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그런데 이거, 어디서 느껴지는 거지?”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느껴지는 방향 자체는 특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향이란 건….
“천장인 것 같은데요?”
“그 정돈 나도 알거든. 내 말은….”
그렇게 말하던 서윤의 눈동자에 한 가지 변화가 들어왔다.
찢어진 살점에서 흘러나오는 대량의 피.
천장을 찢고 나온 언노운은 그 거대한 눈동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건…!”
“아까 봤던 녀석들이랑은 또 다른 녀석들이다!”
언노운을 발견한 황도 12궁이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녀석들과 눈을 마주치지 마라!”
일말의 고민도 없이 형만이 외쳤다.
살점을 찢고 나타난 언노운은 둘.
수는 적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개체는 아니었다.
“뭐? 그럼 어떻게 싸우라고!”
“다리. 움직이는 거 보고.”
단검을 꺼내 든 수지가 형만의 뒤를 따랐다.
“되돌려줄게.”
사람보다 두꺼운 여섯 개의 팔.
파괴적으로 휘두르는 언노운의 공격을 모두 받아 낸 수지는 흡수한 대미지를 되돌려주었다.
충격에 찢겨 나가는 베히모스의 살점.
날아간 한쪽 팔을 움켜쥐는 언노운의 등 뒤로 떨어진 형만은 대검을 박아 넣었다.
“헬 플레어!”
확산하는 푸른 화염.
언노운을 집어삼킨 화염은 순식간에 언노운의 생명을 앗아 갔다.
대검을 뽑아 든 형만은 다른 한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터진 안구에서 흘러나온 액체는 지면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움직임이 멈춘 녀석의 어깨 위엔 용주가 서 있었다.
“이거 안 좋은 거 아니야?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전투.
조금 꿍한 얼굴의 서윤이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하는 자책이었다.
사방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형만이 일으킨 불길에 타버린 건 언노운만이 아니었다.
“음. 괜찮아질 거야.”
베히모스의 살점을 도려내려는 수지.
“자… 잠깐만요!”
그런 수지의 행동에 놀란 설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뭐 하시려는 거예요? 설마 베히모스를….”
“새 세포가 재생하려면, 잘라 내는 편이 나아.”
그렇게 말한 수지는 익어 버린 살점들을 잘라 냈다.
“괜찮을 거다. 그쪽은 녀석의 전문 분야니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설녀에게 용주가 이야기했다.
“전문 분야?”
“저길 봐.”
“……!”
수지가 도려낸 자리에 빠르게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자연적인 회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속도였다.
치료를 끝낸 수지는 단검을 집어넣었다.
“저기,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용주와 마주 보고 선 설녀가 이야기했다.
“아까 그 괴물들, 상대하는 게 엄청 능숙하신 것 같던데. 역시 알고 계신 거 맞죠?”
“그래. 우리 쪽에선 그걸 언노운이라고 부르고 있다.”
“언노운…. 그건 용주 씨네 세계에 사는 생명인 건가요?”
“아니. 우리로서도 녀석들은 침략자다.”
“침략자….”
고개를 돌린 설녀가 언노운의 유해를 바라보았다.
“실은 베히모스의 몸속에서 저거랑 다른 생명체들을 목격했어요. 하나같이 엄청 공격적이었고, 엄청 적대적이었어요.”
“그렇다는 건 이미 언노운들이 베히모스의 살점 안으로 파고들었다는 이야긴가?”
용주가 손가락 마디를 깨물었다.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어 있었다.
“참고로 너희가 만났던 언노운들은?”
“우리가 모두 정리했다. 그런 괴물들이야 한 입 거리도 안 되지.”
사자궁이 이빨을 드러냈다.
“한 입은 아니고 세 입은 됐지.”
“세 입은 아니고, 네 입은 됐을걸.”
그런 사자궁의 이야기에 끼어드는 쌍아궁.
“조용!”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자궁을 피해 쌍둥이자리의 둘은 거해궁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래?”
그렇다는 건 황도 12궁의 전투력을 우습게 볼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녀석들이 만난 언노운이 어느 정도 수준의 녀석들인진 몰라도.
조금 전 튀어나왔던 녀석들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그랬다.
“하나 더. 베히모스의 몸 여기저기에 있는 갈고리에 대해 아는 건?”
“으응. 처음 보는 물건이에요. 마지막으로 여기 왔을 땐 그런 건 없었어요.”
“그렇군.”
“아! 처음 보는 물건이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갈고리 말고도 하나 더 있었어요!”
“처음 보는 물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이쪽이에요!”
설녀를 따라 이동한 일행은 한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들어찬 석조 건물들과 조각들은 부식이 심하게 진행되어 있었다.
“이거예요!”
광장 중앙에 있는 건 백색의 원반이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것들과 달리, 전혀 색도 바라지 않았고, 재질 자체도 완전히 달랐다.
원반엔 홈이 뚫려 있었다.
정중앙의 홈은 크고 깊었지만, 주변 네 개의 홈은 그렇지 않았다.
“뭔지 알겠어?”
“글쎄….”
걸음을 옮긴 용주는 근처에 있던 다른 물건을 살폈다.
저쪽이 뭔지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쪽이라면 알 것 같았다.
다섯 개의 태엽이 달린 거대한 오르골.
작동도 멈췄고, 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색도 잃어버려 하얗게 변했지만.
이건 분명 어둠그늘 숲의 동력원이었다.
“그런 거라면 여기 몇 개 더 있었답니다.”
“다섯 개야. 정확히 다섯 개.”
처녀궁과 쌍어궁이 이야기했다.
태엽에 손을 올린 용주는 태엽을 감아 보려 했다.
하지만 돌릴 수 없었다.
