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 * *
“젠장! 앞에 또!!”
세 사람이 일렬도 서기도 벅찬 좁은 복도.
정신없이 달리던 서윤이 다급하게 외쳤다.
복도의 반대편에서 푸른색의 장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위에 다른 길이 있는 것 같은데요!”
태영이 동굴 위쪽을 가리켰다.
“위? 어디?”
“제가 앞장설게요. 따라오세요!”
실 가닥을 펼친 태영이 허공을 달렸다.
태영의 뒤를 따른 용주 일행은 천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또 다른 통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환풍구도 아니고, 대체 여기 이런 게 왜 있는 거야?”
서윤이 따지듯 물었다.
“전에 언노운이 뚫어 놓은 굴에도 비슷한 게 있었어요.”
“언노운?! 잠깐만. 그럼 이것도 언노운이 만든 거란 거야?”
“글쎄요. 저도 거기까지는 잘….”
걸음을 계속한 일행은 넓은 공터를 마주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본 태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지금이라면 잠깐 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해 줬으면 하는데. 아까 그 파란 거 뭐야? 뭔데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고 한 건데?”
허리춤을 짚은 서윤이 물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처음 마주한 풍경은 꽤 익숙했다.
E급 D급의 카오스 게이트에서 흔히 보는 개미굴 구조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마주한 게 조금 전과 같은 파란 벽이었다.
벽이라곤 했지만, 정확한 묘사는 아니었다.
그건 반투명했고, 물결치듯 일렁거리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움직였다.
용주는 그걸 보자마자 달리라고 소리쳤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기장이다.”
“자기장?”
“그래. 지금으로선 피하는 게 최선이다. 닿아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이곳의 기본 베이스는 분명 하이에나 소굴이었다.
골드록을 비롯한 놀들이 있던.
용주가 가장 처음 마주했던 퀘스트 게이트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곳엔 자기장의 땅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자기장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인커젼.
세계가 충돌하면서 두 세계가 교묘하게 뒤섞였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때 자기장과 지금 자기장은 100% 동일하지 않았다.
그때에 비하면 이곳에 있는 자기장은 파편처럼 작았고, 무한히 영역을 축소해 가기보다는 불규칙적으로 확장되었다 축소되는 듯 보였다.
“아니. 자기장이라고 해봤자 위험하다는 느낌이 확 와닿지가 않는데. 저게 정말 그렇게 위험한 거야?”
“전에 저런 자기장이 있는 섬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 섬에 생존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그런….”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한 적들의 숫자는 소수에 불과해. 대부분은 저 자기장이 알아서 처리해 줬지.”
마른침을 삼킨 서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이시우인가 뭐시긴가 하는 녀석만 있었어도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것 같은데. 왜 필요할 땐 또 없는 거야?”
잘은 모르지만, 자기장은 전류와 관계가 있지 않은가?
전류 하면 또 그 녀석이었고.
그런데 어째선지 시우는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모두 같은 곳으로 이어진 걸로 봐서 혼자만 다른 곳으로 튀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마지막에 뭔가 발목이라도 잡힌 건가?
“문제라고 하면 팬텀을 찾는 것도 일이겠네요.”
태영이 턱 끝을 짚었다.
TF의 눈이 사라진 지금 적을 추적하는 건 전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여긴 누가 있었어?”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지가 물었다.
아직까진 자기장 말고 다른 무언가를 만나지 못했었다.
“놀들이 있었지.”
“놀?”
“하이에나나 늑대처럼 생긴 상상 속 이종족이에요. 늑대인간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닐 수도 있고요.”
태영이 부가 설명을 했다.
뱀파이어에 이어 다음은 놀이라니.
무슨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음 그럼 놀들 중에도 친구가 있던 거야? 여긴 누가 살아?”
“아니, 아쉽게도 놀들 중엔 그런 친분을 쌓은 녀석은 없었다. 애초에 말이 통하지도 않았었고.”
테레사의 도움과 같은 도움은 여기선 기대하기 힘들었다.
브로의 경우엔 놀과 달리 대화가 가능하긴 했지만….
놀도 브로도 살아 있다 한들 아군이라 할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
형만이 걸음을 뗐다.
“움직이는 건 좋은데, 어디로?”
