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청호의 헌터…. 아니 지금은 적아(赤蛾)의 헌터인가.”
서아와 마주한 라스가 중얼거렸다.
푸른 나비에서 붉은 나방으로.
그 변화가 의미하는 게 뭔지 라스는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
적아의 헌터란 이명 역시 대중에겐 알려지지 않은 우물 속 이명이지.
“오랜만에 뵙네요.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뵐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는데.”
서아에게서 날아오르는 푸른 나비들.
날개 끝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한 나비들은 순식간에 붉은 물결을 이루었다.
“주일 할아버지. 아니, 빙제.”
서아의 왼손으로 모여드는 붉은 나방들.
오른손을 왼손 가까이 가져간 서아는 단숨에 뽑아 들었다.
불어 나가는 강렬한 바람.
붉은 나방들이 머물던 그녀의 손엔 붉은 검집과 일본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이야기신지 전혀 모르겠군요.”
“이렇게 난리를 치고 발뺌하실 생각이신가요? 할아버지답지 않네요.”
“…….”
“솔직히 말하면, 마지막까지도 의심을 품고 있었어요. 아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할아버지가 팬텀에 있다고. 이준과 손을 잡고 이런 일을 벌이실 거라곤 상상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서아의 칼끝이 라스를 가리켰다.
“하지만 제 눈으로 보고 제 피부로 느낀 이상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네요. 검술, 스킬, 마나 그 모든 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으니까.”
붉은 잔상을 남기며 뛰쳐나간 서아가 검을 휘둘렀다.
맞부딪치는 힘과 힘.
두 사람의 충돌에 일어난 파동에 일대의 얼음 타일이 산산이 부서졌다.
“왜 그러신 거예요? 대체 왜!”
뒤로 물러난 라스를 따라붙는 서아.
날카롭게 내리꽂힌 그녀의 곁엔 붉은 나방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제가 아는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준을 막으셨을 거예요. 어떻게 해서라도요!”
“…….”
사슬을 따라 솟구치는 얼음 가시.
가시 끝을 밟고 달리는 서아의 발밑에서 거대한 빙산이 솟아올랐다.
씨잉~!
일격에 잘려 미끄러지는 빙산의 꼭대기.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진 서아는 파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월영식 – 적.”
그런 서아를 기다리는 두 발의 검기.
정면에서 월영식을 베어 낸 서아는 그대로 내리꽂혔다.
“프로즌 메이든”
서아를 휘어 감는 동그란 냉기.
얼음의 구체 밖에 나타난 날카로운 얼음송곳들은 일제히 구체를 꿰뚫었다.
“…….”
무언가를 직감한 듯 물러나는 라스.
조각조각 갈라진 얼음은 이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순간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
“확실히 그 몸으론 예전 같은 위력은 못 내시는 모양이네요. 이 정도 상처밖에 못 내시고.”
쏟아지는 얼음 사이를 비집고 나간 서아가 공격을 이어 갔다.
“월영식 – 록(綠).”
춤을 추듯 유려하게 파고드는 라스.
그가 일으킨 초록의 검기는 회오리가 되어 솟구쳤다.
‘적아….’
하지만 맹렬했던 초록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초록을 잠식하기 시작한 붉은 물결.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른 붉은 물결에 바람 소리는 이내 잠잠해졌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부드러운 나방의 날갯짓.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을 작은 바람뿐이었다.
라스의 공격은 분명 유효타로 들어갔다.
서아의 몸 여기저기 남은 상처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상처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몇 초 만에 상처는 사라졌고, 상처가 있던 자리에선 붉은 나방들이 날아올랐다.
상처가 급속도로 치유되고 있다기보다는.
다쳤다는 현상 자체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프로즌 파일.”
기관총처럼 사출되는 얼음들.
서아의 질주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를 보는 것 같았다.
“월영식 – 백.”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날카로운 검풍.
자기 몸이 찢기는 건 아랑곳하지 않은 서아는 있는 힘껏 사슬을 내리쳤다.
“의료 헌터니까 전투 능력이 떨어질 거다. 할아버지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진 않으시겠죠.”
동그란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는 바람.
‘백’을 중간에 끊어 낸 서아의 나방은 두 사람을 뒤덮었다.
“스칼렛 노바!”
공간을 가득 채운 분진 폭발.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던 폭발은 기화하듯 사라졌다.
