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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24화 (324/357)

324화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흩날리는 회색 입자.

거꾸로 뒤집힌 풍경 속에서 날아오는 것들에 형만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는 건 다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사신형 언노운….”

수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결.

저건 분명 그것들이었다.

“떨어져 있어라. 다른 녀석들이랑 같이.”

노엘과 랫맨들을 보낸 용주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태풍의 눈이 된 이곳은 바깥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뭐 하려는 거냐.”

“세계의 붕괴를 막기 위한 방편이다. 너에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다.”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온 세계의 파편들이 카일론에게 모여들었다.

파편들엔 저마다 크고 작은 금이 생겨 있었다.

태풍의 눈을 타고 솟구친 파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지진?!”

“또 지진이다!”

“이 신세계는 괜찮은 거 아니었냐!”

세계가 극렬하게 요동쳤다.

“뭘 한 거냐.”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거다.”

뒤집힌 세계 속으로 돌아가는 언노운들.

사라져 가는 소용돌이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에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소리는…. 설마?’

메아리치는 거대한 소리.

그 정체는 하늘을 나는 거대한 고래.

베히모스의 울음소리였다.

“엄청 큰 고래네. 산보다도 크겠어.”

“왜 베히모스가 여기에….”

베히모스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는 건 용주도 처음이었다.

두 번이나 마주한 녀석이었고, 심지어는 배 속까지 헤집었던 녀석이었지만, 용주는 늘 놈의 단편적인 일부만을 봤을 뿐이었었다.

녀석은 그만큼 거대한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저게 다른 무언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마… 아까 봤던 파편들을.”

“느끼지 않았나? 세계의 무게를.”

해골 병사들을 일으킨 용주는 그들을 둘렀다.

높이 날아오른 용주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중앙의 숲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전혀 다른 풍경들.

사막, 폐허, 밤의 숲….

확실한 경계면을 가진 채 이어진 세계들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너의 세계를 독립된 차원에서 분리했다. 이제 여긴 실존하는 하나의 세계다.”

용주와 나란히 선 카일론이 이야기했다.

“독립된 차원에서 분리했단 게 무슨 소리냐.”

“여긴 너의 세계임과 동시에 독립된 세계, 너의 힘이 없더라도 지탱되는 세계의 파편의 결합체다.”

“…….”

녀석의 이야기를 100%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선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자신이 구축한 차원이었지만, 더 이상 자신의 마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 세계를 훔쳤단 얘기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다만, 말했다시피 너한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을 거다. 여길 전장으로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을 테니.”

“…….”

조목조목 짚는 녀석의 이야기는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훗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길 전장의 무대로 쓰진 않았을 테니까.

“인커전 없이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거냐.”

“부패가 짓밟았던 상처끼리 붙이는 건 나한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게다가 여길 구성하는 너의 힘 역시 나와 같은 뿌리. 그 위에 쌓인 게 달라도 그건 변치 않는다.”

“이렇게 누더기처럼 막 붙여 놔도 되는 거냐. 저 녀석들, 사는 환경도, 사용하는 언어도 전혀 다른데.”

“당장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이것뿐이었다. 그대로 뒀다면 네가 마지막에 찾았던 그곳의 풍경이 여기 모두의 풍경이 됐을 거다.”

가볍게 원을 그리는 카일론의 손짓.

그의 손짓과 동시에 지면에 여러 개의 포탈이 활성화됐다.

반원을 그리며 나타난 포탈들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지의 모습.

포탈 너머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서윤이었다.

눈이 부신 듯 이마에 손을 올린 서윤은 자신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매개가 된 건 너의 힘이었다. 붕괴의 영향 역시 네가 밟았던 세계가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지.”

서윤 다음으로 나타난 이는 태영.

같은 세계에 남았던 두 사람은 인접한 두 포탈에서 나타났다.

달려간 수지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몸 구석구석을 더듬으려는 그녀의 손길에 서윤은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펄펄 뛰고 있었다.

“훗…!”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

안도의 미소를 삼키는 용주의 눈동자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 역시 하나둘 나타났다.

다른 세계에 남겨 뒀던 녀석들 모두 무사했다.

