝거리던 걸 삼킨 쥬다스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카일론의 팔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쥬다스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뿌득…. 뿌드득…!!
부서진 육체를 빠르게 수복하는 카일론.
왼손을 입가에 가져간 카일론의 모습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흐음…?”
어깨를 스쳐 가는 부패의 기운.
뭔가 재밌는 걸 마주했다는 듯 쥬다스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규칙적인 배열을 갖춘 입자.
뒤를 돌아본 쥬다스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카일론이었다.
투구를 눌러쓴 듯 입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던 카일론의 얼굴엔.
날카로운 이빨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촤악~!!
순식간에 쥬다스를 크게 한 입 베어 먹는 카일론.
엉망으로 뜯겨 나간 신체 조직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고기를 입에 대는 건 꽤 오랜만이지 않나?”
온몸을 관통하는 극심한 통증.
뒤통수를 크게 한 입 내어 준 쥬다스는 여유를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카일론의 모습은 또다시 재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 * *
‘그 정도 소란이었는데도, 전혀 반응하지 않잖아.’
카르고스의 유해를 지난 용주는 내성 안쪽으로 진입했다.
안쪽 역시도 바깥쪽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성을 베이스로 곳곳에 다른 세계가 녹아들어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모습으로.
그때 느꼈던 쥬다스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녀석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언노운을 비롯한 다른 어떤 것도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사신형 언노운.
모스맨형 언노운.
각 진영을 상징하던 S급 개체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막지 못했다면, 다른 녀석들론 어차피 안 된다 그거냐.’
침입 경로를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었다.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니까.
‘이 위인가.’
공중에 떠 있는 타오르는 불길.
화마에 삼켜진 부유석을 차례로 밟은 용주는 가장 높은 곳에 섰다.
녀석이 있는 곳은 이 천장의 위.
막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길이야 만들면 그만이었다.
‘먼저 한 방 시원하게….’
광폭화에 이은 에스카톤 저지먼트.
개전을 알리는 축포로 시원하게 한 방 꽂아주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부유석을 밟은 용주의 주변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
심장을 파고드는 섬뜩한 한기.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벽과 기둥.
오래된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는 끔찍한 비주얼의 가죽 장식품들.
유리병에 담긴 살아 있는 눈알들.
똑같은 모습이 데칼코마니로 비치고 있는 하늘.
그리고.
“어서 와라.”
쥬다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문을 배경 삼아 앉아 있는 건.
분명 녀석이었다.
“인간이라. 그래. 그래서 그런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던 건가.”
거만하게 다리를 꼰 쥬다스가 흥미롭다는 듯 용주를 바라보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갇힌 석조문엔 고통스러운 얼굴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카일론. 내가 녀석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네. 설마 이런 걸 준비해 뒀을 줄이야. 이런 반쪽짜리 괴물을.”
용주에게서 느껴지는 선명한 근원의 힘.
근원은 하나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나도 두 종류.
어느 한쪽도 그리 쉽게 볼 크기가 아니란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로지가 인간 따위에 당할 줄은.
“내가 준비해 둔 선물이 그렇게 망가진 것도 이해가 가. 설마 로지가 아닌 다른 자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가볍게 손짓하는 쥬다스에게 날카로운 냉기가 내리꽂혔다.
손가락만 까딱인 쥬다스는 룬검의 냉기를 손쉽게 무로 되돌렸다.
“그간의 노력이 영 아쉽게 됐어. 재료를 모으고, 만들어서, 죽음으로 담금질한 일련의 과정은 꽤 손이 많이 갔는데…. 뭐, 말을 가르치는 건 나름 유쾌하긴 했었지만. 유인원을 하나 가르치는 것 같았거든.”
“생각보다 입이 가볍군.”
담금질.
녀석의 그 말이 유독 머릿속에 남았다.
그건 카일론이 자신에게 남겨 뒀던 단어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그 녀석과 자신에겐 공통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녀석도 자신도.
결국, 목적을 위해 담금질 된 존재이자 병기였으니까
다른 게 있다면.
그걸 제외한 모든 게 달랐다는 정도겠지.
“여유는 강자의 특권이거든. 죽음이 서두르지 않는 건 필멸자들에겐 축복이지. 안 그래?”
어깨를 들썩인 쥬다스가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역시 로지를 믿진 않았나 보지?”
“내가 믿는 건 오직 나뿐이거든. 방심한 순간 비수를 꽂아 넣는 게 로지가 즐겨 쓰던 방식이기도 하고. 녀석과 대면했다면 너도 잘 알 텐데?”
“내가 상대했던 녀석은 역시 로지의 발목을 잡기 위해 준비해 둔 거냐?”
“그래.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돼야 했지.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말이야.”
“직접 상대하기에는 무서웠나 보지?”
“무섭다? 하핫! 푸하핫! 그거 참으로 유쾌한 농담이구나!”
시원하게 폭소를 터뜨린 쥬다스가 박수를 보냈다.
“로지의 힘이야. 조금 까다로울 정도일 뿐이지. 삼킬 수 없는 망각이야 악몽보다 못해.”
“거짓말이 서툰걸.”
“거짓말?”
“로지의 힘이 그 정도라면, 왜 진작 삼키지 않았지? 카일론이 없던 시간이 기회였을 텐데?”
“그거야 간단하지. 녀석이 나보다 차원에 훨씬 능했으니까. 카일론에 비하면 뭐, 아쉬운 수준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대답한 쥬다스가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필요가 있으니 남겨 두는 건 당연한 선택이지. 카일론을 처리하면, 자연스레 차지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니.”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지 않냐고.
더 반박할 말이 있냐고 묻는 쥬다스의 눈빛.
“글쎄. 과연 정말 그럴까?”
자신만만한 그의 앞에서 용주 역시도 자신감을 보였다.
“그럼 녀석은 왜 만든 거냐?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유쾌한 장난이지. 단순무식한 로지라면 절대로 그 녀석을 죽음에서 끄집어낼 생각을 못 했을 테니까.”
여유롭게 턱을 괸 쥬다스가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기억도, 의지도, 자신도 없다. 그렇게 되면 망각에 삼켜질 염려도 없지. 설령 누군가의 조각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순 없고. 쓰러뜨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성상 최악의 적인 거지.”
잠시 눈을 감은 쥬다스가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녀석, 자기 마음대로 안 풀렸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참 일품이거든. 보는 입장에서 아주 유쾌하지.”
“…그래. 확실히 로지라면 그런 식으론 쓰러뜨리지 못했을 테지. 최악의 상성이었을 테고.”
“훗! 인정은 빠르구나. 아주 좋은 자세야.”
“하지만 정답은 아니야.”
“정답이 아니다?”
“유쾌한 장난. 넌 분명 그렇게 말했지. 아니. 거기서부터 틀렸어. 넌 의식하고 있던 거야. 녀석의 힘을. 그래서 그 귀찮은 일련의 과정을 벌였던 거야.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흐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말해 주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긴 한데, 말로 하긴 슬슬 입이 아파서 말이야.”
순식간에 변화하는 풍경.
“그러지 말고 직접 보는 게 어때? 네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을.”
발아래 부서지는 물결엔 붉은 달이 비치고 있었다.
아리아의 세계 속에 있는 건 자신 혼자.
쥬다스는 자신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처음이니, 특별히 신경 써 줄 테니까.”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수많은 생각, 기억, 감정.
로지의 힘을 이용한 용주는 최고의 악몽을 위한 퍼즐을 맞춰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