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하이해! 역시 최고로 하이하다고!!”
안개를 가르며 솟아오른 프라이드가 소리쳤다.
“이보다 더 위가 있다니! 상상만으로 정말 최고로 하이해!!”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린 프라이드가 손바닥을 쫙 펼쳤다.
“더 위로 가자고! 더! 더 위로!! 트랜스 폼 - 모글레이!!”
자신 있게 외친 영창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는 없었다.
변한 건 하늘.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은 일순간 동그란 구멍을 내며 갈라졌다.
‘그런 무기도 가지고 있었던 거냐.’
모습을 드러낸 모글레이.
하늘을 가득 채운 칼날은 인간으로선 잡을 수도 휘두를 수도 없는.
신이 내리는 심판의 칼날과도 같았다.
‘어쩔 수 없지.’
피할 곳은 없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낀 용주는 룬검을 집어넣었다.
“정면으로 깨부숴 주마.”
순식간에 변화하는 용주의 모습.
날카롭게 치켜세운 여섯 개의 꼬리를 한데 모은 용주는 힘을 집중시켰다.
몰려드는 검고 붉은 입자들.
창공으로 쏘아 올려진 ‘에스카톤 저지먼트’는 모글레이와 정면에서 부딪쳤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줄다리기.
조금씩 뒤로 밀려나던 용주는 강하게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깨진 힘의 균형.
모글레이의 끝에 생긴 작은 균열은 순식간에 검 전체로 퍼져 나갔고, 산산이 조각난 칼날이 유성처럼 빗발쳤다.
일직선으로 솟구친 파동은 다시 한번 구름을 갈라놓고 있었다.
“키힛!”
흩날리는 파편 사이를 강하하는 프라이드.
부서진 칼날이 모여 만들어진 또 한 자루의 검은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콰앙!!
굉음과 함께 부딪치는 칼날과 꼬리.
유리처럼 깨지는 칼날 속에서 프라이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목줄을 풀어 줄 테니, 어디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 듀란달.”
그 순간 날뛰기 시작하는 수백, 수천 조각의 칼날 파편.
용주를 포위한 파편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용주의 몸 여기저기를 날카롭게 베어 나갔다.
“물론, 재미는 나도 볼 거지만 말이야! 키햐핫!!”
초승달 모양의 검 ‘찬드라하스’.
차가운 빛을 머금은 검을 꺼내 든 프라이드는 공격에 공격을 더했다.
찬드라하스가 그린 궤적을 따라 일어나는 묘한 기류.
분명이 피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던 공격은 용주의 팔을 날카롭게 베어 냈다.
‘방금 그건….’
마치 달의 인력에 물이 끌리듯 자신의 몸이 칼날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광폭화 상태인 지금의 자신이 말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휘두르는 칼날은 자신의 움직임을 크게 방해하고 있었다.
‘우선은 귀찮은 이 날파리들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듀란달의 칼날 소리는 계속해서 귓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개별의 공격력으론 자신의 갑피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가랑비였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지 않는 건 아니었다.
“끼~햐앗~!!”
다시 한번 용주를 잡아당기는 찬드라하스.
피하지 않고 역으로 달려든 용주는 칼날을 깨물었다.
숨통을 끊으려는 악어처럼 난폭하게 고개를 휘젓는 용주.
역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닌 프라이드는 용주의 힘에 그대로 내던져졌다.
‘한 방에 전부 날려 주지.’
힘껏 뛰어오른 용주는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물결치듯 동그랗게 퍼져 나가는 안개 사이로 수많은 칼날들이 따라오는 게 보였다.
용주의 팔에 자라나는 무수히 많은 가시들.
폭발적으로 강하한 용주는 칼날이 미처 따라오기도 전에 지면에 부딪혔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가시들.
듀란달을 역으로 집어삼킨 힘은 크고 작은 파편들을 사방으로 흩뿌려 놓았다.
토성을 벗어난 고리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듯, 듀란달 역시 더 이상 추격할 힘을 잃고 사라졌다.
“키힛! 그걸 그렇게 처리한 건 네가 처음이야. 끝내준다고!”
