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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08화 (308/357)

308화

“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했던가? 좋을 대로 해. 어차피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없으니까.”

검지와 중지로 V자를 그린 엔비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여길 찌르면 돼.

그녀의 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래. 사랑했던 유일한 걸, 지키고 싶은 유일한 걸 잃어버렸거든. 가족 말이야.”

왼손을 펼친 엔비가 손안에 남은 모래들을 후 불어 날렸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려지는 거…. 자업자득이란 거 알면서도 참 슬프더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일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게 하다니. 인생이란 참으로 가혹해.”

옅은 미소를 머금는 엔비.

그녀의 미소엔 숨기지 못한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어머~ 지금 날 동정하는 거니?”

자신을 향한 수지의 눈빛에 엔비가 물었다.

진지함과는 거리를 둔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지만, 수지의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뭐랄까.

‘무뚝뚝한 동정심’이란 말이 있다면, 저 눈을 두고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럴 필요 있을까? 난 네 가족을 죽인 살인마인데.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 악질 중의 악질.”

“…형만 아저씨. 송이 아줌마랑 만나고 나서 엄청 힘들어했었어.”

“그래~ 그랬겠지. 그래서 러스트도 그걸 원하지 않았던 거고.”

어떻게 하고 싶은가.

러스트에게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러스트로 남기로 했던 데엔 그런 이유도 있었을 테지.

“그치만 형만 아저씨.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진실을 알게 되어, 다시 한번 눈을 마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음~ 글쎄. 그건 그냥 네 추측일 뿐이잖아. 실제로는 아마 그러지 않았을걸? 모르는 게 약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니까.”

엔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랬을 거야.”

“단호하네.”

“응.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사랑했고,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사람이니까. 잡을 수 없는 신기루라도, 눈을 뜨면 사라지는 꿈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게 사랑이고 그리움이니까.”

“…….”

“슬프다는 건 그만큼 사랑한단 뜻이잖아.”

“…후훗! 후하하핫!”

잠깐의 침묵을 지키던 엔비가 세상 떠나가라 웃어 보였다.

웃고 있는 그녀의 뺨을 타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라? 비가 오나? 왜 갑자기 물이 떨어지지.”

“…….”

“아~ 이건 너무 싸구려 멘트인가. 그치만 나 정말로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혹시 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 건가?”

태연한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일었다.

슬프지 않은데,

슬프지 않을 텐데.

정말 이상하고, 한심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팬텀이 아니라도 있지 않을까? 살아 있을 이유.”

“훗,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당장 찔러 죽여도 모자랄 판에. 혹시 망가져 버린 장난감엔 관심 없는 거야?”

눈물을 닦아 낸 엔비가 능청스레 이야기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없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방법도 때론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흐음?”

“그치만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들었어.”

“피를 씻을 수 있는 건 피뿐이야. 그건 이 언니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

“살릴 수 있으면, 죽일 수 있다. 감출 수 있으면, 보일 수 있다. 그럼 지은 죄도 속죄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자연스러운 삼단 논법으로 이어진 수지의 물음.

순간 흐른 정적은 깊고, 깊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어. 만약 내가 그런 것처럼 그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가 빼앗은 건 이미 다 사용했거든. 게다가 팬텀은 전원 보스가 직접 모은 멤버야. 기계로 치면, 소프트웨어도 하드웨어도 전부 보스 혼자 만든 거라고. 난 아무것도….”

“그런 의미 아니야.”

수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응.”

“그럼~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나?”

“원망도 저주도 피하지 말고 다 마주하는 거야.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거지.”

“흐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의료 헌터니까.”

“푸흡…! 하하핫!!”

끓어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한 엔비가 폭소를 터뜨렸다.

“너~ 정말 귀여운 소리를 하는구나? 살인마의 손에 자기 목숨을 맡길 녀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원망도 저주도 마주해야 한다고 했어. 그런 시선도 마찬가지야.”

“…….”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저리 가라고. 손 치우라고 욕을 하고, 침을 뱉어도 상관없어. 진실되게 마주하다 보면, 달라질 수 있을 거야. 난 그럴 거라고 믿어.”

수지의 눈에 거짓은 없었다.

