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뭐야? 저 꼬맹이는?”
용주와 나란히 선 서윤이 물었다.
적이 아니라는 용주의 말만 아니었어도, 벌써 한 방 크게 날려 줬을 것이다.
“별자리. 살아 움직여.”
뱀도 뱀이지만, 소년 자체도 꽤 특별해 보였다.
그가 두르고 있는 망토는 밤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너 13번째냐?”
용주의 물음에 소년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13번째라니? 그건 또 뭐래?”
“황도 12궁. 설녀랑 함께 여기 있던 녀석들이다.”
“황도 12궁? 별자리 말이야?”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잠깐만. 근데 방금 13번째라고 하지 않았어? 황도 12궁은 말 그대로 12개잖아. 13번째가 어디 있어?”
서윤이 딴지를 걸었다.
설녀와 황도 12궁이 대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가도 싶었지만, 그것보단 우선 이것부터였다.
“아뇨. 황도의 13번째 자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태영이 끼어들었다.
“13번째 자리가 있다고?”
“네, 점성술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장이었지만, 그런 해석이 일부에서 있긴 했어요. 황도의 13번째 자리 사견궁. 한국식으로 하면 ‘뱀주인자리”죠.”
“뱀주인자리.”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확실히 이름과 어울리는 이미지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있는 건 누가 봐도 뱀주인이었으니까.
“어떻게 그걸….”
사견궁의 경계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기억 못 하는 거냐? 하긴 이상할 것도 없긴 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뭐, 알 필요 없다.”
용주가 대답을 회피했다.
자신이 때려눕힌….
아니, 죽였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욘 없겠지.
“그보다 린은 어디 있냐? 안쪽에 있는 거냐?”
“어떻게 그 이름을.”
용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사견궁이 움찔했다.
“안내해라. 녀석을 만나면, 녀석이 증명해 줄 거다. 내가 네 적이 아니란 걸.”
사견궁의 눈동자에 순간 망설임이 스쳤다.
“…린은 지금 여기 없어.”
잠시 고민하던 사견궁이 이야기했다.
“없다고?”
“베히모스가 이상한 것 같다고 그랬어.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그랬군.”
아까 들었던 베히모스의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따라와. 린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미리 말하는데, 힘들다고 칭얼대거나 뒤처져도 난 몰라. 알아서들 하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한 사견궁은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 * *
“하아…. 하아….”
앞서가던 사견궁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푹푹 빠지는 눈길에 사견궁은 꽤나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힘들어 보여.”
“뭐야? 그렇게 건방이란 건방은 다 떨더니. 완전 저질 체력이잖아?”
수지의 말을 이어받은 서윤이 다 들으라는 듯 이야기했다.
현지인인 주제에 이방인인 자신들보다 더 빨리 지치다니.
입으로 방정만 안 떨었어도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다 들리거든. 그리고 누구보고 건방지대?”
사견궁이 불쾌한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응?”
사견궁의 불만을 듣던 수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당연한 듯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우리 어떻게 저 사람 말 들을 수 있는 거야?”
수지가 용주에게 물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서윤과 태영의 시선 역시도 용주에게로 향했다.
“이상한 말로 구시렁거리길래 내가 손을 좀 써뒀어. 뒤가 영 찜찜해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물음에 돌아온 목소리는 용주의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사견궁이었다.
“뭐야?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어느 틈에 그렇게 했대?”
“황도를 우습게 보지 마. 그런 건 나한테 껌이라고.”
사견궁이 자기 귀를 후볐다.
“…….”
용주는 수지의 귓불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손을 쓴 건 아까 산을 출발할 즈음.
귀걸이보다도 작은 사이즈의 별 조각은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다.
다른 녀석들이 사견궁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그 효과일터.
용주 역시도 녀석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아~ 그러셔?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데?”
“거의 다 왔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약 20분 뒤였다.
거리상으론 그만큼 걸릴 거리는 아니었지만, 지친 사견궁 때문에 시간이 더 지체되어 버렸다.
덕분에.
