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 *
“녀석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니냐?”
용주가 엔비를 노려보았다.
“아니면 이쪽 전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든가.”
“후훗, 설마. 우린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 않았답니다.”
엔비가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S급 헌터. 녀석의 기반이 된 그 힘을 꽤 신뢰하고 있나 보지?”
“흐음~ 역시 거기까지 눈치채고 있나 보네. 하긴 목격자를 남겨 뒀으니 그럴 수 있지.”
형만을 본 엔비가 눈썹을 들썩였다.
팔 하나를 잃은 샐러맨더가 빙제의 추격을 벗어날 가능성은 높게 쳐도 한 자리를 넘기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라스가 형만을 살려 보낸 건.
놓쳤다기보단 놓아준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할 거다.
러스트에 대한 그 나름의 배려였던 셈이겠지.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애송이.”
목소리에 앞서 날아든 한 발의 화염.
화염에 삼켜진 해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장난은 위험하다고요. 이 아름다운 휴양림이 다 타겠어요.”
“녀석은 내가 상대하겠다.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움직여.”
“그렇게 대놓고 무시하면, 저도 좀 속상한걸요?”
엔비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 그런데 어떻게 하죠? 난 연상보다 연하가 좋은데. 이왕 하는 데이트면 제 취향에 맞춰 주면 안 될까요?”
“네 취향 따위 알 바 아니지.”
“어머~ 매정하기도 하셔라. 성격이 그러니 머리도 훌훌 빠지는 거라고요.”
가벼운 농담을 던진 엔비가 메스를 그었다.
상처가 난 나무는 빠르게 시들어 갔다.
“그런데 잊은 건 아니겠죠? 문은 두 개라고요. 보스가 어디로 갔는지….”
“그런 거야. 간단하지. 양쪽 모두 가면 그만이니까.”
형만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흐음~ 그치만 괜찮겠어요? 제가 물론 거짓을 섞긴 했지만, 틀 자체는 사실에 근거했는데요. 둘 중 누군가는 프라이드랑 보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상황을 두려워했다면, 애초에 추격하지도 않았을 거다, 애송이.”
형만에게서 폭발적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
“아니야.”
수지가 형만의 오른쪽에 바짝 붙었다.
“뭐가 아니란 거냐.”
“저 사람 상대하는 거. 내가 해야 해.”
“…왜 그렇게 생각한 거냐.”
“의료 헌터가 상대야. 의료 헌터를 가장 잘 아는 건 의료 헌터고.”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수지의 목소리.
한 발 앞으로 나온 수지는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보단 아저씨가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아저씨한텐 나한텐 없는 불꽃이 있으니까.”
“…….”
불꽃.
수지가 말한 그게 단순한 현상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걸 형만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수지가 말한 불꽃은 마음속에 자리한 깊은 분노와 증오.
이준을 향한 복수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웃기지 마라, 안수지. 이 부서지는 세계에 널 두고 가라고? 내가 그럴 것 같나?”
지금까지 지나왔던 다른 세계들과 이곳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붕괴의 속도로 보건대, 이 세계에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시간.
중심이 되는 등대섬에까지 균열이 있었으니 안전한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후훗.”
진지한 형만의 외침에 돌아온 건 수지의 웃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수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 언제 한번 들어본 것 같지 않아?”
“비슷한 이야기라고?”
“응. 분명 있을 거야. 응. 있어.”
수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형만은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이런 이야기가….
“…기억나? 전에 비밀의 방에서 우리 전부 용주한테 속았었던 거.”
“속았었다고?”
“아~ 이건 비밀이었던가? 아무튼 그때처럼 한 번 더 속아줘.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날 구해 주러 올 사람이 있으니까.”
“…….”
거기까지 들은 형만의 머릿속에 그때의 일부가 떠올랐다.
아까 수지가 말했던 비슷한 이야기.
그건 분명 자신이 불길 속에서 외쳤던 말이었다.
“시간 없어. 어서 움직여.”
그리고 이어진 수지의 이야기.
이 말.
