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 * *
“무너진다!! 이제 정말 다 끝이다!!”
사라져 버린 하늘과 바다.
그 속에 남은 마지막 한 뼘의 땅에 모여 있던 랫맨이 외쳤다.
“여보….”
“종말까지 함께할 수 있다니, 이것 또한 복 아니겠소. 당신이 이곳으로 날 보러 왔으니, 이번엔 내가 그쪽으로 가는 것이오. 그게 전부라오.”
불안에 떠는 부인에게 엘이 안심하란 듯 웃어 보였다.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크레아탄의 소환터.
등대 아래에 위치한 의식의 방이었다.
등대 위에 있던 ‘이름 없는 자들의 위령비’는 엘이 짊어지고 있었다.
바닥 타일을 뜯어내 지게 형식으로 만들어서 말이다.
“괜찮을 거야. 여기라면 아무 일 없을 거랬어.”
불안에 떠는 이들의 모습에 수지가 안심하란 듯 이야기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으니 말이다.
“불안에 떨지 않는 거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여기 물 있는데도 괴물들 들어오지 않았었다. 어쩌면 정말 괜찮을지도 모른다.”
안도감과 평안함.
수지의 얼굴에서 그 두 가지를 느낀 랫맨들이 이야기했다.
“응,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아. 반드시 구하러 올 테니까.”
쿠구구궁…!
안심하라는 수지의 말이 무색하게 또 한 번 천지가 진동했다.
“아아악! 저기 봐라! 저기!!”
“갈라지고 있다! 벽이! 바닥이! 갈라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갈라지는 균열.
지금껏 단단하게 버텨 주던 마지막 보루 역시도 더 이상 붕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냐! 여기라면 괜찮다고 하지 않았냐!”
“거짓말이었다! 가짜 희망이었다!”
“아악! 떨어진다! 떨어져!!”
균열을 피해 물러난 랫맨들이 서로 뒤엉켰다.
안 그래도 인원은 이미 포화 상태.
더 도망칠 곳도.
더 움직일 곳도 없었다.
“죽을 거야! 전부 죽을 거라고!”
“살고 싶어~!”
“아래로 떨어지면 뭐가 있는 거지? 바닥은 있는 건가? 숨은 쉴 수 있는 건가?”
비처럼 쏟아지는 천장의 파편들.
소환터의 중앙을 가른 균열은 크레아탄의 석상을 완전히 삼켜 버렸다.
“다 끝났어! 끝났다고!!”
균열에 갈라지기 시작하는 대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린 지면은 일제히 무너져내렸다.
“으아악!!”
끝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랫맨들.
랫맨들의 비명 사이에서 노엘은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았다.
“…….”
온몸을 끌어당기는 중력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랫맨을 바라본 수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썩 좋은 인생이었다!! 젠장!!”
여기저기서 불을 밝히는 랫맨들의 촛불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에 날아오른 등불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괜찮아. 그렇지?”
찰랑거리는 두 개의 펜던트.
가슴 속에 넣어뒀던 펜던트에 손을 올린 수지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
등 뒤에서 감싸오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수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 있는 건.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안 늦었냐.”
작은 포탈을 찢고 나온 용주가 물었다.
“응.”
“다행이네.”
벡터를 조작한 용주가 이곳에 작용하는 중력을 역전시켰다.
추락하는 속도를 잃고 붕 떠오른 모든 이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몸이…! 몸이 떠오르고 있다!”
“우리 죽은 거냐?! 죽어서 지금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거냐?!”
갑작스러운 무중력 상태에 당황한 랫맨들이 서로를 살펴보았다.
“여보.”
“아무래도 저쪽에서 만나는 건 오늘이 아닐 것 같구려.”
수지를 안고 있는 용주.
그 모습을 바라본 노엘이 이야기했다.
수지의 믿음.
그건 결코 실체 없는 허상이 아니었다.
“꽉 잡아라. 조금 흔들릴지도 모르니.”
“응.”
의식을 집중한 용주에게서 서로 다른 빛깔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안이 했던 것처럼….’
까만 어둠 속 일렁이는 까만 물결.
