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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17화 (317/357)

317화

“거기가 그렇게 좋으면 좀 더 멋진 공간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원을 그리는 이안의 손짓과 함께 날아가는 잔해들.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한 잔해들은 이내 작은 달이 되었다.

쿠드득…!

없는 균열을 강제로 비집고 나오는 갈고리 모양의 팔들.

단단히 뿌리를 내린 팔들은 도약을 준비하는 방아깨비의 뒷다리처럼 굽어졌다.

달에서는 날 리 없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쾅!

도약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는 달.

등에서 자라난 여섯 개의 갈고리 팔로 추진력을 얻은 용주는 날카로운 손톱을 세웠다.

손톱마다 휘감기는 페이탈 블러드.

구체의 형태에서 변형된 스킬은 회오리치는 물결이 되어 있었다.

“벡터의 중심지로 지정한 핵을 강제로 깨부수다니, 대단한걸.”

재앙처럼 퍼붓는 피.

페이탈 블러드의 회전 방향에 손을 댄 이준은 원심력을 최대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던 원을 벗어나 용주를 찢는 페이탈 블러드.

팔과 어깨, 그리고 얼굴을 타고 지나가는 피에 방향이 틀린 용주는 호수를 이룬 핏속으로 떨어졌다.

“그 잠깐 사이에 이만한 걸 준비했다니. 내 힘을 역이용하면 이런 것도 가능하단 소린가?”

호수는 피라미드의 절반까지 차오를 만큼 깊었지만, 이준만은 예외였다.

“하긴 이안이 만든 물의 행성에서 비슷한 걸 하긴 했었지. 이런 기분이었었나 보네.”

한 방울도 젖지 않은 이준은 아직도 메마른 타일 위에 있었다.

“그리드가 자주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랑 비슷한 느낌인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야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물도 아니고 피가 고인 호수니 당연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용주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는 건 그와 별개의 이야기였다.

빠르고 유려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는 용주의 위치를 이준은 정확히 따라가고 있었다.

“깊은 심해와 그 속을 누비는 미지의 공포, 공략하는 법이야 여러 개 있지만….”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는 혈사포.

용주의 움직임과 합쳐진 혈사포는 이동식 가관총처럼 사방에서 물결쳤다.

“역시 이 방법이 가장 절망을 안겨 주기 좋겠지.”

용오름 치는 탄환을 가볍게 흘려낸 이준이 칼끝을 피의 호수에 담갔다.

쿠와앙!!

그 순간 드러나는 메마른 바닥.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용오름 친 12개의 소용돌이는 용주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피의 호수가 사라지며 강제로 물 밖으로 끄집어내진 용주는 모사사우르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건 돌려줄게.”

요동치는 12개의 소용돌이.

내리꽂힌 소용돌이는 꿰뚫을 기세로 용주를 파고들었다.

“카각…!”

“다음 공격은 흘려보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

날아가는 용주의 벡터에 손을 댄 이준은 방향을 강제로 왜곡시켰다.

왼쪽을 강타한 충격이 위쪽으로.

또 오른쪽을 강타한 충격이 오른쪽으로 밀어내는 기묘한 풍경.

마지막 한 점까지 휘몰아친 피의 소용돌이는 이내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일종의 수소 폭발을 일으킨 피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양파 같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건가?”

바닥을 낮게 기는 하얀 안개.

자신에게서 흘러나가는 아지랑이에 손을 올린 이준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무기를 만들어 내는 건 프라이드, 벌레는 부리는 건 슬로스, 공간을 이동하는 건 러스트, 언노운의 힘과 충동은 글러트니, 얼음을 다루는 건 라스, 반영구적인 생명력을 가진 생명체를 부리는 건 그리드.”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가는 아지랑이.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있던 안개의 흐름은 이내 멈춰 섰다.

“그리고 이번엔 생명 자체에 관여할 수 있는 엔비. 팬텀 전원의 특기를 전부 다 보여 줄 수 있다니. 역시 처리하긴 아까운 인재인데.”

