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벡터가….’
멈춘 듯한 시간 속 보이는 용주의 꼬리.
벡터는 분명 최대로 돌려놓았다.
어떤 물질도.
어떤 힘도.
이 방정식의 예외일 수 없었다.
왜냐면 이건 그 모든 걸 상회하는 최상위 방정식이었으니까.
질서 위의 질서였으니까.
그런데….
‘내 질서를 벗어난… 현상이라고?’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최상위 방정식의 여러 변수들을 다시 조정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네 개의 턱이 자라 있는 꼬리는 완전한 흑암이었다.
강착 원반을 두른 흑암.
초대형 블랙홀을 흡수한 것 같은 이질적인 비주얼을 보며 이준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안….”
주변 공간을 왜곡시키는 일격.
심장을 직격하는 치명적인 일격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이준의 가슴을 꿰뚫었다.
“!”
자신의 몸이 사라진 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
아이러니하게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흩뿌려지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상태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가슴 정중앙이 동그랗게 사라져 있었다.
세포, 뼈, 장기. 피.
몸을 구성하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사라진 것처럼.
“컥…!”
숨소리에 섞여 나온 단말마.
인지보다 한발 늦게 들어온 충격에 이준의 몸이 날아갔다.
부패의 소용돌이를 뚫고 나가는 이준.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처박힌 이준에겐 어떤 움직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카학…!”
마지막의 마지막에 적중시킨 마지막 비수.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일으킨 용주에게서 광폭화가 걷혀 갔다.
미래시와 현실시.
다른 시간선의 풍경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미래시가 보일 때 자신은 방관자에 가까웠었다.
일은 일어나고, 자신은 그걸 보고 있다.
그게 미래시의 기본적인 구도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은 행동의 주체였고, 현실을 만들었다.
두 시간선이 같은 것을 보였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였다.
미래시가 보인 풍경은 근원을 뽑힌 미래.
거기서 승부수를 던지지 못했을 때 일어날 미래에 대한 경고였다.
힘을 잃어버린 자신은.
이안의 힘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자멸했다.
그걸 보고 움직인 미래가 지금과 달랐을까?
거기에 대해 묻는다면 답은 할 수 없었다.
아마 영영 얻을 수 없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의 감각은.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다 끝났어. 이걸로….”
움직이길 거부하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 용주는 자신의 왼팔을 집어 들었다.
서서히 되돌아오는 팔의 감각.
짓이겨지고, 터진 상처에선 아직 피가 흘렀지만, 핵심이 되는 신경들은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녀석에게 남은 건 이제 잔불뿐이야.’
룬검을 뽑아 든 용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준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상태라고.
“……!”
그렇게 생각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진.
후두둑…!
흩뿌려지는 붉은 피.
팔과 다리를 쓰지 않고 몸을 일으킨 이준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움직일 수 있다고? 저 상태로?”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적어도 인간인 이상 저 상처로 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자주 듣던 이야기지만, 저건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 녀석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
텅 빈 가슴에 손을 올린 이준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의식은 있는 것 같긴 한데….’
용주가 확신을 내릴 수 없었던 건 녀석의 상태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녀석의 눈동자 때문이기도 했다.
탁하게 번진 눈동자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흐릿했다.
‘뭐가 됐든 녀석의 마나는 이제 바닥이야. 벡터를 제대로 조종할 수 있을 리 없어.’
바닥을 알 수 없는 대양과도 같던 그의 마나도 이제 바닥을 드러냈다.
확실하게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이 몸을 일으킬 때 사용한 벡터만 해도 불안정함의 끝이었다.
초보자가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처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용주라고 상황이 좋진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이쪽은 이런 몸 상태에 익숙했다.
“확실하게 끝을 내주마.”
마나를 다리에 집중시킨 용주는 거리를 좁혀 나갔다.
이안과 이준.
적어도 그 둘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하나의 스킬이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
차원을 만들고, 벡터를 조작하는 고유의 능력은 전체이자 하나였다.
그걸 잃었다는 건.
전부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마침표를 찍는 지점이 달라졌지만, 그 결과에는 변함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고통도, 분노조차도.”
갑작스럽게 뻗어 나온 검은 불꽃이 용주의 앞을 막아섰다.
‘이건….’
눈에 익은 흑염.
텅 빈 이준의 가슴에서 피어오른 흑염은 그의 전신에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윤현의….’
거칠게 날뛰는 여덟 개의 머리.
틀림없이 이건 녀석의 ‘야마타노오로치’였다.
‘녀석의 불꽃이 어째서.’
서리를 두른 룬검이 불꽃을 베어 냈다.
잘려 나간 머리가 그리는 동그란 원.
웅덩이진 불꽃 속에서 솟구치는 건 불의 지네 ‘오오무카데’였다.
“녀석은 항상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지. 힘을 내놔. 더 강한 힘을. 난 그게 무슨 소린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
불꽃에 둘러싸인 이준이 텅 빈 가슴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몸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에도 그는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천장을 강타하는 오오무카테.
머리에서부터 얼어붙은 지내는 이내 마디마디 깨지며 부서졌다.
“목소리가 들려. 내게 말을 걸고 있어. 내게 힘을 준다고.”
이준의 곁을 빙빙 도는 상어 한 마리.
지면을 잠수한 ‘지자메’는 떨어지는 용주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큭…!’
왼손을 잡아당기는 용주를 관통하는 통증.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뒤로한 용주는 지자메를 관통했다.
“도준의 리액터를 먹은 글러트니에게 변화가 있었었지. 글러트니의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였었는데,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괏값이었어.”
