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최단 시간에 최단 거리로 주파할 거다.”
짧고 단호하게 중얼거린 용주는 서윤의 손을 놓아 주었다.
“최단 시간에 최단 거리로…? 그러니까 이 자기장 미로를 그냥 뚫고 가겠단 소리야?”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 위험하다고 말한 건…!”
“그래. 내가 말했지. 그러니까 괜찮다고 한 거다.”
서윤의 재방송을 차단한 용주가 안심하란 듯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궤변이야?”
“뭐, 말로 하자면 길다. 복잡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려고?”
“자기장의 효과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다만 효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지.”
용주의 부름에 라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덴의 낙뢰에 직격당한 용주의 몸엔 번개의 고리가 돌고 있었다.
“이열치열. 뭐, 그런 거야?”
“비슷할 거다.”
거짓말이었다.
라이덴의 번개와 자기장의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 가설 이하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거면 적어도 납득 가능한 설명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미래시로 봤던 풍경 속에서 자신은 자기장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심대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목숨을 잃진 않았다.
광폭화 상태라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용주가 이런 도박을 하게 된 건 거기에 근거가 있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틸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의 전문 분야니까.
“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거칠게 몰아세우던 서윤이 어쩔 수 없단 듯 한발 물러났다.
정확한 원리나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용주가 제시한 방법이란 게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혹여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쫓아오지 마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잠시 숨을 고른 용주는 광폭화 상태로 진입했다.
미로 입구로 들어선 용주는 지체 없이 방향을 틀었다.
선택지는 당연 액상 자기장이 없는 루트.
길은 좌우로 길게 뻗어 있었다.
‘지금 속도면 고개를 돌리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언홀리 프렌즈를 발동한 용주는 한층 더 속도를 끌어 올렸다.
점멸을 사용해 뛰어넘은 첫 번째 벽.
자기장 벽을 통과하는 용주에게 강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HP.
‘버틸 만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운 용주는 미로를 관통했다.
눈 깜짝할 새에 미로의 절반을 통과한 용주.
이대로면 별문제 없이 미로를 통과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예상치 못한 일이 찾아왔다.
“저게 뭐야?!”
“미로가….”
지금껏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미로가 격동하고 있었다.
길이었던 곳이 벽이 되고, 벽이었던 곳이 길이 되기도 했으며.
좌측으로 이어지던 길이 우측을 향하기도 했다.
물론, 거기까진 용주에게 커다란 변화점이 아닐 수도 있었다.
통과할 자기장의 수가 달라졌을 수야 엤겠지만, 그런 건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쉽게 통과시켜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하지만 다른 한 가지 변화는 용주에게도 치명적이었다.
오른쪽과 왼쪽.
액체 형태의 자기장은 오직 두 방향으로만 흘렀었다.
방 전체로 놓고 보면 오직 세로 방향으로만 흐르던 물결이었다.
그런데.
오른쪽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방 전체로 보면 가로 방향으로 흐르는, 지금까지 없던 흐름이었다.
“이용주!”
서윤의 외마디 외침과 함께 용주의 모습이 해일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흐르던 자기장이 개울 물 정도였다면, 지금 몰아치는 해일의 크기와 깊이는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보였다.
‘구하러 가야 해!’
몸이 먼저 반응한 서윤은 무작정 미로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때.
“안 돼.”
수지가 서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쫓아오지 말라고 그랬어.”
“그런 말이나 할 때야?”
“쫓아오지 말랬어.”
힘으로 밀고 나가려던 서윤이 순간 머뭇거렸다.
“저길 봐라.”
두 사람에게 다가온 형만이 눈짓을 보냈다.
서윤의 시선은 그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자기장이 들어찬 아쿠아리움.
푸른 물결 속 붉은 무언가가 헤엄치고 있었다.
잘 발달된 지느러미와 날 선 곡선을 그리는 꼬리.
얼핏 보면 미니 모사사우루스처럼도 보였다.
“저건….”
물살을 거스르는 모사사우루스.
틀림없이 저건 용주였다.
지금까지 봤던 용주의 변화랑은 조금 다른 형태긴 했지만….
“무턱대고 끼어들었으면, 애송이의 발목만 잡았을 거다.”
“…….”
움켜쥔 서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1패.
적어도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지는 자신보다 더 용주를 신뢰하고 있었다.
“카각!”
폭발적인 속도로 솟구친 용주는 브로의 조각상을 때려 부쉈다.
흩뿌려지는 파편과 함께 사라지는 물결.
흐릿해지던 미로의 중앙엔 반듯한 길이 하나 생겨 있었다.
‘수영할 계획은 없었는데. 덕분에 진땀 좀 뺐군.’
광폭화를 해제한 용주는 멈췄던 호흡을 내쉬었다.
라이덴에게서 흡수했던 번개는 사라져 있었다.
자기장과 부딪친 전류는 불규칙하게 튀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은 바로 자기장 흡수.
자체적으로 N극과 S극을 가지게 된 자기장은 용주를 중심으로 펼쳐졌었다.
덕분에 물살을 거스르는 게 한결 수월했었고.
하지만 그런 호재가 있었음에도 HP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나중 절반을 지날 때 줄어든 HP가 처음 줄어든 양의 배는 되었다.
뭐, 자기장을 그렇게 시원하게 뒤집어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
히든 게이트에서 이리저리 처맞았던 게 꽤 도움이 됐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대미지를 입었을 테니까.
‘그래도 결과론적으론 다 좋게 된 모양이니. 그걸로 됐어.’