“무작정 움직이는 것도 방법이긴 하죠. 여기 가만히 있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서윤의 물음에 태영이 대신 대답했다.
형만도 분명 그런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자기장이 있던 섬에서 혼자 살아남았다고 했지? 거기 있던 놈들 중 일부는 네 손으로 처리했다고.”
용주를 흘겨본 형만이 물었다.
“그래.”
“그럼 여기 있는 녀석들도 적이라 판단해도 되는 거겠지?”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녀석들의 특성은? 가령 위험을 감지하면 도망간다든가, 이길 수 없는 적이라도 달려들고 본다든가.”
“위험을 감지하면 도주하거나 무리를 부를 거다. 개중에는 동족을 포식하는 상위 개체가 있을 수도 있지. 그런 녀석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다.”
“그렇군. 그럼 답은 간단하지. 우린 그 놀이란 녀석들을 찾으면 된다.”
“놀? 왜? 그 녀석들 적이라며. 게다가 말도 안 통한다고 하지 않았어?”
서윤이 물었다.
녀석들을 만난다 한들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꼭 살아 있는 녀석들을 만날 필욘 없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은 자는 많은 것을 말하지. 만약 놈들 중에 팬텀의 손에 찢긴 녀석들이 있다면….”
“아!”
서윤이 손뼉을 부딪쳤다.
형만의 생각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 *
“이놈도 글렀어.”
놀의 유해를 살피던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장에 당한 놀들은 대개 바짝 타거나, 미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이 녀석도 그중 하나.
성과는 여전히 제로였다.
“그쪽은 좀 어때?”
서윤의 시선이 용주를 향했다.
용주는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저쪽으로 간 거 같은데, 일단은.”
“저쪽?”
용주가 가리킨 곳을 본 서윤은 다시 용주가 살피던 곳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흩뿌려진 자국이 심상치 않았다.
뭐랄까?
거대한 포식자가 머리통을 물고 잡아 흔든 것 같았다.
“저기! 저기 보세요!”
단서를 쫓던 태영이 먼 곳을 가리켰다.
갈림길이었다.
“발자국 같은 흔적이 남아 있을 만도 한데, 그런 건 영 안 보이네.”
어깨를 들썩인 서윤이 용주를 바라보았다.
“어쩔까? 둘로 갈라질까?”
“아니. 일단은 왼쪽으로 간다.”
용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음? 왜? 뭐라도 찾았어?”
“찾긴 찾았지. 만나면 안 될걸.”
“만나면 안 될 거?”
까치발을 든 서윤이 좀 더 집중했다.
불긋불긋 날아다니는 빛 사이로 희미한 자기장이 보였다.
“저기! 저기 보세요!”
갈림길을 지난 태영이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반응은 같았지만, 그가 찾은 건 전과 같지 않았다.
“마을이잖아?”
“폐허.”
이번에 발견한 건 어느 마을의 폐허였다.
서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중심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고성이 있었다.
“이거, 규모가 엄청난데요?”
마을 안으로 들어선 태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단순 사이즈만 놓고 보면, 뱀파이어가 살던 저택과 정원보다도 더 넓은 부지였다.
“여기 동물 사체 있어.”
수지의 부름에 용주가 가장 먼저 달려갔다.
수지가 발견한 건 코도였다.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걸로 봐서 죽은 지 한참 지난 모양이었다.
“이건 뭐라고 불러?”
“코도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말처럼 타고 다니는 운송 수단이었지.”
코도의 유해를 살피던 용주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가죽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최근에 생긴 상처로 보였다.
‘브로는 아니야. 녀석들은 도구를 쓰고, 무엇보다 전멸했으니까.’
팬텀 역시도 당연하게 배제된다.
그럼 남은 건….
“…….”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른 용주는 부서져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용주를 감싸는 묘한 적막감.
위이잉!
용주에게서 날아오른 착취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삐그덕…!
낡은 나무 바닥을 딛고 달려 와인 전시대를 걷어찼다.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전시대 사이로 뛰쳐나오는 움직임들.
“크르릉!!!”
무리를 이룬 놀들은 사방에서 용주를 덮쳐 오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한발 늦었어.”
테이블을 딛고 뛰어올랐던 놀들이 순식간에 격추당했다.