용주의 룬검을 막아서는 ‘카마이타치’.
흩어지는 불꽃 사이로 보이는 이준의 얼굴은 고통스럽기보단 평온해 보였다.
“이건 누구의 목소리일까? 윤현인가? 내가 흡수한 너의 일부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언노운의 기운.
불꽃으로 검을 빚은 이준은 용주를 몰아붙였다.
치명상을 입은 인간이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힘과 속도였다.
“리액터의 재료가 된 이형 결정체인가?”
용주의 뒤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먹잇감을 놓쳤던 지자메는 다시 한번 이빨을 드러냈다.
“칫…!”
부분 광폭화로 빚어낸 칼날 촉수.
등 뒤에서 자라난 여섯 개의 촉수는 불의 상어를 도륙했다.
그런데.
“칵!”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지자메는 용주의 몸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
찢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의 상어였던 불꽃은 수많은 피라냐로 분리되었다.
마치,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고등어 떼처럼.
‘녀석이 쓰던 거랑 원리 자체는 비슷한데….’
서리 갑옷을 두른 용주는 불꽃을 모두 산산이 조각냈다.
윤현의 스킬 역시도 베면 베는 대로 증식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건 베기 전에 각자의 개체로 갈라져 있었다.
이 녀석 단순히 윤현의 그림자를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녀석보다 한 발 더 나가 있을지도….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감정들. 굴욕감, 모멸감, 격양된 분노.”
들이받는 쿠단의 박치기.
사후 강직의 효과로 대미지를 최소화한 용주였지만, 빳빳하게 굳은 몸은 충격에 그대로 날아갔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갈증과 충동,”
순간 이준의 왼팔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 모습은 마치 변화했던 카일론의 모습.
완성된 형태는 달랐지만 피부를 구성하는 물질 자체는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해 보였다.
“!”
다섯 개로 갈라지는 이준의 팔과 손.
용주가 꼬리를 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찢어진 손은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 그 자체였다.
뚝…!
순간 보이는 미래의 풍경.
피눈물과 함께 보이는 미래시에 반응한 용주는 재빠르게 어깨를 틀었다.
촤악!
아래에서부터 위로 찢고 나가는 칼날.
아직 다 아물지 않았던 상처에선 다시 한번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공격을 완벽하게 흘려보내진 못했다.
하지만 이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조금 전 그 일격은 사후 강직을 가볍게 찢어 놓았다.
‘이 기운은….’
이준의 기운은 뒤틀려 있었다.
뒤틀림 속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느껴졌다.
이준의 기운.
윤현의 기운.
그리고 광폭화 상태의 자신의 기운까지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 외에 무언가가 하나 더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움츠리고 있는 무언가가.
‘실베스…. 죽음의 동생이란 자의 잔영인가.’
이형 리액터의 기원이 되는 건 특별한 힘을 가졌던 이형 결정체.
그 결정체를 드랍한 언노운은 역시 그자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기운 역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녀석이 왜….’
녀석에게 이준을 도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녀석은 자신의 죽음에 관여된 원수일 테니까.
하지만 녀석은 이준을 돕고 있었다.
단순히 그게 자신이 생존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달아. 인간의 피가. 이렇게 달고 향기로웠던가?”
손끝에 묻은 피를 핥는 이준.
소름 끼치는 미소를 머금은 이준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왼팔의 변이는 이제 어깨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용주의 팔을 잡아먹었던 고대의 재앙이 그랬던 것처럼.
“더, 더 마시고 싶어. 아직 이 갈증이 해결되지 않았어.”
맞부딪치는 하얀 서리와 검은 화염.
칼날과 함께 부딪친 손과 손은 서로를 찢고 부러뜨렸다.
“그 피는 내 거야. 그 살과 고기 역시 내 거야. 한 점도 남기지 않겠어.”
기괴하게 뒤틀리는 이준의 목소리.
벡터의 방향을 순간 돌려놓은 이준은 용주를 할퀴며 날려 버렸다.
‘그래. 그런 건가.’
길게 이어진 핏자국.
그 끝에서 멈춰 선 용주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류은(瀏誾)의 헌터.
맑고 온화함을 의미하는 녀석의 이명은 더 이상 녀석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다.
녀석의 눈동자에 남은 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살육에 대한 충동.
그것뿐이었다.
첫 번째 시련에서 자신은 자신의 분신과 싸웠었다.
저건 그때 봤던 그 눈동자였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이준의 모습은 점점 더 사람의 모습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질수록 가장 깊은 곳에 움츠리고 있던 실베스의 기운이 주변 다른 것들을 서서히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도달한 물음의 답.
녀석이.
실베스가 윤현을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녀석은 윤현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래.
첫 번째 시련에서 자신의 분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조금은 감이 와. 네 능력이 뭔지. 내 안에서 말하고 있어. 어떤 경우의 수로도 피할 수 없는 완벽한 죽음을 선사하라고.”
“그러냐. 그럼 네가 좀먹히고 있단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좀먹힌다고? 내가? 하! 웃기지 마. 난 이준이야. 신세계의 질서라고!”
“윤현을 먹지 않은 건 그게 작은 조각이었기 때문이냐? 아니면 그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냐.”
“…헛소리를. 내가 먹고 싶은 건 이 갈증을 채워 줄 너의 피와 살뿐이야!”
변이된 이준의 왼팔에서 말뚝 모양의 갑피가 자라났다.
용주를 겨눈 팔에서 사출되는 말뚝.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포화는 다시 한번 비밀의 방을 뒤집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