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 * *
‘처음 보는 개체인데.’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모래 벌레.
비슷한 형태의 언노운이라면 몇 가지를 나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언노운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여기 사는 괴물인 건가?’
그런 가능성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결과는 같았다.
녀석은….
이 전투의 훼방꾼이었다.
“끼야아악~!!”
인간의 비명처럼 들리는 괴성을 지른 모래 벌레가 글러트니를 집어삼켰다.
겹겹이 쌓여 회전하는 수천의 이빨은 그대로 땅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방해를.”
빠르게 가까워지는 진동.
솟구치는 모래 벌레를 피해 물러난 형만은 대검을 욱여넣었다.
“한 줌 재로 만들어 주지.”
순식간에 모래 벌레를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
온몸을 뒤덮던 가시들을 바짝 세운 모래 벌레는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가시와 화염.
관성에 버티던 형만은 이내 엄청난 속도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바닥을 긁는 그의 허리와 어깨엔 선명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불에 대한 내성은 글러트니 그 이상인가.’
어쩔 수 없이 검에서 손을 뗀 형만이 허리에 박힌 가시를 뽑아냈다.
가시에 박힌 상처는 치명적.
딱히 독이 있거나 한 것 같진 않았지만, 팔보다 두꺼운 가시에 찔리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귀찮게 됐군.’
한바탕 난동을 부린 모래 벌레는 다시 한번 땅속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이어지는 쇼타임.
솟구쳐 오른 모래 벌레는 곧바로 땅속으로 사라졌고, 전혀 다른 곳에서 또다시 솟구쳐 오르며 공격을 이어 갔다.
‘어울려 주다간 끝도 없겠어.’
불로 지져 상처를 지혈한 형만은 모래 구덩이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퍼져 나가는 헬 플레어.
굴속으로 흘러 들어간 푸른 불꽃에 굴 전체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래 벌레의 공격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녀석의 표피는 열에 충분히 강했지만, 상대적으로 약한 내부는 열파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꺄악! 꺄아악!!”
완전히 지상으로 나온 모래 벌레가 하늘을 보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흐려지는 하늘.
하늘을 검게 채운 먹구름에선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형만의 피부를 적시는 첫 빗방울.
이게 단순한 비가 아니란 걸 깨달은 건 그와 동시였다.
치이이익…!
얼굴을 시작으로 몸 여기저기서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이 비.
틀림없었다.
이건 물이 아니라 산이었다.
그것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
‘벌레치곤 재주가 좋군.’
강한 불길로 자신을 감싸는 형만.
떨어지는 빗방울은 불에 닿으며 모두 기화해 사라졌다.
“미안하지만 네가 먹은 걸 도로 토해내 줘야겠다. 녀석에게 어울리는 죽음은 그렇게 평온하고 안락한 게 아니니.”
폭발과 함께 솟구친 형만이 모래 벌레의 턱 아래에 대검을 욱여넣었다.
자신보다 몇십 배는 거대한 거구를 압도하는 형만의 괴력.
녀석의 머리를 바닥에 메다꽂은 형만은 그대로 목을 그었다.
반쯤 잘려 너덜거리는 머리.
외마디 비명과 함께 형만을 후려친 모래 벌레는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머리에 든 게 없는 모양이군. 하나같이 저렇게 팔팔하기나 하고.”
회전하는 녀석의 중심부로 모여드는 에너지 흐름.
응집된 산성비는 이내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잘도. 내. 앞에서. 발악. 하는구나.”
그 순간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
소리의 진원지는 분명 모래 벌레였다.
지금까지 녀석이 내던 울음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지만, 당연하게도 형만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린 건 단순히 기존의 울음소리와 달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리가.
이질적으로 조각나 있었다.
뭐랄까.
마치, 라디오 채널을 돌려서 나오고 있는 특정 단어들을 조합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마디마디의 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울음소리처럼 들리던 것도 실은 어떤 말이나 문장이었던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얻을 순 없었다.
“끼아아악!!!”
“플레임 인젝터!”
힘의 충돌에 일어나는 강렬한 폭발.
