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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02화 (302/357)

302화

* * *

“주변 언노운들도 얼추 정리된 것 같고,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어.”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 가던 A급 헌터가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냈다.

예고도 없이 열리는 카오스 게이트는 까다로웠지만, 전투의 안정성은 꽤 탄탄한 편이었다.

인원도 충분했고, 개개인의 실력 역시도 훌륭.

카오스 게이트가 아닌 익숙한 환경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엄청난 메리트였다.

게다가 S급 의료 헌터의 의료 지원까지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 조건이라면 언제까지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단 착각이 들 정도였다.

“쉬는 건 좋아도 긴장은 하고 있어야 해. 녀석들이 또 언제 어디서….”

“아아~ 또 잔소리. 나도 알고 있다고.”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헌터들.

“확실히 우리보다 강한 헌터들을 따라가는 건 힘드네. 가랑이 찢어지겠어.”

검을 집어넣은 주원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꽤 많이 처리했잖아. 안 찢어진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생각해야지.”

예나가 버티를 끌어안았다.

“아가씨.”

예나에게 다가온 승우가 카드 한 장을 건넸다.

예나가 받아든 카드는 이내 생수로 변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술을 할 여유가 있다니, 대단하구려.”

잠시 투구를 벗은 금화가 생수를 건네받았다.

승우가 부리던 언노운들은 그의 칼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행복하니까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여유가 좀 생기죠.”

“말은 그렇게 해도 승우 형 대단하던데요.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더 대단했다고요.”

주원이 감탄을 표했다.

승우의 헌터 등급은 B급이었지만, 그런 딱지를 떼고 보면 A급 헌터 사이에 섞여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아까 하늘을 날 때 조커 형을 보는 것 같았어요. 아! 조커 형이 누구냐면요….”

“아가씨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승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카오스 게이트가 아까보다 더 크고 선명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때.

‘……?’

무언가를 감지한 듯 승우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기분 탓인가? 그렇지만 분명….’

바람이 불어왔었다.

그것도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바람이.

‘뭔가 있어. 언노운인가? 그렇지만 언노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경계의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승우.

“집사? 왜? 무슨 일 있어?”

승우의 이상을 감지한 예나였지만, 그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왜냐하면.

폭발적으로 일어난 얼음의 파도가 전쟁 기념관 전체를 집어삼켜 버렸으니까.

“다들 무사하십니까?”

예나를 꼭 끌어안은 승우가 물었다.

“덕분에 그런 것 같네.”

“이게 대체….”

주원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자신이었다.

네 사람은 지금 얼음벽에 포위되어 있었다.

승우가 펼친 바람의 장벽이 아니었으면 아마 자신들은 저 얼음 안에 있었을 테지.

“아무래도 적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적이요? 그럼 이건 언노운이?”

“아뇨. 언노운이 한 게 아닙니다.”

“언노운이 아니라고요?”

주원의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 갔다.

언노운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언노운이 아니면, 태스크 포스?”

“그쪽도 아닐 겁니다. TF는 지금 길드와 협력 관계이니.”

“그럼 대체 누가….”

“누가 됐든 굉장히 위험한 인물임은 확실할 겁니다. A급 헌터에 S급 헌터까지 있는 이곳에 선전 포고를 해 온 거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짐작 가는 상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자들은 역시 그들뿐이었으니까.

얼음벽을 날려 버린 승우의 얼굴에 고통이 묻어났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그걸 막아서면서 조금 무리한 모양이다.

“집사?”

“괜찮습니다. 그보다….”

승우의 시선이 보다 먼 곳으로 향했다.

전쟁 기념관 전체가 하나의 얼음 왕국이 되어 있었다.

전시물들은 모두 얼음에 갇혀 있었고, 건물들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승우가 마주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거 설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곳곳에 전에 없던 얼음 조각들이 생겨나 있었다.

한두 개 아니었다.

얼음 조각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둘. 그들은 모두 사람들이 있던 자리에 있다.

셋. 그들은 모두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넷, 그들은 모두 나비와 함께 있다.