이건 분명 그 어둠 속에서 용주가 했던 말이었다.
이 녀석….
분명 의도적으로 싱크로를 맞춘 게 분명했다.
그때처럼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교활한 녀석.”
“결정 났네.”
형만의 대답에 수지가 만족했단 반응을 보였다.
“…일이 정리되거든 이용주 녀석을 따라가라. 꼭.”
“응. 그럴게.”
형만이라고 이 부서지는 세계에 수지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희생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왼쪽은 내가 맡는다. 불만 있나?”
“아니.”
“그럼 됐군.”
“이준이 있다고 판단되거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라. 어떻게 해서든 길을 찾을 테니.”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면, 찢어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적어도 쓰러지지 마라. 내가 갈 때까지.”
“흥. 녀석이 상대라면 난 죽여도 안 죽는다. 눈을 감을 수 없는 이유가 내겐 있으니까.”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남긴 형만이 먼저 뛰쳐나갔다.
“가. 닫히겠어.”
용주의 시선에 수지가 이야기했다.
또 한 번 조각난 차원은 거의 1/3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남은 건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작은 틈뿐이었다.
“인커젼이 사라지면, 붕괴가 멈출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등대에 있어.”
“응. 그럴게.”
“붕괴가 계속되더라도 침착해야 해. 등대 아래 있는 크레아탄 소환터는 상대적으로 안전할 거야. 거긴 다른 세계와의 균열이 있었던 자리니까. 언노운들도 거리를 두는 듯 보였고.”
“응. 그럴게. 걱정 안 해. 왜냐면 다 잘될 거란 거 아니까.”
자기 입술에 손을 올린 수지가 용주의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
“…….”
걸고 있던 은시계를 잡아당긴 용주는 수지의 손에 그걸 쥐여주었다.
그걸로 마지막.
등을 보인 용주는 균열을 향해 달려 나갔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날카롭게 부딪치는 메스와 은장도.
선제타격에 나선 수지는 쉴 틈 없이 공격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응. 그치만. 뭔가 할 수도 있으니까.”
빠른 속도로 뛰어오른 수지가 주먹을 내질렀다.
“속고만 살았나 봐?”
거대한 충격과 함께 솟구치는 모래.
수지의 목엔 두 개의 은시계가 걸려 있었다.
“힘이 아주 장사네. 여리여리한 팔뚝에서 이런 괴력이라니.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 고생깨나 하겠어.”
폭발 반경을 벗어난 엔비가 여유를 보였다.
수지에 대한 간략한 전투력은 그리드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이 괴력 역시도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정답 어디였어?”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낸 수지가 물었다.
형만과 용주는 이제 이 세계에 없었다.
“어머~ 그걸 지금 나한테 알려달라는 거야? 하핫, 너 재밌네.”
엔비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날 쓰러뜨리면 알려 주는 걸로.”
“약속한 거야.”
“그래. 약속.”
여유로운 미소를 보인 엔비가 메스를 휘저었다.
엔비가 긋는 결대로 잘려 나가는 풀과 나무.
대지에 남은 상흔을 피해 움직인 수지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웃기는 상황이지? 의료 헌터끼리 칼을 겨누는 것도. 어딘지도 모르는 부서지는 세계에 이렇게 버려진 것도.”
“버려지지 않았어.”
“어머 그래? 그런데 너 의료 헌터치고는 움직임이 제법이네. 혹시 너도 나랑 같은 부류인 거니?”
수지의 손목을 순간적으로 낚아챈 엔비가 그녀를 내던졌다.
“죽이는 건 살리는 것보다 쉽지. 그리고 살릴 땐 느낄 수 없는 쾌락과 희열을 가져다주고."
엔비가 메스 끝을 들어 올렸다.
메스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같지 않아.”
바나나 나무 하나를 통째로 부러뜨린 수지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붉은 얼룩이 생긴 수지의 허리.
찢겨 나간 옷 아래 있던 상처는 이미 다 치유되어 있었다.
“의료 헌터는 살육에 쾌락도, 희열도 느끼지 않아.”
