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저기 용주 씨!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러는데, 그러니까 용주 씨 말씀은 여기 있는 모두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씀이시죠?”
조심히 손을 든 린이 물었다.
“그런 셈이지.”
“그치만 저기 저분들은 아무리 봐도 제가 알고 있는 분들 같은걸요.”
린이 석조 삼 형제를 가리켰다.
“저희 말씀이십니까?”
“탄탄한 이 머슬들은 그쪽 같은 미인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마신.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마신. 그렇기에 마신.”
그런 물음에 돌아온 각기 다른 반응.
개성 넘치는 환과 울의 반응에 린은 피식 웃어 보였다.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 세 분은 드워프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실은 저희 세계에도 여러분 같은 분들이 있거든요. 여러분도 제 이야기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지 않으셨어요?”
“마신, 어떤 언어도 들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쪽 이야기가 좀 더 귀에 들어오긴 했다.”
팔짱을 낀 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세히 말하자면 길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용주가 이야기했다.
설녀와 석조 삼 형제의 관계.
개개인의 관계로 보면 둘 사이의 접점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석조 삼 형제의 뿌리가 그곳의 드워프들과 같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누가 뭐래도 녀석들은 석조 드워프였고.
석조 드워프가 살았던 세계는 설녀와 같은 세계였으니까.
“세계가 붕괴되고 있다는 건 무슨 소리냐? 그 부분부터 듣는 게 순서이지 않을까 싶은데.”
용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모드락이 꼬리를 흔들었다.
테논과 모드락의 세계는 이중 용주가 방문하지 않은 유일한 세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일 테지.
“이상이라면 감지하고 있었겠지.”
이야기를 시작한 용주는 빠르게 필요한 내용을 전달했다.
다른 차원의 세계.
인커전.
언노운.
이야기의 마침표를 지켜본 테논과 모드락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웬 지랄 같은 상황인가 했더니 그런 거였냐. 젠장.”
검을 빙글 돌린 모드락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사실이잖아. 내가 뭐 틀린 소리라도 했어?”
긴 혀를 날름거린 모드락이 주변 풍경을 살폈다.
초목이 우거진 초원과 삼림.
이곳엔 아까 봤던 균열도 괴물들도 없었다.
“그래서 거기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였는데? 뭐 없어지기라도 해?”
“우리 세계 없어졌다.”
따지듯 묻는 모드락에게 랫맨들이 대신 대답했다.
“우리 집도, 땅도, 가족도 잃어버렸다.”
“모아 둔 식량도 몽땅 사라졌다. 바다도 육지도 사라졌다.”
“바위 골렘들 못 따라왔다.”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끝도 없는 나락으로.”
“…….”
좌절과 절망이 느껴지는 그들의 표정에 모드락이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의 이야기가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이 아니란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칫…! 살다 살다 쥐랑 이야기하는 날이 올 줄이야.”
“우리도 그렇다 설마 살다 살다 도마뱀이랑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랫맨들과의 대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 모드락은 주둥이를 긁적였다.
“칫! 하는 수 없지.”
모드락의 손짓에 그의 부하들이 바실리스크와 함께 왔다.
“실어 놨던 물자 이 녀석들한테 좀 나눠 줘라. 입을 거랑 덮을 것도 좀 주고. 당장 살려면 부족한 게 많을 거다.”
“네!”
모드락의 한마디에 수많은 물자들이 내려졌다.
“이거 정말 우리 주는 거냐?”
“우리 아무것도 줄 거 없다. 우리 알거지다.”
산처럼 쌓인 물자 앞에 랫맨들이 이야기했다.
“누가 돈 달라고 그랬냐. 그냥 쓰라고. 멍청이들아.”
눈치를 살피던 랫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물자로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이 가장 먼저 향한 건 물.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이들은 살 것 같단 표정을 지었다.
“웬일로 그런 결정을.”
“더 잃어버릴 것도 없는 녀석들이 우리한테 뭘 어쩌겠어. 나보다 약한 녀석들 괴롭히는 취미도 없고.”