“그래…. 그래서 바깥쪽은 어떻게 된 거냐?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하는 거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한시가 급한 거 아니었냐.”

“다방면으로 가던 균열을 제거했으니, 그 정도 시간은 있을 거다. 네가 만든 시간이라 할 수 있지.”

“…그래서 뭘 더 기다리란 거냐.”

“아직, 초대한 손님이 다 도착하지 않았다.”

“손님이라고?”

더 올 사람은 없었는데, 대체 누굴….

“……!”

그렇게 생각한 용주의 눈에 익숙한 녀석의 모습이 나타났다.

술 한잔 거하게 걸치고 있는 땅딸막이 기사.

세 드워프와 함께 나타난 건 와인 기사였다.

햇빛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와인 기사는 이곳이 자기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대자로 누워 버렸다.

“왜 저 녀석들이….”

“녀석들의 세계는 전체이자 일부다. 하지만 부서지고 잊힌 조각들 역시 하나가 될 수도 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새로운 세계의 주민들에게 한 번은 얼굴을 마주 볼 기회를 주려고 했다. 싫다면, 그만두지.”

그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포탈에서도 누군가 나타났다.

수많은 박쥐 떼가 만들어 낸 어둠 속을 거니는 이는.

어리바리한 얼굴의 테레사였다.

“평소에도 그렇게 신경 좀 써주지 그랬냐.”

와인 기사와 석조 드워프 삼 형제.

테레사와 그녀의 뱀파이어들.

설녀와 황도 13궁.

테논과 모드락이 이끄는 리자드맨들.

거기에 노엘과 랫맨들까지.

전부라고 할 순 없었지만, 중심이 되는 이들은 거의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쩐지 포탈이 쓸데없이 많다 싶더만.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 박쥐에 별에 도마뱀에 쥐. 딸꾹~! 뭐야? 취하기라도 한 건가.”

주변을 쭉 훑어본 와인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도마뱀 인간에, 쥐 인간, 거기에 엄청나게 큰 거인까지, 제가 보는 게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거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테레사가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물었다.

“용주 씨가 부르는 거라고 그랬었는데,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요.”

황도들 앞에 선 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베히모스는 저 위에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여긴 대체 어디고. 저 녀석들은 또 뭐야? 아까 그 괴물들은….”

날카로운 눈매를 빛낸 모드락이 검을 움켜쥐었다.

리자드맨들이 여기 온 경위는 다른 녀석들과는 좀 달랐다.

그들이 여기 온 건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신형 언노운들에 의해서.

그들과의 전투를 준비하던 이들은 푹 꺼지는 지면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 들어왔다.

“다들 진정해라. 내가 설명할 테니.”

땅으로 내려온 용주가 중심에 섰다.

“아! 용주… 씨?”

“야! 이용주!”

설녀의 말을 집어삼킨 서윤의 외침.

버선발로 뛰어나온 서윤은 용주의 등에 업혔다.

“뭐 하는 거야?! 해명해!”

“그러니까. 이제부터 설명한다 했잖아. 그리고 좀 내려가.”

“아니! 말하기 전까진 안 떨어질 거거든!”

“그러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뭐?!”

“뭐, 여기가 어디고 쟤네가 어쩌고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왜 내가 1등이 아니었냔 거라고!”

“뭐? 1등?!”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소리를….

“처음엔 저 두 녀석, 그다음엔 우리 둘. 그다음에도 비슷했을 거 아니야. 글러트니, 라스, 엔비…. 그 프라이드 개자식도 있었을 거고.”

“…….”

“그랬으면 날 1등으로 불렀어야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

마음 같아선 한숨이라도 푹 쉬고 싶었다.

뭔 소릴 하나 했더니 그런 거였냐고 이마라도 꾹 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용주는 그러지 않았다.

녀석의 걱정도, 기다림도 지금 녀석의 표정이 다 설명해 줬으니까.

“그리드 녀석이라면 완전 시원하게 날려 버렸어. 네가 그 모습을 꼭 봤어야 했는데.”

“그러냐.”

“묵은 체중이 아주 그냥 싹 내려갔다니까. 한 3kg은 빠졌을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빚은….”

