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폭식의 여왕이 마지막 자비니라. 네 양팔과 다리를 잘라 바치거라.”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여왕의 모습.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을 보인 여왕은 용주가 딛고 있던 발판을 내리찍었다.
“폭식. 그게 널 상징하는 말인가 보지?”
손가락 사이를 통과한 용주는 룬검을 휘둘렀다.
손등을 타고 손목까지 길게 잘려 나가는 상처.
주먹을 움켜쥔 여왕은 공중에 남겨진 용주를 향해 손등을 휘둘렀다.
팡!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흩뿌려진 잔해.
정원의 한쪽 벽면에 처박힌 용주는 이어지는 다음 손짓을 피해 움직였다.
‘대략적인 한 방의 대미지는 이 정도인가.’
무시할 수 있는 화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수준도 아니었다.
카일론, 이준.
적어도 그 둘보단 확실히 아래였다.
‘가장 주의해야 할 건 저 깃털. 아무래도 저게 녀석의 주력 무기인 모양인데.’
깃털에 직격당한 정원 한 면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위력이 큰 만큼 재사용 대기시간도 꽤 긴 편인가?’
녀석이 깃털을 흩뿌린 건 지금까지 총 2번.
여덟 개의 팔 중 2개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재생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진 몰라도, 앞으로 6번. 그것만 흘려보내면….’
순식간에 날아드는 여덟 개의 팔.
서윤의 사복검처럼 자유자재로 휘는 팔은 치명적일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빠르단 건 알고 있었지만, 공격의 디테일 역시 꽤 정교해.’
귓가를 스쳐 가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
칼날을 맞댄 용주의 몸이 순간 야구공처럼 날아갔다.
“앞으로 6번만 피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
용주의 현재 위치와 진행 방향, 그리고 퇴로까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떨어지는 광범위한 사출.
세 개의 팔을 동시에 휘두른 여왕의 공격은 지금까지 있던 어떤 공격보다도 치명적이었다.
“한 번에 한 개씩만 쓸 거라고. 누가 그래? 아하하핫!”
승리를 확신한 듯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용주의 오른 어깨와 정강이는 끔찍한 모습으로 찢겨 있었다.
“오지 마!”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한 용주가 단호하게 외쳤다.
부서진 은막의 거울벽을 뛰어넘은 수지는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말했지. 내가 처리한다고.”
자신의 어깨를 날려 버린 깃털을 왼손으로 짚은 용주는 이빨을 드러냈다.
철을 씹는 소리를 내며 깃털을 씹어먹는 용주.
한쪽면에 선명한 이빨 자국을 남긴 용주는 입안에 남은 찌꺼기를 뱉어 냈다.
‘역시 단순한 무기는 아니었군.’
용주의 상처는 놀랍도록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다.
시체 뜯어먹기의 효과는 이 깃털을 상대로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게 단순한 칼날이라든가 투사체였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이 깃털은 녀석의 신체 일부.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살점이었다.
‘맨 처음 사출했던 팔에 깃털이 다시 자라났어. 그렇다는 건 두 번째 깃도 조만간 다시 자란다는 이야기군.’
조금 전 세 발을 투자한 포화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혜안이 주는 경고가 보였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도 이걸로 어느 정도 다 파악했어.’
“그걸 맞고도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 있다니. 과연 위험한 녀석이야. 충분히 숙성시켜서 먹었어야 날 완벽하게 만들어 줬을 텐데.”
양팔을 들어 올린 여왕이 힘껏 내리찍었다.
다시 한번 여왕의 손등에 올라탄 용주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감히! 폭식의 여왕인 날 먹으려 들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손가락 하나.
용주를 움켜쥔 여왕은 그대로 용주를 짓뭉개려 했다.
그런데.
짓뭉갤 수 없었다.
손바닥을 찢고 들어간 용주는 손등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너 이 녀석!”
“좋은 걸 많이 먹고 자란 가축은 맛도 좋다던데, 맛이 영 별로군.”
공중으로 뛰어오른 용주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뭐라고?!”
도발 섞인 용주의 조롱에 여왕이 노골적으로 반응했다.
“하긴 많이 먹는다고 다 맛이 좋은 건 아니지. 폭식의 여왕이 아니라 그냥 짬돼지가 더 어울리는 거 아니냐.”
“짬이라고…?!”
