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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15화 (315/357)

315화

* * *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냐.’

용주의 곁을 지나는 수많은 풍경들.

어딘지도 모르는 풍경들 속엔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세계의 파편들이 들어 있었다.

와인 기사와의 짧은 작별.

인사라고도 하기 민망한 술주정을 뒤로한 용주는 태양 가까이로 다가갔었다.

거기서 마주한 건 안정적인 모양의 포탈.

지금까지 마주했던 부서진 차원의 균열과는 다른 퀘스트 게이트의 문이었다.

‘안수지. 녀석은 괜찮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 프라이드를 덮고 있던 장막이 깨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나 프라이드가 인위적으로 깬 느낌은 아니었다.

그건 시전자의 변화에 의한 자연 소멸.

엔비가 더 이상 힘을 유지할 수 없을 상황에 놓였다는 의미였다.

둘 중 하나일 거다.

세계가 완전히 붕괴되었거나.

엔비가 전투에서 패배하였거나.

그리고 용주는 그중 후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수지의 상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남은 건 이제 이준 하나. 이 끝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진 몰라도 이제 더 이상 앞길을 막아설 팬텀은 없어.”

점점 더 붙는 속도.

폭발적인 속도로 추락하던 용주의 눈에 마침내 들어오는 출구.

마지막 각오를 다진 용주는 어두운 회색빛 사이로 떨어졌다.

“……!”

그런 용주의 눈에 보이는 익숙한 풍경.

한순간이라고 말해도 좋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용주는 이곳이 어딘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이곳은.

비밀의 방이었으니까.

쾅!!

굉음과 함께 부서져 나간 타일.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며 착지한 용주는 고개를 들었다.

“이거 놀랐는데요. 설마 이렇게 빨리 추격자가 나타날 줄이야.”

그의 앞에 있는 이는 이준.

그의 손엔 사신형 언노운이 반쯤 부서져 있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이것보다 멀리 도망갔을 줄 알았는데.”

“도망갔다. 글쎄요. 그 표현이 정말 맞는다고 보시는지요.”

이준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전 그냥 제가 하려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추격대가 붙었다고 해서 전부 도망자인 건 아니죠.”

“말은 잘하는군.”

“전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말이라면 헌터님도 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쭙잖은 존대라면 관두는 편이 어떻겠냐. 그 말투. 상당히 구역질 나는데.”

“하핫! 그런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 사용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인데.”

호탕한 웃음을 보인 이준이 들고 있던 언노운을 내던졌다.

용주가 붙잡은 언노운은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뭐, 특별히 그만두도록 하죠. 여기까지 절 따라온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린 이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안쪽에서부터 찢겨 나가는 사신형 언노운.

갈기갈기 찢긴 리퍼의 망토는 풍선 조각처럼 흩날렸다.

“사신형 언노운. 확실히 지금껏 관측된 적 없던 타입의 언노운이야. 생명력을 착취하는 힘은 엔비가 사용하던 힘과 유사성이 있어 보였고.”

여유를 보인 이준이 위를 가리켰다.

천장엔.

무수히 많은 사신형 언노운들이 자기 낫에 찔려 죽어 있었다.

“가지고 놀기에 제법 유쾌한 장난감이었어.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론 말이야.”

용주에게 등을 보인 이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전장에서 적에게 등을 보이는 건 죽여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이준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가공된 타일과 기둥, 인위적으로 조각된 조각들과 의식을 위한 피라미드. 찾고자 했던 걸 설마 여기서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단 아래 위치한 여섯 개의 석판에는 언노운들이 걸려 있었다.

십자가에 처형된 듯 비참한 최후를 맞은 녀석들은 오와 열까지 맞춰져 있었다.

“이곳에 잔류한 차원 압력은 확실히 이질적이야. 진하고 무겁지만, 역설적이게도 파괴적이지 않아. 누군가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압력이지.”

천천히 뒤돌아선 이준이 손목시계를 조금 풀었다.

“참으로 이상하지. 대체 누가, 대체 왜, 무엇을 위해 이런 공간을 만든 것일까.”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핏줄기.

벡터를 조작한 이준은 혈사포를 가볍게 왜곡시켰다.

