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분명 베어 물었었는데.’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수정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흔적이 없는 건 자신의 HP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이 적중했고, 대미지가 들어갔다면, 필연적으로 회복이 이루어져야 했을 텐데.
HP나 상처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포식은 적의 방어력을 관통하는 스킬.
적중하냐, 하지 못했냐로 결과가 갈릴 순 있겠지만,
뚫었느냐 뚫지 못했냐로 결과가 갈리긴 힘든 스킬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불과 몇 초 만에 처음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풍경.
공간의 지배권은 이쪽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여섯 개의 꼬리를 활짝 펼친 용주는 다시 한번 로지를 덮쳤다.
결과는 이번에도 마찬가지.
신기루를 베어 낸 듯 반대편으로 뚫고 나온 용주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왼쪽 발목이라 할 수 있는 부위가 완전히 90도로 휘어 있었다.
‘대미지를 전혀 줄 수가 없잖아.’
영혼 안개를 펼쳤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안개의 반응하는 생명체는 0.
어떤 영혼의 흐름도 용주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사라질 것들이라고 그랬던가?’
망각의 기운 속 봤던 연등.
지금 녀석을 감싼 결정은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등의 빛을 용주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잠…. 꿈이라고….’
녀석이 꾸고 있던 동화 같은 꿈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허구의 공간 같았던 그곳에서 만났던 폭식의 여왕은 실제로 거기 존재했었다.
‘녀석은 지금 거기 있는 건가.’
로지는 분명 눈앞에 있었다.
수정으로 몸을 감싸고.
돌기로 얼굴을 감쌌다고 한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 처음 도착해서 녀석을 찾을 수 없었던 그때처럼.
‘외부에서의 공격은 전부 무효. 녀석을 쓰러뜨리려면, 그 안에서 쓰러뜨려야 한단 건가.’
펼쳤던 차원이 사라지자 처음 로지를 만났던 홀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린 용주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홀 전체에 널린 많은 거울들엔 모두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반파 이상의 피해를 주고받은 뒤 잠이 들었다.
그렇다면 목적은 명확했다.
녀석은 그 안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부상을 치료할 거다.
자가 회복이라면, 이쪽도 자신 있는 분야였지만, 아마 회복력에서 상대가 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카일론과 쥬다스.
그 두 녀석이 부딪치며 방출하는 힘은 ‘눈’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선명하고, 강렬했다.
‘잠깐만.’
방법을 모색하던 용주의 눈동자에 순간 이상한 게 스쳤다.
‘저게 뭐야.’
거울 속에 뭔가 있었다.
강제로 비틀어 연 듯 찢어진 차원의 균열과 그 균열을 감싸는 주황색 수정.
고개를 돌린 용주는 그게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긴 아무것도 없었다.
거울엔 비치고 있었지만, 용주의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잠깐만. 이 위치라면….’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
이 위치.
분명 자신이 수지를 다른 차원으로 보냈던 그 자리였다.
‘설마.’
용주는 차원을 불러오려 했다.
하지만 차원이 반응하지 않았다.
로지가 만든 소용돌이 속에서 차원을 이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대체 어느 틈에.’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기미도.
이런 이상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고.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다는 걸.
‘안수지….’
뭐라도 해야 한다.
그게 뭔진 몰라도 뭔갈 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용주가 크게 휘청거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팔이.
다리가.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뭔갈 하려면 우선 이 상처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자신의 몸은 지금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 * *
“수지야~ 내려와서 밥 먹어.”
귓가를 간질이는 포근한 목소리.
기분 좋은 아침 햇살에 눈을 뜬 수지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음?”
두 눈을 깜빡인 수지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굉장히 멍~한 그런 느낌이었다.
“수지야! 아직 자는 거야? 깨워 달라고 했잖아.”
“응. 그랬었지. 참.”
조금 더 커진 엄마의 목소리.
이부자리를 정리한 수지는 방문을 나섰다.
“우리 딸, 좋은 아침.”
“안녕히 주무셨어요.”
모닝 신문과 모닝커피.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계신 아버지와 눈을 맞춘 수지가 자리에 앉았다.
“좋은 시절 다 갔네. 벌써 개강이라니.”
“응. 그러게요.”
‘음?’
자연스러운 대답 뒤에 따라붙은 물음표.