“에헷!”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낸 서윤이 몸을 더 바짝 밀착시켰다.

“빚은 누가 졌다고 그래? 여기서 네가 갚을 빚은 하나도 없다고.”

용주를 놓아 준 서윤이 용주와 마주 보고 섰다.

“이럴 땐 그냥 ‘고생했네’라고 한마디 해주면 되는 거라고. 오케이?”

“…….”

“부드러운 말투. 부드러운 목소리! 알지?”

입술에 닿는 서윤의 검지.

“고생했네.”

작은 한숨을 내쉰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좋아~ 이걸로 날 1등으로 안 부른 건 용서해 줄게. 고맙단 이야긴 내가 1등으로 들은 거 맞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서윤.

“어이어이~ 서로 물든, 빨든 내 알 바 아닌데, 집에 좀 보내 주고 하면 안 되냐?”

그 모습을 불편하게 바라보던 시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노래도 안 나오고, 재미도 없는 세계에서 이제 좀 나가나 싶었더니만.

이거야 아직도 아무것도 안 되지 않은가.

“실례했군.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줬으면 하는데. 저기 저 녀석들부터 돌려보내야 이야기가 쉬워질 테니.”

용주가 각기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에게 다가오란 손짓을 보냈다.

“용주 씨!”

“이 사람들 대체 뭐예요?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요?!”

테레사와 린이 동시에 이야기했다.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놀란 듯 보였다.

용주를 알고 있단 것도.

서로 다른 언어로 용주에게 말을 걸고 있단 것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으니까.

“구원자시여!”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불길하게 시리. 아까 그 녀석들은 네가 보냈던 것들이었나 보지?”

그 둘과 조금 거리를 둔 테논과 모드락이 이야기했다.

“나 무섭다! 이 녀석들 대체 뭐냐!”

“여긴 혹시 크레아탄이 살던 세계인 거냐! 그럼 여기도 그런 괴물이 있는 거냐?!”

“크레아탄 무섭다! 그렇지만 우린 노예가 되지 않는다!”

옹기종기 모인 랫맨들이 노엘의 뒤에 바짝 숨었다.

“마스터! 이게 대체….”

“이곳이 바로 마신의 세계. 현신한 마신의 이면 세계다.”

“나~ 그냥 포도주나 한 잔씩들 들라고~ 어차피 다 꿈인데, 뭘 그리 놀라고 그래. 마셔마셔~ 쭉쭉~.”

이 중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느긋한 반응들.

와인 기사와 울의 이야기를 들은 린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방금 저 두 사람의 말은 자기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그러고 보니 저 세 사람.

석조 드워프이지 않은가?

“정말이지. 다들 쫑알쫑알 시끄럽네.”

혀를 찬 사견궁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

그와 동시에 통하기 시작한 대화.

번역의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침묵이었다.

“다들 몹시 당황스럽다는 거 알고 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

사견궁을 바라본 용주가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본 너희 세계의 풍경. 기억하고 있겠지?”

용주의 목소리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의 세계는 달랐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너지는 하늘과 갈라지는 대지.

세계는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

베히모스가 날아다니는 그곳까지도.

“세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너희 세계를 새로운 차원에 안정시켰다. 태어난 곳도, 살아온 환경도, 언어도, 생김새도 다른 너희가 여기 모인 이유지.”

용주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좋든 싫든 너흰 한 방주에 탄 거란 소리다. 그리고 너희가 여기 모인 건 너희가 너희 세계를 대변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이고.”

“세계를 대표하는 목소리?”

“역시 보는 눈이 있다. 마신. 세계의 목소리다.”

용주의 이야기에 나온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 어떻게 지낼지는 너희 선택이다. 지금처럼의 고립도, 협력도, 침략도 여기선 뭐든 가능할 테지. 다만… 난 너희가 서로 피를 보는 미래는 원치 않는다. 너희 전부 나와 인연이 있는 자들이고, 전부 내가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여전히 그들의 눈동자에 서려 있었지만, 그 끝은 적대심이 아니었다.

전부 내가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용주의 그 한마디가 가져온 건 폭풍이 아닌 봄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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