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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40화 (340/357)

340화

“좋아! 후름라이드까지 컴플리트! 다음은….”

기뻐 보이는 동생의 모습과 계속해서 들려오는 주변의 웅성거림.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풍경이었다.

“아! 오빠! 잠깐만 여기 있어 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래.”

다리 난간에 기댄 용주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정신이 또렷했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몽롱한 감이 있었다.

마치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용주 씨?”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으로 보이는 거대한 성.

그 성을 배경 삼아 이쪽을 보고 있는 이는.

은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뭐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녀석이 여기에.

그것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머리띠 떨어졌어요. 여기요.”

“그래.”

“손 말고 머리 줘봐요. 빨리!”

뭔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눈높이를 맞춘 용주.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속에 용주는 눈썹을 기울였다.

‘뭐지?’

방금 분명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뭔가가 부자연스럽다고.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가 이상했던 거지?

대체 뭐가 부자연스러웠던 거지?

분명 뭔가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그게 대체 뭐지?

“됐다! 제가 지난번에 그러고 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용주 씨 같이 유명한 사람이랑 연인처럼 잡혀가지고.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

“그럴 거면 확 고백해 버리자 했었거든요. 용기 내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었으면 용주 씨랑 여기 다시 오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일이… 있었던가?’

“아! 저기 아이스크림! 저거 먹자고 했잖아요! 가요!”

팔짱을 끼는 은정에게 이끌린 용주는 인파 사이를 뚫고 나갔다.

“야! 야! 이용주!”

노을이 지는 놀이공원.

순간 덮쳐 온 피로감에 멍해 있던 용주가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내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너?!!”

서윤이 있었다.

그것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차림의.

단발이었던 그녀의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이 되어 있었다.

“감히 다른 여자를 봐?! 이 아름다운 날 두고?!”

“아….”

“딱딱한 말투 금지!”

“…….”

또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오늘 하루 종일 이 녀석이랑 같이 있었을 텐데.

뭘 잊어버린 거지?

“슬슬 해도 지고~ 밤이 되면 여기 조명이 이제 쫙 들어오겠네. 분위기 완전 그럴듯할 거야.”

서윤은 즐거워 보였다.

뭔가 엄청난 기대감에 차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밤이 되는 거 기다리고 있지?”

“……?”

“실은 네가 말 꺼냈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굳이 여기 같이 오자고 한 거면 말 다했지.”

용주와 마주 보고 선 서윤이 옆머리를 찰랑였다.

“더 기다리지 말고 확 말해 버리지 그래? 난 이미 마음의 준비 다 해뒀다고. 밤까지 질질 끌고 갈 필요 없어.”

“…….”

“빨리! 이 노을이 찬스라고!”

용주의 턱을 짚은 서윤이 은근한 손짓을 보냈다.

노을이 비친 서윤의 분홍 머리는 평소보다 더 윤기 나게 빛났다.

“어서 날 좋아한다고 말해! 내가 좋아졌다고! 너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려는 입.

의식의 영역으로 나온 용주는 그 입을 서둘러 틀어막았다.

녀석에게 고백받았던 날 밤의 기억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후에 녀석과 함께했던 일들일 스쳐 갔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 기억이 맞는가 하는 의문.

모든 생각이 자기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첫 단추가 된 기억엔 감정이 함께 녹아 있었지만.

다른 기억들엔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기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억지로 집어넣은 것만 같이 ‘마음’이나 ‘감정’이란 단어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게 해놓고 속으로 즐기고 있는 거지! 너! 이러려고 일부러 뜸 들이고 있던 거지!”

‘그래. 그런 거였나.’

순간 머릿속에 낀 안개가 확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앞에 있는 건 분명 서윤이었지만, 이건 녀석이 아니었다.

왜냐면.

진짜 녀석이었다면….

“뭐 아무튼! 나랑 같이 있자. 여기서 평생. 내가 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게.”

“정말 괜찮겠냐?”

“그럼 당연하지! 빨리! 시간 없어.”

“지금 하면, 불꽃놀이 못 볼 텐데?”

“괜찮아. 그런 것쯤이야.”

“그러냐.”

서윤의 손을 치워 낸 용주가 작은 숨을 내쉬었다.

“어이.”

차갑게 식은 용주의 목소리.

서윤을 보는 용주의 눈빛은 조금 전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날 너무 물로 본 거 아니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용주 너 갑자기 왜 그래.”

“이 정도로 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람 잘못 봤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뭐야? 창피해서 말 돌리기로 한 거야?”

“확실히 그럴듯하게 잘 만들어 놓긴 했어. 부자연스러운 교차점도 망각으로 잘 가려 놨고, 어떤 게 현실인지, 어떤 게 내 기억이고, 어떤 게 내 생각인지조차 흐릿하게 만들어 놨으니까.”

“…….”

“그런데 기억을 들춰 볼 거면, 조금 더 세밀하게 보지 그랬냐?”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잘 모르겠는데?”

“정말로 네가 서윤이고, 정말로 여기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면, 노을이 아니라 밤을 기다렸을 거다.”

“…그건 모르는 거잖아. 여자 마음은 갈대야. 그때그때 바뀌는 거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불꽃놀이와 폭죽. 녀석에게 있어 그건 일종의 로망이다. 그리고 녀석이라면 내가 그 이야길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거다.”

“…….”

“녀석이라면 내가 생각해 둔 때가 오기를.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동화 같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을 거다. 아무리 마음속에서 쿵쿵거리고, 조바심이 나도, 꾹 참았을 거다.”

“아니야.”

“불꽃처럼 팍 치고 나가는 녀석이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 다 그런 건 아니야. 네가 만든 기억엔 그 마음이란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용주의 곁을 감싸는 짙은 부패의 바람.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부패에 주변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형태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지.”

