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저 녀석….”
서윤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녀석의 옷가지엔 저번 전투의 흔적이 간헐적으로 남아 있었다.
“팬텀은 다 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이상하다. 분명 그랬는데?”
태영의 물음에 사견궁이 말을 더듬었다.
자신이 봤던 풍경 속에선 분명 녀석들이 다 다른 세계로 넘어갔었다.
“흐흐흐. 불완전한 눈을 속이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한마디로 디셉션(Deception).”
데스 사이드를 어깨에 걸친 그리드가 여유를 보였다.
“린.”
그리드의 존재를 확인한 용주가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13번째와 함께 위로 돌아가라.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네? 그렇지만….”
“네 도움이나 전투력을 말하려는 게 아니야. 이건 우리 싸움이다. 우리가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이야.”
“…….”
설녀의 시선이 그리드를 향했다.
“알았어요. 대신….”
“걱정하지 마라. 우린 이기려고 여기 있는 거니까.”
“네. 알고 있어요. 저를, 제 친구들을, 베히모스를 구해 주신 건 용주 씨잖아요. 이번에도 잘해 내실 거라고 믿어요.”
용주에게 조금 더 다가온 설녀가 까치발을 들었다.
“지금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고요.”
손을 올린 설녀가 용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로가 역전된 풍경의 데칼코마니.
용주의 머리를 쓰다듬은 설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에 용주 씨를 다시 만나거든, 꼭 한번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거예요. 용주 씨가 그렇게 해주셨을 때 엄청 안심됐었거든요.”
아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러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따뜻했던 그 손길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손길에 그 정도 힘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길 바라는 염원만큼은 전해졌으면 좋겠다.
“가자!”
사견궁의 손을 붙잡은 설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녀석을 남겨 뒀단 건 시간이 더 필요하단 소리겠지? 우리가 여기까지 따라붙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단 소리고.”
한발 앞으로 나온 서윤이 용주를 곁눈질했다.
서윤에 눈빛은 조금 더 까칠해져 있었다.
“녀석한텐 빚을 진 게 좀 있거든. 그때 시원하게 다 못 돌려줬어.”
“…….”
“처음은 그 재수 밥 말아먹은 두 녀석에게 뺐겼지만, 이번엔 아니야. 녀석은 나한테 맡겨 두라고. 확실하게 날려 버릴 테니까.”
검을 고쳐 잡은 서윤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거절은 거절할게.”
진각성을 하면서 녀석에게 한 방 먹여 주긴 했었다.
하지만 당시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번엔 그때와 달랐다.
게다가….
“마지막에 웃는 건 결국 나야. 아무한테도 양보 안 해. 의료 헌터도, 의사도, 백 년 묵은 여우도, 뱀파이어도, 설녀도. 결국 다 2라고. 1은 나 하나뿐이야. 명심해.”
서윤의 붉은 눈동자가 수지와 린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물론, 단순히 그런 감정적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야. 단순한 소거법으로만 봐도 확실하지.”
서윤이 어깨를 들썩였다.
“이용주 넌 당연히 패스, 고래 통구이를 만들기 싫으면 그쪽도 당연히 아웃이지.”
서윤이 자연스레 형만을 제외시켰다.
“네 힘으론 안 된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거고. 이미 한 번 시원하게 깨져 봤으니.”
그다음으로 제외시킨 건 태영.
그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 자기 분수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의료 헌터도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아까 그 자기장처럼 위험한 게 언제 또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 이 녀석이 언제 또 제멋대로 굴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수지를 향한 서윤의 시선.
서윤의 눈동자는 경쟁자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보는 눈이기도 했다.
“어때? 이거면, 합리적으로도 납득할 수 있지? 그럼 후딱후딱 움직이라고.”
“흐흐흐.”
서윤의 소거법이 끝나자마자 저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날 그렇게 대놓고 투명 인간 취급하다니. 한마디로 카오스.”
그리드의 손짓과 함께 전투마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치렁거리는 사슬을 끌며 달리는 전투마.
폭발적으로 속도를 높인 서윤은 전투마를 정면에서 맞이했다.