폭발 속을 질주한 형만은 모래 벌레를 베어 냈다.
머리 아래부터 복부까지 이어지는 길고 싶은 상처.
복부의 기준을 어디로 잡을지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상처가 적어도 녀석의 3분의 1 이상을 갈라낸 것만은 사실이었다.
“애송이 주제에. 명줄 하난 길군. 게다가….”
활짝 열린 녀석의 안쪽으론 장기가 꿈틀대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하지만 녀석의 발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개복당한 상처에서 흘러나온 정체불명의 액체는 화염을 흡수했고, 액체가 된 화염은 이내 모래 벌레의 상처를 메웠다.
이글거리며 흐르는 화염.
거푸집에서 들어간 금속처럼 주조의 과정을 거친 화염은 이내 그의 갑피가 되어 굳어져 갔다.
‘내 화염을 갑옷으로 두르다니.’
상성이 좋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징징거릴 생각은 없었다.
“녀석을 뱉을 생각이 없다면, 녀석과 통째로 지옥에 떨어뜨려 주는 수밖에.”
형만을 잠식하는 거친 불길.
붉은색과 푸른색 불꽃은 선명한 경계선을 그으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때.
“끼야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형만의 머리 위로 살점들이 날아들었다.
“…….”
모래 벌레의 살점을 뚫고 나온 건 하늘거리는 검은 촉수들.
순식간에 녀석의 몸을 찢어발긴 촉수들은 이내 모래 벌레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모래 벌레는 격하게 발버둥을 쳤지만.
안쪽에서부터 찢긴 상처에 장사는 없었다.
움직임이 사라진 모래 벌레는 그대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박형만. 박형만. 박형만!!”
자신을 삼킨 포식자를 역으로 삼켜 버린 글러트니.
강같이 흐르는 침은 모래 벌레가 파놓은 굴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배고파! 아파! 뜨거워! 목말라!”
기괴하게 변이된 글러트니의 다리가 뱀의 형태가 되었다.
변해 가는 글러트니의 피부.
“굴욕…! 복수…! 애송이…. 아니야!”
전체적으로 말랑거리고 동그랗던 글러트니의 모습은 딱딱하고 날카롭게 변해 갔다.
마치, 갑피를 두른 것처럼.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글러트니의 목소리에 순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었다.
들어본 적 있는 사내의 목소리 같았지만, 그게 누구였는지 형만은 알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중얼거리는 것부터가 애송이인 거다, 애송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녀석이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해야 할 일은 같았으니까.
“그때는 사용하지 못했었지.”
일대를 불사르는 강렬한 열파.
남아 있던 야자수가 열파에 바스러졌고, 메마른 땅이 조각조각 깨져 나갔다.
열파와 마주 본 바위의 표면이 녹아 흘러내렸으며, 수증기와 함께 공기마저 증발하기 시작했다.
“해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라고 설득하고 설득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어.”
순간, 러스트의 얼굴이.
아니, 송이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 결투에서 분명 자신은 전력을 다했었다.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같은 밑바닥을 긁었다 해서 같은 것은 아니었다.
결단의 차이.
망설임의 차이.
흔들림의 차이.
무슨 말로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해야만 했을 때조차 하지 못했었지.”
라스와 러스트.
미래시가 없어도 보이던 미래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준.
모든 것의 진실을 알았던 그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격한 슬픔.
끓어오르는 증오와 분노.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남은 건 이제 한 줌의 재뿐이었다.
그리고.
그 재야말로 끝이자 시작이며.
자신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태울 광염이었다.
“샐러맨더!”
뒤섞이는 두 가지 불꽃.
하나가 된 불꽃 속에 형만의 빈 오른팔에 불길이 채워졌다.
오른손으로 넘겨진 대검.
불길로 이루어진 손은 자연스럽게 대검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형만을 감싸던 불길이 하나의 형상이 되었다.
길게 늘어뜨린 꼬리.
붉은 비늘을 지나는 푸른 불길.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안광과 날카로운 이빨.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며, 네발로 땅을 디딘 붉은 괴수는 전설 속 나오는 샐러맨더 그 자체였다.
