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잘도 날 물 먹였겠다.”
흩뿌려지는 붉은 피.
왼발로 땅을 디딘 서윤이 과격하게 그리드를 몰아붙였다.
“…….”
갑작스러운 기습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그리드의 얼굴엔 고통에 묻어나왔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 어깨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
베였다기보단 뜯겨 나갔다는 게 더 어울리는 상처는 그리드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거기서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날 물로 보지 말라고.”
낡은 나무 지지대에 부딪힌 그리드.
고쳐 잡은 데스사이드를 갈고리 끝에 건 그리드는 묘기를 부리듯 몸을 회전시켰다.
순식간에 뒤집힌 공격 주도권.
서윤의 뒤를 잡은 그리드는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
그리드가 이용한 갈고리가 갑작스럽게 쑥 뽑혀 나왔다.
‘방해를….’
태영을 노려본 그리드가 데스 사이드를 끌어당겼다.
그리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핏빛 비.
서윤의 참격에 뿜어져 나온 핏빛 파도는 맹진해 오고 있었다.
‘가드와 동시에 뚫고 나가는 거야. 위기야말로 진정한 기회지.’
공격 패턴은 단순.
저 정도면 충분히 막고도 남을 거라고 그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데스 사이드를 코앞에 둔 물결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찢어졌다.
사냥에 나선 문어처럼 뻗어 나가는 피.
그리드의 머리와 어깨를 감싼 곡선의 종착역은….
그리드의 전신에 남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
거침없이 이어지는 블러디 퓨리.
두 사람이 부딪치는 순간마다 울리는 힘은 파장이 되어 주변을 흔들었다.
지금까지처럼 공격을 막아 내는 척 연기한 그리드는 기다렸단 듯 서윤의 뒷덜미를 잡았다.
또 한 번 마주하게 된 승부의 분기점.
용주의 코트에서 한쪽 손을 뺀 서윤은 그대로 공격으로 전환했다.
촤악!
그리드의 가슴 깊이 들어가는 서윤의 칼날.
흉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그리드는 서윤의 마지막 일격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칫! 찢어졌잖아. 빌린 건데.”
시원한 한 방을 선사해 준 서윤이 코트를 다시 걸쳤다.
쭉 찢어진 코트 아래론 서윤의 옷이 그대로 보였다.
“공격 이어받도록 하죠.”
반동에 튕긴 그리드의 몸이 보이지 않는 실에 걸렸다.
와이어 장치에 손을 올린 태영은 와이어에 이어진 실을 튕겼다.
그 순간, 찢어지는 그리드의 피부.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피는 손가락을 타고 떨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은 지금 작두 위에 올라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리드는 그물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것도 칼날로 된 그물.
전면전으로 그리드를 이길 순 없지만, 이렇게 들어온 물고기를 상대하는 건 자신 있는 태영이었다.
“푸흐흐…!”
옅은 미소를 머금는 그리드.
“뭐가 그리 우습죠?”
그와 대비되는 차가움으로 마주한 태영은 다른 실들을 더 튕겼다.
“한마디로 카오스.”
온몸이 찢겨 나가는 와중에도 기어이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태영의 실을 모조리 끊어 냈다.
변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위협.
가까워진 죽음이 전해 오는 희열.
그 모든 게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가까워졌군. 그때만큼이나.”
가슴의 상처를 쓸어내린 그리드가 심장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까진 하지 않으려 했건만. 흐흐. 하는 수 없지.”
데스 사이드를 거꾸로 쥔 그리드가 허공을 베어 냈다.
찢긴 차원에서 기어 나온 영혼의 물결은 하늘 위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아간 톱 해트는 물결 사이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말하지. 장의사가 불길하다고.”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녀석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서윤이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생각처럼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할 순 없었다.
모래 지옥에 빠진 듯 걸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이상을 감지한 서윤이 태영과 부딪쳤다.
꽤 거리를 두고 있던 태영도 이쪽으로 빨려 들어온 것이다.
“뭔가가 계속 잡아당기고 있어요. 발버둥 칠수록 더 강하게요.”
“그럼 그 실이라도 펼쳐 봐. 바닥에 뭔가 수를 쓴 거면 그거 밟고 나가자고.”
