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안 나타나네.”
좌우를 두리번거린 수지가 이야기했다.
처음 같은 흐름이었으면, 언노운이 나타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뭐지? 대체 왜….’
주변을 살피던 용주의 시선이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런 거였나.”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다른 한 가지 규칙을.
“그런 거였다니?”
“저기.”
용주의 손이 가리킨 곳은 3시 방향에 있는 다른 공간이었다.
세로로 90도 기울어진 그곳엔 언노운들이 있었다.
“언노운이 저기에?”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많은 수의 언노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2개씩 짝을 이룬 퍼즐에 한 웨이브의 언노운들이 동반된다. 그게 반드시 여기 나타난다는 말은 없었지.”
“그럼?”
“묘하게 딱 맞지 않아? 12를 2로 나누면 6. 여기 있는 발판의 수도 정확히 여섯.”
“응. 그럼 매번 다른 곳에 언노운들이 나올 거란 이야기?”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규칙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여기서 처리할 수 있어?”
“글쎄. 여기 룰에 달렸겠지.”
룬검이 베어 낸 궤도를 따라 뻗어 나가는 한기.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던 한기는 발판의 끝 선을 지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언노운들은 밖으로도 날아가던데.”
“물리적으로 떨어질 순 있어도,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다. 뭐, 그런 거겠지.”
녀석들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녀석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과 저곳이 그만큼 독립적인 공간이란 이야기일 거다.
“그럼 저기 넘어가야만 처리할 수 있다는 거네?”
“그렇겠지.”
“뛰어넘어 갈 수 있을까?”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 역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에 포함될 테니까.”
“그럼….”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게 있잖아. 여기 있는 것들 중에.”
걸음을 옮긴 용주는 3시 방향에 있는 거울 근처로 이동했다.
“여기 들어가는 거야?”
“섬마음 등대에서도 봤잖아. 장소와 장소를 이동하는 물건은. 이것도 아마 그 일종이겠지.”
거울 앞으로 다가간 용주는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뒤틀리는 공간의 흐름.
원상태로 돌아간 시야에서 용주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까 멀리서 봤던 언노운들이었다.
“우리 수직으로 서 있는 거 맞지?”
곧장 뒤따라온 수지가 물었다.
아래에서 봤을 때 여긴 90도로 서 있는 공간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중력에 이끌려 저 아래로 떨어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그런 이상은 느낄 수 없었다.
아까 서 있던 천구가 있던 발판이.
여기서 보기엔 수직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란 거겠지.”
룬검을 움켜쥔 용주가 전투를 준비했다.
“겉으로 보이는 건 전부 가짜야. 진짜는 그 아래 있어.”
이곳에 있는 언노운들은 ‘늪의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개체들.
늪처럼 끈적한 피부와 얼핏 보면 인간의 형태처럼도 보이는 모습에 붙은 별칭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내리깔리는 혹한 속에서 비상하는 본 드래곤.
위협적인 저공비행을 펼치는 적의 등장에 언노운들의 몸 곳곳이 얼어붙으며 깨져 나갔다.
무음의 포효를 내지른 보좌관은 사선으로 고도를 낮췄다.
지면을 갈아엎는 보좌관의 날개.
그 날개 아래 산산이 조각났던 언노운들은 아메바처럼 재생하고 있었다.
“주의를 끄는 건 그 정도면 충분해.”
날개를 펼치며 힘껏 날아오른 보좌관은 한 방울의 빛망울을 떨어뜨렸다.
눈송이처럼 사뿐히 내려앉는 빛망울.
잔잔했던 바람은 태풍이 되어 일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오….”
“아직 한 발 남았으니까. 뒤에 있어.”
용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하나의 빛망울이 떨어졌다.
이어지는 2차 대폭발.
꿀렁거리며 자라나고 있던 밑동까지 날려 버린 냉기에 살아남은 언노운은 없었다.
“깔끔하게 뿌리 뽑았네.”
폭발의 진원지에 선 수지가 이야기했다.
