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엉망으로 부서진 얼음 타일.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잔뜩 낮췄던 몸을 일으킨 주원이 물었다.
월영식 - 백.
그건 검을 뽑아내며 만들어 낸 검풍으로 적을 공격하는 기술이었다.
적과 다른 점은 발도의 속도가 굉장히 느리고, 검풍이 단발이 아니라는 것.
월영식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하는 검술로, 검과 검집이 모두 필요한 발도술의 일종인데….
‘적’과 마찬가지로 그냥 맨손으로 사용했다.
미리 대처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정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설마 용주에게 해줬던 이야기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줄이야.
“아…. 응.”
예나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있어야 할 것들 중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전두엽을 강타하는 불길한 예감.
서둘러 달려간 예나는 부서진 얼음 조각을 살폈다.
얼음 조각에선 예나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이라면 괜찮습니다, 아가씨.”
바람과 함께 나타난 승우가 이야기했다.
그의 숨은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고,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안전한 곳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보단 나을 겁니다.”
“그 상황에 그런 판단을 하고, 그걸 실행했다라. 확실히 인정할 만한 솜씨군요.”
얼음을 깨고 나온 라스가 사슬을 늘어뜨렸다.
산 사람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들까지 그는 전부 이동시켰다.
하나하나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힘의 소비가 상당하군요. 예정에 없던 무리를 한 탓이겠죠.”
갑작스럽게 솟구치는 땅.
얼음 타일을 뚫고 나온 건 다름 아닌 버티의 팔이었다.
“월영식 – 청.”
알고 있었단 듯 뛰어오른 라스는 몸을 회전시켰다.
사슬의 궤적에 남는 푸른 물결.
“!”
깔끔하게 잘려 나간 버티의 두 팔은 차가운 얼음 바닥을 굴렀다.
“버티가!”
공격과 동시에 땅속 버티를 끌어내는 라스.
산산이 조각난 지면과 얼음 사이로 뽑혀 나온 버티를 휘감은 사슬엔 푸른빛이 감돌았다.
“프로즌 메이든.”
버티를 에워싸며 나타난 수많은 얼음 송곳들.
죄수를 고문하는 아이언 메이든처럼 입을 벌린 송곳들은 일제히 버티의 몸을 꿰뚫었다.
화염을 토해 내며 저항하던 버티는 힘을 다하고 결국 쓰러졌다.
“삼천세계(三千世界)!”
라스의 측면을 파고든 금화의 일격.
강한 힘과 속도를 동반한 첫 번째 일격은 아슬아슬하게 라스를 빗겨 갔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검을 지면에 박아 넣은 금화는 그 힘과 반동을 이용해 회전하며 뛰어올랐다.
그대로 이어지는 강력한 내려찍기.
가볍게 뒤로 뛰어오른 라스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솟구치는 날카로운 얼음 가시.
갑옷을 긁어내는 강렬한 소리와 충격을 뚫고 나간 금화는 가시 산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소천, 중천을 거치며 위력을 키운 회심의 대천.
양손으로 대검을 움켜쥔 금화의 일격은 라스에게 그대로 적중했다.
빠득… 빠드득…!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마찰음.
회심의 올려 베기를 적중시킨 금화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수라의 길이란 거군요, 이게. 잘 봤습니다.”
공격은 분명 적중했다.
하지만 베어 내지 못했다.
금화의 대검은 한기가 만든 얇은 바람 장막 앞에 가로막혀 버렸다.
“고구마 아저씨!”
금화를 베어 내는 라스의 사슬.
금화의 두꺼운 갑옷조차도 금화를 지켜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슬이 지나는 곳마다 튀는 미늘은 물고기 비늘처럼 날아다녔다.
“멋진 분투에 경의를 표합니다.”
날아가는 금화의 투구.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투구는 맥없이 떨어졌다.
“장자만등…(長者萬燈).”
등처럼 피어오른 대검의 빛.
쓰러지기 직전.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집중한 금화는 최후의 일격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라스에게 닿기는 역부족이었다.
검끝부터 타고 오른 얼음은 빛을 삼켰고, 금화의 몸까지 잠식해 버렸다.