“그때처럼 질질 끌려다녀 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빌로이 블러디(Billowy Bloody).”
검으로 흘러 들어가는 서윤의 마나.
물결치는 붉은 기운이 서윤의 검을 휘어 감았다.
마디마디 늘어진 서윤의 검은 완전한 사복검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휘릭!!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검을 휘저은 서윤이 전투마의 목을 휘어 감았다.
힘껏 잡아당기는 손아귀.
다그닥거리는 발굽 소리가 멈춘 곳엔.
갑주를 두른 전투마의 머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래, 알았다. 녀석은 맡기지.”
점점 좁아지는 차원의 균열.
그 경계면을 바라보던 용주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만약 시간 안에 녀석을 제압해도, 넘어올지 말지는 한번 생각해 봐라.”
“아~ 알고 있어. 괜히 혼자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거. 나도 그 정도 생각은 했다고.”
처음 같았으면,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했겠지.
하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용주가 없었다면, 자기장이 있던 그 굴을 통과할 순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짐이 될 바에야 여기 남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겠지.
“걱정하지 마. 여기 녀석들이랑은 그래도 말이 통하니까. 지나온 곳들보다야 백 배 낫잖아.”
문이 닫히고, 차원의 경계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용주가 데리러 올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 옷은 내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을게. 그래도 되지?”
서윤이 걸치고 있던 코트 옷깃을 잡았다.
여기 넘어오면서 용주가 걸쳐 줬던 코트는 아직도 서윤에게 있었다.
“그래. 맘대로 해라.”
“그럼 이제 가. 더 지체하지 말고.”
입가에 묻은 미소를 거두어들인 서윤이 단호하게 외쳤다.
서윤과 한 번 더 눈을 마주친 용주는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막아설 줄 알았는데, 의외네.”
멀어져 가는 발소리.
그 속에서 그리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서윤이 이야기했다.
예상과 달리 그리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트릭을 더 준비해 둔 것 같지도 않았다.
용주의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흐흐.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것. 그것이 바로 카오스지.”
“그냥 쫄았다고 하지 그래? 어찌 됐든 너도 헌터였으니까 느꼈을 거 아니야. 용주의 힘을.”
“심연보다 더 깊은 심연. 그걸 들여다보는 건 공포심과 탐구심이 동시에 드는 희열이지.”
“뭔 개 소리야, 그게?”
“심연에 삼켜지는 순간 자체는 일생에서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공포. 공포와 희열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지.”
“그럼 더더욱 용주를 막았어야 하는 거 아니냐?”
“흐흐흐. 탐구심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심연만은 아니란 걸 깨달아서 말이야. 이세계의 존재, 이세계의 생명체, 이세계의 마법, 그걸 볼 수 있는 건 숨이 붙어 있을 때뿐이지. 어쩌면 지금껏 보지 못한 무언가가 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몰라.”
그리드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꿀렁거리는 베히모스의 살점.
세상에 이런 생명체가 있을 거라고 감히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 그건 숨이 붙어 있을 때뿐이긴 하겠지. 근데 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사라져 가는 전투마의 흔적.
사복검을 길게 잡아당긴 서윤이 입꼬리를 올렸다.
“넌 여기서 나한테 박살 날 건데, 그런 시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흐흐흐.”
서윤의 도발에도 그리드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빛은 달랐지만, 그 눈동자가 머금고 있는 것은 같았다.
승리에 대한 확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자~ 어디 그때처럼 한번 놀아 보자고. 이번엔 내가 엉망진창으로 괴롭혀 줄 테니까.”
사복검을 휘두른 서윤이 선공을 잡았다.
원거리 공격에서 이어진 강렬한 돌파.
순식간에 데스 사이드 안쪽으로 파고든 서윤은 날카롭게 검을 휘저었다.
검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 검에 담긴 날카로움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데스 사이드를 긁어내는 사복검에선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흐흐. 보고 기억하는 전투법이 있는 품새인걸? 한마디로 카피(Copy).”
“어디 언제까지 그 한마디 타령 할 수 있는지 보자고. 셧업(Shut up)하게 만들어 주겠어.”
