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2 : 1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
바닥에 칼날을 바짝 붙인 그리드가 검을 올려 그었다.
“데스 클로!”
뻗어 나가는 여섯 갈래의 검기.
양쪽으로 갈라진 서윤과 태영은 공격을 여유롭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
그런 두 사람의 얼굴에 붉은 피가 튀었다.
동시에 뒤를 돌아보는 두 사람.
그리드의 공격에 찢긴 베히모스의 살점에선 엄청난 양의 혈액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고통에 발버둥 치는 베히모스.
살과 건축물 사이에 뻗어 놓았던 태영의 실 역시도 그에 따라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흐흐흐.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너 이 녀석한테 호기심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거면 좀 더 소중하게 대해 주지 그래?”
“흐흐, 소중하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자세히 보려면,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깊은 교감을 하려면, 그 속을 들여다봐야 하는 법이지.”
“뭐라는 거야?”
서윤이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이거 완전 구제 불가능한 변태이지 않은가?
“피한다고 처사가 아니겠는걸요? 아무리 거대해도 이런 대미지를 누적해서 입으면 치명적일 거예요.”
“그 정돈 나도 알아!”
실 가닥 위에서 뛰어내린 서윤이 다시 한번 거리를 좁혔다.
맞부딪치는 힘과 힘.
오른쪽 사선으로 내리찍는 그리드의 일격을 흘려보낸 서윤은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왼손으로 사이드의 손잡이를 쳐든 그리드는 정확히 그녀의 공격을 가드해 냈다.
“폴링 소울.”
데스 사이드로 모여드는 아지랑이.
한순간 휘두른 그리드의 참격에 서윤이 뒤로 크게 날아갔다.
“툼스톤.”
데스 사이드를 들어 올린 그리드가 허공을 베어 냈다.
갈라진 차원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석들.
비처럼 쏟아지는 비석들에 베히모스의 피가 샘처럼 솟구쳤다.
“너 이 자식…!”
떨어지는 비석 사이를 질주해 온 그리드는 다시 한번 서윤을 몰아붙였다.
올려치는 데스 사이드와 그를 막아서는 사복검.
조금 전 펼쳐진 공방의 재연처럼 보였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서윤의 검을 감싼 여덟 개의 실 가닥….
여덟 방향으로 고정된 실 가닥은 그리드의 힘을 사방으로 분산시키고 있었다.
“옵티컬 케이지(optical cage).”
조용히 그리드의 뒤를 잡은 태영이 펼쳐 놓았던 실타래를 끌어들였다.
그리드를 가두는 새장.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실 가닥이었지만, 하나하나는 잘 손질된 검처럼 예리했다.
“흐흐. 이거 참….”
툼스톤의 방향을 조금 튼 그리드.
쏟아지는 비석들은 태영의 새장을 엉망으로 짓이겨 놓았다.
‘그걸 한순간에…!’
“이미 한번 깨졌던 기술은 흥미롭지 않아.”
태영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 낸 그리드는 그의 멱살을 휘어 감았다.
“한마디로 낫 인터레스팅(not interesting).”
태영을 비석에 처박은 그리드는 그를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태영과 부딪친 서윤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끄럽네요.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그런 소리는 이긴 다음에나 해.”
서윤이 입가를 닦아 냈다.
태영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는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흐흐. 그럼 좀 더 본격적으로 놀아 보자고. 체런!”
전투마에 올라탄 그리드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왔다.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요. 그 목,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얇은 실 가닥을 수없이 겹친 태영은 그리드의 이동 경로에 덫을 놓았다.
녀석을 베어 내는 건 녀석의 속도.
이건 달리는 오토바이를 겨냥한 무차별 살인에 사용된 적 있는 끔찍한 덫의 업그레이드판이었다.
“우습게 보인 건 나인 것 같은데.”
달리는 말 위에서 두 발로 선 그리드가 가볍게 덫을 뛰어넘었다.
“누가 할 소리!”
그 순간, 그리드를 덮치는 피의 물결.
그리드의 속도를 전투마와 다르게 만든 서윤은 곧장 그를 몰아붙였다.
그리드와 서윤.
전투마와 태영.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전투는 순간 두 개의 전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쪽에도 갚아 줘야 할 빚이 있었죠.”
전투마의 발밑으로 파고든 태영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큰 대미지를 입힐 순 없었다.
