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뭐야, 그 다이얼처럼 생긴 건?”
서윤이 물었다.
“다이얼이다만.”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장난해? 그걸로 뭐 어떻게 하려는 거냐고?”
“뭐, 보면 알 거다.”
어깨를 들썩인 용주는 메모리다이얼의 두 번째 칸을 채웠다.
용주가 선택한 아이템은 ‘골렘의 바위 심장’.
주변 지형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출구는 역시 그쪽으로 하는 게 좋겠지.’
얼핏 보면 미로를 만들었던 지난번보다 훨씬 난이도가 쉬워 보였다.
복잡하게 머리를 쓸 필요도, 트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자기장의 파편이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최대한 여유롭게 길을 내면, 돌발 상황이 있어도 대처할 시간이 있을 거야.’
가야 할 방향을 바라본 용주는 바위 심장을 사용했다.
“보면 알 거라니, 대체 뭐가….”
작아지는 서윤의 목소리.
눈앞에 펼쳐진 현상들은 입이 있다 해도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다.
자기장 아래 잠겼던 집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로 반듯하게 정돈된 지반이 솟아올랐다.
변화가 생긴 곳은 더 있었다.
단단하게 덮여 있던 천장에 커다란 굴이 뚫려 있었다.
솟아오른 지반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굴은 흡사 터널을 연상케 했다.
굴의 일부에선 푸른 자기장이 목격되었는데, 입구를 타고 왔던 자기장이 저기까지 뻗어 있는 모양이었다.
“뭐야, 이게…?”
고개를 저은 서윤이 두 눈을 비볐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놀라운걸요? 전에 언노운을 조종하셨던 것만큼이나요.”
태영이 왼손의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태영이 말한 시점은 훨씬 더 과거였다.
그때 봤던 게 있었기에, 용주가 언노운을 타고 갔을 때도 상대적으로 덜 놀랐던 태영이었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충분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용주의 시선이 형만을 향했다.
“…애송이 주제에.”
말버릇처럼 중얼거린 형만의 주변으로 불씨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불씨들.
앞서 날아간 불씨들은 굴 안을 이미 밝히고 있었다.
* * *
“하아. 정말이지. 무슨 지뢰 찾기 하는 것도 아니고.”
용주의 뒤를 따르던 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주는 실시간으로 길을 새로 정돈하고 있었다.
이걸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조금 갔다 하면, 자기장이 있고,
또 조금 갔다 하면, 어디서 자기장이 불쑥 나타나고.
차라리 지뢰 찾기면 지금보단 더 쉬웠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주변에 지뢰가 몇 개인지 알려 주기라도 하고, 적어도 지뢰가 실시간으로 움직이진 않으니 말이다.
“이거 방향은 괜찮은 거야? 난 어디쯤인지 감도 안 오는데.”
처음 몇 번까지만 해도 그래도 방향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동서남북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어디쯤 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태영이 안심하란 듯 이야기했다.
“꽤 확신에 차 있네?”
“그럼 서윤 헌터는 못 믿으시나 보죠? 좀비 헌터를.”
태영의 한마디에 서윤이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믿어. 당연하잖아!”
목소리에 힘을 준 서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용주를 못 믿는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믿지 못할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전에 좀비 헌터랑 이런 개미굴 같은 곳을 돌아다녔던 적이 있거든요. 제 목소리에 확신이 차 있었다면, 분명 그때의 기억 때문일 거예요.”
가볍게 웃어 보인 태영이 안경테에 손을 올렸다.
모든 것이 그때랑은 달랐지만, 용주의 뒷모습이 주는 안도감만은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러워졌다고 말하는 게 맞을 테지.
“…….”
조용히 용주에게 다가간 수지는 용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귀를 두 번 톡톡 두드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수지.
길을 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용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뭐지?’
그리고.
수지가 느낀 이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뭔가가 밀려오고 있는 것 같은 소리와 진동.
주변 다른 자기장이 내는 소음과 토양을 조작하며 생긴 진동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눈치챘을 이상이었다.
‘설마….’
안 좋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 용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삽시간에 덮쳐 오는 푸른 물결.
형만이 일으킨 불길은 물결을 저지해 보려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료들.
광폭화 상태로 진입한 자신은 그 속에서 모두를 끌어안았고, 전력을 다해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아무도 구할 수 없었다.
HP가 0이 되기 전에 간신히 출구로 나올 수 있었지만, 숨이 붙어있는 건 자기 하나뿐이었다.
‘푸른 액체…. 저것도 자기장의 일종으로 봐야겠지.’
근미래에 일어날 풍경.
최악의 미래를 확인한 용주는 곧장 통로의 형태를 변형시켰다.
변화의 방향은 크게 두 방향으로.
하나는 차오르는 물살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조금 전 보았던 출구까지의 직통 항로의 개통이었다.
거기라면, 물결이 뿜어져 나와도 흘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뛰어!”
거두절미하고 외친 용주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뭐?!”
상황 파악이 덜된 서윤이었지만, 뭔가를 따지고 있기엔 상황이 안 좋았다.
용주는 이미 저 앞까지 튀어 나간 뒤였으니 말이다.
덤으로 수지도.
“뒤처지지 말고 잘 따라와라, 애송이.”
한마디를 넘긴 형만이 먼저 뛰쳐나갔다.
“네. 그럴 생각이에요.”
가볍게 뒤로 뛰어오른 태영이 펼쳐 놓은 실을 밟았다.
로프 반동을 이용해 발사되는 태영.
순식간에 속도를 높인 태영은 서윤을 추월했다.