“젠장…!”
분노에 물든 주원의 얼굴.
“미완성, 미숙, 그 정도의 월영식으론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기술보다 감정이 앞선 주원의 검을 가볍게 받아친 라스가 주원을 베어 냈다.
“큭!”
깊은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이어 가는 주원.
왼손의 사슬을 자신의 팔에 감은 라스는 주원의 복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월영식 – 황.”
원을 그리며 풀어지는 사슬.
고속으로 회전하는 힘에 휩쓸린 주원은 힘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커헉!”
회전하며 처박힌 주원.
대량의 피를 토해 낸 주원의 복부는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다.
“풀어…. 얼음. 당장 풀라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주원이 라스를 노려보았다.
“마음을 잃지 않는 게 월영식의 기초이거늘.”
“풀어. 금화 아저씨를… 놓아줘.”
“웃긴다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었을 때는 분노하지 않았으면서.”
“닥쳐!”
폭발적으로 달려드는 주원.
주원의 움직임은 아픔을 잊은 듯 저돌적이었다.
“스킬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무늬만 헌터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검까지 놓아 버리면 죽겠다는 소리밖에 안 되지 않겠습니까?”
왼손으로 검을 받아 낸 라스가 오른손을 내질렀다.
“월영식 – 자.”
세 방향으로 휘감기는 검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기를 정면으로 파고든 주원은 검을 내질렀다.
“월영식 - 자!”
역방향으로 휘감기는 세 갈래의 검기.
보랏빛 물결을 마주한 라스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명경지수를 잃진 않은 건가. 모순적이군.’
보랏빛 검기를 후려친 라스는 사슬을 붙잡았다.
그에 맞춰 칼집을 꺼내 드는 주원.
“월영식 – 백.”
“월영식 - 백!!”
단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작렬하는 검술은 일대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월영식이 아까보다 더 정교해졌어.’
찢겨 나가는 바람 소리.
맞부딪치는 바람은 칼처럼 예리했고, 또 치열했다.
같은 기술이지만, 둘의 기술은 같지 않았었다.
기술의 정교함도 위력도 라스가 최소 두 수 이상은 앞서 있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의 공방은 달랐다.
차이가 나 봐야 한 수 이하.
팽팽하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었다.
‘순도 100%의 분노. 역설적이게도 그것 역시 명정지수란 건가.’
두 사람의 공방은 칼끝이 완전히 뽑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재미있군. 그럼….’
“수라는 살아 있습니다. 아직은 말이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두 자루의 칼날.
주원과 승우의 협공을 동시에 받아친 라스가 난타전을 이어 갔다.
“아직은 이란 게 무슨 소리야!”
“영구동토는 즉발적인 살상력이 굉장히 떨어지는 스킬. 이 기술의 무서운 점은 가둔 적의 정신과 생명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다는 데에 있죠.”
“정신과 생명을 갉아먹는다고?”
“잠깐이었지만 수라의 정신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주 깊고, 아주 견고했죠. 하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심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저 상태론 나비의 치유도 받을 수 없죠.”
“…….”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잃게 될 겁니다. 전부를.”
주원을 날려 버린 라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코어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칼날들이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마나로 극대화한 검의 일격이라.”
응집되는 힘과 마나.
승우의 회심의 일격을 마주한 라스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지면과 마찰된 사슬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오로라.
탈춤을 추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던 라스가 검기를 쳐올렸다.
“월영식 - 홍(紅)!”
“바알 블래스터!”
승천하는 붉은 검기와 내리꽂히는 붉은 파동.
팽팽한 평행선을 그리던 두 물결은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하고 거대한 폭발로 사라졌다.
파바밧!
얼음장 사이에 꽂히는 트럼프 카드.
연막 사이를 질주한 라스는 내리꽂히는 폭풍을 마주했다.
시야 전체를 집어삼킨 폭풍의 중심엔 승우가 있었다.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끌고 온 것부터 박수받아 마땅한 일. 경의를 담아 전력으로 부숴 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몰아치는 극한의 한기.
