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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45화 (345/357)

345화

“조금 따끔할지도.”

기사의 왼쪽 어깨 갑주에 닿은 메스.

수지의 메스는 갑주를 무시한 채 안쪽을 휘저었다.

가볍게 휘저은 메스가 갑주 끝을 스칠 때마다 메스에 묻어 나온 검은 액체가 먹물처럼 흩뿌려졌다.

‘이 모습. 분명 어디선가….’

완전히 달라진 수지의 전투법에 용주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메스를 휘두르는 의료 헌터.

자신의 갑피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도륙해 냈던 여자.

그래.

저건 분명 엔비가 보여 줬던 전투법이었다.

‘왜 녀석이….’

하지만 수지와 엔비의 전투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엔비는 생명을 깎아 내는 죽음의 천사였지만, 수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수지의 메스는 엔비와 같이 적을 베어 내고 있었지만, 생명력을 깎아내던 전 주인과 달리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베면 벨수록, 베이면 베일수록 치유가 되는 검이라고….’

상식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상식조차도 지금 보기 좋게 부정당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다는 건.

꼭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통해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꾸오오~!!”

순간 잠잠해진 기사의 발버둥.

아까의 기억을 되새긴 용주는 재빨리 대검을 후려쳤다.

포물선을 거리며 날아가는 대검.

기사의 왼손을 꼬리로 휘감은 용주는 기사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고정시켰다.

‘와라.’

반짝이며 빛나는 안광.

혜안이 보여 준 미래의 풍경을 확인한 용주는 작은 동작만으로 섬광을 흘려보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기사를 베어 내면 베어 낼수록.

묻어 나오는 어둠을 흩뿌리면 흩뿌릴수록.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슬픔, 분노, 절망, 원망, 단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을…. 목을 쳐.”

그때.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이건 분명 기사의 목소리였다.

“그래. 알았어.”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수지는 순식간에 기사의 목을 그었다.

피 대신 흩뿌려진 먹물.

드드득…!

무한히 재생되던 기사의 투구에 선명한 균열이 생겼다.

회복되지 않고, 재생되지 않는 상처.

부서져 내리는 투구 속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의 기운은 삽시간에 두 사람을 삼켰다

회오리치는 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망자들의 형상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칵…!”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나오는 용주가 땅을 긁어냈다.

사자가 제 새끼를 물어 옮기듯 조심스레 다문 용주의 이빨 사이엔 수지가 있었다.

“괜찮아. 그보다 저기….”

수지가 기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담담한 듯 보였지만, 수지의 목소리는 평소랑은 조금 달랐다.

회오리치던 죽음의 바람이 사라지자 그 자리엔 끔찍한 형태의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빠져나오려 안간힘 쓰다 끝끝내 나오지 못하고 죽은 듯 보이는 망자들.

특정 종족이나 형태라고 분류하기도 힘든 것들은 그냥 형편없이 버려져 있었다.

“아악…. 아아악….”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무릎을 꿇은 기사.

목 위쪽의 갑주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 있는 그는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람은… 아니었나 봐.”

기사의 갑주 안쪽을 들여다볼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폭식 분쇄에 반신이 날아갔던 건 용주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안쪽에서 볼 수 있던 건 까만 죽음뿐이었었다.

그 안쪽에 뭔가 있는지.

뭐가 있긴 한 건지 거기까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기사의 모습은 전혀 다른 생명들의 부분 부분을 엮어놓은 것처럼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접합면에 끈적하게 녹아 있는 점액은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과 같은 것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눈의 형태가 전혀 달랐고, 피부의 색감과 질감 역시 부분 부분 전혀 달랐다.

지금 저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키메라.

그것보다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 없을 것이다.

“…….”

완전히 사그라든 기사의 투지.

광폭화 상태에서 벗어난 용주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녀석을 잠식하던 죽음의 기운은 매초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기사는 웅덩이를 거닐었다.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일어나고 또 일어난 기사는 혼자 힘으로 결국 웅덩이를 빠져나왔다.