뭔가가.
뭔가가 이상한 것 같았다.
방학?
개강?
그런 일이 있었던가?
“새로운 후배들도 보겠네.”
“응. 아마 그렇겠지?”
“우리 딸은 언제쯤 엄마한테 남자친구 소개시켜 주려나?
“남자친구?”
“그래. 우리 딸 아직까지 엄마한테 소개시켜 준 적 없잖아. 혹시 있는데 숨기고 있는 거야?”
“으응. 그런 거 아니야.”
고개를 저은 수지는 수저를 들었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깼던 모양이다.
* * *
“개강총회 뒤풀이 자리는 일단 지금 앉은 자리대로….”
부자연스럽게 끊긴 목소리.
“거기 뭐 하는 거야?!”
날카롭게 쏘아붙인 사내의 외침이 조용히 투덕거리던 남자애들을 향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급하게 흩어지는 무리.
“테이블을 옮기는 건 그 테이블이 깨진 다음에 해. 그게 같이 앉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니까. 이 규칙 안 지키고 지 X대로 하는 놈 있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알겠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렇게 쫄 필욘 없고. 누가 보면 내가 군기 반장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냥 편한 형, 오빠라고 생각해.”
사내가 소주잔을 높이 들었다.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지? 다들 재밌게 놀아 보자!”
부딪치는 잔 소리.
여기저기서 시작된 술 게임에 가게 내부는 순식간에 소음으로 가득 찼다.
“하여튼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이쁜 여자만 보면 그냥 환장을 해가지고.”
수지의 옆에 있던 여학생이 콧방귀를 뀌었다.
수지의 같은 테이블에 있는 인원은 총 여섯 명.
그중 셋은 신입생이었고, 나머지 셋은 아니었다.
“그러게 말이야. 신입생 주제에 겁도 없이. 넘볼 나무를 넘봐야지.”
“골키퍼도 없는 골대에 슛을 때리는 게 뭐 어떻냐던 건. 어디 사는 누구 씬지 모르겠네.”
“푸흡…!”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여학생의 일침에 남학생이 물을 뿜었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게 맞는 말만 해서 질질 끌려 나간 게 문제지.”
“야! 너 지금 무슨 소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학생의 얼굴.
“저…. 질질 끌려가다뇨?”
조심스럽게 손을 든 신입생 한 명이 물었다.
“푸하핫! 궁금하지? 당연히 궁금하겠지!”
“야…!
“쪽팔릴 짓이었으면 하질 말았어야지. 크큭.”
“야~ 하지 말래도.”
“실은 말이야. 우리 막 처음 들어왔을 때 얘기 수지 엄~청 좋아했었거든.”
여학생이 수지를 가리켰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그냥 아주 노골적으로 들이댔었다니까.”
“음~ 근데 충분히 그럴 만할 것 같아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으니까요.”
가운데 있던 신입생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술 한 번 먹여 보려고. 그냥 아등바등 기를 썼는데, 술이란 술은 지가 혼자 다 마시고 뻗어 버렸다니까. 아주 그냥 난리였다고.”
‘술…?’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 속에 수지가 조용히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첫 잔을 마셨을 때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큰 변화도 느끼지 못했고.
누가 들으면 그게 뭐 어쨌느냐고 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 걸리는 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너도 괜한 수작 부리려고 하지 마. 아까 기웃거리던 남자애들이랑 똑같은 거 다 봤으니까.”
“아…. 네!”
“아마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걸요?”
신입생 여학생이 어깨를 들썩였다.
“전부가 아니었다니?”
“실은 저희끼리 첫인상 투표했던 거 있거든요. 무기명으로.”
“음~ 그래서?”
“실은 거기서 사귀고 싶은 여자 1위로 뽑힌 사람이 여기 있어요.”
“음~ 그거 엄청 흥미로운 이야기네. 그런 말을 한 거 보니 본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하하…. 그렇게 칼로 푹 찌르지 말아 주실래요. 아프거든요.”
여학생의 시선이 조용히 있는 다른 신입생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들은 것 같네.”
“‘이예은’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예은?’
왠지 낯익은 이름이었다.
많이들 사용하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보면 그렇게 특이한 이름은 아니었다.
동명이인도 분명 엄청 많을 테고.
