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닉네임 좀비헌터-309화 (309/357)

309화

“여기입니다.”

앞장 선 조가 멈춰 섰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벼랑 위에 세워진 성벽 위.

보좌관의 다리를 배경 삼은 그곳엔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자세를 낮춘 용주는 곳곳에 남아 있는 상흔들을 살폈다.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그어 만든 상처들.

이 상처들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들이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건가.’

남아 있는 녀석은 3명이었다.

그중 이 녀석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를 사람은 하나밖에 없겠지.

‘프라이드. 그럼 이준 역시 여기 있단 소리인가?’

엔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상처에서 위험한 기운 느껴진다. 마신. 느낄 수 있다.”

“그래. 위험한 녀석이 남긴 거긴 하지.”

“위험한 녀석? 그 말은 여기 있던 자들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단 말씀이십니까?”

조가 물었다.

“그래. 여기 있던 녀석들은 다신 못 돌아올 거다.”

“그 말은….”

“내가 쫓고 있던 녀석들이 여길 지나갔다. 너희가 녀석들과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용주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만.”

“네! 말씀만 하십시오! 마스터!”

“별을 봤다고 했었지. 그것도 혹시 이 근방이었냐?”

“머슬들을 자극하는 힘. 그건 분명 이 근처였습니다.”

“가능하다면 그곳도 살펴보고 싶다만.”

“마신. 길을 열겠다. 그림자 밖은 위험하니 벗어나지 않게 잘 따라와라.”

자신만만 앞장선 울은 다리로 안내했다.

“여기가 바로 별들이 떨어졌던 자리다. 마신과 괴물들의 역사적인 전투가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울이 바지 속에서 주섬주섬 책 한 권을 꺼냈다.

“‘마신 전쟁 - 비탄과 죽음의 다리’ 전국 서점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10권 사면 사인도 해준다.”

“그래…. 그거참 매력적인 이야기군.”

태클을 걸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종이를 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부터 시작해 10권이나 사는데 겨우 저게 맞느냐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더 깊게 파지 않기로 한 용주였다.

원래 그런 녀석이기도 했고, 여기 남은 흔적들을 살피는 게 더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여기 정말 별이 떨어진 게 확실하겠지?”

“확실하다! 마신 전쟁 100% 실화를 기반으로 쓰인 거다.”

“틀림없겠지?”

“네! 틀림없이 여기가 맞습니다.”

조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별이 떨어진 다음 언노운들이 출현했다. 너흰 분명 그렇게 말했지.”

“언노운?”

“너희가 상대했다는 괴물. 와인 기사가 술로 담가 먹으려고 하고 있던 그 녀석들 말이다.”

“틀림없습니다. 그것들을 처음 목격한 건 별을 본 직후였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렇지만….”

용주가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언노운의 유해를 발로 밀었다.

커다란 바람구멍이 난 언노운은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뚫려 죽어 있었다.

“과연 그게 최초의 언노운이었을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마스터?”

“여기 있는 언노운들. 크게 3종류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더군.”

“3종류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다 똑같은 종류로 보이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말한 건 녀석들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다.”

“죽음?”

“그래. 여기 있는 언노운들에게 남은 상처는 크게 3종류. 하나는 묵직하고 둔탁한 무언가에 맞아 생긴 상처. 이건 필히 너희가 만든 거겠지.”

복싱과 레슬링.

조와 환의 전투는 그 연장선에 있었다.

울은 보나 마나 팔짱 끼고 폼만 잡으면서 입만 움직였을 테니, 흔적이 남지 않았을 거다.

“두 번째는 날카로운 날붙이에 잘려 나간 상처. 추측건대 이건 와인 기사가 만든 거겠지.”

상처는 날카로웠고, 치명적이었다.

느릿느릿.

와인 기사 하면 만취한 주정뱅이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기에 이렇게 예리한 상처가 그의 작품이란 게 쉽게 납득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향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폭격을 당한 듯 찢긴 상처. 언노운을 상대한 게 너희만이라면 이런 상처가 남았을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폭격을 당한 상처?”

조와 환이 용주가 넘긴 언노운의 상처를 살폈다.