안개 사이로 걸어 나오고 있는 용주는 다시 4족 보행에 적합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100%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하늘거리며 일렁이는 검붉은 날개.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생명력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신형 언노운들도 비슷한 걸 사용했었지. 미안하지만 그건 이미 내 계산식 안에 있어.”

영혼 안개가 멈춘 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생명력의 착취 역시 정지돼 있는 상태.

속도를 높인 용주는 점멸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날카롭게 휘두른 손톱에 찢기는 용주의 피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던 기포가 찢기며 흩뿌려진 폭발성 담즙은 이준의 눈앞에 있었다.

“작은 걸 숨기기 위해 큰일을 벌인다라. 기본적이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전술이지.”

불과 1cm 차이로 무위로 돌아간 공격.

‘아니, 틀렸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용주는 이내 안쪽에 숨기고 있던 것을 깨부쉈다.

삽시간에 모든 것을 뒤덮는 무의 승천.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에 휘말린 이준은 5cm 정도 뒤로 밀려나 있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었다니. 이건 워커를 이용했던 서예나 헌터의 기습을 응용한 건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용주를 꿰뚫는 영혼 안개.

움직임의 근간이 되는 큰 관절마다 꽂힌 말뚝들은 용주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뚝…!

“…음?”

뺨을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감각.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인 이준은 뺨을 쓸어 냈다.

“……!”

그 순간 굳어지는 이준의 표정.

손끝에 묻어 있는 건 다름 아닌 피였다.

그것도.

자신의 피.

“피…?”

흔들리는 동공은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기습을 당한 건 맞았다.

벡터의 계산이 조금 늦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그게 자신의 상처로 이어진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방정식에 넣을 필요도 없는 연산이었지만.

이준이기에.

신의 권능을 자랑해 온 류은(瀏誾)의 헌터이기에.

마지막으로 피를 흘려본 적이 언제인지.

아니, 애초에 흘려본 적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기에.

이준에게 그 연산은 사고의 오류로 다가왔다.

“피…. 피…. 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두통이 일었고,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이 보였다.

“피가…. 피가…. 손이 축축해.”

귓가를 울리는 거친 숨소리와 웅얼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흑백의 풍경이 망가진 필름처럼 지직거렸다.

언제, 어디의, 누구의 시야인지.

누구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릿했고, 모든 것이 희미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느낌이.

이 무력감이 토할 정도로 역겨웠다.

“대체 뭐야, 이건.”

끔찍한 두통과 환영에 몸서리친 이준이 용주를 더욱 만신창이로 헤집어 놓았다.

고슴도치가 된 용주를 날려 버리는 이준.

피라미드의 경사면을 역으로 거스르며 날아가는 용주를 따라잡은 이준은 용주의 꼬리를 붙잡았다.

“대체 뭐냐고!”

지금껏 들어본 적 없던 이준의 목소리.

언성을 높인 이준은 용주를 집어 던졌다.

“…….”

용주의 눈동자에 비치는 이준의 얼굴.

평정심을 잃어버린 그의 얼굴엔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넌.”

자신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향하고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

충격에 날아간 용주는 피라미드의 반대편 모서리를 타고 지상까지 추락했다.

“사라져!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추락하는 용주를 따라잡은 이준은 용주의 목을 붙잡았다.

지면이 깊게 파일 정도로 수차례 용주를 찍어누르는 이준.

주변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이준은 용주를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용주의 몸은 마치 승부가 결정 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휘리릭!

여섯 개로 갈라진 용주의 꼬리가 위협적으로 이준을 휘감았다.

보지도 않고 벡터를 계산한 이준은 무의식만으로 꼬리를 튕겨 냈다.

“!”

그 순간 꼬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물체.

몸을 숨기고 있던 살아 있는 바다는 바통을 이어받았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벅찬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사건.

이변이긴 했지만, 아까만큼의 이변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이준은 생각했다.

하지만.

벡터는 생각한 것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벡터 조작에 이상이 생긴 건 용주가 마련해 놓은 간단한 트릭 덕분.

살아 있는 바다의 뿌리는 광폭화와는 결이 달랐다.

무게와 힘, 구성 성분, 기타의 다른 것들에서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부분.