태엽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장 난 게 아니라. 단순히 동력을 잃어버리면서 멈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갈고리들이 전부 떨어져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갈고리들.
평범한 갈고리는 아니었으니까.
‘동력을 복구시킨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게 있을까?’
홈의 생김새를 보고 생각나는 아이템이 하나 있긴 했다.
어쩌면 거기 응집된 동력을 역으로 흘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얻을 수 있을 게 뭔지 의문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수지가 태영에게 다가갔다.
수첩을 보고 있는 태영의 곁엔 언노운의 사체들이 있었다.
“언노운. 아까 말했던 건가 보구나.”
“여기 있는 개체들. 알고 있어요.”
태영이 보고 있던 수첩을 덮었다.
“날카로운 날붙이를 보면, 무조건 물고 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적어 뒀어요. 사람보다 칼을 더 집요하게 노리는 녀석이라고.”
외형적인 특성으로 미루어 보건대 틀림없었다.
이 개체의 별명은 ‘블레이드 로커스트(Blade locust)’.
한국식으로 말하면 ‘날붙이 황충’ 정도 되는데, 그런 이유에서 붙은 별명이었다.
“응. 잘 봤네.”
“여기 떨어져 있는 갈고리에 몰려들었던 모양이에요.”
사체 근처엔 아까 봤던 갈고리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서로 이걸 씹으려고 모여 있다가, 황도 12궁과 맞닥뜨려 전투에 들어갔었던 모양이다.
“이 녀석들에게 그런 특성이 있다고?”
용주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네. 틀림없어요.”
태영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 거리에서 이 작은 목소리를 정확히 캐치했다니.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청력이란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돌린 용주가 설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맞춰 볼까요?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신 거죠?”
“네가 본 언노운들 중에 이런 종류의 언노운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한데.”
“음… 꽤 많았어요. 7할, 8할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요?”
“…그래?”
용주의 시선이 다시금 광장 중앙을 향했다.
‘만약 동력이 복원되면서 갈고리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면….’
갈고리를 부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반 정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무력화시키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제자리를 찾아간 갈고리를 언노운들이 공격한다면?’
태영이 관찰하던 언노운은 기생충의 형태를 닮아 있었다.
고등어, 갈치, 오징어 등에서 관찰되는 고래회충.
그리고 학꽁치에 기생한다고 알려져 있는 아캄 벌레.
그 둘의 특징을 이리저리 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퀘스트 당시 갈고리는 치명적이었다.
용주에겐 더더욱 그랬다.
만약 갈고리가 그때의 절반.
아니, 3분의 1 수준의 위력만 내준다고 하더라도, 상대해야 할 언노운의 숫자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남은 문제는 역시 그 녀석들인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주는 광장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들을 상대했을 때와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녀석들이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다면.
녀석들의 투지를 꺾어 복종시키면 그만이었다.
“다들 광장 밖에서 기다려라.”
“뭐? 왜?”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그게 뭔데?”
“곧 알게 될 거야.”
서윤을 지나친 용주는 설녀를 바라보았다.
용주의 손엔 크고 날카로운 장병기가 들려 있었다.
다섯 잎의 롱기누스.
찬란한 푸른빛을 내뿜는 장창의 힘에 황도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여기로 통하는 길을 싹 다 봉쇄해 줬으면 하는데, 할 수 있겠냐?”
“길이라고 해봤자 몇 개 안 되잖아요. 문제없어요. 아! 설마 저런 곳까지 다 막아 달란 건 아니죠?”
설녀가 천장을 가리켰다.
“눈에 보이는 입구들만 막아 주면 돼.”
“알았어요! 그 정도라면!”
“최대한 견고하게 부탁하지. 어지간한 충격 정도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네! 어… 근데 왜?”
고개를 끄덕인 설녀가 뒤늦게 고개를 기울였다.
“…움직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들어오지 마.”
용주의 단호한 목소리에 설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약속한 건 아니니까.
정말로 위험한 것 같다고 판단되면, 그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어디 어떻게 나와 줄지 한번 봐 볼까?”
롱기누스를 움켜쥔 용주는 원반의 홀에 날을 맞췄다.
지면을 타고 뻗어 나가는 푸른 동력.
혈관처럼 뻗어 나간 동력은 광장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는 동력기로 흘러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오르골 소리.
동력원들에 동력이 돌아오자 갈고리들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앙상했던 기둥들에 다시 갈고리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뚝…! 뚝…!
갈고리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히모스의 살점에서 피가 떨어졌다.
살점을 뚫고 나온 건 언노운.
‘블레이드 로커스트’라고도 불리는 바로 그 개체였다.
나무 기둥 주변으로 몰려든 언노운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갈고리를 깨물었다.
맘처럼 쉽게 되지 않는지 언노운은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갈고리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얌전하던 언노운이 극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듯 움직이는 녀석은 갈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언노운의 움직임이 멎은 건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언노운의 숨이 멎자 또 다른 갈고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노운의 몸을 꿰뚫는 갈고리들.
기존의 것보다 더 길고 날카로운 갈고리들은 언노운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역할을 마친 갈고리들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노운의 사체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저기 꽂히면, 저런 식으로 끝을 맞이하게 돼 있었나 보군.’
여기 갈고리가 돌아왔다는 건, 다른 곳에 널려 있던 갈고리들도 힘이 돌아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게다가 언노운은 저 갈고리에 이끌리는 듯 보였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 모양이고.
언노운을 죽일 살상력도 충분.
언노운의 수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베히모스의 고통도 줄어들 것이다.
남은 건 이제 다른 한쪽.
“그래서 너흰 어떻게 할 거지?”
발전기들이 돌아오자 네 명의 존재들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싸울 거냐? 아니면 복종할 거냐?”
네 방향에서 용주를 보고 있는 존재들.
용주와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던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다리가 없는 동그라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