나지막한 테논의 물음에 모드락이 대답했다.
“설마 그것보다 최악인 상황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적어도 불가항력의 ‘재앙’은 피했잖아. 이미 말려들어 버린 이상 최선을 생각해야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가벼운 추가 지시를 내린 모드락은 용주와 눈을 맞췄다.
이 정도면 만족하냐.
모드락의 눈동자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쪽 어르신들은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맞아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 말씀하세요. 도움이 되고 싶어요.”
우연히 발걸음이 맞은 테레사와 린이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이 맞았던 모양이다.
“필요한 거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래요. 저흰 지금 이대로면 충분하답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저희가 뭔가 돕고 싶어서 그래요. 정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요. 네?”
노엘의 정중한 거절에 두 사람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들이밀었다.
초면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나~ 그럼 난 내 궁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커다란 와인 저장고랑 푹신한 소파가 있는.”
“궁전?!”
놀란 테레사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그거 이 두 사람이 한 말이 아니었다.
“어…. 그러니까 그쪽은.”
“아까 드워프들이랑 같이 계시던 분 맞죠?”
“나~ 몰?라. 저기는 와인 기사라고 부르더라고.”
와인 기사가 손에 든 병을 흔들어 보였다.
“와인 기사? 멋진 이름이네요! 추임새도 엄청 독특하시고.”
“혹시 와인 기사 님도 드워프신 거예요? 괜찮으시면 투구 한 번 벗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래도 얼굴은 한 번 보면 좋잖아요.”
린의 부탁에 와인 기사가 갑작스럽게 거리를 뒀다.
투구를 벗어 보란 이야기가 아무래도 역린을 건든 모양이었다.
“아하하…. 불편하시면 안 벗으셔도 돼요. 근데, 궁전이라니 대체 어떤?”
부자연스럽게 웃어 보인 테레사가 물었다.
“얼음으로 된 궁전. 얼음으로 된 와인 저장고. 나~ 가끔은 시원한 와인이 마시고 싶다고나 할까.”
“어~ 그럼 와인 저장고만 있으면 됐지. 왜 굳이 궁전까지….”
“나~ 와인 저장고가 있어서 궁전이 있는 게 아니야. 궁전이 있으니까 와인 저장소가 있는 거라고.”
“네? 그게 무슨….”
테레사가 곤란함을 표했다.
뭔가 말이 되는 것도 같으면서, 굉장히 이상한 논리였다.
“저… 그러고 보니.”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노엘이 입을 열었다.
“집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해요. 남편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작은 집이.”
“집이란 말씀이시죠.”
테레사가 믿어달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하루면 뚝딱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그녀의 부름에 인형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와인 기사에게 몰려든 인형들은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나~ 왜 내 궁전은.”
놀아달라는 아이들에게 붙잡힌 삼촌.
딱 그 모습을 하고 있는 와인 기사가 이야기했다.
“가능하면, 지하에 와인 저장고도 같이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있으면 저희도 유용하게 쓸 것 같은데.”
“음… 못할 건 없긴 한데, 부탁하셨던 얼음으로 된 와인 저장고는….”
저장고를 부탁한 건 노엘이었지만, 그 목적엔 와인 기사의 바람이 녹아 있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얼음으로 된 저장고를 만들어 달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당연히 가능하죠!”
“그럼요! 당연히 가능…. 에?!”
놀란 테레사가 고개를 돌렸다.
“응?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그치만 방금 가능하다고.”
“음? 당연하죠. 그런 거라면 제 전문 분야라고요.”
린의 손짓을 따라 물결 진 바람이 눈사람을 만들었다.
와인 기사와 똑 닮은 눈사람이었다.
“설녀란 이름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요.”
“설녀? 와~.”
테레사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잠깐 이어졌지만, 린은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하나로 통일되었던 언어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하아~ 젠장 힘들어.”
사견궁이 고개를 떨궜다.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이 이상은 한계였다.
