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괜찮아?”
고개를 든 수지가 물었다.
“아~ 덕분에.”
“혹시 내 아래에도 보여?”
수지의 물음에 용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엔 안 보이는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또 이런 게 튀어나올지 모르니.”
“응.”
“지금 아주 좋았어. 그렇게 부탁할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면의 큐브는 총 4개. 돌아가는 속도는 동일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고. 네 개 면 중 어느 한 면에 동선이 겹치면 섬광을 발사하는 방식인 것 같아.’
네 개의 큐브가 그릴 수 있는 각도와 구도.
그 모든 걸 머릿속에 그린 용주는 걸음을 계속했다.
예상대로 날아오는 섬광과 불규칙하게 솟아오르는 가시들.
진행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여럿 있었지만, 중간지점을 통과하는 데까지 큰 이상은 없었다.
‘이 앞은 두 큐브가 겹치는 교집합 양각을 동시에 피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타이밍은 딱 한순간.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용주는 생각한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였다.
그때.
“끼에엑!!”
날카로운 괴성이 용주의 귓가를 찢었다.
순식간에 발판을 뚫고 나타나는 건 거미 형태의 언노운.
아까 정원에서 처리했던 개체의 특대 개체였다.
“칫…!”
언노운의 독니 사이에 손톱을 욱여넣은 용주는 게의 입을 따듯 언노운의 입을 땄다.
이윽고 날아오는 두 발의 섬광.
양각을 잡힌 용주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위로 뛰면 공격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지가 위험해진다.
자신의 머리 위는 빈 공간이었지만, 수지의 머리 위는 가시밭이었다.
‘그렇다면….’
부분 광폭화로 꺼내 든 여덟 개의 가시 촉수.
거미의 다리를 모두 제압한 용주는 녀석을 방패로 삼았다.
지지직…!
귀를 긁는 타는 소리와 함께 코를 찌르는 담백한 향기.
거미 통구이를 앞에 둔 용주는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이걸로 2층도 클리어.
3층으로 올라가서 저 연등만 잡으면 이 방도 끝이었다.
“언노운도 숨어 있었네.”
“그러게나 말이다.”
길 끝에 멈춰선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그쪽은 발판이 전혀 없네. 어디 장치라도 있던 걸까?”
수지가 있는 곳은 정상적으로 발판이 있었지만, 이쪽엔 그런 게 없었다.
2층과 3층의 높이는 용주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높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발판이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상관없어. 올라갈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수지의 말대로 정직하게 올라가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발판을 만들 장치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디딜 발판이 없는 건 이쪽에서 해결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발판은 없어도,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있어.’
가볍게 뛰어오른 용주는 벽을 짚었다.
땅으로 내려온 용주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할퀴기로 만들었던 손톱이 완전히 부러져 있었다.
벽에는 긁힌 자국 하나 없었고 말이다.
‘이 방법으론 안 되겠군. 그럼….’
용주의 팔에서 자라나는 문어의 다리.
다시 한번 뛰어오른 용주는 수많은 빨판을 벽에 붙였다.
완벽하게 밀착된 빨판은 사람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을 정도였다.
‘됐어.’
한쪽 벽면만을 이용한 용주는 그대로 3층까지 올라섰다.
마침내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한 두 사람.
손을 흔드는 수지를 향해 용주 역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당연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수지의 행동이 똑같이 재현된 것일 뿐.
‘아무것도 없는 게 어째 더 수상한데.’
눈에 보이는 건 연등뿐이었다.
가시도 없었고, 기타 다른 무언가도 보이지 않았다.
1층에서 자신을 노렸던 섬광도 여기까진 사정권이 아닌 모양이었다.
테스트에서 아무런 결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 끝이란 느낌이야.”
“더 조심하면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도 없는 게 영….”
그렇게 말하던 용주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바닥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게를 버텨 주던 바닥이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마치 신기루처럼.