기사의 상반신을 덮던 갑옷은 엉망으로 부서져, 그 안에 감추던 끔찍한 것들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 녀석에겐 더 많은 자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은 내게 안식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는 기사.

구원을 바라는 듯한 그의 말은 끊임없이 반복하던 대사들과 달랐다.

그의 말은 하나였지만, 그 뒤로 수많은 언어들이 겹쳐 들렸다.

각 언어들의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이제 괜찮은 거야?”

수지가 물었다.

“괜찮다? 괜찮다는 기준이 뭐지?”

“널 지배하던 게 이젠 사라졌냐고.”

“…그래. 죽음은 내게 더 이상 속삭이지 않는다.”

어깨에서 떨어져 나온 팔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각조각 나 있는 팔의 살점들은 원래 자기 모습을 찾아가려는 듯 풀어져 나왔다.

“그럼 이제 우릴 도와줄 수 있겠네.”

“…너희는 녀석과 대적할 셈인 거냐? 죽음의 귀공자와.”

“응.”

“그런가.”

당당한 수지의 대답에 기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왼쪽 발목이 떨어져 나간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미안하지만 너흴 도와줄 순 없을 것 같다. 보다시피 몸이 이 모양이라.”

“치료해 준 게 효과가 없던 거야?”

자신이 한 건 분명 치료였다.

그렇게 보이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그 결과였다.

치료를 했는데, 몸이 무너지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뭔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네 힘은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너무도 따뜻했고, 너무도 평온했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건 그 덕분이다.”

“그럼….”

“하지만 그 따스함이 우릴 우리로 있게 해주던 걸 가져갔다. 불 앞에 놓인 눈사람은 녹아내릴 뿐이지.”

“…….”

“우린 네게 감사한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영겁의 고통 속에서 우릴 나오게 해주었으니.”

수지의 눈빛에 기사가 먼저 감사를 표했다.

“역시 너는. 아니, 너희는 녀석에게 살해당한 녀석들의 집합체인 거냐?”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어딘가의 영웅, 어딘가의 괴물, 어딘가의 신, 또 어딘가의 종말. 우린 모두 다르지만, 우린 모두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는 걸.”

붉게 빛나는 기사의 안광.

빨려 들어가는 듯한 시야 속 용주의 머릿속에 처음 보는 세계의 모습이 펼쳐졌다.

동시에 보이는 수많은 풍경들.

모든 것이 달랐지만, 공통된 한 가지가 있었다.

쥬다스.

영웅, 괴물, 신.

그밖에 뭐라고 불리는 녀석이건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쥬다스와 마주했고, 맞섰고, 패주했다.

죽음에 잠긴 그들의 기억은 더 이상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우린 너흴 도울 수 없다. 하지만 너희가 우릴 도와준다면, 우리 역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겠다.”

“보답?”

“우리의 기억, 우리의 감정, 우리의 경험. 녀석과 상대했던 모든 것. 우리에겐 아직 그게 남아 있다.”

기사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녀석들의 힘 자체를 얻을 순 없지만, 적어도 그 기억들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전투에 상당한 도움이 될 테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수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다. 내가 이렇게 나로 남아 있을 때. 여기 있는 모두가 나랑 같은 생각이다.”

“어떻게 하면 편해질 수 있어?”

“죽음은 저주. 그 저주에서 멀어지면 우린 당연한 질서 속으로 사라질 거다. 내 말뜻 이해할 수 있겠지?”

자신을 향한 시선에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이고.”

수지의 시선에 용주가 대답했다.

메스를 집어넣은 수지는 기괴하게 뒤틀린 기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응. 최선을 다해 볼게.”

깊은숨을 내쉰 수지의 마나가 큰 물결을 일으켰다.

남아 있는 전부를 쏟아붓는 수지.

밝게 빛나는 기사의 안광은 이전의 기억을 상기시켰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용주를 향한 안광은 많은 것을 전해 주고 있었다.

“고맙다.”