“왜 너희 세계에는 없는 말인가 보지? 그럼 이렇게 말해 주지. 음식물 쓰레기…라고.”
격노한 여왕을 한층 더 자극하는 용주.
비꼬는 용주의 미소에 여왕의 안면이 심하게 구겨졌다.
“너… 곱게 먹힐 생각은 하지 마라. 마디 하나하나, 관절 하나하나 전부 먹어 치우고, 다시 자라는 걸 기다린 다음 또 먹어 줄 테니!!”
두 개의 팔을 안쪽으로 굽힌 여왕이 깃털을 흩뿌렸다.
“살려 달라고. 제발 죽여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공중을 딛고 선 용주는 날아오는 깃털과 마주했다.
“받은 만큼은 돌려 주지.”
몸에 새긴 기억을 토대로 시도되는 벡터 조작.
갑작스럽게 멈춰 버린 깃털들에 여왕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순간, 역행하는 깃털들의 물결.
“으윽! 으아악!!”
빗발치는 포화 속에 여왕의 몸 여기저기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너 이 녀석…!”
남아 있는 깃털들과 재생한 하나의 깃털.
모든 전력을 동원한 여왕의 일격이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광폭화 상태로 진입한 용주는 포화 속을 질주했다.
파박!
도약과 동시에 사라지는 용주의 모습.
‘어디로?!’
한쪽 눈이 사라진 여왕은 남아 있는 눈을 바삐 움직였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살기.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눈엔 한 가지 환상이 보였다.
내장이 드러내진 채 널려 있는 고기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카각!!”
작렬하는 용주의 포식.
180도로 찢어진 입은 여왕의 고기를 탐했고, 날카로운 이빨의 계곡을 타곤 피가 쏟아졌다.
날카롭게 손질된 꼬리를 입에 문 용주는 남아 있는 여왕의 목을 쳐 냈다.
대회전 베기에 완전하게 분리된 몸과 머리.
힘껏 뛰어내린 용주는 여왕의 머리를 그대로 짓뭉갰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은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
피와 살로 엉망이 된 정원.
머리만 남은 여왕의 조각상을 흘겨 본 용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내레이션이 나왔어도 이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직 뭔가 남았단 건가?’
경계의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용주.
“배가 고프고파! 배가! 배가 고프다고!!!”
그런 용주가 이상을 발견한 건 그로부터 불과 몇 초 뒤였다.
“내놔! 살! 피! 내장! 내 거야! 다 내 거라고!!”
잘려 나간 녀석의 목에서 무언가 자라나고 있었다.
꿀렁거리며 자라난 세포는 기다란 목이 되었고, 그 끝에서 열매마냥 머리가 자라났다.
하나가 아니었다.
동시에 자라난 머리만 무려 다섯 개.
이전과 달리 길고 유연하게 자라난 목은 수장룡의 목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어! 하나도 남기지 않겠어!”
길게 뻗어 나간 여왕의 머리가 지켜보던 모스맨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스맨들의 반응은 상당히 이상했다.
그들은 피하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들이 도망가지 않는 것인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용주가 느끼기엔 후자보단 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은 공포에 질려 있지도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까지 보였다.
“더! 더! 더!!”
‘칫…!’
자신을 향한 머리를 빗겨 보낸 용주는 녀석의 머리를 다시 한번 베어 냈다.
하지만 큰 효과는 볼 수 없었다.
잘려 나갔던 녀석의 머리는 금세 새롭게 자라나 버렸다.
‘먹어 치우면서 재생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졌어. 녀석도 나랑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건가.’
녀석의 몸은 말 그대로 넝마가 되어 있었었다.
하지만 그 재생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머리가 노리는 건 자신과 언노운들만이 아니었다.
수지 역시도 녀석의 타깃 중 하나.
수지는 충분히 잘 대처하고 있긴 했지만, 시간이 끌려서 좋을 건 없었다.
이곳의 언노운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나면 공격은 몽땅 이쪽으로 집중될 테니까.
“고기! 고기! 신선한 고기!”
땅을 낮게 기며 바닥을 쓸어 낸 여왕의 머리가 용주의 측면을 파고들어 왔다.
그대로 용주에게 들이받는 머리.
둘의 충돌에 여왕의 머리가 산산이 조각났고, 마찬가지로 용주의 갑피도 엉망으로 부서지며 흩날렸다.