“미안해, 린. 분위기 좋게 잘 흘러가던 참이었는데.”
“으응. 아니야. 네가 아니었으면 이만큼 하지도 못했을 거야.”
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을 붉은 사견궁은 시선을 피했다.
‘확실히 한 번은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 같긴 한데.’
“질서를 만드는 건 세계의 주인인 자가 할 일이지.”
용주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카일론이 내려앉았다.
“…….”
내려앉은 카일론을 바라보는 와인 기사에게선 묘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보는 앞에서 코를 베간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세계의 질서를 통일시키고 싶다면, 네가 정하면 되는 거다. 전에 상대했던 차원을 다루던 자처럼.”
“…….”
카일론이 말하는 건 분명 이안이었다.
이 녀석, 아무래도 그 녀석의 차원으로도 끌려갔던 적이 있던 모양이다.
‘룰을 만들라고? 그렇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언어를 통일시킨다.
목적은 특정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 떠오르는 게 없었다.
너무 막연해서, 뭘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잠깐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편적인 이야기.
용주의 힘에 반응한 세계에 한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이건….”
“대체 뭐냐.”
용주의 앞에 창조된 건 하늘까지 이어진 탑.
완성된 탑은 이내 아래에서부터 부서져 하늘 위로 날아갔다.
“저기 봐라!”
“저건… 달?”
탑이 사라진 하늘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달.
태양 빛에 가려져 희미했지만,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임에 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견궁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룰을 만든다. 제대로 되긴 했나 보네.’
신에게 닿기 위해 쌓은 탑이 있었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들의 도전에 진노한 신은 그들의 언어를 분화시켰고, 그들의 탑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지금 이건 거기에 뿌리를 둔 발상이었다.
무너뜨린 탑은 그때 신이 무너뜨렸다던 탑.
땅이 아닌 하늘로 올라간 잔해는 그 일이 없던 일이 됐다는 상징과도 같았다.
물론, 지금 이 행동이 결과에 있어 꼭 필요한 행동이었냐고 물으면 확신할 수 없었다.
이안이라면.
보다 익숙한 자였다면, 이런 불필요한 상징과 사건 없이도 룰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지금의 용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뭐가 됐든 결과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
걸음을 옮긴 용주는 와인 기사에게 다가갔다.
검집을 잡은 그의 손은 불안한 듯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녀석에게 복수하고 싶겠지.”
용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른 녀석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용주는 쭉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평온함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비수가 용주의 눈엔 보였으니까.
“네 복수를 말릴 권리는 내게 없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
“다만, 남겨질 자들도 한번 생각해 봐라. 저 바보 삼 형제에겐 네가 필요할 거다.”
날카롭게 용주를 쏘아보는 와인 기사의 눈동자.
캄캄한 갑옷 속에 갇힌 그의 눈동자에선 묘한 망설임이 느껴졌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건.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싸움이란 건 스스로도 알고 있단 눈치였다.
“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혹시 취하기라도 한 거야?”
목이 타는지 와인을 들이부은 와인 기사가 검을 놓았다.
“바보 삼 형제랑 같이 마시기로 한 좋은 술이 있다고~ 저번에 그 식물로 담갔던 게 아주 숙성이 잘됐어. 시원하게 하면 분명 환상적일 거야.”
딸꾹질을 한 와인 기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좋은 걸 두고 갈 수야 없지. 게다가 내가 여기서 날뛰면 분위기가 엉망이 될 거 아니야. 그런 거 싫다고.”
“…고맙다.”
용주가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위안이 될진 모르겠지만, 곧 다른 두 녀석을 칠 거다. 배신자는, 배신자로서 자신의 과오를 다하게 하는 것도 복수의 한 모습이지 않을까.”
“…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상해. 너.”
자신의 손에 와인을 부은 와인 기사가 용주의 얼굴에 와인을 뿌렸다.
제령?
용서?
위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용주로선 확실치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확실하게 말하고 있었다.
매듭을 지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