방향이 비틀린 혈사포는 용주의 왼편을 스쳐 갔다.

“그리고 왜 그 공간이 하필 그 게이트에 있었을까.”

흥미로운 미소를 짓는 이준.

그의 눈빛은 마치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비 헌터. 처음 너한테 붙었던 이명은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지. 어떤 적을 만나도 걸레짝이 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 솔직히 말하면, 판 전체에 있어 너는 공기보다도 못한 존재였어. 너보다 유능한 대체품이야 발에 치이도록 널렸었으니까.”

“…….”

“그럼 그 좀비 헌터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정답은 너무도 간단하지.”

가슴에 손을 올린 이준이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다.

“뭘 보고, 뭘 경험했으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었는가. 뭐,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긴 하지만 나한텐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야. 나한테 중요한 건 여기가 문을 열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란 거지.”

이준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붉은빛.

이준의 발밑에서 시작된 붕괴는 피라미드를 둥글게 갉아먹었다.

“이 세계의 붕괴는 곧 새 시대의 서막이 되는 거야.”

“역시 가지고 있었군.”

빛이 발현되는 순간 느껴진 건.

광폭화 상태의 자신의 기운과 자신의 힘을 흡수했던 윤현의 기운이었다.

그때 러스트가 회수했던 리액터는 녀석에게 있었다.

“단 하나를 향한 순수한 집념. 윤현은 이 역할을 위한 최고의 장기 말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랐을 정도야. 녀석의 집착은 프라이드조차 넘어섰으니까.”

희미해져 가는 빛.

습관적으로 안경을 올려 쓰려고 한 이준이었지만,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이었는지 본인이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다.

올려 쓸 안경은 거기 없었으니 말이다.

“너희 두 사람에게 악의는 없어. 오히려 감사하고 있지. 너희가 아니었으면 오늘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테니까.”

인자한 미소를 보인 이준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제안이라고?”

“그래. 나랑 손을 잡지 않을래?”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너무나 뜬금없는 그의 제안에 용주의 포커페이스에 금이 갔다.

“이안한텐 책임감이 있어. 형만에겐 복수심이 있고. 하지만 넌? 너한테 과연 나와 적대할 이유가 있을까?”

“하! 무슨 논리를 펼치나 했더니.”

“맞아. 너에게도 나와 싸울 명분이라면 있지. 팬텀을 결성한 건 나니까. 하지만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우린 손을 잡을 수 있어”

“…….”

“알고 있어. 네가 헌터를 증오한다는 거.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헌터에 묶여 있었다는 것도.”

앞으로 내민 손을 움켜쥔 이준이 손에 핏대를 세웠다.

“널 무시하고, 경멸하던 헌터들. 그 녀석들의 얼굴이 공포와 비명으로 물드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

“너에겐 힘이 있어. 네가 대의를 잡기만 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게 될 거야. 돈, 명예, 권력, 복수, 원한다면 질서까지도.”

다시 한번 손을 내미는 이준.

“하! 바보냐 넌?”

그와 눈을 맞추고 있던 용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알고 있단 듯, 그렇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역시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군.”

“…….”

“내가 헌터들을 싫어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녀석들이 날 무시하고, 경멸했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헌터들에게 구역질이 났던 건. 헌터들이 다 너 같은 쓰레기 새끼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쓰레기 새끼라. 그것참 듣기 좋은 표현인걸.”

“힘이 있다고 했지. 그래. 내겐 힘이 있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용주의 마나.

“널 쓰러뜨리고. 널 막을 힘이.”

순식간에 이준의 앞에 나타난 용주는 룬검을 휘둘렀다.

“마나를 이용해 힘과 스피드를 올린다. 굉장히 초보적이고 단순한 활용인걸.”

역방향으로 흩날리는 서리.

강한 힘에 맞부딪친 칼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날 쓰러뜨릴 힘이라. 글쎄. 그 자신감이야 칭찬받아 마땅하다만 과연 할 수 있을까?”

역으로 용주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이준.

“네가 얼마나 강해지든 그런 건 전혀 상관없어. 벡터를 조작하는 내 앞에선 네 힘조차 나의 힘. 내 힘은 절대불변의 진리야.”