“폭발을 베어 내는 건 아무리 그래도 반칙 아닌가 싶은데요.”
사라져 버린 나방들.
폭발의 진원지에 선 서아가 이야기했다.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라스는 상처 하나 없었다.
“‘월영식 – 흑’이었던가요, 그거.”
분진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라스는 두 개의 사슬을 엑스자로 교차시켰었다.
그의 움직임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월영식 흑은 공격보단 방어에 치중된 검술.
주변에 있는 위협을 모두 베어 내는 극한의 방어술이었다.
강철과 같은 언노운의 발톱도.
떨어지는 불길도.
심지어는 언노운의 독가스까지도 베어 내는 검술.
말로 들으면 그런 판타지 같은 일이 어디 있냐고 하겠지만, 그건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일들이었다.
그 여파로 생겨난 게 바로 라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검은 대지.
얼핏 보면 땅이 검게 물든 것 같은 저 흔적은 무수히 많은 상처가 누적되어 생긴 착시였다.
‘흑’이라는 색깔이 붙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왜 그랬냐고. 물었었죠.”
교차시켰던 사슬을 푼 라스가 입을 열었다.
“죽음 앞에 인간이란 참으로 무력한 법이더군요. 세상을 다 가진 황제도, 천하제일의 검객도, 죽음 앞엔 한낱 인간일 뿐이니.”
“…….”
“늙는다는 건 저주입니다. 모든 기능이 퇴화되고, 모든 감각이 둔해지죠. 평생을 일궈 온 것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게 됩니다.”
“…주름 신경 쓸 시간에, 아름답게 늙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셨던 건, 할아버지가 아니셨나요?”
서아가 미간을 좁혔다.
“죽음을 마주하면, 모든 생각과 모든 가치관이 뒤집히는 법이죠.”
라스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나의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걸, 나의 고동이 약해지는 걸 하루하루 느끼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라스가 가볍게 양팔을 들어 보였다.
“영구동토에 갇힌 사람들은 시시각각 죽음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라스의 시선이 6.25탑을 향했다.
이안과 나은.
얼음의 잔해엔 두 사람이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이 전투에 난입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둘 중 하나일 거다.
그럴 여력이 없든가.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받았든가.
“그럼 정말로… 이준과 거래한 건가요? 죽음을.”
깊숙이 파고든 서아가 칼집을 휘둘렀다.
쇠사슬과 부딪친 칼집에서 날아오르는 세 종류의 나방들.
모두 붉은 날개를 가졌지만, 그들의 색은 조금씩 달랐다.
마비. 수면. 중독.
각기 다른 효과를 가진 나방들이었지만, 어느 하나 효과를 볼 순 없었다.
라스는 그걸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고, 베어 낼 능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라스는 공격으로 이어 갔다.
“정말 그런가 보네요. 정말로….”
공격의 주도권과 선공권을 쥐고 있는 이는 라스였다.
하지만 우위에 서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서아의 상처는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환영을 베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호접지몽. 과연 상대하는 입장에선 그런 생각이 안 들 수 없는 전투 스타일이야.’
“이터널 제노사이드.”
“로즈 스위프트(Rose Swift).”
소리가 나중에 따라오는 두 사람의 공방.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옮겨간 소리는 광장 곳곳을 수놓았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하지. 큰 힘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적아의 대가는….’
부러져 날아가는 얼음의 검.
“자신의 수명.’
“일루전 글로우(Illusion Glow)!”
라스를 관통한 서아가 검집에 검을 꽂았다.
서아를 따라오는 붉은 잔영.
잔영에 한 번 더 베인 라스의 상처에선 얼음 파편과 함께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역시 이런 방법으론 결판을 낼 순 없을 것 같군요.”
폭발하는 마나와 함께 차갑게 죽어 가는 눈동자.
“당신의 시간. 이 한 칼에 단절 내겠습니다.”
원을 그리며 움푹 파인 대지가 파편이 되어 떠 올랐다.
‘이건….’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임을 멈춘 파편들.
자세를 바짝 낮춘 서아는 검집을 최대한 위로 기울였다.
“일루전 글로우!”
다시 한번 라스를 관통하는 서아.
“스칼렛 노바!”
빠른 속도로 서아를 따라오던 잔영의 움직임은 일순간 사라졌다.