배달 음식 주문 받으면 참 잘하겠다는 서윤의 비아냥도 받았고 말이다.
뭐, 사견궁은 그게 뭔지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다 부서져 있네.”
도착한 곳은 유적지처럼 보였다.
여기저기 건물들의 잔해가 있었고, 파괴된 신상 역시도 방치되어 있었다.
“여기 발자국이 남아 있어요.”
태영이 가리킨 곳엔 확실히 발자국들이 있었다.
“팬텀 녀석들 건가?”
“아마 아닐 거다.”
용주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동물 발자국이 같이 찍혀 있잖아.”
“아!”
확실히 발자국 사이엔 사람의 것이 아닌 것이 섞여 있었다.
그 종류도 한 가지는 아니었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이쪽이라고.”
사견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애써 힘든 걸 숨기고 있었다.
“뭐야, 여긴?”
입구는 꽤 그럴듯하게 되어 있었다.
크기도, 디자인도 말이다.
하지만 있는 건 입구뿐이었다.
처음엔 뒤에 있던 궁전 같은 게 무너진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입구에서 이어진 길은 지상이 아닌 지하를 향하고 있었다.
‘라를 따르던 녀석들이 뚫어 놓았던 신전의 정문. 그래. 이런 곳도 있었지.’
베히모스를 빠져나올 때는 드워프들이 뚫어 놓았던 입구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여기가 거기와 같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조 자체는 동일하게 보여졌다.
“여기 베히모스라는 고래 위라고 하지 않았어?”
서윤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살아 있는 고래의 등에 어떻게 내려가는 길이 있을 수 있냔 말이다.
“베히모스의 가죽을 찢고, 살점을 파고 들어갔던 녀석들이 있었다. 그놈들이 남겨 놓은 상처인 거지.”
“살점을 파고 내려가? 그럼 이 안은….”
서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입을 움직일 시간 있으면, 발을 움직이라고.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모두를 흘겨본 사견궁이 앞장섰다.
“저 녀석 뭐 저렇게 까칠해? 친구도 못 사귀겠어.”
그렇게 말한 서윤은 순간 뜨끔했다.
이 이야기.
분명 남들이 자신에게 했던 뒷담화였다.
‘아니야. 난 저 정도까지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수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던 서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서윤의 얼굴엔 옅은 홍조가 드리워 있었다.
“여기가 정말 고래 배 속이란 말이죠?”
계단을 내려온 태영이 믿기지 않는 듯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게, 내부엔 도로가 나 있었다.
인공적으로 가공된 석조 기둥은 살점이 무너지지 않도록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배 속은 아니지.”
“하하, 그렇긴 하겠죠. 흑피 쪽 어딘가일 테니까요.”
용주의 지적에 태영이 웃어 보였다.
“흑피?”
수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고래의 등 쪽은 보통 검잖아요. 배 쪽은 하얗고. 그래서 등살을 그렇게 부르나 보더라고요. 등살이나, 바가지살이라고 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응. 뭔가 맛있어졌네.”
“맛있어졌다니. 베히모스는 먹는 게 아니라고, 이 야만인들아.”
수지의 이야기에 사견궁이 토를 달았다.
“좀비 헌터는 전에도 여길 와 본 거죠?”
가볍게 웃어 보인 태영이 물었다.
“그래.”
“전이랑은 뭔가 다르다는 얼굴이네요.”
“…….”
“아까부터 저거 보고 계셨죠?”
태영이 가리킨 곳엔 갈고리가 있었다.
떨어진 갈고리 근처엔 나무로 된 기둥이 있었다.
갈고리는 아마 저기서 떨어진 걸 테지.
“제가 제대로 봤나요?”
“…그래.”
전에 왔을 때 저런 갈고리는 보지 못했다.
나무 기둥의 상태를 봐선 제법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
어둠그늘 숲에서 봤던 그 갈고리들처럼.
‘설마. 여기도 두 차원이 뒤섞인 건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자기장의 땅과 하이에나 굴.
전혀 연관 없는 두 차원이 실제로 뒤섞인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직후이니 말이다.