형태를 잡지 못한 물결은 일정한 흐름 없이 파도쳤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잖아.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이안이 만든 세계는 허상이었지만, 허상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 안에 실재하는 또 다른 세상.
먹고, 마시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세계였다.
‘더 게이트…!’
하나 되는 두 가지 빛깔.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물결은 이내 거대한 바다가 되었다.
“으아악!”
“떨어진다! 다시 떨어진다!”
“빠질 거야! 빠진다고!!”
모든 이들에게 다시 돌아온 중력.
빠르게 가까워지는 보랏빛 바다에 모두가 눈을 감았다.
“…….”
수지를 바짝 끌어안은 용주는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광활한 초원과 산림이 펼쳐진 그곳엔 밝은 태양 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악! 숨이…! 숨이…!”
고통스러운 듯 목을 움켜쥔 랫맨.
“쉬어지잖아?!”
한참을 뒹굴던 랫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보라색 바다 같은 곳으로 떨어졌는데.”
“그럼 여기가 바닷속이라고?”
“해도 있고, 나무도 있고, 물도 있다. 바다에도 원래 이런 게 있나?”
“아니, 그보다 우리 바닥에 떨어졌는데, 왜 하나도 안 다쳤냐? 우리 어디서 떨어진 거냐?”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 봐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다만.
“우리 산 거 맞지?”
한 가지 생각이 모두를 관통했다.
자신들은.
살아 있었다.
“살았다! 살았어!”
“살아 있다고!”
“오~! 감사합니다! 어디 사는 어떤 신인진 몰라도 무조건 감사합니다!!”
터져 나오는 함성.
서로 부둥켜안은 랫맨들을 보던 용주는 조심히 수지를 내려놓았다.
“멋진 풍경이네.”
“그러냐.”
“응. 정말 예뻐.”
용주의 가슴에 손을 올린 수지가 가볍게 손을 쓸어내렸다.
“…….”
안도감과 함께 밀려온 극심한 현기증에 용주는 잠시 머리를 짚었다.
“괜찮아?”
“그래. 별거 아니야. 익숙하지 않은 걸 억지로 했더니. 조금 무리했나 보다.”
벡터만 해도 충분히 낯설고 벅찬 힘이었다.
이미 많은 마나를 소모한 직후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짐을 하나 더 얹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
해낸 게 오히려 기적이라 봐야 할 정도로.
“잠깐 기대있어.”
수지가 자기 어깨를 두드렸다.
“매미가 나무에 매달리지. 나무가 매미에 기대는 거 봤냐.”
“나무한테 직접 물어본 거 아니잖아. 매미한테도.”
“…….”
한마디도 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수지의 얼굴.
평소와 같은 수지의 얼굴을 마주한 용주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스스로 자기 머리를 날렸던 기억도.
죽음이 차오르던 그 감각도.
이 표정 하나면 몇 번이라도 다시 감내할 수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냐.”
“응. 내기에서 이겼거든.”
“내기?”
“응. 그래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엔비와 무슨 내기를 했는지 용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용주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뭐가 됐든,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닐 테니까.
“그러면 그쪽 일은 잘 정리됐나 보네.”
조금 전 용주가 사용했던 힘.
그건 분명 S급 헌터들의 능력이었다.
류은과 무.
신의 힘이라 불리던 두 헌터의 힘은 지금 용주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게이트는?”
“…안심해도 돼. 이준도, 녀석의 이형 리액터도 다 끝났으니까. 이쪽에서 문이 열릴 일은 없어.”
용주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이준과 그의 리액터가 끝난 것도.
이쪽에서 문이 열릴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거짓이 없다고 그것이 진실이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 뒤에 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응.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수지는 차고 있던 은시계 중 하나를 풀었다.
“이건 돌려줄게.”
까치발을 든 수지는 용주의 목에 은시계를 걸어 주었다.
“이거 바뀐 것 같은데.”
“응. 알고 있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수지가 가볍게 뒷짐을 졌다.
수지의 은시계를 움켜쥔 용주는 넝마가 된 옷 안쪽으로 은시계를 집어넣었다.
어둠밖에 없던 세계.
부서져 떨어지던 세계 속에서 느낀 자신의 기운.
그건 어쩌면 저 은시계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저 물건에.
