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훌륭하도다.”
라스를 관통한 ‘사’.
모든 신체의 감각을 잃어버린 라스가 이내 주저앉았다.
“하아….”
멈췄던 숨을 내쉰 주원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엔 짙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모두가 만든 합작이라. 그래. 유치하긴 하지만 끝매듭으로 그만큼 어울리는 건 없긴 하지.”
한쪽 무릎을 꿇은 라스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방금 그거 예전 할아버지라면 충분히 대처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를 따라 자세를 낮춘 이안이 이야기했다.
“생전의 모습이 아니면 원래의 힘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다. 준이가 했던 말은 역시 사실이었나 보죠.”
“…생전이었다 한들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멋진 기습이었으니.”
“그렇지만 그런 상황까지 만들어 가지 못했을 수도 있죠. 저도, 서아도, 나은이도 다 만신창이였으니.”
전황을 되돌아보면, 상황은 최악이었다.
자신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고.
나은과 서아 역시 다른 곳에 대부분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 기습에 나섰을 때.
가장 먼저 ‘영구 동토’가 작렬했었다.
모든 게 얼어붙었고, 자신들 역시 힘의 사정권 안이었다.
악조건 속에서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도.
그 이상을 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사용한 스킬들 중엔 그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스킬은 없었다.
라스가 사용하는 스킬.
아니, 주일 할아버지가 썼던 스킬들을 가까이서 봐왔던 이안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게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진 몰라도 말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역량의 100%를 발휘했다면,…
가령 얼음에 비친 공격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콜링 리버스’같은 스킬을 사용했었더라면.
결코 지금 같은 상황은 오지 않았겠지.
“잠깐만요.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뚜벅뚜벅 걸어온 주원이 물었다.
칼날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예전 할아버지라고 그러셨죠? 월영식을 사용하는 팬텀. 이자가 누군지 알고 계신 거죠?”
이안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치가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구나.”
라스가 옅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너희 애비는 헌터로서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었지. 그쪽으론 관심조차 없었고,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많았단다. 쓸 곳을 잃은 검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그래서 네가 태어났을 때 기대를 많이 했었단다. 하지만 역시 아쉬움이 남았지. 헌터의 힘이 발현되긴 했지만, 너무 작았고, 크게 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잠시 눈을 감은 라스가 숨을 골랐다.
“검객으로서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 천방지축, 사고뭉치. 명경지수와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지. 네 아비와 너는 달라도 너무 달랐어. 너는 수련보단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그의 침묵에 주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순수한 분노의 명경지수. 확실히 그건 예리하게 손질된 명검이라 부를 만하더구나.”
“…….”
“‘사’는 죽이기 위한 검술이자, 지키기 위한 최후의 검술. 네 검은 제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분노가 분노를 삼킨 거야.”
라스가 만족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라스’가 담은 뜻은 분노.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월영식은 지키기 위한 검술. 잃은 다음 타오르는 분노로는 복수를 할 수 있을지언정 지킬 수는 없느니라.”
“정말로….”
“부러진 검은 다시 붙일 수 있고, 명검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선 당연히 거름이 필요한 법이거늘. 그 간단한 이치를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탱! 태래랭….
주원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땅을 굴렀다.
주원의 눈에 가득 어렸던 살기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생에 대한 집착, 정말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 이준이랑 손을 잡으신 건가요?”
서아가 물었다.
그녀의 색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었죠.”
라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편해져 있었다.
“이준이 뭘 하려는지 아시면서도요?!”
“자세한 내막까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게 뭐라도 상관없었죠.”
“지금의 그런 몸이 되실 거란 건.”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연하게도 전성기 시절의 제 모습을 기대했으니. 그게 너무 큰 욕심이었단 건 눈을 뜨고 깨달았습니다.”
“이준이 배신했단 걸 알면서도 가만히 계셨다고요?”
“글쎄요. 그걸 과연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실제로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 입으로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
“오랜 친구고, 오랜 전우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준이란 사내가 얼마나 경계심이 많고, 매사에 신중한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절 의심하고, 경계했던 거겠죠.”
라스가 어깨를 들썩였다.
‘사’를 맞은 시점에서 제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지만, 피를 응고시킨 얼음 결정을 움직임으로써 그 정도 표현을 해낸 그였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습니다. 늙고 구속되긴 했지만, 이 몸은 병들지도, 죽음이 느껴지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죠.”
“…헌터 사냥…. 거기에 대해 하실 말씀은요?”
“유구무언. 전 온전한 저의 의식을 가지고 일에 동참했습니다. 죄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멈추진 않았습니다.”
“왜요?! 대체 왜요!! 죽음이 두려우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남에 목숨을…!”
“제 목숨이 그들의 목숨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
충격을 받은 듯 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의 말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럼 마음을 바꾸신 이유는요?”
그런 공백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목소리.
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나은이었다.
“너….”
“괜찮아요. 끈질기게 괴롭히던 겨울도 다 지나갔으니까요.”
나은이 넌지시 웃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라스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다 이루었다는 듯 편한 얼굴 하고 계신 이유요. 제가 보기엔 이준이란 남자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했던 경계가 결코 기우만은 아니었던 것 같은걸요.”
라스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심안.
그녀의 눈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듯 보였다.
“일전에 러스트와 만났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한계까지 몰려 있는 상태였죠. 그녀의 곁엔 마찬가지로 기력이 다한 샐러맨더가 있었습니다. 전 임무에 따라, 역할에 따라 그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라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러스트는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녀의 임무가 그게 아닌 것도, 그게 어떤 식으로든 비극으로 끝날 거란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필사적이었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목소리, 눈빛, 행동 하나하나까지.
