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 * *
“카아악!!!”
“푸르릉! 푸릉!!”
서로 뒤엉켜 죽고 죽이는 언노운들.
하늘과 지상, 지하를 가리지 않고 펼쳐지는 살육전은 끔찍했다.
피가 강이 아닌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시체의 평원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붉은 하늘에선 눈과 비 대신 살점과 피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으며, 살과 뼈를 씹는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쿵!
대량의 워커들이 만들어 낸 강렬한 폭발.
엄청난 속도로 바람을 가른 사신형 언노운들이 다른 언노운들을 도살했다.
점차 밀리고 있던 전장의 흐름은 지원군의 합류로 또 한 번 급변하고 있었다.
“슬슬 궁지에 몰린 게 느껴지나 보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심복들까지 전선으로 내보낸 걸 보면.”
그런 사신형 언노운들을 덮치는 보랏빛의 바람.
순식간에 소용돌이가 된 바람은 일대의 모든 언노운들을 휩쓸었다.
적과 아군의 구분 따위 없었다.
그들의 죄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뿐.
“날 방해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카일론. 네 소원대로 죽음이 널 찾아왔노라.”
오른손을 뻗은 쥬다스가 힘을 집중시켰다.
전장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죽음의 물결.
살과 피가 흩날리는 평원에 생겨난 건.
왕의 길이었다.
“끼리릭~!”
상황을 즐기고 있던 쥬다스의 적극적인 개입.
표적을 고정한 사신형 언노운들이 쥬다스를 에워쌌다.
길게 이어지는 생명력의 흐름.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넘치도록!”
얇은 실 같던 물결이 순식간에 몇십 배로 불어났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사신들은 연결을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연결을 장악하고 있는 건 쥬다스였다.
“왜 그러지? 넘치도록 잔을 채워주고 있다만.”
통제력을 잃어 버린 모기처럼.
부풀 대로 부푼 사신형 언노운들은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저런~. 감당할 수 없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풍선처럼 흩날리는 사신들의 잔해.
긴 흑발을 흩날리던 쥬다스가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움켜쥔 그의 오른손에 들린 건 갑피로 이루어진 한 발의 화살.
부러진 화살은 맥없이 바닥에 버려졌다.
“이 유희를 조금 더 만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흘러넘치는 죽음의 향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충만한 이 죽음의 느낌이 참 오랜만이었다.
“안 그래?”
오른손을 움켜쥔 쥬다스가 손을 휘저었다.
일대를 휩쓰는 죽음의 진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지워 버린 죽음에서 살아남은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뭐냐, 그 말투는?”
활처럼 변이시켰던 왼팔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 카일론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의 등장과 함께 흩날리는 잿빛 먼지.
죽음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부패는 일대의 모든 것을 무로 되돌렸다.
“유흥을 즐기는 승자의 말투지. 처음도 아니잖아?”
“승자의 뜻을 잊어버린 모양이군.”
옅은 미소를 머금은 쥬다스와 무표정한 카일론.
두 사람 다 여유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 여유엔 베일 듯 날카로운 긴장감이 숨어 있었다.
“정말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정말로 네가 날 막을 수 있다고.”
“막을 수 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게 생각했던 적은 없는 것 같군.”
“흐음~?”
“내가 생각한 건 널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 막는다는 건 그저 작은 파편에 불과하지.”
“재밌는 농담이네. 네가 한 농담치곤 꽤 웃겼어.”
전장을 가로지르던 언노운들이 두 사람을 피해 갔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언노운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최후는 모두 같았다.
죽음과 부패의 영역에 발을 디딘 언노운들은 가루가 되어 흩날리거나,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잘못된 순환은 오늘 여기서 끝난다.”
“잘못된 순환 같은 건 없어. 굳이 있다면 네가 하고 있는 짓이 잘못된 순환이겠지.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죽음이 생명을 거둬 가는 당연한 순환을. 네가 방해하고 있으니까.”
불어오는 바람에 쥬다스의 망토가 휘날렸다.
“실베스가 열어 놓은 길이 보였다. 내 형제는 지금 어디 있는 거냐?”
미소를 거둔 쥬다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제의 죽음.
그건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건이었다.
