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전부 먹어 치워. 새하얀 뼈만 남을 때까지.”
슬로스의 손을 떠난 벌레의 폭풍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키힛!”
자신의 몸에 번개를 두른 시우는 정면에서 폭풍을 관통했다.
시우가 지나는 발걸음마다 떨어진 벌레들은 고압에 전류에 타들어 갔고,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벌레들은 사지가 절단되어 나뒹굴었다.
“어디 짜릿짜릿하게 놀아 보자고. 변신인지 변태인지 모를 나으리.”
“탈태야.”
“아~ 그러셔?”
쉰 안쪽으로 파고든 시우가 검을 휘둘렀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시우의 검은 한 자루뿐이었다.
나머지 다른 한 자루는.
슬로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펼친 절대 방어. 그럼 위는 어떨까?’
작은 스파크에서 시작된 번개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떨어진 검을 받아든 시우는 곧장 공격으로 이어 갔다.
맹렬하게 내리친 번개는 쉰의 영역에 진입하자마자 힘을 잃어버렸다.
“어블레이즈 소드 (Ablaze sword).”
수호의 영창이 끝나자 원 오브 아이의 칼날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벌레 새끼들 주제에…!”
수호가 그리는 궤적을 따라 타오르는 열기가 뻗어 나갔다.
지지직…!
타닥타닥…!
열기에 직격당한 벌레들은 화마에 휩싸였고, 열기가 지난 자리는 텅 비어 갔다.
수많은 궤적을 그린 수호는 속도를 높였다.
“깔끔하게 한 방 먹여 주지.”
칼날을 가지런히 모은 원 오브 아이의 중심부로 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응집된 힘은 파장을 일으켰고, 하얀 구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거리를 좁힌 수호는 슬로스에게 바짝 파고들었다.
우연인지, 노린 건진 모르겠지만, 시우는 수호에게 완벽한 각도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아이 오브 더 매드니스(Eye of the madness)!”
확산하는 파동.
강렬한 빛을 발한 구체는 일대의 풍경을 모두 하얗게 물들였다.
키이이잉!
이윽고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
위험을 경고하듯 울리던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는 파동 속에 바스러졌다.
“크윽…!”
몸 전체를 관통하는 충격.
바람만 불어도 칼에 베인 듯 아프다는 통풍처럼.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스톰 브레이커!”
하얀 빛 속을 때리는 뇌성.
하나로 이어 붙인 검을 고쳐잡은 시우는 번개와 함께 내리꽂혔다.
사방으로 뻗어 나갔던 번개는 다시 시우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또 한 번의 뇌성.
연이어 터지는 공격에 휘청이던 슬로스는 두 사람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냈다.
그리고.
“프레데터 플랜츠 – 스콜하티.”
두 개의 꽃봉오리를 피워 냈다.
봉오리에서 시작되는 붉은빛.
빛에 닿은 피부에는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이 올라왔고, 손등을 비롯한 곳곳에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타올라라! 전부 없애 버려!”
빛과 함께 퍼져 나간 붉은 나방들.
원을 이루던 나방들이 일제히 용오름을 치며 날아올랐다.
재빠르게 빛을 벗어난 수호와 시우는 살아 움직이는 용오름 사이를 누볐다.
그 순간, 일어나는 강렬한 화염.
모든 것을 태워 버린 불의 소용돌이는 아래에서부터 빠르게 사라졌다.
“끝났군.”
승리를 확신한 슬로스가 가위를 덮었다.
“피곤해. 그것도 엄청나게. 금방 다시 잠들 수 있겠지.”
뒤로 돌아선 슬로스는 차원의 일렁거림을 살폈다.
그 넓었던 차원의 균열은 이제 손바닥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이젠 방해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숨을 깊게 들이마신 슬로스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
그 순간, 느껴지는 섬뜩한 감촉.
시야 끝에 걸친 단 하나의 상을 캐치한 슬로스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스윽!
반듯하게 잘려 나가는 스콜하티.
두 발로 슬로스의 목을 조른 수호는 그 반동 그대로 녀석을 집어 던졌다.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마, 벌레 새끼. 자기 싫어도 금방 재워 줄 테니까.”
거침없이 몰아치는 수호의 참격.