자기 앞에 있는 게 죽음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당당했고,
두려워하기는커녕 담담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슬프지만, 행복해 보이는 얼굴.
그 미소가 잊히지가 않았다.
“그 모습 앞에,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어떤 존재고 의미였는지.”
“그래서. 결론은요?”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명경지수가 무엇이었는지는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명경지수….”
“그녀의 명경지수는 사랑. 그녀의 마음과 의지는 죽음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라스의 가슴에서 또 한 뭉텅이의 리액터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잠시 호흡을 멈췄던 라스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본 명경지수 중 가장 평온했으며,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강했으며, 또 가장 눈이 부셨습니다. 그 어떤 미련도 느낄 수 없었고, 그 어떤 후회도 볼 수 없었습니다. 고결하고, 숭고하게까지 보였죠. ‘아름다운 죽음’, 병행할 수 없다 생각했던 말들이 하나가 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량의 피를 쏟아 낸 라스의 호흡이 크게 흐트러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서아의 얼굴엔 안타까운 표정이 스쳤지만, 서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죽음과 마주할 준비가 되신 건가요?”
“네. 마지막에 소망했던 걸 이뤘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소망했던 거?”
주원과 라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과거의 망령이 할 수 있는 건 후대의 밑거름이 되는 것. 그리고 나 같은 과오를 저지르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어리석은 교훈을 남기는 것.”
일순간 깨져나가는 영구 동토.
전쟁 기념관 전체를 뒤덮었던 얼음의 물결이 순식간에 부서져 나갔다.
“심장이 멈췄던 사람도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습니다. 냉동 인간으로 잘 보존되었으니.”
얼음에 갇혔던 푸른 나비들 역시 활동을 재개했다.
초점을 잃었었던 일부 헌터들은 다시 호흡이 돌아오고 있었다.
“반기를 들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선택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지도 제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간 이 이형 리액터가 이준의 손에 들어갔을 거고, 그로 인해 이준의 힘이 더 성장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죠.”
전에 도준이 가지고 있던 리액터가 글러트니에게 건네졌던 사례가 있었다.
리액터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글러트니에게 영향을 주는 듯 보였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패배가 두려웠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가능성이 0이 아닌 이상 그렇게 할 순 없었다.
“…….”
라스의 가슴에 생긴 균열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바스러지기 시작한 라스의 손.
“하, 할아버지! 손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내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
“…….”
“너의 그 착한 마음은 약점이자 큰 강점이다. 조금 전 날 베었던 그 마음을, 그 감각을 몸과 마음에 새기거라. 내가 했던 말들과 내가 보인 자세들을 기억하거라. 소중한 건 잃기 전에 지키거라. 그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이니라.”
눈앞에 다가온 죽음과 마주한 라스는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주원의 검을 뽑아 든 라스.
망설임 없이 내지른 라스의 칼날은 이안을 꿰뚫었다.
‘빠르다. 아직도 이런 힘을.’
“대체… 무슨…!”
“이건 제 작은 작별 선물입니다. 어리석은 노인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놀란 나은과 서아를 뒤로한 라스의 목소리.
라스가 꿰뚫은 건 이준이 남겼던 상처였다.
점혈을 관통한 칼날은 칼자루 가까운 곳까지 깊이 들어갔지만, 반대편으로 뚫고 나오진 않았다.
“월영식 - 참(懺) : 구월(救月).”
상처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오는 거미줄 무늬.
사슬처럼 복잡하게 얽혔던 무늬는 일순간 끊어지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강대한 마나.
봇물 터지듯 솟구치는 이안의 마나는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푸르고 선명했다.
티링…!
이윽고 들려오는 철 소리.
땅에 떨어진 주원의 검은 힘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사라져 버린 라스의 손은 더 이상 검을 들고 있지 못했다.
참회하듯 무릎을 꿇고 쓰러진 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정말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어. 욕심과 미련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안한 것을. 이렇게… 편안한 것을….”
깊은 한숨을 내쉰 라스가 만족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든 신경이 잘려 나간 그의 몸을 움직여 줬던 피의 결정들은 그의 몸과 함께 사라져 갔다.
“한동안은 정말 바쁘겠어. 속죄해야 할 죄가 정말 많으…니….”
어둠 속에 잠기는 라스의 눈.
바스러진 그의 몸은 이내 한 줌 모래가 되었다.
“…….”
숙연해진 분위기.
부서진 이형 리액터를 집어 든 이안은 주원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리액터를 받아든 주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리액터에 검을 꽂았다.
월영식 - 참 : 구월.
조금 전 라스가 보여줬던 바로 그 검술이었다.
“할아버지도 이걸 바라셨을 거예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안이 주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안, 방금 그거….”
“그래. 빨간 할아버지. 산타클로스가 준 마지막 선물인 모양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따라가실 건가요?”
이안의 마나를 보던 나은이 물었다.
“아니. 그쪽 일은 맡겼어. 우린 우리 일만 제대로 하면 돼.”
이안이 카오스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상태가 안 좋았다지만, 지난번 전투에서 자신이 가진 대 이준용 카드는 다 보여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아 있는 카드는 좀비 헌터에게 맡긴 한 자루의 비수.
그걸로 결판을 내지 못한다면, 수백의 차원도, 수천의 괴수도 다 시간 벌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