“애송이 아니야! 애송이 아니라고!! 난 애송이 따위가 아니야!”
글러트니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인 기묘한 외침.
샐러맨더를 둥글게 포위한 글러트니는 그의 입을 붙들었다.
집어삼키려는 자와 찢어발기려는 자의 힘 싸움.
모든 것을 태우는 광염에 지면이 주저앉았고, 그 아래 있던 지하수가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먹을 거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먹을 거야!”
글러트니의 몸을 할퀴는 샐러맨더의 발톱.
타오르는 고통 속에 입을 벌린 글러트니는 통째로 형만을 삼켜 버렸다.
“먹었어. 이히히힛! 먹었어! 먹었다고! 엔비!”
기쁨에 찼던 글러트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라 버렸다.
“엔비….”
무거운 정적 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글러트니.
글러트니의 가슴을 뚫고 나온 톱니 모양의 이빨은 차원을 물어뜯었다.
“엔비 어디야.”
네 개의 팔을 더 만들어 낸 글러트니는 여섯 개의 팔로 차원의 상처를 붙잡았다.
있는 힘껏 찢는 힘에도 차원은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엔비! 거기야?”
여섯 개의 팔에 자라나는 작은 팔들.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글러트니는 자신의 팔을 긁어내렸다.
갑피는 점점 더 두껍고 날카로워져, 이제는 거의 건틀릿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
“엔…!”
배와 가슴 전체를 차지한 글러트니의 입에서 거센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비?”
글러트니의 몸 여기저기 생겨나는 균열들.
길고 선명해진 균열들은 머지않아 서로 맞닿았고, 이내 몸 전체가 하나의 라인으로 이어졌다.
놀란 글러트니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신을 살폈다.
몸을 이루던 갑피가 파편이 되어 튕겨 나갔고, 그 아래에서 푸른 불길이 용솟음쳤다.
“박형만……!”
외마디 말과 함께 한 점으로 빨려드는 글러트니의 모습.
자기 안쪽으로 말려들어 갔던 글러트니는 이내 거대한 폭발 속으로 사라졌다.
일대의 지형을 바꿔 놓은 강렬한 폭발.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은 이곳이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대검을 움켜쥔 형만은 글러트니를 짓밟았다.
끝없이 재생하던 글러트니는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한 채 흉측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그게 네 본모습인가 보지?”
지금의 글러트니는 고작 주먹만 한 크기의 숯덩이.
반쯤 튀어나온 이형 리액터는 동전처럼 이마에 박혀 있었다.
이게 그동안 먹고 흡수했던 힘을 모두 소진한 모습.
그래.
녀석의 시작이자, 끝인 모습이었다.
“도와줘! 엔비! 엔비! 어딨어?!”
울먹이는 글러트니의 목소리는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안과 밖이 전부 타서 쪼그라들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곧 만날 거다. 너희 둘 다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질 테니.”
대검을 내려놓은 형만은 야구공을 쥐듯 글러트니를 붙잡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일말의 자비도 없이 타오르는 형만의 불꽃.
“언노운을 위한 지옥이 따로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푸른 불꽃 속에 바스러진 글러트니의 흔적은 이제 한 조각의 이형 리액터가 전부였다.
“후우….”
리액터 파편을 움켜쥔 형만이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애송이는 지금쯤 녀석과 만났으려나?”
용주라면 자신보다 이쪽 세계에 익숙했다.
프라이드가 길목을 막아 설 순 있겠지만, 녀석의 힘을 생각하면 문제 될 건 없었다.
프라이드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용주의 힘을 좀 더 끌어낼 수 있을지언정 승패를 뒤집을 순 없다고 형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
잠시 빈 오른팔을 바라보던 형만이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에게 녀석을 쓰러뜨릴 비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녀석의 최후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이제 와선 이룰 수 없는 희망이 되어 버렸지만….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뭘 하고 있던 거냐.”
고개를 든 형만은 글러트니가 자신을 삼켰던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 있는 건 비틀리고 찢긴 차원.
억지로 구겨 넣어야 간신히 사람 하나 들어갈 작은 균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