적어도 엔비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훗. 이래서 꿈꾸는 어린애는 피곤하다니까.”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지나온 길은 바꿀 수 없지만, 앞으로 갈 길은….”

“아니~ 틀렸어. 그런 건 없다고.”

엔비가 어깨를 들썩였다.

“앞으로 갈 길 같은 건 없어. 무거운 짐을 짊어질 생각도 없고. 그리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여기 없으니까.”

“그 말은….”

“그래~ 남은 건 나 하나뿐이야.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없다고. 나한텐 팬텀이 가족이었고, 그게 세상의 전부였어.”

“…….”

“돌려보낸다고 했지. 생각해 보니. 그거참 괜찮은 방법인 거 같네. 거기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엔비의 시선이 수지의 뒤편을 향했다.

세계의 붕괴는 이 작은 섬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마지막 수다치곤 꽤 즐거웠어.”

걸음을 옮긴 엔비가 수지에게 바짝 다가갔다.

“끝내.”

여길 찌르면 된다고 말하는 엔비의 손.

그런 그녀를 마주한 수지의 손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려고 여기 남은 것임에도 말이다.

“하아~ 이러지 마.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가늘게 떨리는 수지의 손에서 그녀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뭐….

힘들기도 하겠지.

어린애 같은 그 마음으로 사람을….

아니.

사람같이 생긴 괴물을 죽인다는 게.

“난 언노운이나 다를 게 없어. 산 사람도 아니고, 죄책감 따위 느낄 필요 없다고.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오히려 상황이 역전된 듯한 아이러니한 상황.

깊은 한숨을 내쉰 엔비는 재빠르게 떨어뜨렸던 메스를 주워 들었다.

수지를 향해 날아가는 메스.

본능적으로 반응한 수지는 메스를 쳐 냈다.

그 순간.

“!”

수지를 와락 끌어안는 엔비.

수지의 은장도는 그녀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정말이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꼬맹이라니까. 이 언니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놀란 듯 동그래진 수지의 눈망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댄 엔비가 윙크를 날렸다.

“악당 엔비 체면을 봐서라도 네가 정의롭게 처리한 걸로 입 좀 맞춰 줘. 악당 체면이 있지 넘어져서 죽은 건 좀 그렇잖아. 안 그래?”

조금 더 강하게 수지를 껴안은 엔비는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부서진 이형 리액터의 파편이 피에 섞여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숨을 붙여 놓을 생각이라면 관둬. 네 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쪽에 선택권이 있으니까. 약을 독으로 만드는 건 내 전문 분야라고.”

비틀거리긴커녕 꼿꼿이 물러난 엔비가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엔 부서진 차원의 틈이 있었다.

“부럽네. 누군가를 신뢰하고, 신뢰받는 거.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거.”

상처에 손을 올린 엔비에게 옅은 빛이 감돌았다.

의료 헌터의 빛과는 다른 빛.

그녀의 생명의 빛은 그녀의 손에 의해 꺼져 가고 있었다.

“헌터는 가족이라고 했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고 그랬고.”

왼손을 펼친 엔비에게서 은하수가 흘러나왔다.

“그치만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적어도 날 위해 울어 줄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단 거니까.”

형만과 용주.

두 사람의 모습 역시 은하수로 흩어졌고, 긴 꼬리를 남기는 무지개가 되어 갔다.

“아까 하는 이야기 들었어. 저기 등대로 간다고?”

“…….”

“너희가 왔던 얼음길엔 성하지 않은 구간이 있을 거야. 그러니 이게 필요한 때인 거지. 네가 고쳐 준 까마귀와 까치가 은혜를 갚는 거라고나 할까.”

전래 동화의 한 장면을 묘사한 엔비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고마워. 그런 눈으로 봐줘서. 나 같은 녀석한텐 사치스러운 마지막이야.”

뒤로 기우는 엔비의 무게 중심.

“견우와 직녀처럼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 동화처럼 말이야.”

마지막 윙크를 보인 엔비의 모습은 나락으로 사라졌다.

“…….”

자세를 낮춘 수지는 엔비의 메스를 챙겼다.

갈라진 섬의 조각들은 이제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고 있었다.

* * *

“둘 중 어디로 떨어지나 싶었더니, 여기인가?”

차원 너머로 나온 용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회색의 안개와 죽은 나무들.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과 화톳불.