수많은 자상을 선사해 준 원 오브 아이의 곁으로 다시 한번 파동이 모여들었다.
반 이상 눈을 감은 원 오브 아이는 여기저기가 조각조각 갈라져 있었고, 파동이 만드는 작은 흔들림에도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 오브 더 매드니스!!”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일점에 집중시킨 수호의 일격.
직접적으로 슬로스의 명치에 욱여넣은 파장은 슬로스의 갑옷을 조각조각 냈다.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다고….”
슬로스의 가위를 타고 오르는 가시넝쿨.
“하지만 부족해. 네 힘으론 매듭을 지을 수 없어.”
강산성으로 코팅된 가위 날은 그대로 수호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잘라 내려는 자와 버텨 내려는 자의 목숨을 건 줄다리기.
원 오브 아이가 바스러질수록 수호의 몸을 강화하던 언리시 블레이딩의 효과도 차차 약해져 갔다.
칼날 같던 수호의 몸에선 피가 흘렀고, 산성에 녹아내린 피부는 눌어붙으며 쪼그라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유례없던 번쩍임과 함께 벼락이 내리꽂혔다.
날개를 펼친 슬로스는 빠른 속도로 날개를 마찰시켰다.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번개를 보란 듯이 피해 보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왼쪽 날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뇌에서 가는 전기 신호가 끊어진 것 같았다.
“키힛!”
신체 불균형으로 틀어진 슬로스의 무게 중심.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은 시우는 슬로스의 양 날갯죽지를 내려찍었다.
“매드니스 x 매드니스. 즐길 만큼 즐겼으니, 슬슬 끝을 보자고.”
쿠르릉…!
한발 늦게 따라오는 소리
열두 개로 갈라진 번개는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리고.
“썬더 매드니스!”
다시 한 점으로 모여든 번개가 슬로스의 몸에 그대로 직격했다.
수호와 시우의 완벽한 협공.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둘이 만든 이 일격은 승부의 마침표를 찍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으윽… 으아아악!!!”
조각조각 갈라지는 슬로스의 갑주.
번개와 충격파가 부딪치며 일어난 폭발은 두 사람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려 버렸다.
슬로스의 깨진 갑주 아래론 리히텐베르크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
땅을 길게 베며 멈춰 선 시우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로 날아갔던 슬로스의 가위가 땅에 수직으로 박히는 게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맷집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 그때 싸웠던 프라이드란 녀석보다도 한 수 위겠어.’
슬로스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의 주변으론 여러 곤충들과 식인 식물들이 널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스킬이 파괴되며 남은 잔해들인 모양이었다.
시야를 좀 더 넓인 시우는 수호의 상태를 살폈다.
원 오브 아이와 이그노얼 나이트메어.
그가 발동했던 두 가지 스킬은 발동을 멈췄고, 그의 호흡 역시 상당히 불안정했다.
일어나려다 몇 번이고 쓰러지는 걸로 봐서 다리가 맘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녀석은 이제 한계야. 남은 건 내 손으로 마무리 짓는 수밖에.’
시우가 검을 굳게 쥐었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전류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때.
위잉!
지지지징! 지징!
슬로스의 주변에 널려 있던 날벌레들이 갑작스럽게 활동을 재개했다.
벌레들의 위협적인 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식인 식물들 역시 포악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안 돼. 가만있어!”
당황한 듯 보이는 슬로스가 강한 명령조로 외쳤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벌레와 식물들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격렬하게 날뛰고 있었다.
‘뭐야, 저거? 왜 저래?’
슬로스의 태도만 아니었어도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아니었다.
슬로스의 손바닥에서 기어 나온 수많은 벌레들은 그의 팔을 점점 잠식해 갔다.
흡사, 바위틈에 빼곡하게 달라붙은 다슬기 무리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명령이야!”
다급하게 외친 슬로스는 벌레들을 긁어냈다.
하지만 벌레들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나무 하나를 끊어 낸 슬로스는 다시 한번 벌레들을 긁어냈다.
떨어져 나온 벌레들은 저마다 슬로스의 피와 살을 씹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땅에 박힌 가위를 뽑아 든 슬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
힘없이 떨어지는 슬로스의 손.
자기 손으로 자기 손을 잘라 낸 슬로스의 표정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난 너희 주인이야! 너흰 내 능력에 불과하다고!”
