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이 목소린….”
지금까지 들었던 내레이션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몽환적인 분위기로 동화책을 읽어 주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번엔 동화 밖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납셨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용주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천장 가까운 곳에 날개를 펼친 녀석이 있었다.
마치 그네를 타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녀석은 막 일어난 듯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저 사람이 로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인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날개가 자라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카일론에게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강함이 느껴졌다.
조금만 긴장을 놓았다가는 바로 삼켜질 것 같았다.
“음~ 뭐야? 남에 이름을 그렇게 멋대로.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는 아이들이구나? 하긴 나쁜 아이들이니 당연히 버르장머리도 없겠지.”
로지가 흥미로운 듯 두 사람을 살폈다.
“근데 너네 뭐야? 너희 혹시 인간이야?”
두 사람에게선 자신들과는 다른 느낌이 풍겼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는 반씩 걸친 느낌이긴 했지만 말이다.
“인간이 여기 있다니~ 대박!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나 아직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뒤로 넘어갈 듯 웃고 있는 로지를 향해 날아가는 붉은 파동.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로지는 혈사포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너랑 장난 칠 시간 없다.”
“장난이라니? 내 달콤한 꿈에 들어와서 내 동화를 훔쳐본 건 너희들이라고.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이 공주님한테 이래도 돼?”
“시간 낭비군.”
게이트를 연 용주는 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폭풍으로 변한 나비의 날갯짓.
‘어?’ 하는 순간 날아간 수지의 모습은 게이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뭐야? 둘이 같이 어떻게 해보려는 거 아니었어? 저 친구는 이렇게 될 거란 거 몰랐단 표정이던데.”
“곧 죽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죽어? 내가? 아하핫! 너 농담 한번 잘하는구나? 웃겼어~.”
고도를 낮춘 로지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내 단잠을 깨운 것도 모자라 아주 난리를 쳐놨네. 아주 깨끗하게 날려 버렸어.”
거울들을 살펴보던 로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느껴져야 할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항아리가 텅 비어 있었다.
“뭐, 좋아. 빈 걸 채워 놓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넌 정체가 뭐야? 왜 우리랑 너희가 반씩 섞여 있는 거야? 그런 인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게다가….”
날개를 펼친 로지가 강렬한 바람을 일으켰다.
날아갈 듯한 바람 속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용주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기 있는 건 두 분을 살해한 원수 중 하나.
두 분의 존재를, 두 분과 관련된 기억을 지워 버린 건 저 장난기 가득한 상판대기였다.
“너한테서 카일론의 냄새가 나. 그것도 아주 진하게.”
“말이 많군.”
용주가 일으킨 선혈의 파도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일반적인 선혈의 파도가 아니었다.
지금 이건 맹독이 섞인 파도.
언노운에겐 치명적인 물결이었다.
“내 안에서 폭식을 씹어먹었지? 내가 가지고 있던 걸 강제로 뺏어갔잖아.”
손안에 작은 연꽃을 피워 낸 로지가 꽃잎을 후 불었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 잠식되는 피의 파도.
맹독이 깃든 선혈의 물결은 수많은 꽃잎이 되어 흩날렸다.
폭발적으로 속도를 높인 용주는 로지의 눈앞에 나타났다.
용주의 손톱을 막아 내는 로지의 손톱.
“덕분에 나 지금 아주 허기가 져. 정말 간만에 말이야.”
힘으로 용주의 손톱을 부러뜨린 로지는 그대로 용주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굉음과 함께 미끄러지는 용주.
지면을 몇 미터나 깨부순 용주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널 좀 먹어야겠어. 심장에서 먼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아~ 너무 걱정하진 마.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전부 파먹기 전까진 죽고 싶어도 못 죽을 테니까.”
피를 핥은 로지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똥처럼 맛없던 누구랑은 다르게, 눈앞에 있는 녀석의 맛은 천하일미.
지금까지 맛봐 왔던 어떤 음식보다 풍미가 뛰어난 낯선 식재료였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피어오르는 붉은 핏방울.
