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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300화 (300/357)

300화

* * *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나 보네.”

뒤를 돌아본 수지가 이야기했다.

태영의 결정과 판단은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건 아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녀석이라면 괜찮을 거다. 누구 발목 붙잡을 녀석은 아니니.”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거기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게 운만은 아니었잖아.”

고개를 끄덕인 수지가 용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상처투성이의 헌터. 그런 점은 너랑 좀 비슷할지도. 형만 아저씨랑도.”

“…움직이자.”

걸음을 재촉한 용주는 빛이 머무는 동굴을 나아갔다.

참방거릴 정도로 물이 들어찬 동굴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뒤틀림이 무너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 상태로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가 있는가?

물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여기선 현실이 되어 있었다.

뒤틀린 동굴 천장 위론 까만 하늘이 보이는 곳도 있었다.

“여기도 와 본 거냐, 애송이?”

사람 하나 간신히 들어갈 틈을 통과한 형만이 물었다.

“글쎄. 아직까진 잘 모르겠는데.”

딱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아직 이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용주였다.

지금까지의 흐름이라면, 분명 지나왔던 퀘스트 게이트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내가 아직까지 지나치지 않은 곳이라면….’

리자드맨들을 만났던 붉은 사막.

와인 기사와 드워프 삼 형제가 있는 잊힌 영웅들의 성.

오우거 노부부가 있는 섬마음 등대.

시련이나 히든 게이트를 제외하면 그 정도였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호수.

주변을 살핀 용주였지만, 갈 수 있는 다른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막혔네. 그때처럼.”

“그때?”

“응. 동굴이 썰물이 들어왔었을 때.”

수지의 이야기에 용주는 섬마음 등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호수 아래 길이 있는지 살펴보고 오지.”

“비켜라. 애송이.”

형만의 목소리와 동시에 거대한 화염이 용주를 덮쳤다.

아슬아슬하게 화염을 빗겨 낸 용주.

형만이 일으킨 화염은 그대로 호수를 강타했다.

일대를 하얗게 물들여 놓은 엄청난 양의 수증기에선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너무 단순 무식한 거 아니냐?”

용주가 물었다.

물이 가득 들어찼던 호수는 바닥이 보일 만큼 수면이 낮아져 있었다.

“길을 찾았으면 그걸로 된 거다. 시간까지 절약했으니 일석이조지.”

형만이 호수 아래로 뛰어내렸다.

호수 바닥과 가까운 곳엔 자연이 만든 거대한 터널이 있었다.

발목 정도로 오는 물은 물길을 따라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빗물이나 지하수가 아니라, 바닷물이 만든 호수였나 보군. 그게 아니라면 여기 호수는 소금물로 되어 있든가.”

호수의 벽면을 본 형만이 중얼거렸다.

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소금이었다.

밀려가는 바닷물.

그 인도를 따라가던 용주는 동그란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중심부엔 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 주변은 길이 드러나 있었다.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은 호수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눈에 익는데.’

아는 장소라는 확신이 서지 않은 건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호수 중심부에 우뚝 서 있던 크레아탄의 석상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거긴 이런 통로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비슷한 다른 장소인가? 아니면….’

어느 쪽이든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건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

출구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

동굴 밖으로 나온 수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부서진 것처럼 조각조각 나 있었다.

푸른색과 푸른색 사이에 그어진 검고 붉은 선들은 점점 그 넓이를 더해 가는 듯 보였다.

“다른 곳들보다 더 심한 것 같아.”

깨진 곳은 하늘만이 아니었다.

땅도 바다도 온통 망가지고 훼손되어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건 온통 어둠뿐이었다.

바닷물에 떠밀려 온 죽은 물고기들은 해안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 것 같군.”

수지의 말처럼 여긴 다른 곳들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두 차원이 겹쳐졌던 그곳보다도 말이다.

이 세계는 부서지고 있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여기가 어딘지 대충 알 것 같으니.”

많은 것이 변하긴 했지만, 남아 있는 자연적 특징과 풍경들이 이곳이 어딘지 알려 주고 있었다.

일단은 등대로 가야 했다.

거기서라면 아주 조그마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

* * *

나무를 타고 오른 수지가 건너편으로 뛰어내렸다.

특이하게 생긴 식물들.

가령 햇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식물 같은 게 여기가 어딘지 알려 주고 있었다.

“전이랑 많이 달라졌네.”

수지가 말한 건 단순히 부서진 세계만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저 앞에 보이는 등대.

절벽을 끼고 있는 등대 역시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등대 주변이 변했다고 하는 게 맞겠지.

등대 주변으론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다.

급하게 돌을 쌓아 만든 허접해 보이는 성벽이.

“등대 쪽이랑은 건축 양식이 전혀 다르군.”

“아마 만든 녀석들이 달라서 그럴 거다.”

걸음을 옮긴 용주가 성문 앞에 섰다.

보초의 부름에 올라온 건 랫맨.

그것도 꼬리가 없는 녀석이었다.

예상대로 이걸 만든 건 랫맨들인 모양이다.

녀석들이 왜 여기 있는지.

왜 거주지와 거주 양식을 버리고 땅에 올라와, 익숙하지도 않은 요새를 만들었는지.

그건 아마 인커젼과 무관하지 않겠지.

“너… 너는…!”

용주와 마주한 랫맨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너희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자… 잠깐! 그런 거 아니다! 오우거 손가락 하나 안 댔다!”

용주의 눈빛에 지레 겁을 먹은 랫맨이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손짓에 얼린 문 안쪽으론 더 많은 랫맨들이 보였다.

소수긴 해도 바위 골렘들도 자리하고 있었고 말이다.