근데 이 목소리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고. 어디서 접점이 있지도 않았을 텐데. 어째서?
“음~ 예은이가 인기 투표 1위라고?”
“아…. 뭐 그렇다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그냥 들은 이야기라.”
“아니야.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 안 그래도 남자애들이 담배 피우면서 떠드는 소리 들었었거든. 신입생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애가 있다고.”
소파에 몸을 기댄 여학생이 남학생의 명치를 점잖게 툭 건드렸다.
어쩐지 남자들이 어떻게 해서든 여기 앉으려고 하는 것 같더라니.
하여튼 늑대들이라니까.
“그래도 안심해. 이 언니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아무도 이 테이블을 쪼개지 못할 테니까. 성스러운 뒤풀이 자리에 그런 흑심을 용납할 순 없지.”
이어지는 두 번째 건배.
왁자지껄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수지는 조용히 예은이를 응시했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를.
불어오는 선선한 밤바람.
술자리를 피해 잠시 밖으로 나온 수지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수지가 밖으로 나오자 같이 밖으로 나가려는 남자들이 꽤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대부분 실패했지만 말이다.
“누나 괜찮아요?”
수지보다 먼저 밖에 나와 있던 남학생이 물었다.
상당한 체격을 자랑하는 학생이었다.
“응.”
“아…. 그럼 다행이네요.”
무심한 목소리에 완벽한 단답.
세상 처음 느껴보는 철벽에 남학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있잖아요, 누나! 괜찮으시면, 저희 테이블이랑 합치지 않으실래요? 저희 한 잔만 마셔도 나가리인 녀석이 2명이라, 벌써 저 혼자밖에 안 남았는데.”
“…….”
“실은 저 이번에 수석으로 들어왔어요. 아버지는 판사시고, 어머니는 잘나가는 의사세요.”
“응. 그렇구나.”
“졸업하면, 바로 대학 병원으로 들어갈 거예요. 이미 이야기도 다 끝내 놨고, 거기서 조금만 해서 경력만 좀 쌓고, 바로 개인 병원 차리려고요. 이미 목 좋은 곳에 건물도 사놨고, 제 개인 소유로 되어 있거든요.”
“응. 그래?”
여전히 뚱한 수지의 반응에 남학생이 입술을 씰룩였다.
이 정도로 어필했는데, 저렇게 돌 보듯 보다니.
이 방법으론 어림도 없다는 건가?
“아! 맞다!”
“미안한데, 조용히 바람 쐬고 싶어서, 먼저 실례할게.”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한 수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제가 아직 말하고 있잖아요!”
목소리 톤을 바꾼 남학생이 수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누나 마음에 드니까 제 거 하시라고요. 저 언제나 1등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이미 성공한 인생이고.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 중에 단 하나도 손에 쥐어 보지 못한 게 없어요.”
“…….”
“서로 좋게 좋게 가면 좋지 않겠어요? 누나가 제 거 하면, 제가 누나 인생도 쫙 피게 해드릴게요. 솔직히 피 보고, 피 묻고, 더럽고, 징그러운 거 백날 보는 것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게 좋잖아요.”
“할 말은 다 했지?”
“누나.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마지막 수를 쓰는 수밖에 없어요. 경찰이든 검찰이든 아무 도움도 못 받을 거라고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수지의 그 말에 남학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빠악!
남학생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한 방에 넉다운 된 남학생은 끽소리도 못 내고 뻗어 버렸다.
“피 보고, 피 묻는 게 더럽고 징그럽다고. 거기 있는 게 네 가족이어도 그렇게 말할 거야?”
차가운 눈동자를 빛낸 수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거기 있을 자격도 없어. 아무도 너 같은 사람한테 자기 가족을 맡기고 싶지 않을 거야.”
담담하게 쏟아 낸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을 마친 수지는 걸음을 옮겼다.
‘방금… 뭐였지?’
자기보다 한참은 체격이 큰 상대를 단번에 제압했다.
몸이 그냥 그렇게 움직였고, 그런 거구를 가볍게 업어 칠 괴력이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가족….’
그 단어가 어째선지 굉장히 아프게 느껴졌다.
아빠도 엄마도 분명 다 살아 계신대.
아파할 이유라면 어디에도 없을 텐데.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