확실히 이건 자신들이 남긴 상처가 아니었다.

“마신. 그때 모습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신의 가호가 이 땅에 넘쳐흘렀고, 가호를 받은 전사들의 주먹이 정의를 실현했다. 그리고 어둠 속 비수가 적들의 목을 수집했다. 이것은 모두 마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마신 전쟁 131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카드로 결제하면 무이자 12개월 할부도 가능하다.”

“…그래. 아무튼 요지는 이걸 만든 게 역시 너희가 아니란 이야기겠지.”

용주가 울의 이야기를 대강 흘려보냈다.

“그렇지만 이상합니다! 그 자리엔 분명 저희밖에 없었는데.”

“그래. 너희가 왔었을 땐 그랬겠지.”

“우리가 마주친 괴물은 초판이 아닌 재판. 마신. 실은 알고 있었다.”

잔뜩 무게를 잡은 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진실이 그게 아닐 테지만, 그래도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이건 너희가 떨어지는 별을 봤을 때 생긴 상처들일 거다. 너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죽어 있던 녀석들이란 이야기지.”

“별에 생긴 상처?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보통의 별이면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지. 하지만 너희가 본 별똥별은 자연적인 게 아니었을 거다.”

“인위적인 별이라니,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페일노트. 녀석이 사용하는 활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너희가 본 건 녀석이 쏘아 올렸던 공격이었을 거다.”

그렇다는 건 녀석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여기 언노운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녀석들이 지나가고 언노운들이 나타났다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단 이야기였다.

‘녀석들이 여길 지나갔다면, 목적지는 역시 거기밖에 없겠지.’

고개를 든 용주가 무명왕과 싸웠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엄청난 강풍이 네 사람을 덮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종소리에 고개를 돌린 드워프들의 눈에 보이는 건 갈라진 하늘.

그리고 그 속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민들레 홀씨들이었다.

“마스터!! 하늘이!”

“…….”

저것들이 땅에 떨어지게 해선 안 된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용주는 룬검을 뽑아 들었다.

“고향의 하늘과 고향의 공기. 어디 맘껏 날뛰어 봐.”

짙게 내리깔리는 한기.

한기 속에서 비상한 보좌관이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날개가 수놓는 거대한 그림자.

균열을 향해 날아오른 보좌관이 홀씨를 뒤덮었다.

한 줌 우박이 되어 떨어지는 수많은 홀씨들.

종탑을 한 바퀴 선회한 보좌관은 가장 높고 뾰족한 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엔.

와인 기사가 이미 자리를 깔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과연 마스터! 대단하십니다!”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보좌관의 비상에 조와 환이 경의를 표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가장 안전한 자리를 찾아 나선 울은 용주와 가까운 다리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신. 아주 중요한 전달 사항 있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던 울이 잔뜩 무게를 잡았다.

“전달 사항?”

“뭔데?”

두 사람의 물음에 대답은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꾸드드득…!

슈륵!

작은 지진과 함께 나타난 넝쿨들이 크라켄의 다리처럼 위로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마스터! 이건…!”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뿌려진 씨앗들이 있던 모양이군.”

두 개의 집게발을 드러낸 넝쿨들이 다리를 붙들었다.

저 거대한 체구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개체.

상륙함의 군인들처럼 쏟아져 나오는 언노운들은 사방에서 용주 일행을 위협하고 있었다.

“날 두려워하지도 않는 모양이고.”

다리를 붉게 물들이는 언노운 무리.

용주가 일으킨 선혈의 파도는 전방의 무리를 한 차례 쓸어 담았다.

하지만.

복구되는 데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넝쿨들에선 계속해서 언노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스터! 저 줄기들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환상적인 머슬 래리어트로 길을 열겠습니다. 그 틈에….”

“아니. 내가 처리하는 게 더 빨라.”

다시 한번 불어오는 강렬한 바람.

짙은 한기를 뿜어낸 보좌관이 다리 아래로 사라졌다.

세 드워프는 보좌관에 붙들려 강제로 함께하고 있었다.

“안정적으로 자라난 성체들은 냉기에 대한 저항이 제법 강한 모양이지?”

하얀 서리에 잠식당하고도 살아 있는 개체들의 수가 제법 많았다.