‘어둠그늘 숲, 그렇다는 건 설마 그 녀석들도 있다는 건가?’
도형 머리를 가진 녀석들.
부하로도 부렸었던 녀석들의 존재 여부는 아직 불확실했다.
설령 있다 해도 녀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고.
갈고리가 다 떨어져 있는 이유 역시도 불분명했다.
동력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인커젼이나 기타 무언가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런 게 여기 있다는 건 체크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은 저 갈고리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만져서 좋을 건 없을 물건….”
용주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조용히 사고를 치고 있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응? 만지면 안 되는 거였어?”
수지가 들고 있던 갈고리를 내려놓았다.
“살점에 아프게 박혀 있길래. 빼줬어. 낚싯바늘을 삼킨 것 같아서. 혹시 이거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럽게 운 게 아닐까 싶어서.”
“…어디 뭐 이상한 점은?”
“음~ 딱히 없는 것 같아.”
수지의 말은 딱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수지의 상태창을 봐도 큰 변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여기선 어디로 가야 하는데?”
서윤이 사견궁의 어깨에 팔을 기댔다.
이 녀석, 아까부터 망부석마냥 제자리에 서 있었다.
“기다려 봐.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신경질을 내고 있던 사견궁에게 별 무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다음부턴 내 어깨에 팔 기대지 마. 무례하게 무슨 짓이야?”
얼굴을 붉힌 사견궁이 씩씩거리며 나아갔다.
“저 녀석 왜 저래? 귀까지 빨개져서는.”
“애송이란 거지.”
형만이 안쓰럽단 듯 콧바람을 뱉었다.
뭐, 저 또래의 남자아이면 딱히 이상한 반응도 아니긴 했다.
여성.
그것보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의 스킨십이 부끄럽기도 했을 테지.
“다 들리거든! 따라오기나 해! 이쪽이니까!”
더 크게 씩씩거린 사견궁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 * *
“린!”
복도 끝 홀에 들어선 사견궁이 손을 흔들었다.
홀엔 설녀와 나머지 황도들이 있었다.
황도들은 용주가 봤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다들 하나같이 유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힘든데 뭐 하러 왔어?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놀란 설녀가 두 눈을 깜빡였다.
사견궁을 뒤따라온 이는 드워프가 아니었다.
“어라? 당신들은….”
의문을 품던 설녀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까칠해 보이는 눈매에 날카로운 얼굴.
틀림없이 저 사람은….
“용주 씨?!”
놀란 설녀가 과한 리액션을 보였다.
하마터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정말 용주 씨 맞아요?!”
사견궁을 지나친 설녀가 용주의 뺨을 잡아당겼다.
“이 사람이 설녀?”
‘치… 뭐야? 꽤 청순하게 생겼잖아?’
서윤이 입술을 실룩였다.
아까 그 뱀파이어도 그렇고, 이번에 설녀도 그렇고.
인간도 아닌 주제에 다들 꽤 반반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게다가 왜들 이렇게 용주에게 들러붙느냔 말이다.
“잡아당길 거면 네 볼을 당기지 그러냐.”
용주가 설녀의 손을 치워 냈다.
“아! 좋은 방법이네요. 그것도!”
자기 뺨을 잡아당긴 설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칫…! 린 이 녀석들, 진짜 아는 사람들인 거 맞아?”
사견궁이 용주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를 적대심과 질투심이 함께 느껴지는 그의 눈빛이었다.
“응. 다른 분들은 잘 모르긴 해도, 여기 용주 씨는 확실히 알아.”
설녀가 용주와 함께 온 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 사람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크… 크흠! 그렇다면 그냥 그런 줄 아시라고요!”
버럭 소리를 지른 설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시 베히모스의 울음소리라도 듣고 오신 거예요?”
“묻고 싶은 게 있다.”
“묻고 싶은 거?”
“그래. 혹시 우리 같은 인간들을 목격했다든가, 아니면 어떤 이상을….”
이야기를 이어 가던 용주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느낌은….”
“녀석들이다.”
언노운의 기운이 이쪽으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