땀과 피와 죽음이 묻은 저 물건에 자신의 기운이 서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너무 보기 좋은 그림 같은 풍경이네요.”
용주에게 다가온 노엘이 이야기했다.
그건 이 세계를 향한 것이기도 했고, 두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잘도 그걸 들고 나를 생각을 했군.”
“그렇게 무섭고 외로운 곳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뭐,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해도 도움을 받았지만요.”
가볍게 웃어 보인 노엘이 수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건 수지의 아이디어였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저흴 도와주셨군요.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감사하지 마라. 딱히 너흴 위해 한 일이….”
“감사 정도면 그냥 받아도 되잖아. 안 그래?”
용주의 말에 끼어든 수지가 이야기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용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공간이 비틀리며 붉은 포탈이 일렁거렸다.
“망가진 세계. 이곳이 그들을 구한 방주인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카일론.
그 옆에 열린 포탈에선 형만이 걸어 나왔다.
“사람?”
카일론과 마주한 수지는 엄습해 오는 강렬함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 사람.
분명 사람이었는데, 언노운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크기의.
“그렇게 막 쳐들어올 수 있는 공간인 줄은 몰랐는데.”
수지에게 안심하란 눈빛을 보낸 용주가 이야기했다.
형만이 함께 있는 걸 보면, 적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아마 수지도 눈치챘을 테지.
“네가 내 세계에 왔던 것과 같은 이치지.”
“아~ 그러셔?”
카일론에게 다가간 용주는 갑작스럽게 주먹을 휘둘렀다.
면상을 가격한 힘에 터져 나가는 파동.
“이걸로 아까 그건 없던 거다.”
시원하게 카일론을 날려 버린 용주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제야 아까의 분노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안수지!”
달려온 형만이 수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무사한 모습에 형만의 얼굴엔 짙은 안도감이 돌았다.
“왜? 죽기라도 했었을까 봐?”
형만의 얼굴에 손을 올린 수지가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형만이었지만, 적어도 이번은 예외였다.
그가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그만큼 무거웠었단 소리겠지.
용주의 그 부자연스러웠던 모습들이 그의 불안감을 더 증폭시켰을 테고.
“그런데 막 그렇게 날려 버려도 되는 거야, 그 사람?”
형만을 안심시키던 수지가 물었다.
같이 들어왔던 것도 아니고.
헌터의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같은 편인 것 같았는데 말이다.
“털끝 하나 안 다쳤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사람도 아니니까.”
“사람이 아니야?”
“그래. 녀석은 언노운이다.”
“언노운?”
수지가 고개를 갸웃하는 그 순간.
수지의 눈앞에 카일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카일론은 딱히 용주에게 불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도 않았고.
그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있었다.
“이 사람이 언노운? 그치만 사람인데? 말도 통하고.”
수지가 카일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상식에 뒤집히는 일이긴 했지만, 수지의 얼굴에 있는 건 공포나 불안이 아니었다.
그건 호기심에 더 가까운 무언가였다.
“신비롭군.”
수지와 눈을 마주친 카일론이 중얼거렸다.
계승자의 자격을 부여받은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이자에게선 그의 조각의 일부가 느껴졌다.
수지의 존재 자체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긴 했다.
마지막 퀘스트 게이트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하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이렇게 눈앞에서 보는 건 또 감상이 달랐다.
“신비로워? 왜?”
“넌 내가 두렵지 않은 거냐.”
“두려워해야 해? 왜?”
“언노운은 너희 세계의 적. 나의 존재는 너희에게 절망 그 자체일 텐데.”
“음~ 그치만 적이 아닌 거잖아? 적이 아닌데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
“혹시 비밀의 방에서 용주를 구해 준 사람이…?”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신형 언노운.
어둠과 점자.
용주에게 생긴 변화.
그런 것들이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 그 말을 언젠가 꼭 하고 싶었어.”
“…….”
수지의 눈빛에 카일론이 시선을 피했다.
이 여자.
아무래도 ‘로지’ 이상으로 특이한 녀석인 모양이었다.
“잠시 실례하지.”
용주와 눈을 맞춘 카일론은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
요동치는 그의 힘에 하늘을 바라보는 용주.
거꾸로 비친 왕좌는 이곳의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