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얼음덩이.
거대한 몸과 특유의 점프력을 이용해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던 언노운은 보좌관의 날개 아래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얼음길로 날아드는 무수히 많은 물들의 향연.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언노운들은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원거리 공격을 이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차원의 균열을 뛰어넘어 다른 바다의 파편으로 뛰어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귀찮게 나와 주는군.”
좌우를 흘겨본 용주가 얼음길을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검붉은 방울.
광폭화 상태로 진입한 용주는 도열해 있던 언노운들을 시원하게 쓸어버렸다.
페이탈 붐의 여파로 터져 나간 바닷물은 얼음길까지 튀었다.
“흠~ 생각한 것보다 저항이 거셌네. 그치?”
얼음길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을 마친 수지가 물었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수지도, 형만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었다.
두 사람도 그 정도 저항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었단 거겠지.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봤어?”
“그래. 뭐, 대충은.”
등대의 불빛이 시선을 끌어보려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됐는지는 수치화하기 힘들었지만, 그 노고와 마음만큼은 감사하게 생각해도 되겠지.
“이 섬도 여기저기 갈라져 있네.”
“그렇겠지.”
자세를 낮춘 용주가 백사장을 살폈다.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발자국의 종류를 세던 용주의 머릿속에 의문 부호가 찍혔다.
‘넷? 잠깐, 내가 뭔가 놓친 건가?’
다시 한번 흔적을 살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
여기 남아 있는 발자국은 네 명분이었다.
“왜?”
“러스트를 제외한 팬텀은 일곱. 거기 슬로스와 그리드를 빼면 다섯이 남아야 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건 네 사람의 것뿐이다.”
형만이 대신 대답했다.
형만 역시도 용주가 품은 것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남아 있는 발자국은 넷.
누구 발자국인지 확실한 건 글러트니와 엔비 정도였다.
“넷. 한 사람만 따로 움직인 걸까?”
언노운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식의 가정은 말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방향이야 여럿 있었지만, 다들 하나같이 설득력이 떨어졌다.
바다를 돌아 다른 곳으로 상륙했다든가.
하늘을 날아 움직였다든가.
아예 무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등등의 것들 말이다.
“글쎄. 일단은 움직이는 수밖에. 답은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니까.”
백사장을 지난 용주는 우거진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 사이로 나아갔다.
발자국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 *
그리 크지 않은 섬의 중심.
갈라진 땅의 경계선에 선 용주는 걸음을 멈췄다.
인커젼으로 일어난 다른 세계의 틈이 보였다.
틈은.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처음 균열을 발견했을 땐 두 균열이 거의 맞닿아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균열이 점차 작아지면서 그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
용주가 걸음을 멈춘 이유 역시도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기발한 아이디어였어. 설마 거길 그렇게 건너올 거라곤 생각 못했네. 덕분에 좋은 구경 했어.”
두 개의 균열 사이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는 엔비였다.
“네가 벌써 나올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팬텀이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엔비란 건 용주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저번 팬텀의 작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건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글러트니.
다른 하나는 엔비였다.
글러트니는 당연히 마주하게 될 이안에 대한 대비였다.
거기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럼 남는 건 엔비.
당시 엔비의 역할은 이준이 직접 개입하기까지 작전을 지휘하고 현장을 컨트롤하는 컨트롤 타워라고 볼 수 있었다.
다른 멤버가 아닌 엔비를 거기 뒀다는 건 이준이 7명 중 그녀를 가장 신뢰하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렇기에 엔비가 나오는 건 팬텀 중 가장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후훗, 그래? 근데 너라는 그 호칭 좀 그렇지 않아? 누나라고 해달라고 했던 거 같은데.”
“러스트 때문이냐?”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형만의 물음.
너무 많은 것이 잘려 나가 문맥이 이상할 정도였지만, 적어도 엔비는 그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땡~ 러스트는 이번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스를 향한 내 사랑도, 날 향한 보스의 신뢰도 그때와 다름없다고.”
야자수와 야자수 사이.
손수 만든 해먹에 앉아 있던 엔비가 물장구를 쳤다.
저번 만남과 달리 엔비는 존댓말을 쓰고 있지 않았다.
격식을 차릴 자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러는 그쪽들도 내 생각이랑은 다르게 움직인 모양이네. 동료를 어딘지도 모를 세계에 버려 두고 오는 매정함을 보일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말이야.”
용주, 형만, 수지.
세 사람의 상태는 상당히 양호했다.
의료 헌터를 낀 인원이기에 상처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와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셋은 슬로스와 그리드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보스의 판단이 자신보다 훨씬 정확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반대로 생각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정말로 아끼는 사람을 내보낸다는 건 그만큼 그 전장이 중요한 거라고.”
흔들 그네를 타던 엔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서로 다른 곳으로 통하는 두 개의 포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쪽들도 여기까지 왔으면 알고 있지 않아? 여기 이 문이 지금껏 봤던 문들과는 다르다는 걸.”
“그런 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아.”
“후후.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거 없잖아? 우리 서로 꽤 끈적하게 즐겼던 사이인데.”
용주의 도전적인 눈빛에 엔비가 눈웃음을 보였다.
“슬로스도 그리드도 무사통과.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려고? 같은 방법이 나한테도 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내 주지.”
“아하핫. 그 눈빛 역시 좋네. 그런데 괜찮겠어? 셋이 한꺼번에 덤비는 거야 난 상관없긴 한데….”