광폭화 상태로 돌입한 용주는 여덟 개의 촉수를 길게 뻗었다.
“늘어나네? 꼭 그 녀석 머리 같아.”
칼날처럼 예리한 촉수 사이를 누빈 로지는 촉수 하나를 끊어 냈다.
꿈틀거리는 촉수를 입에 문 로지는 마치 산낙지를 씹어먹듯 그걸 먹어 치우고 있었다.
“맛은…. 음! 아까보다 더 좋아졌는데? 혹시 부위마다 맛이 다 다른가? 이거 엄청난데!”
로지의 날갯짓 한 방에 탕탕이 쳐지는 촉수.
폭발적으로 고도를 낮춘 로지는 용주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쉽겐 안 될 거다.’
왼팔에 무게를 실은 용주가 하반신을 들어 올렸다.
작렬하는 레이징 브레이크.
아토믹 버스터를 두른 양발은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
공격과 동시에 뒤꿈치를 관통하는 통증.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용주는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이 부위는 꽤 딱딱하네.”
입 안에 든 걸 잘게 잘게 씹은 로지가 꿀떡 삼켰다.
“그 녀석들 빨간 눈알 정도는 되겠어. 많이 먹기는 좀 그러네. 턱이 네모나지면 안 이쁘다고.”
‘이 녀석….’
그냥 단순히 막힌 것도 아니라, 뜯어 먹혔다.
그 정도 강도를 가진 갑피를 저렇게 간단히.
역시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맛은 좋네. 끝도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이야. 다음은~ 어딜 먹어 볼까나~?”
신이 난 듯 흥얼거린 로지가 속도를 높였다.
“근데 왜 그 모습이야?”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대지.
양손에 실은 풍참을 정면에서 파훼한 로지는 그림자에서 솟아난 꼬리를 붙잡았다.
“너 반은 우리 쪽에 있잖아. 혹시 반으론 최종 형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야?”
꼬리를 뜯어낸 로지가 꼬리 속 가장 깊은 곳을 할짝였다.
“카칵!”
“말도 못 하나 보네. 저런 세상에. 진화가 아니라 퇴화해 버린 꼴이잖아?”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하는 로지.
순식간에 꼬리를 재생시킨 용주는 꼬리를 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을 가르는 참격.
“호오?”
놀란 듯 동그란 눈을 깜빡인 로지가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 사라져 있었다.
“그래! 재밌는 생각이 났어.”
잘려 나간 단면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꿀렁거리는 세포 조직.
날아가기 시작한 로지의 피부는 풍선 조각처럼 갈기갈기 흩날리고 있었다.
“그럼 나도 그때 그 모습으로 놀아보는 거야. 어때? 재밌겠지?”
일대를 뒤덮는 힘의 파동.
“…….”
파장에 뒤로 밀려난 용주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새하얀 먼지 사이로 보이는 건 바늘처럼 날카로운 수십 개의 다리.
아름다운 날개 대신 자리 잡고 있는 건 톱처럼 생긴 여섯 개의 돌기였다.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녀석의 얼굴엔 눈을 기준으로 위아래에 두 개의 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때? 놀랐어? 막상 저지르고 나니까 조금 창피하네. 이런 모습. 망각 속에 싹 묻어 뒀었는데 말이야.”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로지가 부끄러운 듯 가슴 부위를 가렸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몰라도 용주에게 성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무언가는 녀석에게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그저 언노운.
완전체가 되기 전 로지의 모습은 확실히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폭식…. 그 녀석이랑 싸웠을 때도 이 모습이었단 건가.’
꿈인지 동화인지 모를 그 이상한 공간에서 스킬이 발현되었었다.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그렇다는 건 거기서 쓰러뜨렸던 여왕은 실제로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먹어 치운 상대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모습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나 보지.’
공주라는 말과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동화 속에 녀석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았던 것도 녀석이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녀석들에 비하면 크기 자체는 작은 편인데.’
여왕에 비해서도 카일론에 비해서도 왜소했다.