수십, 수백 가지 언어와 목소리로 들리는 한마디.

완전히 분해 되어 흩어진 기사는 한 줌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고맙긴.”

갑작스럽게 찾아온 극심한 빈혈기.

순간 의식이 멍해진 수지를 용주가 급하게 붙잡았다.

“괜찮냐?”

“응. 근데 좀 어지럽네. 마나 고갈인가 봐.”

잠시 눈을 감은 수지가 심호흡을 했다.

“저기까지만 같이 가줄 수 있어?”

“못할 건 뭐겠냐.”

용주의 부축을 받은 수지는 거대한 이빨에 몸을 기댔다.

“사라지는 그 사람들 감정 느낄 수 있었어. 마지막엔 그래도 편안한 것 같더라.”

“…그러냐.”

“근데 왜 사람이 아닌 걸 억지로 사람처럼 만들어 놓았을까. 아니지,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처럼 만들어 놓은 건가?”

“글쎄. 단순한 심심풀이였을 수도 있고, 전리품의 또 다른 종류일 수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 뭔가를 시도해 본 걸 수도 있고. 정확한 건 녀석만 알 일이지.”

“응. 그렇겠네. 건네받기로 한 건 잘 받았고?”

“그래.”

녀석이 보여 준 마지막 기억들 속엔 쥬다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저마다의 힘과 저마다의 스킬로 최후의 항쟁을 벌였던 녀석들.

차곡차곡 쌓인 그 기억들은 지금 용주에게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다행이네.”

안심한 듯 머리를 기댄 수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있잖아. 나 방금 한 가지 정했어.”

“뭘?”

“잠깐 내려놓기로.”

“내려놓다니 뭘?”

“내 의지.”

“의지?”

“응.”

짙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지금의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지금의 난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거야. 그래서 내려놓으려고.”

“…여기 남겠다고?”

“응.”

“여기까지 와서?”

“응.”

수지가 이런 말을 가볍게 할 리가 없었다.

무심하게 툭 던졌지만, 분명 속으론 많은 생각을 했겠지.

“그래. 그럼….”

“아니.”

차원을 열려는 용주를 향해 수지가 고개를 저었다.

“차원을 열고, 유지하려면 마나가 들어가잖아. 그것도 엄청 많이. 분명 안 좋게 작용할 거야.”

“고집부리지 마.”

“여기라면 괜찮아.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

“다 끝내고 그러고 돌아오면 되잖아. 이길 거니까. 문제없잖아.”

고집부리지 말라고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그 정돈 아무 문제 없다고.

내가 감당하면 되는 부분이라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수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진심이.

그녀의 믿음이.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렇지?”

“…그래.”

작은 한숨을 내쉬는 용주의 곁에 번개가 아른거렸다.

모습을 드러낸 라이덴.

망각의 땅을 지키던 그녀는 지금 여기 있었다.

“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응.”

두 사람을 등진 용주가 발걸음을 옮겼다.

툭….

갑작스럽게 멈춘 발걸음.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른 용주는 다시금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네 고집 덕에 그래도 이만큼 할 수 있었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용주는 괴수의 두개골을 지나, 카르고스의 머리를 밟았다.

반쯤 날아간 머리를 지난 용주는 그 너머로 사라졌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네.”

라이덴을 바라본 수지가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수지의 곁으로 다가온 라이덴은 그녀를 감싸듯 앉았다.

“기대라는 거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뼈밖에 없는 라이덴이야 원래 기대고 있던 이빨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더 따뜻했다.

“걔가 알면 엄청 뭐라고 하겠지.”

완전한 고요.

그동안의 소란이 환상인 듯 사라지자 서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책임지고 데려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자기가 이랬단 걸 알면 크게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나중에 사과하면 용서해 주겠지.”

점점 감겨 오는 눈꺼풀.

눈가를 비빈 수지는 라이덴에 좀 더 기댔다.

“졸리네. 좀 자야겠어.”

눈을 감은 수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만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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