‘몇 초 이상 디디고 있으면 발판이 사라진다든가… 뭐 그런 건가?’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말이 되는 게 없었다.
그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주의를 기울일 시간을 주지 않겠단 거냐.’
허공을 디딘 용주는 자연스럽게 다시 지면으로 돌아왔다.
사라진 길은 약 5m 남짓.
따로 블록 지어진 건 없었지만, 앞으로도 저 정도 길이가 한 세트로 사라질 거란 이야기였다.
“한 번에 간다.”
속도를 높인 용주는 블록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앞서갔다.
“뒤에.”
“알고 있어.”
뒤따라오는 작은 가시들.
화살처럼 날아드는 가시를 피해 자세를 낮춘 용주는 반대로 힘껏 뛰어올랐다.
수지의 발밑을 지나가는 날카로운 가시들.
사방에서 빗발치기 시작한 가시들에 용주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탄막 슈팅도 아니고, 이 많은 가시들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대충 다 파악했어.’
자신과 수지.
두 사람에게 위협이 되는 것들을 추려 낸 용주가 가시 사이를 누볐다.
움직임을 공유한다 한들.
자신과 수지의 체격에는 차이가 있었다.
용주의 움직임은 그 점까지 고려한 움직임.
과감하고, 망설임 없었지만, 섬세했다.
빠르게 연등으로 다가간 용주는 연등을 터치했다.
그 순간, 움직임이 사라진 가시들.
가시들이 사라진 자리엔 발판이 돌아오고 있었다.
“똑똑한 공주는 이 방의 중심에 있는 연등을 파괴해야 한다는 걸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어요. 방엔 여러 숨겨진 장치들이 있었지만 용감하고 똑똑한 공주의 앞길을 막을 순 없었죠. 왕비의 퍼즐을 푼 공주님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답니다.”
내레이션과 함께 또다시 변화하는 풍경.
외길이었던 땅은 정사각형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또 다른 방이네.”
허공에 떠 있는 발판.
발판 아래에는 구름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 같이 안 움직이나 봐.”
발걸음을 돌린 수지는 타일의 정중앙으로 다가갔다.
중앙엔 천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생각인 거지?”
“공주는 생전 처음 보는 새하얀 연기를 볼 수 있었어요. 그게 구름이란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짜증 섞인 말을 중얼거린 용주의 귀에 로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은 공주가 절대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준비해 뒀어요. 한 번도 본 적 없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기에 아무리 똑똑한 공주라도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더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리던 수지가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 모양이다.
“힌트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것 같네.”
“아니. 그렇지도 않아.”
“응?”
“아까 녀석이 그랬지. 한 번도 본 적 없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을 준비해 뒀다고.”
“응. 그랬지.”
“그리고 여기 있는 건 천구지. 별자리를 기록하는.”
“응.”
“모르겠어?”
“응?”
한국말 특유의 ‘응’ 화법을 구사한 수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주는… 아니, 로지는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다고 했어. 당연히 별도 본 적 없겠지. 뭐, 여기도 별이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음~ 확실히 그렇네. 그럼 이 천구가 힌트란 거야?”
“그렇겠지.”
용주가 천구를 살폈다.
찰랑거리는 검은 물결 사이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별자리가 하나도 기록되지 않은 천구라.”
고개를 든 용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대칭을 이루는 발판이 하나 더 있었다.
‘여기까지 하면 총 여섯 개인가.’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
모두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발판이 존재했다.
정육면체를 누군가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놓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근데, 여기 세계 별자리도 알아?”
“뭐… 한번 봐 봐야지.”
알 턱이 없었지만, 일단 그렇게 얼버무린 용주는 타일 끝으로 움직였다.
네 면의 중앙에는 같은 모습을 한 네 개의 거울이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곳들에도 마찬가지인가.’
공중의 다른 타일들에서도 이와 같은 거울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것도 어딘가에 쓰는 장치란 뜻일 테지.
“있잖아. 내가 뭐 찾았는지 볼래?”