하지만 형태 자체는 가장 난해하단 생각이 들었다.
조각조각 다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각 부위가 어디에 특화되어 있는 건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뭐, 이왕 보여 줬으니까. 한번 놀아 보자고. 옛날 그 공복으로, 그 기분으로 말이야!”
90도로 굽어지는 로지의 다리.
‘빨라!’
용주가 로지의 움직임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로지는 이미 용주를 사정권 안에 두고 있었다.
엄청난 분비물을 쏟아 내며 쩍 벌어지는 두 개의 입.
로지와 교차한 용주는 땅을 그으며 방향을 틀었다.
“…….”
오른팔의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파먹힌 건 팔꿈치와 어깨 사이의 약 40%.
점멸을 사용한 회피 기동이 있었음에도 공격을 완벽하게 흘려보내지 못했다.
“음~ 뭐야? 여긴 식감도 아주 끝내주는데? 탄력도 있고, 지방감도 좋아. ‘세트로 메피스토스’의 갈빗대보다도 훌륭한데?”
이마에 달린 또 하나의 입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아래쪽 입은 원하는 걸 손에 넣는 데 실패했지만,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았다.
“후후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 얼굴이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움직이기 위해선 지면을 박차야 한다’라는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을 테니까.”
녀석의 말대로였다.
모든 움직임엔 그만한 무언가가 수반되어야 했다.
저항도 그중 하나.
하지만 녀석의 저 뾰족한 다리 구조는 그걸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재생력이 좋은 건 칭찬해 줄게. 신선한 고기를 리필해서 즐길 수 있는 건 참 좋은 일이지.”
용주를 똑바로 보고 있던 로지의 얼굴이 180도로 돌아갔다.
“그치만 역시 다른 곳을 맛보는 게 좋겠지?”
위아래가 뒤바뀐 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또 한 번 바람을 가르는 로지의 질주.
“다음엔 옆구리살이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로지가 용주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코앞에 보이는 탐스러운 고기.
향기로운 내음을 음미한 로지의 두 입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화르륵!
둘 사이에 피어난 강렬한 흑염이 로지의 얼굴을 불살랐다.
“앗! 뜨거!”
두 개의 돌기를 뒤로 뻗은 로지는 그 힘을 이용해 빠르게 물러났다.
입체 기동을 하고서야 보이는 불꽃의 모습.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보이는 불꽃은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족제비의 모습을 하고 말이다.
“응? 저건….”
카마이타치의 모습에 로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베스?”
착각이 아니었다.
이 불꽃.
이 느낌.
분명 그 녀석의 것이었다.
“너 뭐야? 네가 왜 실베스를 가지고 있는 건데?”
로지의 물음과 동시에 솟아오르는 오오무카테.
돌기들을 최대한 길게 뽑아낸 로지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반으로 잘려 나가는 지네의 몸통.
용주를 향해 돌기를 발사한 로지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용주를 향해 강하했다.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럼 나도 거기 맞춰 줘야겠지.’
끓어오르는 광기 속 집중되는 헌터의 힘.
‘음?’
전광석화로 내리꽂힌 로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자신이 예상했던 것들이 아니었다.
입으로 들어오는 건 피가 아닌 바닷물.
빛이 사라진 심해의 압력은 로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뭐야, 이게? 여기 물속인 거야?”
크게 당황하지 않은 로지가 고개를 돌렸다.
빛 한 줌 없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용주를 정확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럼 여긴 네 꿈속인가? 뭐야 이 몽환적이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않은 상상력은.”
물속엔 작은 피라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있는 건 자신과 용주뿐.
용주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길고 유려한 몸체는 물속을 헤엄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설마. 이걸로 날 질식시켜 보기라도 하려던 거야? 그런 거면 유감인데.”
물속이든, 불 속이든.
그런 건 크게 상관없었다.
인간들과는 신체 구조 자체가 달랐으니까.
어둠도 마찬가지.
형편없는 인간의 시력과 달리 로지의 눈은 어둠에 아주 익숙했다.
뭐.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