그때의 분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걸로 끝이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실베스의 기운.
절대로 잘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곧 만나게 될 거다. 이미 죽음과 하나 되어 있으니까.”
“뭐라고?”
미간을 구긴 쥬다스가 오른손을 퍼 올렸다.
그 순간, 찢겨 나가는 대지.
선명한 단층을 보인 지각은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죽음에 잠기거라.”
검게 물드는 쥬다스의 손.
카일론을 감싼 죽음의 기운은 빠르게 구를 만들어 갔다.
그 순간 산산이 조각나는 구체.
완성되기 직전 부서진 파편은 수백 미터 밖까지 날아갔다.
파편이 떨어진 일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
A급 이상의 특정 개체를 제외하면 모든 게 죽음에 삼켜져 버렸다.
“로지는 잘 있나 모르겠군.”
맞부딪치는 두 사람의 칼날.
카일론의 뒤를 따라온 부패의 기운은 세 개의 물결이 되어 쥬다스를 덮쳤다.
“지금쯤이면 아마 동화 같은 꿈이나 꾸고 있겠지.”
“네 손으로 처리하겠다고. 그렇게 말했나 보지?”
“쌍방이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니까. 난 이루려는 걸 이루고, 녀석은 귀찮은 일에서 손을 떼고.”
“여전히 바보군. 녀석도.”
“뭐, 그렇지.”
재 속에 묻혀 있던 사신의 낫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나가 된 거대한 데스사이드를 움켜쥐는 사신의 손.
재에서 일어난 칠흑의 사신은 쥬다스를 베어 냈다.
“흥!”
가벼운 콧방귀와 함께 뛰어오르는 쥬다스.
무위로 돌아간 공격은 공간 자체에 심대한 상처를 새겨 놓았다.
“우리 셋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서로의 힘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 각자의 근원이 가진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가볍게 뛰어오른 쥬다스가 날개를 펼쳤다.
그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문.
중앙에 자리한 눈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내 양쪽으로 찢어졌다.
“심연이 너를 기다린다.”
문 안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의 물결.
죽음에 묻힌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정해진 형태도 없었고, 한 개체의 구분과 정의도 없었다.
그들은 그냥 흘러가는 물결이자, 지나가는 바람.
비통의 강 아케론에 흐르는 죽음일 뿐이었다.
날개를 펼친 카일론은 쥬다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죽음은 그를 삼키지 못했지만, 그가 만들어 냈던 사신은 이야기가 달랐다.
죽음은 그를 갈가리 찢었고, 그를 자신들의 일부로 만들었다.
쥬다스의 부름에 다시 닫힌 문은 그 전부를 가둔 채 모습을 감추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친다. 둘이 힘을 합쳐 하나를 친다. 우리에겐 그런 선택지가 불가능했지.”
“그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치면, 약화된 틈에 자기 역시도 삼켜질 테니까. 힘을 합친다 해도, 근원을 탐할 수 있는 건 한 명뿐. 어떤 식으로든 균형은 깨지게 되어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 파국처럼 보이지 않나?”
둘의 싸움으로 이득을 볼 사람은 로지.
지금까지 둘이 나눈 대화대로라면 결론은 그렇게 나온다.
카일론에겐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쥬다스도 마찬가지일 거다.
“근원을 삼키고, 다른 세계로 나간다. 그러면 거기서 인간들을 마주하게 되겠지.”
“호오~?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과연.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던 브레인답네.”
“인간들이 우리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단 것도, 우리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단 것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 그들을 삼키면 소모한 힘을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뒤엉킨 두 사람의 칼날이 수없이 부딪쳤다.
힘의 충돌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두 사람.
폭발적으로 고도를 높인 카일론은 활시위를 당겼다.
“그럼 거기서 게임 끝. 그 시점에서 로지는 네 상대가 될 수 없겠지.”
한 발에서 열 발로.
열 발에서 백여 발로 늘어나는 화살.
하늘을 가득 채운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한 점을 향해 내리꽂혔다.
“정답이야. 바로 맞췄어.”
쥬다스의 몸을 감싸는 죽음의 기운.
그 속에서 나타난 붉은 안구는 날아오는 모든 투사체를 훑어보았다.