난자하는 가시 사이를 치고 들어온 프라이드가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이었던 그의 검은 어느새 동그란 원형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 찬드라하스의 만월 말이야.”
위험을 감지한 용주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거리는 충분하지 않았다.
용주의 몸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인력.
회전하는 원형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얼음덩이는 고운 입자가 되어 흩날렸다.
“저만한 크기로 베어 봤자 얼마나 베겠냐? 그렇게 무시했다간 따끔할 거야. 이 작은 구멍 안으로 코끼리도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네 개의 촉수를 박아 넣은 용주는 인력에 최대한 저항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저항일 뿐이었다.
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그럼 코끼리보다 큰 녀석으로 넣어 주지.’
날카로운 이빨을 보인 용주가 입을 쩍 벌렸다.
모여드는 페이탈 붐.
인력을 등에 업은 투사체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스파게티처럼 늘어나는 페이탈 붐.
목성에 빨려 들어가는 지구처럼 구의 형태를 잃어버린 투사체는 원 안으로 사라져 갔다.
“키힛! 시도는 좋았어.”
입꼬리를 올리는 프라이드를 향해 날아가는 또 한 발의 구체.
연속해서 날아든 포탄들은 몰아치듯 달을 강타했다.
‘어이어이~ 그런 걸 그렇게 숨 쉬듯 쏴대도 되는 거냐?’
페이탈 붐의 위력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찬드라하스가 빨아들인 힘이 간접적으로 이쪽에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 위력을 가진 공격을 무슨 코 풀듯이 난발하다니.
이거 완전 최고로 짜릿하지 않은가.
팡!!
일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폭발.
낭자한 핏속에서 선 프라이드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임계점을 넘어 한순간 부서진 찬드라하스는 손잡이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멋진데. 멋지다고! 진짜 끝내주게 죽여 버리고 싶다고! 꺄하하핫~!!”
손목을 타고 떨어지는 굵은 핏줄기.
갈기갈기 찢긴 이카루스는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좋아좋아좋아. 충분히 달아올랐어. 충분히, 충분히 하이해졌다고.”
얼굴을 짚은 프라이드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기 피부를 긁어내렸다.
광기에 완전히 잠식된 그의 눈동자는 희열과 쾌락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래.
광폭화 상태인 용주의 눈동자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최고의 하이함으로! 최고로 하이하게 노는 거야! 한 명의 심장이 터져 죽을 때까지 말이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프라이드.
“트랜스 폼… 카른웨난!”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흑암은 순식간에 공간 전체를 잠식했다.
“…….”
광폭화 덕분에 시야 자체가 어둠에 잠기는 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프라이드는 용주의 시야 안에 있지 않았다.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의 기척과 녀석의 살기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녀석의 존재 자체가 여기서 사라진 것만 같았다.
‘사라진 건 그것만이 아닌 것 같은데.’
손발을 움직이는 감각.
근육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몸은 움직이고 있는데, 움직인다는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카른웨난. 뭐 하는 무기인 거지?’
순간 짓이겨진 용주의 어깨.
자기 몸에 일어난 변화와 마주하고서야 움직인 용주는 지면을 때려 부쉈다.
분출하는 피의 연쇄 속에 보이는 이질적인 움직임.
재빠르게 반응한 용주는 날카롭게 손톱을 휘둘렀다.
뭔가를 베었다.
혹은 뭔가와 부딪쳤다는 감각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와 부딪친 것만은 확실했다.
허공에서 멈춰 섰던 팔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으니까.
“카각!”
멈췄던 손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확인한 용주는 일부러 소리를 냈다.
하지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건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청각조차 정상 범주에 있지 않은 모양이다.
‘시각은 남아 있긴 하지만, 정작 프라이드의 모습은 베일에 싸여 있고, 청각도, 통각도 마비 상태. 딱히 베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건가.’
시야가 마비되는 비슷한 경험이야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때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
‘녀석이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투사된 움직임을 감지할 수는 있었어. 그럼….’
내리깔리는 영혼 안개.