“집사 저거…. 아니지?”

“…….”

예나의 물음에 승우는 침묵을 지켰다.

“구해야 해요! 빨리!”

말보다 행동이 앞선 주원은 얼음 조각 앞에 섰다.

죽었을 거란 생각 자체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

얼음 안에 갇힌 사내의 동공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아니야.”

주원은 필사적으로 그를 구하려 했다.

단단한 얼음을 내리찍고, 내리찍고, 또 내리찍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음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듯 움직이는 주원.

근처에 있던 다른 헌터에게 다가간 주원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사내의 눈동자가 분명 자신을 바라보았다.

착각이나 망상 같은 게 아니었다.

이 사람은….

살아 있었다.

“꺼내 드릴게요!! 조금만 버티세요!”

단순히 휘두르기만 해서는 가망이 없다.

그렇게 판단한 주원은 호흡을 멈췄다.

“잠깐!”

그때, 그를 막아서는 금화.

양어깨를 잡은 금화는 진정하란 듯 주원을 흔들었다.

“얼음을 날려 버리면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네. 월영식이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단 소리네.”

“…그렇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 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손가락이나 쪽쪽 빨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술자를 쓰러뜨리면, 술법은 자연스럽게 풀리는 법이죠.”

6.25탑 주변을 살핀 승우가 검을 빼 들었다.

탑이 있던 자리엔 기하학적인 얼음 단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한 부분까진 알 수 없었지만, 추측건대 이 공격은 S급 헌터들과 나은을 쓰러뜨리기 위한 목적은 아닐 것이다.

이 공격의 목적은 주변 정리와 일시적인 단절.

즉, 저 셋을 공략하기에 앞서 방해꾼들을 제거하기 위한 가지치기였다.

“마술사를 속였으니, 저도 최소한의 답례는 해야겠죠.”

승우의 칼날을 타고 나타난 수십의 언노운들이 창공을 가로질렀다.

“모습을 드러내시죠. 유령.”

정확히 한 지점을 노리는 언노운들.

바람을 타고 강하하던 녀석들은….

이내 한 줌 얼음덩이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치리링…. 스으윽….

몰아치는 짙은 눈보라와 들려오는 쇠사슬 소리.

점점 다가오던 소리는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A급 헌터들의 유약함이라고 보는 게 맞을지. 그 이하의 분투라고 보는 게 맞을지.”

우박처럼 떨어지는 언노운의 사체를 집어삼킨 눈보라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런 결과는 저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군요.”

그리고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안대와 쇠사슬로 상징되는 그 노인은.

라스였다.

“저 사람은… 설마….”

주원의 머릿속에 용주와 나눴던 대화가 스쳐 갔다.

검이 아닌 사슬로 검술을 쓴다던 노인.

월영식을 사용하는 팬텀.

본능적으로 그게 저자란 걸 알 수 있었다.

“크기에 비해 질이 상당히 좋더군요. 바람을 다루는 힘에 특별한 힘을 가진 검. 아주 잘 봤습니다.”

네 사람과 마주한 라스가 이야기했다.

그의 입은 분명 승우에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주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원이 가진 검을 포함해서.

“가까운 곳에 잘도 숨어 계셨군요.”

“그게 제게 내려진 임무였으니 말입니다.”

“그 임무란 건 역시….”

“기존 질서의 붕괴. 복구된 파편의 빙소와해”

오른쪽 사슬을 붙잡은 라스가 허리춤으로 사슬을 당겼다.

‘저 자세는….’

고작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주원은 그가 하려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저 자세는….

“월영식 – 적.”

한순간 내지른 쇠사슬.

“월영식 - 적!!”

날아오는 붉은 검기에 주원이 똑같이 응수했다.

맞부딪치는 두 개의 검기.

같은 모습, 비슷한 크기와 궤적을 가진 검기의 충돌은 평행선을 그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찰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검기를 베어 낸 검기는 주원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밀렸어?!’

눈앞에서 번뜩이는 붉은 검기.