그와 동시에 뻗어 나가는 날카로운 이빨들.
모든 공격을 상쇄시킨 안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쥬다스의 발밑에 고인 죽음의 강물에는 카일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왼손으로 클레이모어를 쓸어내리는 카일론.
검신 전체가 붉은빛을 내기 시작한 클레이모어는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공격을 받아 낸 쥬다스에겐 큰 이상이 없었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각조각 갈라진 지면은 유리창처럼 빗발쳤고, 깨진 차원의 단층이 흘러내렸다.
“전제 자체가 잘못된 가정은 망상에 불과해.”
“글쎄. 그거야 잘못됐을 때 이야기지.”
카일론을 밀어낸 쥬다스의 손에 하늘빛의 결정이 나타났다.
수백의 파편이 되어 깨져 나간 결정은 작은 블랙홀이 되어 공간을 뒤틀었다.
그에 맞춰 검을 고쳐잡는 카일론.
부서진 대지에서 피어오른 재의 꽃들은 사신이 되어 날아올랐다.
원을 그리며 휘두른 카일론의 참격.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사신들 아래론 흩어졌던 결정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는군.”
“유언이라면 들어 주지.”
“훗! 죽음에게 유언이라. 유쾌한 장난인걸.”
쥬다스의 칼끝을 타고 오르는 죽음의 물결.
방대하게 팽창한 그의 마나는 천지를 뒤흔들었고, 일대를 날려 버린 파동은 잿빛 연막을 흩뿌렸다.
“…….”
고개를 든 카일론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있는 건 거대한 무언가의 실루엣.
최종형이 되기 전 쥬다스의 모습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 * *
사방에서 날아드는 페이탈 붐.
소용돌이를 그리며 헤엄치는 용주는 벌써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라면 맘처럼 쉽진 않을걸.’
숨을 쉬지 못할 거다.
앞이 보이지 않을 거다.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만 여길 선택한 게 아니었다.
“음~ 알 것 같다. 여기라면 내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첫 번째 파이탈 붐을 마주한 로지가 여섯 개의 돌기를 뻗었다.
가운데에서 찢어발겨지는 구체.
폭발의 잔해를 뚫고 나간 로지는 용주의 진행 경로를 바짝 추적했다.
“물 속이라면, 필연적으로 저항이 발생할 거다. 그리고 난 거기 특화되어 있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거잖아.”
바늘처럼 날카로운 다리.
급회전을 가능하게 해주는 돌기들.
확실히 이곳이라면 자신의 힘에 제약을 줄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다리가 저항을 최소화한다 해도, 몸이 일으키는 저항까진 무시할 수 없었고, 발을 디딜 공간을 아예 배제시켜 돌기의 사용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
충분히 합리적인 계산으로 보였다.
뭐.
합리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효과가 있을 거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녀석.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총알처럼 날아드는 녀석의 움직임은 용주의 속도에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저 다리…. 물속에선 저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냐.’
하늘거리는 돌기를 몸 안으로 밀어 넣은 로지는 마치 오징어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2개 조로 나뉜 다리는 번갈아 가며 물살을 밀어내고 있었기에, 전진 후 잠시 멈춰 서는 오징어의 특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까꿍!”
용주의 앞을 막아서는 로지.
그대로 로지를 덮친 용주는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건 로지도 마찬가지.
누가 먼저 끊어 내냐를 겨루며 뒤엉킨 두 사람은 차원을 깨부수며 밖으로 튕겨 나갔다.
물 밖에서 마주한 새로운 차원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세계.
육지에 적합한 형태로 돌아온 용주는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목덜미에 남은 상처는 치명적이었지만, 결판을 낼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다.
둘 모두 빠르게 회복 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 교전에서 생긴 상처는 그거 하나만이 아니었다.
“응?”
곳곳에서 느껴지는 묘한 통증에 로지가 자신의 몸을 살폈다.
몸 여기저기는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다쳤잖아? 대체 언제?”
이빨, 촉수, 꼬리, 손톱.
주고받은 몸의 대화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공격도 이런 결을 남길 순 없었다.
그럼 이건 언제.
어떤 경로로 생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