날개를 펼친 용주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거기냐.’
하늘 높이 뛰어오른 용주가 양발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분출하는 피와 흩뿌려진 가시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영혼의 흐름.
오로지 그 작은 흐름에만 의존해 추격을 개시한 용주는 거칠게 프라이드를 몰아세웠다.
‘내 몸이 사라진 것 같은 감각. 전신마비가 오면 이런 느낌이겠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모두가 전투에 있어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은 그걸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굳이 따지면, 전신마비와는 차이가 있긴 했다.
적어도 자신은 머리가 내린 명령을 몸이 받아들이긴 하고 있으니까.
단지, 그걸 다시 머리가 받지 못할 뿐.
‘녀석을 직접 타격하는 건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을 거야. 흘러가는 흐름은 볼 수 있지만, 세세한 부분까진 감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추격하면 추격할수록 늘어만 가는 상처.
쉬지 않고 방법을 모색한 용주는 두 개의 꼬리를 추가로 만들어 냈다.
‘그럼 하나를 전부로 만드는 수밖에.’
기다렸단 듯 휘두른 꼬리가 안개를 덮쳤다.
그물처럼 순간 펼쳐지는 문어 다리.
살아 있는 바다로 안개를 휩쓴 용주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마지막 한 가닥.
가장 마지막을 장식한 한 가닥에는 사람 형상의 물방울이 잡혀 있었다.
“카각!!”
게걸스럽게 물방울을 찢어발기는 이빨.
순간 멈칫했던 프라이드의 움직임은 오히려 더 템포를 올려 날뛰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고삐 풀린 사냥개처럼 득달같이 몰아치는 프라이드.
녀석의 공격을 전부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녀석의 움직임이 자기 주변으로 제한된 건 용주도 바라던 바였다.
이 거리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
‘디파일러.’
피어오르는 역병 포자.
블러드러스트 상태에 진입한 용주는 남은 HP의 거의 반을 지불했다.
용주 주변으로 형성된 포자 구역은 바깥으로의 탈출을 차단하고 있었다.
‘빠져나가긴 늦었어.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는 모양이지.’
작렬하는 포자 폭발.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 폭발은 잔류하던 어둠까지 집어삼켰다.
“키힛! 키히히힛!”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는 프라이드.
포자 구역 밖으로 내던져진 몸은 여기저기가 삐걱거렸지만, 프라이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키힛…. 켁! 뭐야. 이 더럽게 찝찝한 갑갑함은.”
뭔가 숨쉬기가 답답하고, 타는 듯 고통스러운 느낌이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아~ 짜릿해. 이 고통, 이 희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건 역시 이 감각뿐이야.”
폭발적으로 거리를 좁힌 용주와 마주 선 프라이드가 발뭉을 휘둘렀다.
“더! 더 원해! 더 날 즐겁게 해! 더! 더 말이야!”
그 순간, 용주를 덮치는 강렬한 충격.
손톱을 부딪쳤던 용주는 날아가듯 뒤로 밀려났다.
“그거 알아? 발뭉이란 이 이름 말이야 ‘고통’이란 뜻이라더라고.”
쾌락과 함께 흘러넘친 붉은 핏방울이 프라이드의 입술을 적셨다.
“칼이 느끼는 고통은 부딪친 녀석이랑 그걸 쥐고 있는 녀석이 나눠 입는 거야. 소름 끼치게 이기적인 녀석이지.”
발뭉이 뿜어낸 빛이 다시 한번 용주를 덮쳤다.
또다시 반씩 나눠 가지는 대미지.
들어오는 대미지는 마치 심장에 직접 충격을 가하는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이 녀석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해. 이 고통. 이 고통이야말로 즐거움이지. 교수형, 익수형, 화형…. 죽음에 가까운 고통일수록 쾌락으로 변한다는 말 혹시 알고 있나 몰라.”
고통 속에 더욱 크게 터져 나오는 프라이드의 광기.
발뭉이 두드리는 심장의 통증은 더욱 큰 자극이 되어 프라이드를 흥분시키고 있었고, 프라이드의 마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격동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