엔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지.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녀석들이었으니까.
“…….”
용주의 시선이 균열을 훑었다.
차원의 갈라짐과 함께 찢겨 나간 균열은 뭉텅이로 떨어져 소멸했다.
마치, 온난화에 녹아내린 빙하처럼.
지금 것과 비슷한 갈라짐이 균열 주변에만 수십 개.
같은 일이 반복된다 가정하면, 균열이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 한계겠지.
“누군가가 남아 시간을 번다. 무언가를 위해 또 한 사람을 버림패로 삼는다. 뭐,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게 최선이긴 하지.”
해먹에서 내려온 엔비가 메스를 꺼내 들었다.
일전에 용주를 몰아붙였던 바로 그 무기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단정 짓는 거냐?”
용주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포커페이스가 강점인 용주였건만.
조금 전엔 그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버림패.
자신은 한 번도 녀석들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세계를 보라고. 이 무너지는 세계를.”
엔비가 양팔을 쫙 펼쳐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떨어진 하늘은 또 한 번 나락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보스께서 그러더라고. 이런 건 이안과 싸울 때 이후로 처음 본다고. 그런 곳에 남겨진다는 게 버림패지 뭐겠어. 안 그래?”
“그건 너 자신한테 하는 소리 같은데.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악취미라도 있나 보지?”
“…….”
용주의 물음에 엔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미소 짓고 있을 뿐.
“그렇게 하겠다면, 딱히 말리진 않을게. 난 두 개의 골대를 동시에 지킬 수 있는 골키퍼는 아니니까.”
잠깐의 침묵을 깬 엔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 용주의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한 그녀의 이야기였다.
“근데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까먹지 않았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메스가 왼손으로 건너갔다.
“보스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왼쪽? 아니면 오른쪽?”
오른손을 펼친 엔비에게 별자리로 이루어진 시계가 나타났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보스가 있는 곳엔 프라이드가 있어. 다른 쪽엔 글러트니랑 라스가 있고.”
10번의 초침을 움직인 시계는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거짓말에 꽤 능숙한가 보지? 낯빛 하나 안 바꾸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거짓말이라니. 나 같은 요조숙녀는 그런 거 모른다고.”
“2 : 2. 넌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지. 4명에서 하나가 떨어져나왔다면, 남은 건 셋뿐이야.”
“4-1이라. 그거 재밌는 추측이네. 그럼 거짓말로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한번 맞혀 보겠어? 그런 사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알아? 좋은 선물이 있을지.”
“…그거야 간단하지.”
용주의 대답에 엔비가 흥미를 보였다.
백사장에 남은 흔적들을 처음 봤을 때.
있는 두 사람을 특정해 낸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뒤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이 닿은 부분이 있었다.
남아 있는 흔적이 아닌, 남아 있어야 할 흔적에 대한 부분이었다.
당연히 있을 이준을 제외하면, 특정되지 않은 발자국은 프라이드와 라스.
그리고 거긴.
녀석이 있었다면 함께 남아 있었어야 할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균열을 넘지 않은 건 라스다.”
“호오…. 근거는?”
“쇠사슬 자국이 모래사장에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형만에게 들었던 라스는 쇠사슬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사슬이었고, 실제로 끌고 다니기도 했다고 알고 있다.
이준이 사슬을 풀어준 게 아니라면 녀석의 사슬 자국이 같이 남아 있어야 했다.
물론, 이준 녀석이 라스에게 자유를 줬을 가능성은 용주는 0에 수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녀석은 라스를.
아니, 주일이라는 그 헌터의 힘을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그거… 자신만만한 추리의 근거치고 너무 빈약하다곤 생각 안 해?”
엔비가 즐거운 듯 물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시간을 끌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겐 안 될 거다. 시간을 재고 있는 건 너만이 아니니까.”
거기 돌아온 용주의 차분한 응수.
능숙한 손놀림으로 메스를 손가락 사이에 낀 엔비는 그런 용주에게 박수를 보냈다.
“역시 매력적인 남자네. 인정할게. 윤현이 같은 남자한테 그렇게 푹 빠져서 집착했던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아.”
“…….”
“근거가 부족해 보여도 그 근거가 남아 있는 전부라면, 그걸 붙잡고 늘어지는 게 정답이지. 여심을 공략하는 거랑 마찬가지로.”
엔비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별자리가 그린 건 양손에 사슬을 늘어뜨린 노인.
라스였다.
“문제를 맞혔으니, 이제 상을 받을 차례겠지? 뭐가 좋을까? 누나와의 뜨거운 포옹? 키스? 그것도 아니면….”
“타임 오버다.”
“후훗. 매정하기도 해라. 기껏 생각한 선물이었는데.”
손가락 사이에 끼워 뒀던 메스를 꺼낸 엔비가 능숙하게 칼을 놀렸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제일 재미없는 선물을 줘야겠네.”
메스를 따라 찢어지는 대지.
제자리에 서서 몇 번 휘적거린 것만으로 나타난 건 평화의 시계탑과 6.25전쟁탑이었다.
“라스는 처음부터 여기 안 들어왔어. 지금쯤 라스는 아마….”
마지막을 여운에 부친 엔비가 만들었던 두 조형을 으스러뜨렸다.
보스가 라스에게 지시했던 명령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잔인한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