서윤이었던 형상이 끈적거리는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로지.

이목구비가 다 헝클어진 로지에겐 이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전혀 없었다.

“남아 있는 네 잔념으론 이게 한계인가 보지?”

“말도 안 돼. 빈틈은 없었을 텐데.”

“빈틈이 없었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뭐라고?”

“알고 있으니까 적당히 덮어 놨던 거겠지. 네가 생각한 완벽한 동화였다면, 이런 식으로 전개를 날림으로 하진 않았을 거야.”

고운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풍경.

어둠 속에 남은 건 이제 두 사람과.

은은하게 비춰 오는 붉은 달빛이 전부였다.

발바닥 아래에서 참방거리는 물은 지평선까지 채워져 있었다.

“있을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그 이야긴 이미 한 번 들은 것 같은데.”

“네가 내 육신을 전부 먹어 치웠잖아. 내가 사라졌다는 건 네가 누구보다 확신했을 거잖아.”

로지의 미간이 바르르 떨렸다.

평온한 호수에 일어난 물결.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용주의 부모님과 동생.

은정과 수지.

그 밖에 주원과 예나를 포함한 다양한 이들의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두 발로 걷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고 있었다.

“더 할 말은 없겠지.”

답을 주지 않은 용주는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베어 냈다.

“너…!”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허수아비를 베어 내고 내가 죄책감이라도 느낄 줄 알았나 보지? 미안하지만 그러기엔 잠이 너무 많이 깼어.”

모든 환영을 베어 낸 용주는 로지를 눈앞에 두었다.

“마지막으로 너한테 한 가지 감사를 표하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로지의 잔념.

끔찍한 상처를 입은 로지는 녹아내리며 사라져 갔다.

“두 번 죽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안 돼! 안 돼!!!”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너와 마주할 일은 없었을 거다. 이 망할 자식아.”

물컹거리며 흘러내리는 로지의 몸을 용주는 도륙하고 또 도륙했다.

완전히 녹아내린 로지는 더 이상 여기 존재하지 않았다.

▶ 망각을 제거했습니다.

▶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 새로운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 망각잔영.

▷ 망각의 근원을 사용합니다.

-실체가 있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잔영은 각자의 의식과 판단을 가지며, 동시에 본체의 생각에 반응하며, 복종합니다.

-잔영이 입는 피해는 각 잔영이 별개로 적용됩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잔영은 소멸합니다.

▶ 잊힌 밤의 아리아.

-적의 영혼을 망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적의 기억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입은 모든 종류의 대미지는 육신에도 고스란히 새겨집니다.

“…….”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 용주는 검을 집어넣었다.

잔념이 남을 수 있다.

실베스의 경우를 보면 그게 가능하단 것 정돈 예상할 수 있었다.

녀석보다 더 강한 상대인 로지가 그것보다 못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이 정도로 휘말렸다.

깨닫지 못하고 녀석에게 먹혔다면, 아마 그때 봤던 이준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되어 있었을지도….

“돌아갈까.”

상처와 힘의 회복.

이 스킬의 효과를 지금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힘은 온전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그래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꿈이었다. 그것만은 인정해 주지.”

앞머리를 쓸어 올린 용주는 잠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한여름 밤의 달콤한 꿈.

이제 거기서 깨어날 때였다.

* * *

“좋은 꿈 꿨어?”

수정을 깨고 나온 용주를 맞이한 수지가 물었다.

“그래. 썩 나쁘진 않았어.”

“다행이네. 뭔가 중간부터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래? 뭐, 표정이야 난 모르니까.”

대충 얼버무린 용주가 로지가 내려왔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움직이자. 저기가 놈의 침실이 있는 곳일 거야.”

“응.”

길을 따라온 두 사람은 반쯤 열려 있는 예쁘장한 문을 발견했다.

문 안쪽은 상당히 공을 들여 꾸민 인테리어가 돋보였는데, 인간의 기준으로 치면 꽤 기괴하게 생긴 것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자기 머리를 뜯어먹고 있는 조각상 같은.

“제대로 찾아온 것 같긴 한데.”

공주님 프릴이 장식된 침대와 화장대를 살핀 수지가 이야기했다.

방엔 창이 여러 개 나 있었는데, 모두 북쪽을 향해 있었다.

“문을 열라고 했었지.”

카오스 게이트와 유사한 균열은 보이지 않았다.

열라고 한 것은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중 어떤 무언가가 문이란 이야기겠군.”

용주는 방 안 곳곳을 살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해 냈다.

“안 비치네.”

방 한 면을 채울 정도로 거대한 거울.

종 하나가 장식되어 있는 이 거울엔 아무것도 비치고 있지 않았다.

“…여기 남는 선택지도 있다.”

잠시 거울을 바라보던 용주가 이야기했다.

“그냥 내 차원에 머무르는 선택지도 있고.”

“응. 그치만 그건 내가 고를 선택지가 아닌걸.”

잔잔하지만 단호한 수지의 대답에 용주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그걸 바란다고 해도?”

“응. 안 돼. 너는 내 가족이니까. 가족을 위험한 곳에 혼자 버려두진 않을 거야.”

수지가 자기 은시계의 목줄에 손을 올렸다.

“그게 내 의지야. 그리고 그게 내가 물려받은 의지야.”

‘의지….’

그 말을 들은 용주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짚었다.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었지만.

물려받은 게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후, 그래. 대신 나도 이번처럼 내 마음대로 굴 거다. 그것만은 나도 양보 못 해.”

“응. 알았어.”

작은 한숨을 내쉰 용주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떠오르는 연등 빛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거울에 물결이 일었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이면 돼.’

각오를 다진 용주는 거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잔잔한 물결이 인 침실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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