아래쪽은 보좌관이 처리할 터.

이쪽은 위쪽에 남은 것들만 신경 쓰면 됐다.

‘그런 식으로 처리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낮게 기는 한기 근처로 안개가 흐르기 시작했다.

드워프 삼형제를 치운 건 이다음 스텝을 위해서.

아직 제대로 된 안정성을 확인하기 전이라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말이다.

‘영혼 안개.’

펼쳐지는 사신의 날개.

언노운에게서 피어오른 무수히 많은 아지랑이들은 용주에게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변화하는 날개의 색깔.

부패의 근원이 함유된 안개는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을 띠고 있었다.

‘무(霧)의 승천.’

용주의 손안으로 모여드는 부패의 안개.

안개를 움켜쥔 용주는 있는 힘껏 안개를 깨부쉈다.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부패의 안개.

모든 것을 집어삼킨 안개가 잦아들었을 때, 거기 남은 건 좀비처럼 변한 몇 구의 언노운이 전부였다.

부패한 시체들은 대부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고, 아예 한 줌 모래로 부패가 진행된 것들도 있었다.

좀비처럼 변한 녀석들 역시 살아있지 않기는 마찬가지.

거기 있는 건 빈 껍데기뿐이었다.

물론, 이 많은 물량을 쏟아 내던 그 녀석들도.

‘부패의 근원에 물든 무의 승천. 이 정도면 위력은 충분히 합격점이군.’

‘무의 승천’은 ‘영혼 안개’에서 파생된 기술.

무의 승천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스킬이었지만, 부패의 근원이 더해지니 그 살상력은 지금까지와는 격이 달랐다.

“나~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딸꾹! 맛이 완전 엉망이 됐잖아?”

상황이 얼추 정리된 그때.

익숙한 술주정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용주는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외곽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올라온 이는 와인 기사였다.

“너… 대체 어디서.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냐.”

와인 기사는 분명 종탑 꼭대기에 있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사실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 저기서 한가하게 나오고 있으니 용주라도 놀랄 수밖에.

“나~ 몰?라. 눈 떠 보니 여기 있었는데.”

그게 말이 되냐는 용주의 눈빛에도 와인 기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완전 마이너스의 손. 다음부턴 손대지 마. 좋은 재료 완전 다 똥 됐어. 똥! 히히힛.”

실없이 웃어 보인 와인 기사가 와인을 들이켰다.

“나~ 좋다~.”

맛이 엉망이 됐다는 자신의 말은 벌써 잊어버린 듯했다.

“마스터!”

다리 위로 솟구친 보좌관과 함께 세 드워프들이 착지했다.

“끈덕지게 내렸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냈습니다. 다신 자라지 못할 겁니다.”

“‘마신전쟁Ⅱ - 그 가을의 추수’ 집필 들어갈 거다. 마신의 고뇌와 판단, 영웅적 활약이 과장 없이 들어갈 예정이다. 예약 판은 특별히 손도장 찍어 준다.”

“…그래. 그거참 재밌겠군.”

걸음을 옮긴 용주가 재빠르게 보좌관에 올라탔다.

“너흰 집으로 돌아가라. 난 마저 정리해야 하는 일이 남았으니.”

“아까 말씀하셨던 그 도망자에 대한 일입니까?”

“그래.”

“그런 거라면 저희도 돕게 해주십시오! 마스터! 부족한 힘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 번 말했다. 돌아가.”

“저희 힘으론 도움이 안 되는 겁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건 너희랑 관계없는 일이야.”

“그럼…!”

조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와인 기사가 한 발 더 빨랐다.

조의 입에 와인 병을 물린 와인 기사는 늘어지게 트림을 했다.

“나~ 그만 수다 떨고 어서 가 봐. 히힛.”

실없이 웃어 보이는 와인 기사.

“세계가 찢어지고 있어. 세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또 전부 잃게 될 거야, 또 전부 잊게 될 거야. 그런 건 한 번이면 족해.”

“…….”

울이나 할 법한 만취자의 헛소리였지만.

용주에게 그건 절대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이 녀석….

고대의 재앙 이상으로 온전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