게다가 빨판의 뒤쪽이 불규칙하게 배열된 아토믹 버스터의 파편은 촉수의 힘과 무게를 불규칙하게 만들었다.

원래 상태의 이준이었다면, 이것 역시도 쉽게 튕겨 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녀석은 흥분 상태.

잃어버린 냉철함은 곧 녀석의 빈틈이었다.

“카각!”

이준의 마나와 감정을 소모시키는 건 분명 용주가 노리던 부분이긴 했다.

같은 피라도, 자신이 흘린 한 방울과 이준이 흘린 한 방울의 의미는 전혀 다를 거라고.

그거면 녀석의 평정심을 크게 흔들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었고.

하지만 그게 이 정도의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는 용주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피가 녀석의 발작 스위치가 된 건 확실하지만.

거기엔 상처를 입었다는 충격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극심한 두통과 머리를 관통하는 무언가의 파편, 어쩌면 혹시….’

추격하는 세 명의 언노운과 그를 저지하는 두 사람.

그 풍경 속 이준은 없었다.

의료 헌터가 둘.

거기에 의료 헌터의 힘을 모방할 수 있는 자가 하나 더 있던 팀이었다.

당시 어머니의 힘은 바닥을 보인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준 역시 당시 녀석들에겐 당해 내지 못했었다는 이야기.

피가 매개가 되어 지워진 기억의 일부가 스친 거라면, 그건 피를 흘린 마지막 기억.

즉, 자신의 패주를 봤을 가능성이 있었다.

‘뭐가 됐든 내 쪽에선 상관없는 일이지.’

이준의 몸을 강타하는 살아 있는 바다.

빨판을 포함한 용주의 몸 전체에서 역병 포자가 피어났다.

이윽고 이어지는 포자 폭발.

흩날리는 포자 먼지는 일대를 붉고 뿌옇게 물들였다.

“커헉…. 콜록!”

포자 먼지의 진원지.

유일한 안전지대를 형성하고 있던 이준이 고통스러운 기침을 내뱉었다.

“무슨 짓을…!”

포자 폭발엔 분명 완벽하게 반응했다.

모든 벡터를 돌려놓았고, 모든 피해를 무로 만들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온몸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고, 특히나 목이 폐와 기관지가 타오를 듯 뜨거웠다.

‘네 부하 녀석이 던져준 힌트지. 거기에 내 나름의 방식을 더한 거고.’

작은 노림수를 숨기기 위해 큰 것을 보인다.

부식성 포자와 영혼 안개를 보며 이준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정답인 동시에 오답이었다.

그 공격으로 용주가 달성하고자 했던 건 지금 이 공격.

살아 있는 바다와 소울 터치, 그리고 디파일러의 콤보였다.

무의 승천 역시 노림수긴 했다.

하지만 그 공격으로 피해를 입힐 확률은 잘해야 50%.

그게 용주가 생각한 최대치였다.

그렇기에 무의 승천 역시도 눈에 보이는 큰 것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포자 폭발이 일어날 때 이준은 자신의 몸을 최우선 순위로 보호했다.

분명 그게 최선이었고, 최고의 수였다.

하지만 녀석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소울 터치.

이준은 자신을 보호했지만, 자신을 본뜬 물방울들은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은 벡터는 물방울들을 더욱 격하게 찢어발겼다.

그로 인해 발생한 대미지는 이준조차도 반사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가장 큰 한 방을 100%로 만들기 위한 중간다리였다.

벡터의 구멍.

프라이드가 말했던 이준을 공략하기 위한 키 카드였다.

프라이드는 그걸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용주는 달랐다.

공략의 핵심은 디파일러.

포자 폭발 자체는 벡터의 그물에 막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거기 붙은 부가 효과는 녀석이라 해도 쉽게 예측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공기에 달라붙은 포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공기.

두 가지가 바로 구멍을 지나기 위한 핵심 키워드.

공기를 통해 흘러 들어간 포자는 대미지로 이어지며, 추가적인 피해를 야기한다.

그리고 지금 이게 그 결과.

용주의 공격은 다시 한번 신의 힘을 가진 자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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