치명상으로 이어져야 할 완벽한 공격에도 태영의 검은 전투마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전투마의 옆구리를 잡은 태영은 전투마에 올라탔다.
여기가 이 전투에서 가장 유리한 포지션이라는 덴 아마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포지션을 유지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거세게 날뛰는 전투마에서 낙마한 태영.
뒷발 차기로 태영을 날려 버린 전투마는 그를 향해 돌진했다.
교차하는 두 사람 사이로 이어지는 사슬.
태영의 무게중심을 완전히 무너뜨린 전투마는 혈옥을 질주했다.
“…….”
질질 끌려가는 태영.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눈이 하나 있었다.
그리드는 아니었다.
서윤도 아니었고.
태영을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태영.
자신을 보는 태영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더 빨리, 더 격하게.’
지금 상황이 일어난 건 초침을 조금 앞으로 돌려야 했다.
태영이 또 하나의 태영을 만들어 낸 건 낙마한 그때였다.
날아드는 뒷굽을 눈앞에 둔 태영은 실타래를 엮어 냈다.
레플리칸트.
미세한 실을 엮고 엮어 레플리카를 만드는 스킬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간에 바꿔 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가 상대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쉽게 속이지는 못했겠지.
‘조금만 더.’
질주하는 전투마를 지켜보던 태영이 와이어 장치에 손을 올렸다.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떼는 태영.
충분에 충분까지 기다린 태영은 일순간 와이어를 회전시켰다.
순식간에 풀어지는 레플리칸트.
수천, 수만 가닥으로 갈라진 실 가닥은 전투마를 휘어 감았다.
“히이이잉!”
맹진하던 전투마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멈추는 것까지는 성공하긴 했는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태영이 전투마 앞에 섰다.
전투마의 움직임을 멈춘 건 온몸에 뒤집어쓴 얇은 실.
레플리칸트가 풀어진 게 결정타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녀석이 달릴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달라붙었던 실은 지금 그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이것만으로 죽일 순 없는 건가?’
위력이 충분했다면, 녀석이 찢겨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 녀석을 제거하기에는 위력이 부족했다.
‘녀석에게도 약한 부위가 있을 거야. 거길 집중적으로 노리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태영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혈옥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놓여 있는 갈고리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언노운에게도 치명적이었지.’
갈고리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물고 있는 것만으로 언노운의 생명을 빼앗아 간 물건임은 틀림없다.
단순한 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까 테레사라는 이름을 가진 뱀파이어는 언노운의 사체를 움직였었다.
그녀의 힘은 자신과 유사점이 있었다.
여기선 그걸 흉내 낼 순 없었지만, 원리 자체는 흉내 낼 수 있었다.
적을 찢는 게 반드시 자신의 무기일 필요는 없었다.
‘만약 저걸 이용할 수 있다면….’
실 가닥을 뻗은 태영이 갈고리 하나를 붙들었다.
‘괜찮아 옆면을 물었을 땐 그렇게 특별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었어.’
힘을 집중시킨 태영이 실을 끌어당겼다.
부러지듯 뽑혀 나오는 갈고리.
팽팽하던 균형이 깨지자 그 힘은 속도로 치환되었다.
태영의 손에 이끌린 갈고리는 그대로 전투마의 어깨를 꿰뚫었다.
‘좋아. 할 수 있어.’
여덟 개의 갈고리를 동시에 붙잡은 태영이 다시 한번 갈고리를 잡아당겼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갈고리들.
힘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정한 태영은 다시 한번 전투마 아래로 미끄러졌다.
무릎을 꿇고 쓰러진 전투마는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녀석 상태가 왜 이래? 최대한 안 다치게 하고 있잖아! 가만히 좀 있으라고!’
서윤이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천장과 바닥이 뒤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고래가 몸을 뒤집은 모양이다.
하지만 서윤의 불만이 들릴 리가 없었다.
또 한 번 뒤집히는 위아래에 서윤의 중심이 크게 휘청였다.
“흐흐. 체크메이트.”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그리드의 스킬.
음산하게 내리깔린 보랏빛 물결 속에서 거대한 아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 녀석은?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아주 자기 같은 것만 데리고 다니잖아?”
추락하는 서윤의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놈의 이빨이었다.
서윤은 지금 놈의 배 속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입 냄새나니까. 그 입 좀 닥쳐 줄래? 블러디 퓨리!”