수지의 부름에 용주가 자리를 옮겼다.
수지가 발견한 건 천구 주변에 자리 잡은 일종의 기호.
천구를 빙 두른 이 발판은 용주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퍼즐의 한 조각이었다.
“이게 뭘까? 아무 의미 없이 있진 않을 것 같은데.”
“황도 12궁.”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이건 녀석들을 상징하는 기호들이었다.
“응. 그렇구나. 그럼 여기 별자리도 우리 별자리랑 똑같단 걸까?”
“글쎄. 그렇지만,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할 거야. 퀘스트 게이트는 우리 세계가 아닌데, 거기 있는 황도들은 우리 세계의 12궁과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오~ 그거 일리 있네.”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지가 다시 한번 기호를 살폈다.
“근데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름이라도 적혀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대강 알고 있으니까.”
12궁의 순서와 기호.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이미 경험해 본 적 있는 것들이었다.
설마 그게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무작위로 배치된 12개의 기호.
용주가 가장 먼저 밟은 건 양자리를 상징하는 기호였다.
“불 들어왔어.”
용주가 양자리 기호를 밟자 양자리의 문양이 밝게 빛났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의 어떤 무언가는 감지할 수 없었다.
“뭔가 틀린 걸까? 아니면 뭔가 빼먹었나?”
“음….”
생각에 잠긴 용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천구, 여섯 개의 발판, 황도12궁. 뭘 놓친 거지?’
“…….”
용주를 지켜보던 수지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때.
“응?”
수지가 발밑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의도치 않게 수지가 밟은 건 물고기자리의 문양.
동시에 두 개의 문장이 활성화되자 작은 땅 울림과 함께 언노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바위 도마뱀?”
일종의 별칭으로 언노운을 부른 수지는 전투를 준비했다.
몸을 동그랗게 만 녀석들의 주특기는 구르기.
단순한 구르기였지만, 특유의 단단함과 속도, 그리고 유연성으로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녀석들이었다.
“굴러다니는 녀석은 그 고문 바퀴 녀석들이면 족해.”
언노운의 돌진을 정면에서 막아선 용주는 녀석의 갑피를 힘으로 으스러뜨렸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과속 트럭들.
발버둥 치는 녀석을 움켜쥔 용주는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분출하는 피 폭발에 휘말린 언노운들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발판 밖으로 떨어진 언노운들은 바닥을 모르는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음….”
상황을 지켜보던 수지가 속도를 높였다.
가로로 넘어진 바위 도마뱀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 돼.”
천구를 향해 직행하는 언노운을 막아서는 수지.
태풍의 눈으로 뛰어든 수지는 회전력 속에 숨어 있던 언노운의 팔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그 속도 그대로 내던져진 언노운은 마찬가지로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괜찮냐?”
“응.”
수지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나온 언노운일까? 어디 숨어 있던 것 같진 않았는데.”
“그게 이 공간의 법칙이란 걸 거다.”
“법칙?”
“그래.”
용주가 천구를 가리켰다.
천구엔 양자리와 물고기자리 두 개의 별자리가 나타나 있었다.
“별자리가 생겼어.”
“앞과 뒤, 대칭이 되는 2개의 별자리를 동시에 누른다. 순서가 맞으면 언노운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언노운을 처리하면 별자리가 천구에 기록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겠지.”
“대칭이 되는 별자리?”
“그래. 네가 아까 밟았던 건 물고기자리. 황도12궁의 마지막 별자리였어.”
“오….”
수지의 반응을 보아하니 의도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뭐, 상관없지 않겠는가.
초심자의 행운이든 뭐든 정답으로 다가갔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다음은 어떤 거 밟으면 돼?”
“황소자리랑 물병자리. 저기 물결치는 것 같은 문양 밟으면 돼.”
밝은 빛을 내는 두 개의 문양.
경계의 눈빛을 띤 두 사람은 일어날 일에 대비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