피범벅이 된 채 널브러진 놀들.
흡혈을 마친 착취의 무리는 맹렬한 기세로 놀들을 쓸어 담았다.
전투력의 차이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놀들은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제압되었다.
“여기가 마을의 끝인 것 같은데….”
마을의 반대편에 도착한 서윤이 팔짱을 꼈다.
앞쪽은 분지가 동그랗게 파여 있을 뿐, 사방이 막혀 있었다.
“뭔가 차 있어. 푸른색.”
“자기장처럼 보이는데요?”
인도네시아의 카와이젠 화산에 가면 푸른색 용암이 흐르는 비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저기 보이는 자기장은 흡사 그것처럼 아름다웠다.
“이쪽으론 안 온 것 같지? 놀들도 살아 있었고,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아무래도 길은 반대편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지금쯤이면 자기장이 사라졌을지도?
“돌아가자.”
몇 걸음을 옮기던 서윤이 다시금 되돌아왔다.
다들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뭔데? 왜 그래?”
서윤이 다시 분지를 내려다보았다.
중간 정도를 찰랑이던 자기장의 수위가 상당히 올라와 있었다.
“이거 어째 느낌이 안 좋은데요? 올라오는 속도가 심상치가 않아요.”
“같은 생각이다.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좋겠어.”
걸음을 서두른 용주 일행은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
선봉에 섰던 용주가 급히 멈춰 섰다.
입구 쪽에서 자기장이 밀려오고 있었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는걸요?”
“안 좋은 소식 하나 더 있어.”
“하나 더?”
태영의 물음에 수지가 발밑을 가리켰다.
희미한 무언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거 설마….”
“자기장이야?”
급하게 움직인 일행은 근처에 있던 폐건물 테라스로 대피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까 그 속도면 넘칠 때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은 거 아니었어? 아니, 애초에 자기장이 넘친다는 게 말이 돼? 무슨 액체도 아니고.”
서윤이 따지듯 물었다.
“어쩌면 그쪽 자기장 조각과 이쪽 자기장 조각이 별개의 파편일지도 모르지.”
난간을 짚은 용주가 아래를 살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일단은 좀 더 고지대로 이동하는 게 좋겠다. 여기까지도 금방 차오를 거야.”
용주의 시선에 태영이 길을 열었다.
목적지는 마을 중심부에 위치한 두 개의 고성.
여기서 그나마 발 디딜 수 있는 가장 고지대였다.
“이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아래를 내려다보던 서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침수 피해를 당한 도시마냥 건물들은 지붕만 간신히 보였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을까 싶었다.
정면에서 밀고 들어온 자기장은 입구 근처에 있던 건물들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굴이라도 팔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수지의 물음에 서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발판 만들 수 있잖아. 천장 뚫으면 길 생길 거야.”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고. 천장이 뭐 그렇게 간단하게 뚫릴 줄 알아? 게다가 그렇게 생각처럼 예쁘게 뚫릴 것 같아? 와르르 무너져서 다 깔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형만 아저씨가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동그랗게 파이긴커녕 무너져 내릴 거라니까? 게다가 불에 달궈진 돌 사이를 어떻게 지나가려고? 아궁이 속에 들어가기라도 하자고?”
“그럼 다른 방법 있어?”
“그건….”
수지의 방법이 말이 안 된다는 건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안을 제시하기엔 뾰족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것보다야 뭐라도 해보는 게 낫기야 하겠다만….
“이용주. 어때? 아무 방법이라도 생각한 거 있어?”
“글쎄.”
“그런 소리나 할 때야? 지금 한시가 급하다고.”
“차선책이라고 한다면, 역시 수지의 제안대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이야? 진짜로 천장을 날려 버리자고?”
“뭐, 천장을 날려 버리잔 소린 아니야. 내가 동의한 건 굴을 파자는 의견 쪽.”
“그럼 뭐, 숟가락 탈옥수라도 되잔 소리야?”
서윤이 팔짱을 꼈다.
칼로 드륵드륵 긁어서 어떻게 할 사이즈는 절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인벤토리를 연 용주는 다시 한번 메모리다이얼을 꺼냈다.
여길 구성하고 있는 건 토양과 암석.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빠져나갈 길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