“무리예요. 실도 전부 이쪽으로 말려 들어온다고요. 상황이 더 악화되기만 할 거예요.”
“칫…!”
검을 지면에 박아 넣은 서윤이 서클을 펼쳤다.
“그럼 멀리서 날려 버리는 수밖에.”
블러디 루인은 서윤이 가진 스킬 중에서도 가장 많은 마나를 잡아먹는 스킬이었다.
쏠 수 있는 건 이제 한 발이 최대.
그 이상은 전투 지속력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다.
“보통의 장의사는 예지된 죽음을 맞이하지. 하지만 그 중엔 특별한 장의사도 있기 마련이야. 흐흐. 죽음의 시간을 정하는 특별한 장의사가.”
승천한 영혼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지자, 거미줄을 타고 하얀 손들이 내려왔다.
살려 달란 듯.
혹은 같이 가자는 듯 그리드를 붙잡든 손들.
새하얗던 손들은 피에 물들어가듯 붉게 변해 갔다.
“다운폴 아라크니아.”
이윽고 찢어지는 거미줄의 중심.
차원을 찢고 나온 건 다름 아닌 거대한 손뼈.
인간과 유사한 골격을 하고 있었지만, 그 크기는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해골의 손엔 의식용으로 보이는 도축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이게 저쪽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인 모양인데요?”
“그런 것 같네.”
“저쪽은 제가 막아 볼게요. 서윤 씨는 녀석을 날려 버리는 일에만 집중해 주세요.”
“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네 입으로 한 말 잊었어? 저게 녀석의 마지막 카드라고.”
그리드와 태영의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공격이 적중되면 우리 둘 다 무사하진 못할 거 알아요.”
태영이 다시 한번 와이어 장치를 작동시켰다.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는 실.
그리드와 이어진 붉은 손에서부터 빨려 나온 붉은 물결은 그대로 태영에게로 이어졌다.
마치, 미세혈관이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비주얼이었다.
“너… 대체 뭘 한 거야?”
“바람이 멎으면서 어느 정도 실을 뿌릴 수 있게 됐어요. 이건 끊어졌던 실들의 일부를 다시 연결한 거고요. 물론, 지금까지 쓰던 것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지만요.”
“뭐?”
“끌어당긴 실 중 일부를 저기 손들과 이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이렇게 해볼 생각이고요.”
와이어 장치가 이어진 태영의 왼팔이 극렬하게 요동쳤다.
찢겨 나간 피부에선 피가 고름처럼 터져 나왔다.
“너 팔이!”
“녀석의 마나를 인터셉트한 부작용이에요. 괜찮아요. 파악했고, 분석했고, 적응했어요. 이 정도면 컨트롤할 수 있어요.”
그리드의 마나를 흡수한 태영이 층층이 실을 엮었다.
천장을 가득 수놓은 붉은 실들은 점점 더 그 크기와 두께를 더해 가고 있었다.
“마벌러스 웹(Marvelous web).”
힘을 집중시킬수록 터져 나가는 상처가 점점 더 늘어났다.
부작용이 상당하긴 했지만, 징징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용주.
좀비 헌터가 발악하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믿어 주세요.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아 내 보일 테니까.”
“…그러니까 말했잖아. 네가 죽으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냐고?”
어깨를 들썩인 서윤이 서클을 조정했다.
입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태영을 믿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네. 그랬었죠. 그럼 정정할게요. 믿음에 반드시 보답해 보이겠다고.”
“그래야지.”
조율을 마친 첫 번째 서클.
내려찍는 의식용 나이프에 태영의 첫 번째 방어선이 찢어진 건 그와 동시였다.
‘끝을 보자고.’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한 서윤은 이내 두 번째 서클을 정렬했다.
머리 위에 쌓이는 서클에도 그리드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저걸 사용하는 동안엔 녀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렬되는 세 번째 서클과 찢겨 나가는 마벌러스 웹.
남은 방어선은 이제 고작해야 3개뿐이었다.
“흐흐흐.”
상황을 지켜보던 그리드는 음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블러디 루인!!”
그 순간, 일그러지는 차원.
서윤이 일으킨 폭발에 모든 것이 붉게 물들었다.