순간 가속도를 올린 서윤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잘려 나간 아귀의 가시는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뭐가 좋아? 회? 수육? 아니면 뼈만 발라내서 매운탕으로 끓여 줄까?”
아귀의 몸을 도륙하는 15번의 참격.
위아래가 분리된 아귀의 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때보다 훨씬 깔끔하게 다듬어졌군. 한마디로….”
“그건 나도 아니까 닥쳐! 네가 정의할 내가 아니니까!”
16번째 검을 흡수한 서윤은 완성된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충돌에 일어난 피의 폭발은 일대를 붉게 물들여 놓았다.
베히모스의 피로 엉망이 된 혈옥.
“그거 알아? 서로 피떡이 되면 유리한 건 나란 거!”
폭발을 거슬러 오른 서윤이 그리드를 몰아붙였다.
계속된 교전으로 두 사람 다 잔상처가 꽤 많이 누적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웃는 이는 서윤이었다.
“흐흐. 충고엔 충고를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충고하는데 발밑은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
순간적으로 발목을 잡아당기는 중력.
‘뭐야 또?!’
바닥이 사라진 듯 빨려든 서윤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보이는 건 깜깜한 어둠.
여긴 물속이었다.
‘설마 아까 그 아귀 녀석이 튀어나왔던 거기야? 녀석을 처리하면 당연히 사라지는 거 아니었어?’
하고 싶은 말이라면 산더미 같았지만, 그러고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
그 안에 어떻게 해서든 여길 빠져나가야만 했다.
‘위에서 떨어졌으니, 위로 나가면 될 거야.’
뭐가 잘 안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떨어진 깊이를 생각하면 얼마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아무리 헤엄쳐도 해수면이 닿지 않았다.
‘젠장…!’
이런 식으론 해결할 수 없을 거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간구해야만 했다.
최대한 빨리.
‘무슨 방법이….’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점점 한계에 다다라가는 숨.
1분 1초가 긴박한 상황 속에 판단력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생각해. 생각…!’
생각하란 생각조차도 1초가 다르게 희미해져 갔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숨.숨.숨.
본능 앞에 다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그글…!
공기 방울을 토해 낸 서윤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젠장, 숨이…!’
시야가.
의식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이런 원초적이고, 허접한 수에….
“…….”
좌절감에 잠겨 가던 서윤의 눈에 자신의 옷이 보였다.
물살에 하늘거리고 있는 코트는 용주가 준 것이었다.
‘아니야.’
순간 서윤의 눈동자에 힘이 돌아왔다.
‘여기서 지면 녀석을 무슨 낯짝으로 보겠어? 나한테 맡기라고 내 입으로 그랬잖아!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검을 꽉 움켜쥔 서윤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 녀석이라면 무슨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뭐라도 더 해보려고 발버둥 쳤겠지.’
서윤이 겨눈 곳은 자신의 머리 위.
서윤이 마법진을 조율해 나갈 때마다 생겨난 서클이 하나씩 쌓이고 있었다.
‘날려 버려 주겠어. 전부 다!’
조율을 마친 서윤이 손가락 총을 만들었다.
그리고.
“블러디 루인!”
공기 방울을 뿜어내며 할 수 있는 마지막 발버둥을 폭발시켰다.
“흐흐. 무리야. 한마디로 디 엔드.”
데스 사이드에 반으로 잘려 나가는 태영.
수만 가닥의 실을 한 번 더 잘라 낸 그리드는 데스 사이드의 손잡이를 뒤로 내질렀다.
“커헉!”
찔리 듯 명치를 가격당한 태영의 입에서 분비물이 새어 나왔다.
360도로 사이드를 회전시킨 그리드는 태영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체런한테 신기한 걸 선물해 줬지? 이 갈고리였던가?”
쓰러진 태영의 멱살을 움켜쥔 그리드가 그를 들어 올렸다.
“흐흐흐. 흥미로워. 그럼 이게 인간에겐 어떻게 작동할까? 분해? 흡수? 그것도 아니면 절단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리드.
갈고리 앞에 선 그리드는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내 실험을 도와줬었으니, 이번에도 그러겠지.”
태영이 날린 회심의 갈고리를 피한 그리드가 태영을 갈고리로 가져갔다.
그 순간.
쿠구구궁!!!
거대한 진동이 차원을 뒤흔들었다.
보라색 바다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친 서윤은 그리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