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 * *
“……!”
갑작스럽게 갈라지는 대지.
차원의 틈 사이로 떨어질 뻔했던 엔비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콰앙!
그 순간 터져 나가는 대지.
내리꽂히는 수지의 일격까지 마저 피해낸 엔비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라스까지….’
급속도로 희미해지던 라스의 존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잘 안 풀린 모양이네.”
날카롭게 따라붙은 수지가 공격을 이어 갔다.
엉망으로 망가졌던 장기들은 원래 상태로 치유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메스를 부딪친 엔비는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런 엔비의 손을 붙잡는 수지.
힘에 밀린 엔비는 그대로 반대편으로 패대기쳐졌다.
“손은 어린애처럼 고운데 말이야.”
수지의 손목을 그은 엔비는 두 다리로 모래를 퍼 올렸다.
‘힘줄을….’
흘러내리는 단검을 왼손으로 잡은 수지.
그 잠깐의 틈으로 날아든 올려차기는 수지를 강타했다.
“그럼 혹시 미끄럼틀도 좋아하려나?”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엔비가 사선을 그었다.
비스듬하게 잘려 나가는 대지.
간신히 발을 올린 대지와 함께 미끄러지기 시작한 수지는 급경사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이었다.
‘움직여야 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단검을 끼운 수지는 오른 손목에 손을 올렸다.
비스듬하게 달리는 와중 이루어지는 급속 치유.
한 번 더 손을 휘저은 엔비는 또다시 지면을 잘라 냈다.
흘러내리는 모래를 거스르는 수지는 한 마리 연어처럼 솟구쳤다.
“종아리 힘도 아주 장사네.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래?”
엔비가 능청스럽게 모래를 털었다.
“그런데 의료 헌터와 의료 헌터의 싸움. 생각은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더 심심한 것 같지 않아?”
전투의 양상은 분명 치열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헌터의 전투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럴듯한 영창도 없고, 화려한 스킬도 없고, 소금 없이 먹는 설렁탕 같은 느낌이랄까? 안 그래?”
소금 없는 설렁탕.
팥 없는 붕어빵.
뭐라 표현해도 상관없었지만, 요지는 같았다.
지금까지 있던 팬텀과의 전투 중 지금처럼 단조롭고 밋밋했던 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악의 상성인 셈.
“게다가 서로 회복 능력은 또 뛰어나서 어지간한 상처는 상처 축에도 못 껴버리잖아. 바퀴벌레끼리 싸워도 우리보단 빨리 끝냈을 거라고.”
어깨를 들썩인 엔비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결판이 안 나겠어. 누구 하나가 말라비틀어지기 전에 이 섬이 먼저 조각날 거라고.”
작은 한숨을 내쉰 엔비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우리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
“…갑자기?”
“그래~ 계속 움직였더니 어깨도 뻐근하고, 뭔가 그럴 기분도 별로 아니고.”
“…….”
“어머~ 그 눈빛은 뭐야? 이 언니 말이 영 못 미덥다는 눈치네.”
야자나무 하나를 통째로 베어 낸 엔비가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누가 지고, 누가 이기든, 결과는 어차피 같아. 우리 둘 다 여기가 종착역인 거라고.”
엔비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귀여운 여자애랑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양로원 흔들의자에서 혼자 노을을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
“종착역 아니야.”
“그거 아까도 들었던 말 같은데. 버려진 게 아니란 건 선택의 문제라지만, 지금 내 말은 절대적인 거 아니야? 아니면 혹시 저 아래 있는 게 뭔지라도 알고 있는 거야?”
엔비가 균열을 가리켰다.
“뭐가 있든 상관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니까.”
“그거 대단한 자신감이네. 부러워.”
다리를 꼰 엔비가 왼손을 펼쳐 보였다.
그 순간 주변을 잠식하는 어둠.
어둠 속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건 별들이었다.