용주의 이마에 손을 댄 이준은 가벼운 딱밤을 날렸다.

그 순간.

휘익~!!

총알 같은 바람이 지면을 깨부쉈다.

‘절대 영도.’

점멸로 뒤를 잡은 용주의 룬문자가 빛을 발했다.

이준의 가슴과 불과 3cm 간격만 남긴 룬검.

멈춰 버린 룬검에서 역류한 한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용주를 집어삼켰다.

“그래도 자기 힘에 대한 내성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같네. 뭐, 불에 타 죽는 샐러맨더 같은 걸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니까.”

한기 너머로 보이는 용주의 눈동자.

그 아래에서 솟구친 거대한 그림자는 이준을 덮었다.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빛망울.

얼음 무덤이 작렬해야 할 그곳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지직!

침묵을 깬 강렬한 스파크.

11개의 잔상을 남기며 이준을 포위한 라이덴의 뇌격은 이준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뼈로 된 용과 사슴이라. 재밌는 조합인걸.”

라이덴과 보좌관.

둘을 겨눈 이준의 손이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났다.

“둘은 서로 상성이 어떤지 한번 볼까?”

가두고 있던 벡터를 돌리는 이준.

라이덴을 덮친 서리와 보좌관을 덮친 뇌격은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흠~ 사이가 영 별로였나 보지?”

추락하는 보좌관과 얼어붙은 라이덴.

용주에게 튄 스파크는 용주에게 흡수되었다.

사라지는 두 존재를 등진 이준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더 해보라는 그의 도발.

그 도발에 넘어가 주기로 한 용주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그때 봤던 그 모습. 열쇠가 된 힘도 바로 이 기운이었지.”

가볍게 손을 뻗은 이준은 용주를 날려 버렸다.

착지와 동시에 뛰어오른 용주는 지면을 내리찍었다.

분출하는 피의 향연.

모든 것을 흩트려 놓던 폭발은 물결치듯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진각성을 하고 나서도 그 모습으로 달려든다. 그게 의미하는 건 중간 과정일까? 아니면 최종 결정일까.”

가볍게 들어 올린 이준의 손으로 모여든 피.

이준의 손을 떠난 아웃레이지 브레이크는 용주를 향해 떨어졌다.

‘언홀리 프렌즈.’

더욱 속도를 높여 템포를 이어 가는 용주.

몇 번을 공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지만, 용주는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내게 남은 비수는 단 한 발. 이 승부의 관건은 그 한 방을 어떻게 녀석의 심장에 꽂아 넣을 것인가 하는 걸 거야.’

아웃레이지 브레이크.

페이탈 붐.

페이탈 블러드와 아토믹 버스터.

그 어떤 스킬을 사용해도 승부의 추를 이쪽으로 당겨오긴 힘들 거다.

하지만 이 모든 행동이 의미 없는 힘 낭비가 되지는 않을 거다.

포식자가 가장 방심하는 순간은 사냥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어정쩡한 연기로는 녀석을 속일 수 없어.’

그를 위해서라도 전력으로 부딪칠 필요가 있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맞혀 볼까?”

한 발을 내딛는 이준.

가볍게 디뎠을 뿐인 타일은 폭발에라도 휘말린 듯 솟구쳐 올랐다.

“이 정도의 폭발적인 마나 상승은 흔치 않아. E급에서 S급으로 성장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지.”

온몸으로 충격을 버텨 낸 용주에게로 모여드는 입자.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페이탈 붐은 용주에게로 되돌아갔다.

“진각성을 하면서 얻은 고유 능력이 있을 거야. 넌 아직까지 그 능력을 보이지 않았고.”

폭발을 찢고 나오는 용주를 기다리는 건 사신의 낫들.

천장에 꽂혀 있던 언노운의 무기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춤을 추었다.

“어떻게 하면 그 능력으로 내 능력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어떻게 내 벡터에 구멍을 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돋아난 촉수들로 낫들을 붙잡는 용주.

이준을 포위하듯 낫들을 집어 던진 용주는 폭발적으로 강하했다.

흩뿌려진 가시는.

돋아났던 자리에 거꾸로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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