“흐흐흐. 그거 흥미롭군. 기대해 보도록 하지. 한마디로….”
두 발을 수직으로 들어 올린 그리드가 데스 사이드를 회전시켰다.
“익스펙트(Expect).”
서윤의 눈앞에서 번뜩이는 회전날.
자세를 바짝 낮춘 서윤은 지면과 날 사이 좁은 틈으로 미끄러졌다.
왼손으로 땅을 짚은 서윤의 눈앞엔 잘려 나간 분홍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흐흐흐. 그때는 좀 놀라긴 했었지. 진각성을 할 거라곤 생각 못했으니까.”
데스 사이드에 올라탄 그리드가 몸을 기울였다.
초승달처럼 기운 날 위에서도 그는 용케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힘이 좀 커졌다고 자만하는 건 흥미롭지 않아. 네 힘은 심연과 달리 평범하니까. 한마디로 노말(Normal).”
칼끝을 밟은 데스사이드가 순간적으로 회전하며 날아갔다.
‘자기 주 무기를 날리다니, 바보 아니야?’
칼끝으로 힘을 굴절시킨 서윤은 데스 사이드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재빠르게 뛰어오른 서윤은 데스 사이드를 쥐었다.
이걸로 전투는 압도적으로 이쪽이 우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뭐야?! 이건!’
데스 사이드를 손에 쥐자마자 새하얀 무언가가 자신의 손을 타고 올랐다.
데스 사이드에서 시작된 하얀 물체는 마치 사람의 손을 보는 것 같았다.
하나가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타고 오른 손만 해도 벌써 다섯.
하얀 손들에 닿은 부위에선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큭!’
왼손에 힘을 준 서윤은 데스 사이드를 집어 던졌다.
“흐흐흐, 왜 그래? 결정적인 기회이지 않았나?”
여유롭게 데스 사이드를 잡아낸 그리드.
“잘 돌려받도록 하지.”
폭발적으로 속도를 올린 그리드가 서윤을 그대로 올려 쳤다.
‘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인가? 그럼 받아치는 수밖에!’
검을 일자로 정렬한 서윤은 녀석의 공격을 받아치려 했다.
그런데 그때.
“!”
날카롭게 휘두른 그리드의 일격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마치 뭔가에 걸린 듯한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블러디 러시!”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은 서윤은 난폭하게 검을 휘둘렀다.
같은 스킬이지만, 위력은 비교 불허.
빠르게 뒤로 물러나려던 그리드의 움직임이 또 한 번 부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흐흐흐. 그래. 그런 거였군. 내가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실없이 웃어 보이는 그리드에게 내리꽂히는 서윤의 일격.
채찍처럼 휘는 사복검을 마주한 그리드는 맨손으로 칼날을 붙잡았다.
그리드의 힘에 날아간 서윤은 공중에 서 있었다.
“뭐야? 왜 안 갔어?”
그리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서윤이 물었다.
완전히 녀석에게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었다.
심지어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까지도.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서요.”
한 층 위에 자리 잡은 태영이 안경테를 올려 썼다.
“제 힘만으론 이길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절 도구처럼 부리고, 절 이용해 게이트를 열고, 절 이용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왼손을 쫙 펼친 태영이 무언가를 확 끌어당겼다.
“흐흐.”
오른쪽으로 데스 사이드를 휘두른 그리드가 왼손을 확 잡아당겼다.
끊어져 나온 열 가닥의 실.
실 가닥을 끊어낸 태영은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선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 최소한의 속죄를 이루고 싶습니다. 제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어도. 방해인 줄 알면서도 제가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오직 그 때문입니다.”
태영의 말에 뒤따른 2초의 정적.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 정적을 깬 서윤이 가슴을 쭉 폈다.
“네가 죽어 버리면 내가 뭐가 되겠어? 이용주가 날 어떻게 보겠냐고?”
“…….”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지? 속죄를 하고 싶다고?”
서윤의 시선이 태영과 마주쳤다.
“그럼 날려 버리면 되잖아. 시원하게.”
“…네!”
태영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순간이긴 하지만, 서윤에게서 용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단순히 그녀가 용주의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용주와 달랐지만, 용주와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