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 * *
“뭐야, 이 녀석들은?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오던데?”
얼음벽의 잔해를 밟은 서윤이 이야기했다.
동그라미에 세모에 네모.
인간의 몸을 하고 머리가 저렇게 생기니 꽤나 소름 끼치는 비주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도! 저도 물어보려던 참이었어요! 언노운은 아닌 것 같은데.”
마름모와 순간 시선이 마주친 설녀가 흠칫 놀랐다.
세세하게 따지면, 시선이 마주쳤다고 하기엔 좀 애매한 상황이긴 했다.
마름모는 눈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텅 빈 여백이 설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한때 적이었던 녀석들이다. 잠시 부하로 부렸던 녀석들이기도 하고.”
“꽤 복잡한 관계잖아? 그래서? 지금은 아군인 거 맞지?”
동그라미 옆에 선 서윤이 뒤늦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녀석….
다리가 없었다.
이래서야 영락없는 달걀귀신이지 않은가?
“그래.”
이 녀석들의 복종.
그건 용주에게도 나쁠 게 없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왜? 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아직 물음표가 찍히긴 했다.
이길 수 없단 걸 느꼈기 때문에?
아니면, 이미 한 번 패배와 복종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아까 꽂았던 건 뭐야? 엄청 크고 위협적으로 생긴 창 말이야.”
서윤이 롱기누스를 가리켰다.
용주가 저걸 꽂자마자 변화가 나타났었다.
“원래 이 녀석들이 있던 세계에서 얻은 물건이다. 그 세계의 동력이 응집된 물건이지.”
“동력?”
“설명하자면 길다. 아무튼 저기 있는 동력원들이랑 갈고리들이 제 기능을 찾은 건 이 녀석 덕분이지.”
용주도 설마 이게 이런 식으로 사용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템 설명에도 적혀 있지 않은 방법이기도 했고,
애초에 여길 다시 보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언노운이 저 갈고리를 물었었죠? 무는 것만으로 죽는다니, 평범한 갈고리는 아닌 모양이죠?”
태영이 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오래되고, 방치된 갈고리일 뿐인데.
무시무시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에 고생 좀 하게 했던 물건이다. 지금은 우리 쪽에 도움이 될 거다.”
“블레이드 로커스트. 녀석들의 특성을 이용한 거군요. 멋진 계획이네요.”
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부턴 어떻게 할 거야? 팬텀 녀석들 빨리 쫓아야 하잖아?”
서윤이 물었다.
어찌 됐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였다.
“팬텀?”
“그게 뭐야?”
쌍아궁이 물었다.
“인커젼을 일으킨 녀석들이다. 너희 세계에 있거나, 여길 지나갔을 거다.”
“인커젼?”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쁜 사람이란 거지?”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13번째.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용주의 시선이 사견궁에게 향했다.
“뭔데?”
“아까 우릴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말했었지? ‘돌아가’라고.”
“…그게, 뭐.”
“그때 그 말 앞에 생략된 단어가 혹시 ‘너희 세계로’였냐?”
“…….”
사견궁이 시선을 피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서윤이 물었다.
“당시엔 그게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리더군. 녀석에겐 나에 대한 기억이 없고, 다른 황도 12궁의 반응도 녀석과는 달랐으니까.”
“…….”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사견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사견궁의 태도.
단순히 낯선 자의 침입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뭔데 그래? 나한테도 비밀로 해야 하는 그런 거야?”
쪼그리고 앉은 설녀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게….”
“말해 봐. 괜찮으니까.”
“…저 녀석들이 나타나기 전에 뭔가를 느꼈었어.”
끝내 망설이던 사견궁이 입을 열었다.
“뭘?”
“엄청난 위압감. 엄청난 불길함.”
“그런 걸 느꼈었단 말이냐?”
사자궁이 날카롭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건 그자들이 베히모스의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였어.”
“음~ 하긴. 우리 막내는 베히모스에 관해선 우리보다 예민했었으니까.”
거해궁에 올라탄 천칭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란 호칭에 사견궁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베히모스가 울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 난 곧장 베히모스를 들여다보았고.”
“들여다보았다?”
“어떤 원린지는 나도 몰라. 근데 어렸을 때부터 볼 수 있었어.”
“지금도 완전 땅꼬맹이인 주제에.”
푹 찌르고 들어오는 서윤의 한마디에 사견궁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난 베히모스를 들여다보았어. 그리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었어. 베히모스 안에 들어온 낯선 침입자들을.”
사견궁이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녀석들은 뭔갈 찾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난 녀석들을 계속 주시했지. 그때… 녀석은… 날 정확히 노려봤어.”
“녀석이라 함은.”
“녀석들 중 리더로 보였던 남자. 부드럽지만, 제일 위험해 보이던 남자였어.”
이준.
틀림없이 녀석이 말하고 있는 건 그자였다.
“그자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아래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베히모스를 통째로 날려 버리겠다고.”
그자의 말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었다.
평온함 속에 감춰진 그 깊이를 사견궁은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그래서? 녀석은 어디로 갔냐?”
녀석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준은 베히모스를 날려 버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 저질렀었겠지.
“버려진 제단 같은 곳이었어. 부서진 석상 아래 위치한 비밀스러운 장소였는데, 베히모스의 살점에 반쯤 파묻혀 있었어.”
‘…설마 거긴가.’
용주의 머릿속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혈옥.
라와 사견궁.
그들과 전투를 벌였던 바로 그곳이었다.
“용주 씨, 혹시 거기….”
“그래. 같은 생각이다.”
“왜 또 둘만 꽁냥거리고 있는 건데? 우리한테도 말 좀 해달라고.”
용주의 말꼬리를 낚아챈 서윤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래. 근데 일단은 거기 도착하고 나서.”