검기를 맞받아친 주원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버텨 내게.”

주원의 뒤를 받친 금화는 힘을 보탰다.

각도가 틀어진 검기는 하늘 위로 날아갔다.

“왼발의 각도가 2도 정도 잘못됐습니다. 검을 내지르는 순간 호흡도 흐트러졌고요. 뽑는 힘과 방향도 균일하지 않았습니다.”

숨 쉬듯 지적 사항을 한가득 쏟아 낸 라스가 다시 한번 사슬을 휘둘렀다.

“프로즌 파일.”

쇠사슬을 타고 흐르는 푸른 물결.

기관총처럼 날아가는 얼음 말뚝은 정확히 하나의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표적이 된 이는 승우.

바람과 같은 속도로 얼음과 얼음 사이를 누빈 승우는 검을 휘둘렀다.

“사람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고, 헌터는 작은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죠.”

날카롭게 주고받는 두 사람의 공방.

우측으로 휘저은 쇠사슬을 회피한 승우는 칼날을 살짝 비틀었다.

이어지는 우측 사슬에 휘어 감기는 냉기.

사슬에 감긴 무언가를 깨부순 라스는 살짝 몸을 틀었다.

조금 전 쇠사슬이 깨부순 건 언노운의 빈 껍데기.

자연스럽게 틈을 만든 승우의 일격은 치명적이도록 날카로웠다.

“서로 다른 두 검술의 융화. 자칫 잘못하면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 있는 조합임에도 다룸에 능하시군요.”

승우의 검은 꽤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승우의 검술은 거기에 맞춰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람처럼 유려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어 있는 검술.

그게 라스가 내린 승우에 대한 평가였다.

“적의 약점을 공략하는 법도 잘 아시고요.”

승우의 움직임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안대를 찬 방향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것.

누가 보면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전술이었지만, 이건 스포츠 같은 게 아니었다.

목숨을 건 진검승부에서 그건 합리적이고, 지극히 타당한 전술이었다.

“게다가….”

맞부딪치는 검과 사슬.

얼음 파편에 찢긴 승우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생겨난 라스의 상처에서도 마찬가지로 피가 흘러내렸다.

조금 전 상처를 만든 건 칼날이 아닌 바람.

승우의 검에 감겨 있던 바람은 흩어지며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가시 갑옷’이라는 메커니즘의 공격적인 활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닉 그라비티.”

왼쪽으로 치고 들어온 승우가 순간 광풍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떠오른 두 사람의 몸.

자유자재로 공중을 누빈 승우는 시야의 사각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월영식 – 자.”

그런 승우를 향해 날아드는 여섯 갈래의 검기.

회전하며 빨려 들어오는 보랏빛 검기에 승우는 그대로 지면으로 추락했다.

“양팔로 다 내지르는 건 반칙 아닌가 싶은데.”

지면을 긁은 승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월영식이라면 최소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방금 사용한 ‘자’ 역시도 주원이 사용했던 기술 중 하나였기에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쪽에서 동시에 날아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칼을 어깨 쪽으로 바짝 당기는 동작도 양팔을 뒤로 당기는 동작으로 치환되었고.

“팔이 아닌 사슬이 그리는 궤적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럼.”

“집사!”

예나가 급하게 승우에게 달려왔다.

버티, 금화, 주원.

공격을 이어받은 세 사람은 라스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 보였다.

주원의 월영식을 월영식으로 맞받아친 라스는 주원을 날려 버렸다.

부족했던 부분을 또 한 번 하나하나 짚어 주면서.

“괜찮습니다, 아가씨. 바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 다치지 않아요.”

“…응. 우리 꼭 이기자.”

예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자기에게 거는 최면에 더 가까웠다.

팬텀이 얼마나 강한지도.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 그래야죠.”

승우가 6.25탑을 힐끔 바라보았다.

같은 우리이지만 승우가 말한 우리는 여기 있는 넷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조금씩 모습을 바꾸고 있는 저 기하학적인 단층 아래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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