“그런 것치곤 몸이 꽤 솔직하지 않아? 그 눈. 어떻게 해서든 날 끝장낼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알고 있어. 네가… 내 가족들을 죽인 거.”
“가족? 어머~ 그랬니?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럼~ 언니가 누군지 한번 맞혀 볼까?”
“거기 있던 모두가 내 가족이었어.”
“흐음~? 그건 또 무슨 NTR 같은 소리래.”
“헌터는 가족이야.”
“그거참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은 말이네.”
엔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알고 있어. 네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
순간 굳어진 엔비의 입꼬리.
“죽이는 게 아니야. 원래 있던 자리로. 속죄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엔비가 그린 궤적을 맞받아친 수지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콰앙!!
부채꼴 모양으로 헝클어진 대지.
길게 갈라진 차원의 틈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엔비는 한 손의 완력만으로 벼랑을 기어 올라왔다.
‘큰일 날 뻔했네.’
수지의 단검.
두 마리의 뱀이 조형된 저 검의 능력 역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얻어맞을 공격이 아니었건만….
가족이라는 말과 망자라는 말이 오늘따라 더 송곳처럼 들어왔다.
“돌려보낸다라. 그거참 재밌는 말이네.”
“…….”
“그럼 어디 해보자고. 넌 네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난 내 가족을 위해.”
가드 대신 파고듦을 선택한 엔비가 수지의 배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들어가는 카운터 어택.
얼굴을 시원하게 얻어맞은 엔비는 엉망으로 땅을 굴렀다.
그리고.
수지의 입술을 타고 역류한 피가 흘러내렸다.
고작 딱 한 번의 터치는.
수지의 안쪽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 * *
“월영식 - 청!”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킨 주원이 빠르게 내리꽂혔다.
“어떤 자세에서 어떤 검술이 파생되는지를 알면. 대처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 쉽고 간단한 법.”
비스듬하게 사슬을 맞댄 라스가 흐름대로 힘을 흘려보냈다.
미끄러지듯 떨어진 주원을 걷어차는 라스.
엉망으로 날아간 주원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월영식 - 적!”
그와 동시에 이어지는 발도술.
사슬을 엑스자로 교차시킨 라스는 검기를 그대로 찢어 버렸다.
하지만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야의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이기어검.
감각만으로 검을 피한 라스는 검을 후려쳤다.
꽁꽁 얼어붙은 예나의 검은 그대로 바닥을 타고 미끄러졌다.
“모든 감각이 극에 달하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법.”
왼발을 한 발 뒤로 무른 라스가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의 앞을 스쳐 가는 묵직한 대검.
왼손으로 라스의 사슬을 잡은 금화는 있는 힘껏 라스를 붙들었다.
금화의 눈가엔 선명한 수라의 문양이 나타나 있었다.
“버티! 태워 버려!”
라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의 파도.
맹렬하게 쏟아지던 불길이 얼어붙은 건 그로부터 3초 뒤였다.
“좋은 호흡이군요. E급 헌터인 걸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산산이 부서지는 얼음 속 사슬을 끌어당긴 라스가 금화의 목을 휘감으려 했다.
그 순간.
“윈드 커터!”
바닥을 기는 날카로운 바람이 지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정도로 절 넘어설 순 없습니다. 절대로.”
순식간에 파고든 승우와 얼굴을 마주 댄 라스.
“프로스트 로러스(Frost Lotus).”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그의 검격을 모두 막아선 라스는 거대한 얼음의 꽃을 피워 냈다.
금화까지 챙겨 사정권을 빠져나온 승우.
얼음꽃의 중심에서 다시 한번 사슬을 붙잡은 라스는 천천히 사슬을 잡아당겼다.
‘이건….’
“다들 엎드려요!”
다급하게 외친 주원이 예나를 끌어안았다.
“월영식 – 백(白).”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찢겨 나가는 얼음의 꽃.
사슬이 움직일 때마다 뿜어져 나온 검풍은 얼음을 베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검풍은 그 자체로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거기 더해진 얼음은 그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