* * *
“하아~ 조금 오버해 버린 건가?”
흥건하게 고인 베히모스의 피.
참방거리는 피의 호수 위에서 숨을 몰아쉰 서윤이 왼쪽 무릎을 꿇었다.
녀석의 미소에 발끈해서 마나란 마나는 다 때려 박아 버렸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잘된 것 같은데요?”
망가진 와이어기를 끊어 낸 태영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아 있는 웹은 딱 한 장.
그것도 반쯤 찢겨 나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이 승부, 우리가 이겼어요.”
다운폴 아라크니아.
그리드의 최강의 일격은 균열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드를 붙잡던 붉은 손들은 다시 하얗게 물들어 갔고, 차차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그런 것 같네.”
주저앉은 그리드에게 다가간 서윤이 데스 사이드를 걷어찼다.
그에겐 무기를 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 끝났어. 네가 졌다고.”
칼끝을 겨눈 서윤이 그리드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드의 얼굴은….
생기를 빨린 듯 회색빛이 돌았고, 흉측할 정도로 삐쩍 말라 있었다.
‘뭐야….’
“흐흐흐. 놀란 모양이지?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아주 추한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서윤의 눈빛에 그리드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다운폴 아라크니아. 그건 내 생명을 대가로 하는 기술. 겉모습은 시간이 지나며 회복되지만, 갉아 먹힌 생명은 절대 돌아오지 않아. 물론…, 쿨럭, 이 몸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지만.”
각혈을 한 그리드가 서윤의 검에 손을 올렸다.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발길질.
얼굴을 걷어차인 그리드는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흐흐. 칼이 아니라 다리인가?”
돌아간 턱을 바로 맞춘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수작 같은 건 없어. 단지 날 끝장낼 물건을 좀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을 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시간이라고나 할까.”
“고난의 시간은 개뿔. 닥치고 있어.”
“나의 호기심과 탐구심은 생을 원하고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일 거 같군. 흐흐. 준비라면 이미 끝냈어. 어서 복수를 이루라고.”
“닥치라고 했을 텐데?”
서윤이 다시 한번 그리드를 후려갈겼다.
이번에도 역시 검은 사용하지 않았다.
“죽이지 않는 건가?”
“너랑 똑같이 보지 마. 너 같은 살인자 놈이랑.”
“흐흐. 이것도 예측 못 한 변수군. 한마디로….”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리드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크… 흐흣”
탁하게 물들어 가는 그리드의 눈동자.
날카롭게 날아든 갈고리들은 그리드의 몸 여기저기를 꿰뚫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복수를 이뤄야죠.”
불어가는 날카로운 바람.
순식간에 서윤을 지나친 태영의 검이 그리드의 심장을 꿰뚫었다.
“야! 너…!”
“다가오지 마세요. 손에 피를 묻히는 건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
“제가 생각한 마무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이건 제가 짊어져야 할 죄악이자 구원이에요.”
태영이 칼날을 비틀자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태영의 안경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붉게 칠해졌다.
“흐흐. 멋지군. 이것이 죽음의 희열. 이게 내가 보는 삶의 마지막 장면. 한마디로… 코미디.”
뒤로 넘어가는 그리드의 눈동자.
무너져 내린 그리드의 몸은 빠른 속도로 입자로 분해되었다.
“뭐야, 이거? 설마 가짜인 거야?”
당황한 서윤이 주변을 살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어떻게 봐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지 않은가?
“아뇨. 틀림없이 이건 녀석이에요. 그리드는 여기서 죽었습니다.”
떨어지는 태영의 검.
안경을 벗은 태영이 안경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품에 가지고 있던 강철 포켓을 꺼낸 태영은 수북이 쌓인 모래 위에 케이스를 던졌다.
평소 태영이 가지고 다니던 것과는 디자인이 다른 하얀 케이스였다.
‘이걸로 조금이나마 안식을 취하시길.’
고개를 숙인 태영이 깊은 묵념을 보냈다.
케이스 안에 든 건, 약도, 주사도 아닌 희생자 리스트였다.
이 안에 든 이름들이 전부라고는 확실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백지의 리스트를 함께 넣어 두었다.
이걸로.
아주 조금이지만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그게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자기 위안일 뿐이라고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