여긴 잊힌 영웅들의 성이었다.

그것도….

“나~ 이건 또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거야? 두더지치곤 좀 큰 것 같은데?”

게이트의 중심에 위치했던 성당 말이다.

“한가하게 취해 있는 거 보니, 별일 없었나 보지?”

와인 기사를 내려다본 용주가 이야기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녀석은 변한 것이 없었다.

“나~ 별일 없었지. 별똥별이 떨어져서 밤새 눈부셨던 것만 빼면.”

“별똥별이라고?”

“히히힛! 엄청 긴 꼬리를 가진 별똥별이었지. 별이 떨어진 자리에서 못생긴 식물들이 자라나길래 왕창 베어 놨다고.”

와인 기사가 한쪽 귀퉁이를 가리켰다.

거기에 있는 건.

식물을 닮은 언노운들의 유해였다.

용주라고 익숙한 개체는 아니었긴 하지만….

누가 봐도 선명한 핏자국이 있지 않은가.

“빨간 과육이 철철 흐르는 걸 보니, 담가 먹으면 아주 색다른 맛이 날 거야.”

“과육이라고? 저건….”

“군침이 싹 돌지? 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내가 보기엔 그렇게 맛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지.”

“나~ 원래 못생긴 게 더 맛있는 법이라고.”

시원하게 딸꾹질을 한 와인 기사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자기만 한 와인 통을 옮기는 와인 기사는 용주가 봤던 어떤 그의 모습보다 열정적이었다.

‘이 녀석들…. 그래도 이만한 숫자의 언노운을 상대로 잘도 이겼군.’

추측건대 여기 모여 있는 유해는 모두 머리였다.

가져온 것만 저 정도라는 건 분명 큰 전투가 있었단 소리였지만, 와인 기사에겐 특별한 상처도, 긴장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뭔가 묘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란 건 알았는데.

과연 무명왕이 신뢰하던 친우라는 타이틀은 허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녀석들은 여기 없는 거냐?”

“다른 녀석들?”

“석조 삼 형제 말이다.”

“나~ 몰?라. 어디서 늘어져라 낮잠이나 자고 있나 보지.”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인 와중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당 내부로 들어온 세 개의 발소리.

“이 목소리는 설마…!”

용주의 목소리에 반응한 발소리가 속도를 높였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조.

삼 형제 중 그나마 정상에 가까웠던 녀석이었다.

“마, 마스터!!”

1층에서 뛰어내린 조가 화톳불 근처로 달려왔다.

“저의 환상적인 머슬들이 마스터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뒤를 따른 건 환.

탄탄한 육체미를 선보인 그는 사이드 체스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신. 마안으로 봐서 알고 있었다. 오늘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마지막으로 나타난 울이 팔짱을 꼈다.

세 녀석 다 마지막에 봤던 그대로였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그래. 셋 다 별일 없는 모양이군.”

“마스터와 이렇게 재회할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용주가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울을 제외한 두 사람은 흙투성이였고, 울의 옆엔 방금 막 수확한 듯한 포도 바구니가 있었다.

아무래도 밭일을 하고 온 모양이다.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이 날뛰는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

“별이 떨어졌다고 들었다.”

“별?”

“그래. 와인 기사한테 들었다. 별이 떨어지고 저 녀석들이 나타났다고.”

“그건 별이 아니었다. 그건 재앙의 씨앗. 마신 없었다면, 이미 세상은 파멸했을 거다.”

울이 최대한 멋진 포즈를 잡았다.

“별이 떨어지기 전에 이상한 걸 목격했다던가?”

“음…. 그러고 보니, 외곽에 있던 잊힌 자들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항상 거기 모여 기도를 올리던 자들이었는데.”

“틀렸다. 그건 별을 본 다음 발견한 거다.”

울이 자신 있게 태클을 걸었다.

“아! 시간 순서로 보면 그게 맞긴 하지. 죄송합니다! 마스터! 정보에 혼선을 드려서.”

“아니. 충분히 의미 있는 정보다. 괜찮다면, 거기로 안내해 줬으면 하는데.”

“네! 앞장서겠습니다! 마스터!”

힘껏 대답한 조가 앞장섰다.

그가 향한 곳은 보좌관이 지키고 있던 다리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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