덤으로 해결된 미로.
직통으로 개통된 고속도로를 보던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꽉 막힌 벽처럼 보이던 반대편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전과 마찬가지의 균열이 보였다.
팬텀은 역시 여길 지나갔다.
“이거 오늘만 몇 번 놀라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미로를 건너온 태영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용주의 변화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운 일이었고.
미로를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깨진 차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조만간 앵무새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가만있어 봐.”
가장 먼저 반대편으로 넘어온 수지는 용주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어때? 뭐 큰 이상 있는 건 아닌 거지?”
“응.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벼운 상처는 절대 아니었다.
전신에 흐른 화상 자국도 그랬지만, 세포의 면역 반응에도 이상이 나타나 있었다.
용주의 세포 활성도가 일반인과 달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영구적인 손상이 왔을지도 모른다.
“여긴 아무도 안 남겨 뒀나 보네요.”
태영이 이야기했다.
“남겨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겠지. 이 장치가 있었으니.”
“하긴… 좀비 헌터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저기서 끙끙대고 있었을 거니까요. 그러는 사이 균열은 닫혔을 거고.”
전에 봤던 균열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균열 역시도 작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면.
막상 건너와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따라와라. 먼저 살피고 있을 테니.”
앞서나간 형만이 가장 먼저 차원 너머로 사라졌다.
형만의 뒤를 쫓은 태영은 가벼운 경례와 함께 경계선을 넘어갔다.
* * *
슈우웅!
“아으! 추워! 뭐야, 이번엔!”
피부를 스치는 한기에 서윤이 양팔을 비볐다.
균열을 넘어오자마자 서윤을 반긴 건 한풍과 설원.
바람에는 눈송이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입고 있어라. 당분간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은 용주는 서윤의 어깨에 걸쳐 놓았다.
여기가 어딘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것 같았다.
다른 게 있다고 한다면.
이곳의 하늘 역시도 조각조각 갈라져 있다는 점 정도겠지.
“숨쉬기가 조금 힘들어진 것 같아.”
수지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기분 탓은 아닐 거다. 여기 하늘 위니까.”
“하늘?!”
놀란 서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말이다.
“왜? 고소 공포증이라도 있는 거냐?”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눈을 대충 쓱쓱 쓸어낸 서윤이 신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특별히 푹신하다거나, 말캉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게 막 밟으면 떨어질지도.”
“뭐?!”
바닥을 꾹꾹 눌러보던 서윤이 순간 자리에서 굳어졌다.
“농담이다. 구름 같은 건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 왜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을 하고 그래! 놀랐잖아!”
서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을 그대로 들여다보인 것 같아 더 창피했다.
“그럼 하늘을 나는 섬인 거야?”
수지가 물었다.
“얼추 비슷해. 섬이 아니라 고래인 것만 빼면.”
“고래?”
“그래. 베히모스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데.”
“베히모스…. 혹시 여기서 만났던 사람이 그 설녀란 사람이야?”
“…그래.”
맞췄다고 해서 딱히 엄청난 일은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긴 했지만, 전에 언급한 적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설녀가 있다 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풍경이었으니까.
“혹시 발자국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건 못 찾았네요.”
세 사람이 잠깐의 담소를 나누는 사이.
형만과 태영이 돌아왔다.
태영의 어깨엔 눈이 조금 쌓여 있었지만, 형만은 아니었다.
“설녀 찾아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
“뱀파이어, 놀, 그다음은 설녀인가요?”
태영의 시선이 용주를 향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냐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설녀란 분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나요?”
태영의 물음에 한 가지 소리가 뒤따랐다.
장엄하게 울리는 울음소리.
높고 가늘게 이어지는 메아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의 봉우리.”
울음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던 용주는 걸음을 옮겼다.
얼지 않은 부동호.
이곳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저 호수가 지금 이곳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고 있었다.
* * *
“뭐야? 여기 진짜 산 맞아?”
정상에서 마주한 거대한 분화구.
그 아래를 내려다보던 서윤이 따지듯 물었다.
안쪽은 산이 아니라 우주를 보는 것 같았다.
“건물이 별자리처럼 생겼어.”
수지가 중심부에 있는 건물 몇 채를 가리켰다.
사원처럼 보이는 것을 포함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하나가 별자리 그 자체였다.
“정말 여기 맞는 거지? 설녀라길래 난 당연히 얼음 궁전 같은 데 살 줄 알았는데.”
“저는 좀 더 조촐한 오두막 같은 곳이지 않을까 했고요.”
서윤의 물음에 태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설녀 하면 얼음 궁전이지. 동화도 안 읽어 봤어?”
“제가 알고 있는 설녀는 여행객을 유인해 얼어 죽게 만드는 요괴인걸요?”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생각한 설녀의 이미지에 꽤 차이가 있던 모양이었다.
“내려가자.”
두 사람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보낸 용주는 비탈길을 미끄러졌다.
그 순간.
“샤아아아!!”
흘러가던 은하수에서 한 마리의 뱀이 솟구쳤다.
온몸이 별자리로 이루어진 특이한 생명체.
능숙하게 뱀의 머리를 잡은 용주는 입을 꽉 눌렀다.
“난 네 적이 아니야.”
나지막이 중얼거린 용주는 격렬하게 발버둥 치던 뱀을 놓아 주었다.
은하수로 들어간 뱀은 반대편에 보이는 다른 은하수에서 솟아올랐다.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리고 그 은하수 위에는.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별자리로 된 뱀을 두른 소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