‘이 녀석…. 움직임이 바뀌었어.’
조금 전 그 공격은 지금껏 녀석이 보여 왔던 포식 행동과는 결이 달랐다.
방금 그건 순전히 상대방을 때려 부수기 위한 일격.
반신이 부딪치면 서로의 반신이 날아가는.
말 그대로 너 죽고 나 죽고 식의 공격이었다.
‘먹기 전에 잘게 부숴 놓겠다. 뭐, 그런 거냐.’
또다시 이어지는 둘의 충돌.
두 번째 공격까지 받아 낸 용주는 녀석의 팔을 살폈다.
전부 다 사용했던 깃털이 거의 다 돌아와 있었다.
승부를 보려거든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쿠단.’
흑염 속에서 일어난 건 거대한 인면소.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나타난 쿠단은 사정없이 여왕의 복부를 짓밟았다.
“아파! 아파! 우욱!”
먹은 것의 일부를 게워 낸 여왕은 쿠단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변화하는 불꽃.
소의 형태를 버린 불꽃은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형태가 되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야마타노오로치는 여왕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운 고기 타는 냄새.
안쪽으로 휘어 감기는 다섯 개의 머리는 뱀의 머리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타닥!
녀석의 목에 네발을 디딘 용주는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달렸다.
녀석의 몸통을 지나는 용주의 그림자.
여왕을 발아래 둔 용주는 여섯 개의 꼬리를 하나로 모았다.
“찢어 죽인다! 형태 하나 남기지 않고 갈가리!”
여덟 개의 팔을 동시에 휘적인 여왕이 모든 깃털을 한꺼번에 사출했다.
에스카톤 저지먼트보다 한발 앞선 여왕의 공격.
기다리던 게 온 걸 확인한 용주는 자신을 향한 모든 벡터 방향을 뒤집었다.
여덟 개의 팔이 만들어 낸 위력은 가히 살인적.
일대를 뒤흔든 충격에 정원을 비롯한 요새의 모든 건 미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 폭식 분쇄.
▷ HP 소모량 : 0~50
-반신을 부딪쳐 적의 반신을 파괴합니다.
-상대방과 자신의 강도에 비례해 피해량이 변화합니다.
▶ 블랙 페더
▷ MP 소모량 : 40
-자신의 세포로 구성된 깃털을 사출합니다.
‘스킬이라고? 여기서?’
타오르는 불길 위에 내려앉은 용주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역시 머리로는 상황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단순히 투영된 환상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부였던 것만은 아니었단 건가.
“못된 여왕은 더러운 깃털을 흩뿌리며 공주님을 위협했어요. 자라나고 늘어나는 여왕의 머리에 공주님은 아주 무서웠답니다. 하지만 공주님은 용기를 냈어요. 그리고 마침내 못된 여왕을 쓰러뜨렸답니다.”
수지의 발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로지의 내레이션.
“못된 여왕을 쓰러뜨린 공주님은 아주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못된 여왕을 전부 먹어 버렸죠. 여왕은 아주 맛이 없었어요. 하지만 착한 공주님은 남기지 않고 먹었답니다.”
사라져 가는 여왕의 유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른 모스맨들은 깃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개선장군에게 꽃잎을 뿌려 주듯이.
“못된 왕비를 삼킨 공주님은 한층 더 아름다워질 수 있었답니다. 왕자님들은 공주님을 축하해 줬어요. 공주님은 왕자님들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답니다.”
여왕의 유해가 사라지자 다음으론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던 언노운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왕과 여왕의 성은 그 후로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답니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의 모든 풍경까지.
사방이 뻥 뚫린 새하얀 공간이 된 그곳에서 용주는 주변을 경계했다.
동화 같은 장난은 이걸로 끝.
책을 덮었으니 이제 다음을 마주할 차례였다.
“저기.”
주변을 살피던 수지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까 봤던 그 거울이랑 똑같은 게 있어.”
허공에 덩그러니 거울 하나가 떠 있었다.
새하얀 공간에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거울 앞에 섰다.
자신들이 비치지 않던 거울.
수지의 말처럼 이건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노라면.
이 거울은.
자신들을 비추고 있었다.
“음~ 숙녀가 자고 있는 사이에 몰래 들어오다니. 아주 나쁜 아이들이구나?”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잠드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변화한 풍경은 처음 내레이션을 들었던 바로 그곳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