용주의 눈은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목덜미를 긁적인 사견궁은 마지못해 안내를 시작했다.
“저쪽이야.”
큰 대로에서 이어진 갈림길.
사견궁이 한쪽 길을 가리켰다.
대로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갈고리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수의 언노운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방치된 피와 살점에서 나는 악취는 참기 괴로울 정도로 진했다.
“지독하잖아, 이거.”
“언노운. 또 와.”
수지가 정면을 가리켰다.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언노운들.
입질 없이 덥석 갈고리를 문 언노운들은 그대로 한 줌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언노운을 만나는 빈도수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아마 균열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다른 종류도 더 있는걸요? 직접 처리해야겠어요.”
“그쪽은 가만히 있지 그래? 고래 통구이는 한 번이면 족한데.”
형만에게 한마디를 날린 서윤이 용주의 뒤를 따랐다.
“엄청난 전투력이야.”
“우리 황도의 힘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압도적인 헌터들의 무력.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황도들이 이야기했다.
개개인의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하나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서로 텔레파시라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음? 뭐라고요?”
자신을 보는 거해궁의 두 눈에 천칭궁이 귀를 기울였다.
“응. 응. 그냥 어떻게 봐도 우리보다 더 강한데, 뭘 그렇게 돌려 말하냐고 그러는데요?”
대신해 전한 거해궁의 일침.
“저희도 돕죠.”
팔을 걷어붙인 설녀가 한 무리의 언노운을 빙산 속에 거두었다.
빙산과 함께 부서진 언노운들의 살점에선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빠르게 정리된 언노운 무리.
마지막 한 마리의 언노운을 깨부순 설녀가 이마를 닦았다.
“왼쪽 길에서만 언노운 안 나왔어.”
수지가 이야기했다.
왼쪽은 아까 사견궁이 가리켰던 곳이었다.
“확실히 그랬던 것 같네요.”
설녀의 기억에도 마찬가지였다.
살점을 파먹으며 튀어나온 개체들이 있긴 했지만, 길을 따라온 녀석은 한 마리도 없었다.
“야야야! 저기 또 오는 것 같은데?”
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태영이 쳐놓은 덫에 일부가 찢겨 나가긴 했지만, 전체적인 규모로 보면 티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린. 여긴 우리가 맡겠다.”
이빨을 드러낸 사자궁이 으르렁거렸다.
“네? 그렇지만….”
“여기서 발목 잡히면 끝도 없을 거야.”“린 친구들 급해 보였어. 중요한 일일 거야.”
쌍아궁이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믿고 가. 이렇게 귀엽고 깜찍해도 우린 황도 12궁이라고.”
“13명이거든.”
사견궁이 불쾌함을 표했다.
“아니지. 넌 안내를 마쳐야지.”
“그럼, 그럼. 여긴 언니, 오빠들한테 맡기고 어서 가.”
“안내를 끝내거든 그때 오라고.”
“…칫”
하는 수 없단 듯 고개를 돌린 사견궁이 걸음을 옮겼다.
“너희도 여기 남아라. 다가오는 언노운들은 모두 처치해.”
용주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장검이 언노운을 꿰뚫었다.
울려 퍼지는 전기톱 소리와 찰박거리는 발소리.
쇠톱을 휘두른 동그라미는 마른기침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괜찮은 거야?”
서윤이 물었다.
녀석들의 전투는 심각할 정도로 단순 무식했다.
저런 상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문제없어.”
“불사의 존재라고? 저 녀석들이?”
“언노운들 입장에서도 상대해 본 적 없는 적들일 거다. 녀석들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내가 직접 경험해 봤으니 잘 알아.”
황도와 존재들을 뒤로한 용주가 혈옥을 향했다.
살점에 거의 파묻힌 폐허는 전보다 더 심각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계단을 내려가던 설녀가 물었다.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그걸로 됐다 싶었어. 괜한 걱정거리 만들기 싫었으니까.”
“그럼 그 사람들은?”
“다 다른 세계로 사라졌어. 저 괴물들이 나온 건 그 이후의 이야기고.”
언노운이 위협적이라고 판단됐으면, 설녀와 다른 녀석들을 절대 보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일부 괴물들이 피부를 뚫고 나와 얼어 죽거나, 드워프들에게 사냥당하는 모습을 봤다.
녀석들이 린과 황도 12궁의 적수가 되지 않을 거란 건 그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녀석들이 만든 균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일단 튀어나온 녀석들만 어찌어찌 처리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라졌다니? 베히모스 몸속에서 사라질 수가 있는 거야?”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근데 사라졌어. 분명 균열이 생기고, 이리저리 찢어졌는데, 베히모스한테 상처를 낸 건 아니었어.”
“하! 너 진짜 바보구나?”
둘 사이에 끼어든 다른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서윤이었다.
“걱정거리를 만들기 싫었으면, 더더욱 말을 했어야지. 좋아하는 여자애가 위험한 곳에 간다는데 입 싹 닫고, 자기만 뒤로 쏙. 그러고도 남자냐?”
“조… 좋아하긴 누가!! 그리고 나 혼자만 뒤로 빠지려고 했던 적 없거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둘 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목적지에 다 온 것 같은데.”
두 사람을 제지한 태영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길었던 계단도 이제 끝이 보였다.
* * *
“…….”
다시금 돌아온 혈옥.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용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견궁이 본 대로 베히모스의 몸 안쪽은 갈기갈기 찢기고 파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베히모스가 찢어진 건 아니었다.
찢어진 건 차원.
사견궁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모두를 기다리고 있던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흐흐, 눈빛들이 살아 있는걸? 한마디로 어벤져스.”
균열 앞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리드.
톱 해트를 눌러 쓴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