라스 곁에 몰려 있는 나방들의 날갯짓까지도.
“월영식 – 지(止).”
허공을 베어 내는 라스의 사슬.
궤적을 따라 뒤틀린 공간은 일순간 깨져 나갔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돌아온 잔영의 움직임.
잔영에 베인 라스의 상처에선 또 한 번 피가 흘러내렸다.
얼핏 보면 일방적으로 끝난 것 같은 한 합처럼 보였다.
깨진 차원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정지했던 파편들도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베인 건.
차원만이 아니었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호흡에 섞여 나오는 대량의 피.
넝마가 되어 떨어진 마스크는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처를 한다고 한 건데… 이 정도인가.’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신기루같이 넘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한 합에 잘려 나간 건 양 팔을 포함한 허리 전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미 위아래가 분리되어 땅을 기고 있었을 거다.
‘이게 약해진 거라니. 정말이지. 터무니없다니까.’
약해져 있는 건 이쪽도 할 말이 있긴 했다.
이쪽은 경기권 전역을 커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를 넘어서 있었다.
월영식이라는 저 검술.
아무리 생각해도 3류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설정이지 않은가.
마나를 쓰지도 않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저게 어딜 봐서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검술이란 말인가?
그냥 치트키지.
‘이안한테 그렇게 큰 소리 뻥뻥 쳤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입안 가득 고인 피를 삼킨 서아가 검을 바로잡았다.
“월영식 - ㅅ…!!”
그 순간.
라스를 집어삼키는 미지의 차원.
“이거, 다들 난리도 아니네. 그치?”
서아와 나란히 서 있는 이는 이안이었다.
“이안, 너….”
“잔소리라면 나중에 들을게. 너랑 한 약속을 깬 것도. 나은이한테 전부 떠넘긴 것도.”
일직선으로 반듯이 잘려 나가는 차원.
차원을 베고 나온 라스는 두 사람과 마주 섰다.
“연속되지 않은 단일 차원의 구축. 그 정도로 얕보였던 건가요.”
“얕보진 않았고, 맛보겐 해드린 거랄까요.”
이안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포커페이스는 아주 강력한 무기.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것 정도는…!”
왼손을 들어 올린 라스의 목소리가 순간 끊어졌다.
끔찍한 고통에 물들어 있는 라스의 얼굴.
가슴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에선 간헐적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슨 짓을…!”
가슴에 손을 올린 라스가 이안을 노려보았다.
“가능성 낮은 도박이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먹힌 모양이네.”
“도박?”
서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방금 펼쳤던 차원, 여기랑은 기압이 완전 딴판인 곳이었거든.”
“기압이라고?”
“9기압에서 1기압으로 폭발성 감압만 돼도 인간은 피가 끓어 즉사하지.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기압은 700~1,000기압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고. 지금 감압은 거기 필적하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살 가능성은 0%지.”
쉼표를 찍은 이안이 잠시 숨을 골랐다.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이만한 차원 압력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은 이 세계의 충격에 상대적으로 내성이 약했던 모양이다.
그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온 저 이행 리액터의 파편들 말이다.
“아무런 소모도,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면 효과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렇게 결과로 이어졌어. 한마디로 모두가 함께 만든 일격이라고나 할까.”
“흐…! 흐하핫.”
손에 떨어진 부서진 이형 리액터의 잔해.
잔해를 움켜쥔 라스가 폭소를 터뜨렸다.
“모든 경우의 수와 모든 계측을 벗어난 멋진 일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매듭을 짓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군요.”
망가진 호흡과 흐트러진 맥박.
명경지수의 마음을 바로잡은 라스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월영식 - 사.
지금의 이안에게 참월을 막을 힘은 없었다.
“이게 끝이라고 제가 언제 그랬던가요?”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살기.
자신이 놓치고 있던 퍼즐의 한 조각을 눈치챈 라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보지 않아도 보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뒤에 있는 게 뭔지.
자신의 뒤를 잡은 건 차원의 틈.
틈새에 서 있는 이는 주원이었다.
“월영식 - 사! 참월!!”
공간을 뛰어넘어 작렬하는 필사의 일격.
여덟 방향으로 흩어졌던 주원은 이내 하나가 되었다.
주원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동시에 같은 곳에 있었다.
이곳은 처음부터 두 사람이 펼쳐놓은 차원 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