이걸로 된 거라고.
슬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잘려 나간 손목에선 조금 전보다 더 많은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날개를 펼친 벌레들은 슬로스의 몸 여기저기에 들러붙었고, 침을 질질 흘리던 식인 식물들 역시 슬로스의 팔과 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하지 마! 하지 마아아악!!”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
슬로스를 먹어 치우는 벌레들의 모습은 재앙이라 일컬어지는 메뚜기 떼를 연상케 했다.
“…….”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날뛰던 벌레와 식물들이 놀라울 만큼 잠잠해져 있었다.
식물은 전부 메말랐고, 벌레들은 수명이 다한 듯 뒤집혀 죽어 있었다.
“이건 좀 비참한데.”
참상의 중심지에 선 시우가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부리던 것들에게 삼켜진 슬로스는 앙상한 해골만 남아 있었다.
“마나를 공급해 주던 숙주의 힘이 약해지자, 먹이를 찾아 숙주를 잡아먹은 건가?”
검을 집어넣은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벌레들이나 할 수 있는 1차원적인 생각이네. 숙주가 죽으면 다음은 자신들일 거란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지?”
작은 소리와 함께 슬로스의 두개골에 균열이 생겼다.
빠른 속도로 바스러지는 해골.
바스러진 뼛가루는 한 자리에 소복이 쌓였다.
마지막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이형 리액터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바스러졌다.
자연적인 형태의 인간이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이었다.
“어이. 언제까지 그렇게 퍼질러져 있을 거냐?”
수호에게 다가온 시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퍼질러져 있긴, 누가.”
수호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키힛! 이 승부, 내가 이긴 거 맞지?”
“하! 웃기지 말라고.”
“에이~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지나가던 개미한테 물어봐도 내가 이겼다고 할 거라고.”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은 건 벌레 새끼들이었다. 뭐, 너도 그 벌레 새끼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면, 그건 인정해 주지.”
두 눈으로 볼 순 없었지만, 슬로스의 최후가 어떤지는 알 수 있었다.
비참한 최후 중에서도 그 정도면 기네스감이겠지.
“그나저나 누가 내 스킬 이름 따라 하래? 매드니스. 그건 내 아이덴티티라고.”
시우가 다른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먼저 사용한 건 나다, 멍청아. 따라 한 건 너겠지.”
“에이~ 그건 이번 전투에서만 그런 거지. 어디 따져 볼까?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
“…칫!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게 하지 마라. 안 그래도 지금 충분히 머리 아프니까.”
수호의 마나는 여전히 활동 중이었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온몸에 퍼진 독의 중화.
의료 헌터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효과적으로 독을 제거할 순 없었지만, 스킬에 기인한 피해인 만큼 어느 정도의 대처는 할 수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완치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
어깨를 들썩인 시우는 차원의 균열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틈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따라가긴 글렀네. 완전히 막혀 버렸어.”
“일이 끝나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적어도 한 명은 여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오~ 이런 상황에서도 꽤 여유롭잖아? 일리 있네.”
신발 밑창으로 땅을 대충 슥슥 문지른 시우가 대자로 뻗어 버렸다.
“뭐 하는 거냐?”
“뭐~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이럴 땐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게 최고라고. 재미없는 네 목소리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들을 수 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텐데 말이야.”
“계속 그렇게 퍼질러 있으시겠다?”
“왜? 뭐 따로 할 것도 없잖아?”
“…….”
아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이상 뭐라 트집 잡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넌 왜 독효가 나타나지 않는 거냐?”
주제를 돌린 수호가 물었다.
“아~ 그거야 뭐, 한 모금도 안 마셨으니까. 피부에도 양보 안 했다고.”
“안 마셨다고?”
“독을 사용하는 언노운이야 수없이 만나 왔으니까. 분자를 흔들어서 결합 구조를 틀어 버리면 대부분 좋게 끝나더라고.”
“그 상황에서 잘도 그런 잔재주를 부렸군.”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마나, 순발력, 판단력.
기타 다른 부분의 잣대를 대어 봐도 이 녀석은 강했다.
녀석이 같이 남아 주지 않았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잔재주도 다 실력이라고.”
팔베개를 한 시우가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 따라 흩어진 뼛가루는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