“그럼 이 심심한 맛에 조미료를 좀 뿌려보도록 할까? 지금 이대로 가면 승부도 못 내고 지루하기만 할 테니까.”
“이건….”
“포스 필드. 내가 가진 또 하나의 힘이지.”
엔비가 자신의 왼손을 곁눈질했다.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우리 존재를 숨겨 왔단 걸. 이건 그 연장선이야. 살릴 수 있다는 건 죽일 수 있다는 것. 그럼 숨길 수 있다는 건?”
“…보일 수 있다는 거?”
“빙고~ 척하면 척이네.”
왼손을 높이 들어 올린 엔비가 무지개를 그리자 별자리들이 흩뿌려졌다.
“간단한 게임을 하나 해볼까 해. 아주 쉽고,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야.”
자리를 찾아가는 별들.
멈춰선 별들이 그리고 있는 건 ….
6명의 팬텀이었다.
“후훗, 놀란 것 같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고.”
엔비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은하수.
흘러내린 은하수는 이내 여섯 별자리로 흘러 들어갔다.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별자리들.
2D에서 3D로 변화한 이들은 엔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
저길 보란 듯 눈썹을 들썩이는 엔비.
발밑을 지난 두 줄기의 은하수를 바라본 수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별자리는 2개가 더 있었다.
익숙한 기운을 풍기는 별자리는 각각 형만과 용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마나에도 살짝 손을 올렸거든.”
“훔친 거 아니고?”
“하핫, 당사자들이 잃어버린 건지 모르면 훔친 건 아니지.”
“이상한 논리.”
“음~ 그렇게 생각해? 그치만 피해자가 없는데 어떻게 가해자가 있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네 공기를 도둑질해 간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는 논리를 펼친 엔비가 능청스레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끔찍하게 훼손되는 두 사람의 모습.
털썩 쓰러진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해. 저기 두 사람을 치료하는 것, 실제 육체는 아니지만, 마나에 비슷하게 반응하게 해뒀어.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간단할 거야.”
손가락으로 숫자 1을 만들었던 엔비가 2를 만들었다.
“물론 그것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여기 이 녀석들이 널 최대한 방해할 거야. 공격을 피하면서 치료해도 되고, 전부 쓰러뜨린 다음 치료해도 상관없어.”
이어서 만들어지는 3.
“베어서 없애든, 마나가 다 떨어져 자연 소멸 될 때까지 버티든 네 자유야. 대신 날 때려눕히는 건 반칙이라고.”
엄지손가락만을 남긴 엔비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네가 이기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할게.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좋을 대로 해. 어때?”
“응.”
“후훗,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단답이란 게 조금 속상하긴 하지만, 즉답이니 그냥 넘어갈게.”
별자리로 된 무기를 꺼내 든 이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치고 나간 건 프라이드.
성격까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지 슬로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랄타크를 막아서는 수지의 검.
“프로즌 파일.”
“데스 클로.”
외곽에서 날아든 라스와 그리드의 공격은 수지를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망상 - 심연.”
그 순간, 수지의 발목을 붙잡는 끈적한 늪.
틈을 놓치지 않은 프라이드의 묠니르는 번개를 뿜어냈다.
흡수한 공격을 사출하며 늪을 빠져나온 수지는 두 사람의 상처를 치유했다.
하지만.
“!”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치명적인 상처 몇 개만을 간신히 치유한 수지를 덮치는 거대한 입.
글러트니의 그림자 아래로 파고든 수지는 그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통쾌한 타격음과 함께 날아가는 글러트니.
앞길을 가로막는 글러트니의 뒤통수를 찍어 누른 프라이드는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필사적이네.’
쉴 틈 없이 변화하는 전황.
여유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엔비가 턱을 괴었다.
‘너무 순진해도 탈이라니까. 약속 따위 그냥 무시하고 날 공격하면, 일이 한결 편해질 텐데.’