요새 안쪽은 여기저기 굴이 파여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랫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중엔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도 보였다.

“괴물이 나타났다. 우리. 열심히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망쳐 도착한 곳이 여기다. 등대 주변으론 그나마 괴물들 적게 나온다.”

그가 가리킨 곳엔 언노운의 유해가 있었다.

부위별로 잘린 언노운은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토템이 되어 있었다.

‘두목이라고 불리던 녀석이 없어도, 저항 정도는 한 모양이군.’

저항이라고 해봐야 말벌 앞의 꿀벌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긴 했다.

언노운의 사체에 비해 부상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사망한 녀석들까지 세면 이보다 훨씬 많아지겠지.

“노엘을 만나고 싶은데, 안에 있겠지?”

“들어가서 위로 가 봐라. 어딘가에 있을 거다.”

“가자.”

수지의 손을 잡아끈 용주가 등대로 향했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은 녀석들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관계도 아니었으니, 아쉽거나 미안해할 것도 없겠지.

수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

형만의 시선이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거대한 체구에 외뿔.

흡사 도깨비가 생각나는 녀석들은 조금 전 보았던 쥐 인간들과는 결을 달리했다.

게다가 같은 결로 보이는 두 녀석도 조금 달랐다.

한쪽에 비해 다른 한쪽은 유독 푸르고, 반투명했다.

“에… 이상한 거라면 기억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이렇게 세계가 조각조각 나기 전이었죠.”

용주의 물음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최근에 봐서 그런지.

아니면 연륜이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노엘의 반응은 테레사나, 린에 비해 차분했다.

“그게 뭐지?”

“바다가 갈라지는 걸 봤어요. 사람의 걸음걸이에 맞춘 것처럼요.”

“어느 쪽이었냐? 어디까지 이어졌지?”

“저 섬이에요.”

엘이 가리킨 곳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한 섬이었다.

섬을 확인한 용주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 맞다면.

저긴 수지와 처음 도착했었던 바로 그 섬이었다.

“섬까지 가실 생각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등대의 빛을 조절한 노가 바다를 비췄다.

빛을 따라 솟구친 건 다름 아닌 언노운이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크기도, 종류도 다양한 언노운들이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뭍에 있는 괴물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바다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랫맨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여긴 이 섬에서 바다로부터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바다를 등지고 있긴 했지만, 섬 중앙보다 언노운의 출현 빈도가 낮았다.

등대 뒤쪽 절벽으론 언노운들이 다가오지 않았고 말이다.

어쩌면, 크레아탄 소환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이상이 생기고 얼마 안 있어 바다가 검게 변하며,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수평선이 정말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죠.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항해하던 배가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죠.”

아랫입술을 깨문 노가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배는 오우거들의 것이었습니다. 본 섬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직감할 수 있었죠. 저흰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

노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일부는 괴물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또 일부는 바다에 생긴 균열 아래로 떨어졌죠. 무사히 섬에 도착한 배는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균열이 있다고 바닷물이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해하는 배는 예외였다.

균열로 나간 배들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듯 그렇게 사라졌다.

바다에 생긴 균열이 단순한 지층의 갈라짐이 아니란 걸 어리석게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충고 고맙다.”

바다를 바라본 용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꼭 가셔야겠다면, 배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아니. 필요 없다. 바다를 건널 방법이라면 생각해 뒀으니까.”

생각을 마친 용주는 등대를 나섰다.

배를 통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항로는.

없었다.

* * *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용주의 뒤를 따르던 형만이 물었다.

“물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불만이 아니야. 이것도 한 방법이지.”

용주가 룬검을 보였다.

“바다의 표면을 얼린다 해도 언노운들의 습격은 피할 수 없을 거다. 물속에서 자유로운 건 너 하나뿐이야.”

게다가 얼음과 불의 상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형만의 힘은 룬검과는 상극이었다.

“확실히 그렇겠지. 전에도 한 번 비슷한 상황이 있었으니까.”

크레아탄과의 전투에서 바다를 얼린 적이 있었었다.

당시의 녀석은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였었다.

룬검의 효과가 강화되었다 한들 전부를 얼릴 순 없을 거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생각이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니까.”

룬문자를 밝힌 용주가 바다로 다가갔다.

용주가 멈춘 곳은 검은 바다 앞.

정확히는 차원 깨지며 생긴 틈새 앞이었다.

이 선을 기준으로 바다는 양분되어 있었다.

“그런 것도 되는 거야?”

용주의 생각을 읽은 수지가 물었다.

얼음길을 여는 건 본 적이 있었지만, 이건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이 길이라면 놈들도 손 쓸 방도가 없을 테니까.”

날아오른 보좌관이 균열 위를 날기 시작했다.

용의 날개 아래 피어나는 얼음의 길.

방향을 튼 보좌관은 균열을 따라 나아갔다.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한 얼음의 다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 위에 놓여 있었다.

“…….”

가장 먼저 얼음길에 올라선 용주는 기다리란 손짓을 보냈다.

조심스레 나아가는 용주.

푸왁~!!

거센 물결을 일으키며 뛰어오른 언노운이 용주를 노렸지만,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건 만찬이 아니었다.

바다를 벗어난 녀석은 나락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

“길로 삼을 수 없는 곳이기에 더더욱 안전한 길이다라. 정상적인 머리라면 할 수 없는 기행이군.”

기가 차단 듯 콧방귀를 뀐 형만이 얼음 다리 위에 올라섰다.

말이 좋아 다리지.

이건 그냥 지옥 위에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찬사네.”

“…….”

수지와 눈이 마주친 형만이 무심하게 나아갔다.

부서진 하늘이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수평선은 아까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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