‘늪의 여신’이란 말에 걸맞게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끈적하게 눌어붙는 점성과 재생력이 발목을 잡고, 본체는 그 아래에서 끊임없이 소통한다.
특유의 연계는 헌터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고, 때에 따라 변화하는 형태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늪처럼 다양했다.
액체에 닿은 피부는 특유의 발진을 일으키는데, 뼈가 갈려 나가는 통증을 유발하며,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절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번에는.
상대를 영 잘못 만난 것 같지만.
“남은 것도 빨리 끝내 버리자고.”
“응.”
쉬지 않고 움직인 두 사람은 천구를 채워 나갔다.
용주의 추측대로 언노운들은 중복되지 않은 발판에 나타났고, 그 종류도 전혀 달랐다.
수지의 지식과 용주의 힘.
둘이 내는 시너지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수지가 언노운의 약점을 일러 주면, 용주는 그걸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힘도 시간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황도의 마지막 퍼즐을 채운 두 사람은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천구에는 황도 12궁이 전부 빛나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 나 하나 궁금한 게 생겼어.”
“뭔데.”
“공주는 수수께끼를 혼자 푼 거겠지? 혼자 발판을 어떻게 누르고 있었을까?”
“천구가 있잖아. 그걸 밀어서 올려놨었겠지.”
“음~.”
너무나 쉽게 풀려 버린 수수께끼에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천구의 무게가 보통이라면 절대 밀 수 없는 무게란 것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왕비는 공주의 집념을 너무 얕잡아 봤어요.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시도해 본 공주는 결국 탑을 나갈 수 있었답니다.”
내레이션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차원.
하늘에 떠 있던 다섯 개의 발판이 사라진 공간은 또 한 번 모습을 바꾸었다.
“탑에서 나온 공주님은 마침내 세상을 볼 수 있었어요. 하늘을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바람은 너무나도 상쾌했죠. 피를 닦아 주는 바람은 아주아주 친절했고, 아주아주 달콤한 향기가 났어요.”
붉은 하늘이 보이는 대정원.
사방이 건물에 둘러싸인 이곳은 낯선 곳이었지만, 어쩐지 익숙하단 느낌이 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다 해보다니. 굉장하네.”
고개를 든 수지가 중앙 분수를 바라보았다.
모스맨을 닮은 언노운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게걸스럽게 모스맨을 뜯어먹고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촉수처럼 가느다란 여덟 개의 팔과 팔마다 달린 앙상한 깃털.
인간 여성의 것과 유사한 머리와 다리의 형태.
피부의 질감이나 형태는 흡사 광포화 상태의 용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럼 이게 그 공주님의 모습이란 걸까?”
“글쎄.”
기억 속에서 봤던 로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스맨들과 같이 있는 걸 봐선 전혀 연관이 없다고도 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탑 밖으로 나온 건 맞지?”
“그렇겠지. 하늘이 보이니까.”
“음. 근데 여전히 밖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것 같은데.”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돌린 수지는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샌가 날아온 모스맨들이 거기 앉아 있었다.
줄을 지어 내려다보는 붉은 안광들은.
마치, 먹잇감이 죽기를 기다리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 거기랑 좀 비슷한 것 같지 않아?”
“거기라니?”
“우리 아까 하늘에서 봤던 북쪽 요새 있잖아. 폐허가 됐던.”
“폐허가 된 요새?”
확실히 그렇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다 부서지고 훼손되긴 했었지만, 그곳의 구조나 배치는 확실히 이것과 동일했다.
“향기에 이끌린 공주님은 한 정원에 도착했답니다. 극심한 허기에 지친 공주님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수많은 왕자님들이 나타났답니다.”
“왕자님?”
“저 녀석들을 말하는 거겠지.”
수지의 물음에 용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공주님은 기뻤어요. 그래서 왕자님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답니다. 왕자님들은 맛이 아주 좋았어요.”
“음…. 그러니까 공주님은 사마귀 같은 그런 부류인 걸까?”
짝짓기를 마친 사마귀 암컷은 수컷을 잡아먹는다.
그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왕자님을 잡아먹는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일일이 신경 쓰지 마.”