“가, 같이 가! 나만 두고 가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친 서윤이 속도를 높였다.
‘분명 이런 식으로 했었지?’
태영이 남겨 놓은 실 가닥을 밟은 서윤은 태영이 했던 동작을 흉내 냈다.
새총처럼 발사되는 몸.
피부로 느껴지는 속도감은 제법 신이 나는 정도였다.
‘생각보다 재밌는 기술이잖아, 이거.’
다음 실 가닥을 밟은 서윤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음?’
태영을 거의 따라잡은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영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뭐지?’
앞서 나간 형만이 너무 멀어졌기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서윤은 태영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 뭐야아아아악~!”
멀어지는 서윤의 비명.
반질하다 못해 미끄럽게 가공된 바위 표면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급경사를 그리면서.
* * *
착!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서윤이 안정적으로 착지에 성공했다.
처음엔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라긴 했지만, 코스가 꽤 길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거 하나 못 해서 엉덩방아나 찧는 한심한 모습을 용주에게 보여 줄 순 없지 않은가?
“뭘 꾸물대고 있는 거냐? 이쪽이다.”
서윤의 손을 잡은 용주가 강하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왜 혼자 그렇게 급한 건데? 나도 좀 알….”
제법 경사가 있는 비탈길.
불만의 목소리를 내던 서윤이 급하게 말을 멈췄다.
용주의 얼굴에 피가 흐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야! 너 피….”
“괜찮아. 다쳐서 났던 게 아니니까.”
나지막이 중얼거린 용주는 무리에 합류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태영이 물었다.
지금이라면, 뭐 때문에 이리 서두른 건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면 알 거다.”
또 한 번 지형을 변화시킨 용주는 소리에 집중했다.
두두두두….
머지않아 땅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
푸와아악!
뿜어져 나온 푸른 물결이 용주가 만든 코너를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물의 양도.
물의 세기도 보통이 아니었다.
폭포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온 물결은 암벽을 깎고, 으스러뜨렸다.
“저거… 설마 자기장이야?”
내리막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결을 보던 서윤이 놀라 물었다.
액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저 색깔과 배열은 틀림없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저런 자기장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아니, 애초에 자기장이 어떻게 액체가 될 수 있는 건데?”
서윤이 따지듯 물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걸 저한테 따지셔도….”
“이용주!”
서윤이 강하게 용주를 몰아세웠다.
“카오스 게이트랑 마찬가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어.”
태연하게 받아넘긴 용주는 토벽을 굳건하게 세웠다.
자기장의 물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이야기 말고!”
“진각성이 뭔가 심심하다 했더니만, 다른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지, 애송이.”
형만이 흥미로운 듯 용주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용주에게 일었던 기묘한 마나의 흐름.
형만이 그걸 놓쳤을 리가 없었다.
용주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용주의 마나는 분명 진각성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용주는 그 방대한 마나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용주가 사용하는 그 방대하고 다양한 스킬들에도 용주의 마나는 크게 요동치거나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스킬의 소모값이 마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궁금했었다.
사용하지 않는 건지, 사용하지 못하는 건지.
“딱히 숨겼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능력이라니?”
서윤이 물었다.
“이상하다는 생각 안 했나 보지? 진각성을 경험한 자라면 그 정도 이상은 감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
“그래. 진각성을 하면서 상승한 건 단순 신체 능력만이 아닐 거다. 그렇지 않나?”
“그야… 그렇지? 새로운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거다. 애송이.”
형만이 다 설명했단 듯 대화를 끝내려 했다.
“그거다, 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애송이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 그리고 그거는 무슨 그거야? 하나도 모르겠거든?”
스킬이라고 한다면 용주는 지금껏 다채로운 스킬들을 보여 줬었다.
분명 같이 봤을 텐데?
“마나의 흐름.”
수지가 대신 대답했다.
“마나의 흐름?”
“응.”
“아니. ‘응’이라고 할 게 아니잖아? 좀 더 알기 쉽게 말해 달라고.”
“마나가 줄어들었어. 차원 전개, 백터 조작, 신체 복구, 그런 스킬들만큼이나 큰 폭으로.”
“마나?”
“응. 전에 다른 스킬들을 썼을 때는 요지부동이었어. 그런데 지금 줄어들었어.”
“…….”
서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A급 헌터가 둘이나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건 분명 그렇다는 것일 것이다.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딱히 스킬이라고 할 만한 건 못 본 거 같은데?”
“피눈물.”
“!”
서윤의 머릿속에 좀 전에 봤던 모습이 스쳐 갔다.
분명 용주는 다쳐서 흐른 게 아니라고 했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건 과정이 아닌 결괏값이겠지. 그렇지, 애송이?”
대검을 내려놓은 형만이 잠시 손을 풀었다.
“결괏값으로 피눈물을 흘린다고? 그럼 그 과정이란 건 뭔데? 네 능력 말이야.”
“저도 꼭 듣고 싶은걸요? 좀비 헌터의 진각성에 대해서요.”
태영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근미래에 벌어질 일을 볼 수 있다.”
딱히 뜸을 들이지 않은 용주가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진 대답이었다.
“근미래에 벌어질 일을….”
“볼 수 있다고요?”
용주의 말을 되읊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잠깐만, 진짜야? 그런 게 진짜 가능하다고?!”
“미래시라…. 신의 힘이라 불리는 S급 헌터들의 능력이랑도 견줄 만하겠는데요?”
맹렬하게 반응하는 서윤과 침착하게 분석하는 태영.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지만, 그 근원적인 부분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