대기 중에 있던 수증기들은 얼음결정이 되어 떨어졌다.
그리고 그건 승우를 감싼 폭풍에도 마찬가지였다.
얼어붙은 수증기 결정들은 속도를 유지한 채 회전했고, 그 하나하나의 결정들은 작은 칼날과 다름없었다.
촤악~!
승우의 몸을 찢는 날카로운 얼음결정들.
이를 악문 승우는 폭풍을 잠재우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라스만을 보고 있었다.
“이터널 제노사이드.”
양팔의 사슬을 동시에 붙잡은 라스가 마나를 폭발시켰다.
사슬을 따라 자라나는 얇고 예리한 칼날.
머금고 있던 숨을 내쉰 라스는 호흡을 멈추었다.
“월영식 - 사 : 참월.”
맞부딪치는 폭풍과 폭풍.
전력과 전력의 승부에서 튕겨 나온 것은.
바람이었다.
“지, 집사!”
온몸을 던진 예나가 승우를 받아 냈다.
서리에 반쯤 삼켜진 승우는 엉망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집사?! 집사!!”
얼굴에 붙은 서리를 털어 낸 예나가 승우를 살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가장 깊은 상처는 왼쪽 가슴과 어깨를 지난 상처.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어도, 즉사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정신 좀 차려 봐.”
예나가 승우를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승우는 죽은 듯 차가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집… 승우 오빠!”
“…….”
예나의 외침에 반응한 승우가 간신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극한의 숨결은 마시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르는 독가스와 같은 법. 그의 안과 밖은 모두 망가졌습니다.”
사라져 가는 얼음의 검.
내려앉는 서리를 뚫고 나온 라스가 주원의 공격을 막아섰다.
“월영식을 쓰는 자라면 알겠죠. 금지된 검술이 왜 금지된 검술인지.”
“아아…! 아아아악!!”
분노에 이성을 잃은 주원이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투가 무색할 정도로 라스는 압도적이었다.
월영식이 월영식에 상쇄된다 해도 라스에겐 그 이상의 강함이 있었다.
그게 전부인 주원으로서는 승산이 없단 이야기였다.
“‘사’는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술. 다른 검술들과는 색 자체가 다른 검술이죠. 하지만 이 역시 탄생한 배경이 있고, 사용의 필요가 있었기에 나온 색깔입니다.”
주원의 발목을 붙잡는 얼음.
힘으로 거칠게 뽑은 주원의 발은 피와 동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사’는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상대를 죽여야만 할 때를 위한 검술. 지켜야 할 걸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색깔입니다. 지켜야 할 게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직무 유기이자, 검과 검술에 대한 배신입니다.”
주원을 베어 내는 라스의 사슬.
춤을 추듯 유려하고, 재빠르게 움직인 라스는 주원을 통과했다.
박아 넣은 검으로 상반신을 간신히 지탱한 주원은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주원 오빠….”
예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버티, 금화, 승우, 주원.
모두 쓰러지고 남은 건 이제 자기 혼자였다.
“어떻게….”
이길 수 없다.
너무 강하다.
무섭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야.”
자기 뺨을 때린 예나가 승우의 손을 잡았다.
승우의 검을 쥔 예나는 다가오는 라스에게 검을 겨눴다.
그때.
지지지직…! 콰앙!!
6.25탑을 감싸고 있던 기하학적인 단층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서리와 파편.
예나의 곁을 스쳐 간 폭발적인 바람과 부딪친 라스가 크게 밀려났다.
“!”
놀란 예나의 눈앞에서 흩날리는 포니테일.
예나의 앞에 있는 사람은.
서아였다.
“조금… 늦었잖습니까.”
토해 내듯 마른기침을 한 승우가 쇠 긁는 목소리를 냈다.
그의 가슴에 내려앉은 푸른 나비는 치유를 이어 가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버텨 줘서 고맙고. 이제부턴 내가 상대할게.”
폭발하며 분출되던 서아의 마나에 순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변하는 마나와 기운.
푸른 나비와 마스크가 사라진 자리엔 붉은 나방과 빨간 마스크가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