가볍게 받아넘긴 용주는 다음 내레이션을 기다렸다.
용주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원이 온통 붉게 물들었을 때, 공주님은 깨달았어요. 여기가 여왕의 성이란 걸. 공주님이 탈출했단 사실을 눈치챈 여왕은 공주님을 없애기 위해 나타났답니다.”
내레이션이 끝남과 동시에 중앙정원의 문이 열렸다.
다리에서부터 천천히 보이기 시작한 모습.
길게 늘어뜨린 여덟 개의 팔을 가진 여왕은 중앙 분수대에 조각되어 있는 바로 그자였다.
“석상에 있던….”
“그래. 저게 여기서 처리해야 하는 녀석인 모양이군.”
조각과 달리 녀석의 체구는 상당히 거대했다.
녀석에 비하면 용주도, 수지도 고작 손바닥만 한 벌레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마 녀석이 마지막일 테지.”
이 동화.
말도 안 되는 엉터리긴 하지만, 기승전결의 흐름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이게 가령 녀석이 이곳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한다면, 여왕을 쓰러뜨리는 게 자연스러운 마침점.
로지 녀석의 꿍꿍이는 몰라도, 이 재미없는 동화책을 덮을 순 있을 테지.
“처음 보는 언노운이야.”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언노운을 마주한 수지가 검을 고쳐 잡았다.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탑에서 상대했던 A급 언노운들보다 한 수 위의 강함.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게 S급 언노운이란 것을.
“아마 S급 개체겠지. 모르는 게 당연해.”
녀석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모스맨들은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 보였다.
그저 이 승부의 승자가 결정되기를 기다릴 뿐.
‘누가 이기든, 그 사람이 주인이라 이거냐.’
더 강한 자를 우두머리로 인정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법칙이었다.
“뒤에 있어. S급이 상대라면 내가 처리하는 게 나으니까.”
크기로만 보면, 카일론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추측건대, 녀석 역시 단일 개체.
세상에 단 하나의 개체만 존재하는 만큼 그 힘도 결코 만만치 않을 테지.
“응. 알았어.”
뒤로 물러나는 수지를 지켜보던 용주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템 하나를 던졌다.
‘은막의 거울 벽.’
상대의 시야에 제약을 주는 일종의 연막이었다.
녀석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을 테지.
“…….”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여왕은 용주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묘한 긴장감.
마치, 적을 탐색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여왕의 입에서 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카악! 카아악!”
보글거리는 침 소리에 섞여 나오는 괴성.
입가에 쏟아진 침을 닦아 낸 여왕은 여덟 개의 팔 중 하나를 휘둘렀다.
흩뿌려진 깃털은 대지를 뒤흔들었고, 부서진 정원의 파편이 하늘로 솟구쳤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딛고 있던 타일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 용주는 같은 눈높이에서 녀석과 마주 보았다.
단 한 발이 보여 준 파괴력은 용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지금 머릿속에 찍힌 포인트는 거기가 아니었다.
‘말을 할 수 있다고?’
S급 개체라고 하더라도 언노운이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적어도 S급 헌터들은 알고 있었어야 정상일 테지.
‘그럼 녀석도 그 세 명이랑 같은 수준이라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역시 의문 부호가 남았다.
‘아니야.’
녀석의 힘은 카일론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의 모습은 인간보다는 광폭화 상태의 자신의 모습에 가까웠다.
카일론의 경우를 생각하면, 적어도 녀석보단 한 수 아래라고 보는 게 합리적일 거다.
‘아까 그 탑 안에 퍼즐도 그렇고, 역시 뭔가 부자연스러워.’
녀석이 등장에서도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있었다.
녀석은 요새의 크기에 비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실이 가미된 허구의 이야기. 상상으로 구현된 허구의 공간이란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관찰자의 입장에서 읊어주는 내레이션도.
그 기이한 공간과 퍼즐들도.
지금 마주한 언노운도 전부 설명이 됐다.
이건 일종의 꿈.
로지가 주인공인 세상에서 녀석이 쓰고 싶은 대로 끌고 가는 동화책 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