전황은 수지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머릿수로만 따져도 6 : 1.
마나만 빌린 허상의 존재들이 본체의 힘에 못 미친다 해도 결코 만만한 상대들은 아니었다.
그것만 해도 힘든데 수지는 두 사람의 상처 치유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 한들 뭐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수지는 마치 실전인 듯 행동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부터 순차적으로. 그래. 나였어도 방금 그 상처부터 건드렸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엔비가 혼자 피식거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지를 응원하고 있지 않은가.
‘나한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기억을 가지고 있다.
러스트에겐 분명 그렇게 말했고,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엔비는 얻을 수 없었다.
‘가족이라….’
헌터는 가족이라는 수지의 말.
그냥 단순히 오버하는 말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런 필사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각의 가지가 조금 더 뻗어 나갔다.
‘만약 내가 저기 널브러져 있다면, 날 위해 저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팬텀.
자신에게 있어 그들은 가족이었다.
자신 역시도 그런 존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부서진 세계에 남겨지며,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일이 정리되면, 데리러 오겠다.
다른 가족들에게 해줬던 보스의 이야기 역시도 자신은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본 눈빛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했다.
담담하고, 평온한 그 눈동자.
자신은.
그의 마음속에서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였다.
“난 대체 뭐였을까. 난 대체 뭐였어?”
앞에 보이는 슬로스에게 물음을 던져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슬로스는 무심하게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가장 적극적으로 날뛰던 프라이드의 모습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 나한테도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 있었으면… 지금이랑은 조금 달랐을까? 응? 러스트.”
깊은 한숨을 내쉰 엔비가 러스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기 있는 게 진짜 그녀였으면 정말 좋았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엔비…. 질투였지. 그건 분명.”
색욕.
러스트의 이름에 비하면 자신은 이름이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러스트는 색욕과는 일절 관계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질투가 조금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나 지금 조금 질투하고 있을지도. 넌 그래도 슬퍼해 줄 사람이 최소 2명은 있었잖아.”
잠시 생각에 잠긴 엔비가 메스를 내려놓았다.
치열하게 이어지던 전투는 슬로스가 사라짐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
짝짝짝!
가까워지는 박수 소리.
수지에게 다가온 엔비는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치유 상태는 매우 훌륭.
100점 만점에 그래도 98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해냈네. 대단한데.”
여유가 넘치는 엔비와 달리 수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만한 맹공을 전부 버텨 낸 거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그런데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어린애같이.”
미소를 머금은 엔비의 메스가 수지의 목을 겨눴다.
수지는 곧장 반응했지만.
갑작스레 움직인 형만과 용주에게 움직임을 봉쇄당해 버렸다.
“그런 말뿐인 약속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고. 심지어 나는 아주 못~된 악당인데 말이야. 이렇게 될 거란 것 정도는 의심해 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점점 가까워지는 메스.
수지의 목에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메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됐다~. 여기서 이래 봤자 뭐 하겠어.”
사라져 가는 포스 필드.
메스를 거둔 엔비는 수지에게 손을 뻗었다.
수지의 안쪽을 엉망으로 헤집었던 그녀의 힘은.
이번엔 그녀의 상처를 하나하나 치료하고 있었다.
“가만있어 봐. 왜? 내가 뭐라도 할까 봐?”
“간지러워.”
“뭐? 하핫! 진짜 어린애가 따로 없네. 그렇게 예민하면 더 괴롭히고 싶어진다고.”
수지의 옆구리를 간질이던 엔비가 메스를 떨어뜨렸다.
당연히 경계하고 있기에 나온 반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세상 단순한 이유일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조금 전까지 서로 죽이려고 으르렁거렸던 사이인데.
사람을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는 건가?
“그런 세상 어린애 같은 부분까지도 조금 질투 나려고 하네. 나도 그런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을 거 같은데.”
두어 걸음 물러난 엔비가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모래는 그녀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