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아파. 방금 그거 엄청나게 아팠어.”
슬로스가 왼손을 휘감은 넝쿨들을 잘라 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시원하게 머리를 적신 슬로스는 마나를 폭발시켰다.
“프레데터 플랜츠 - 라그나로크!”
격렬하게 요동치는 대지.
쏟아지는 식물들의 잔해 사이로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맘대로 하게 둘 줄 알고?”
수호는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잠깐잠깐, 원래 변신할 때는 기다려 주는 게 예의라고.”
그런 수호의 앞을 시우가 가로막았다.
“너 이 자식…! 누구 편이냐, 대체!”
“뭘 당연한 걸 물어? 난 당연히 내 편이지.”
원 오브 아이가 그리는 참격을 날렵하게 피한 시우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는 사이 지상에서 날아오른 물체가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휘우~ 저게 뭐야?”
모습을 드러낸 건 비공정이었다.
오로지 식물로만 이루어진 비공정.
비공정의 뱃머리에 선 슬로스는 다시 한번 악기를 엮어 냈다.
이번에 엮은 악기는 바이올린이 아닌 콘트라베이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포문을 연 비공정은 지상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다.
폭발하는 물과 진액.
몇몇 포탄엔 맹독성 물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 이번엔 리얼 제대로 된 방주잖아? 꽤 멋진데? 라그나로크라면 종말 신화 같은 거든가? 그때 살아남을 방주나 뭐 그런 건가?”
“너 때문에 일만 복잡해졌잖아!”
입안에 비릿한 아몬드 향이 돌았다.
콧구멍 안쪽과 목구멍에서도 이상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원인은 필히 방금 마신 독에 있겠지.
공기 중에 퍼진 독성만으로 이 정도.
상황이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크큭!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좀 더 재밌어졌을 뿐이잖아? 결과는… 절대 변하지 않아.”
가볍게 뛰어오른 시우의 몸으로 전류가 모여들었다.
“라이트닝 서커스.”
빛의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가는 번개.
서로 얽히고, 퍼지며 물결치는 번개는 마치 레이져 쇼를 보는 것 같았다.
예측 불가능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번개는 배의 옆면을 강타했다.
쾅! 콰과과광!!
이윽고 이어지는 연쇄 폭발.
포문을 열었던 식물 대포 중 일부는 화마에 휩쓸려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어디 제대로 한번 놀아 보자고!”
씨익 웃어 보인 시우가 뇌성과 함께 사라졌다.
시우가 나타난 곳은 비공정 위.
두 개의 검을 공중에 띄운 시우는 슬로스를 내려다보았다.
“라이트닝 볼텍스!”
천지를 찢는 진동과 함께 나타난 한 마리의 뇌수.
이빨을 드러낸 뇌수는 그대로 비공정을 향해 떨어졌다.
“번개, 시끄러워. 눈부셔. 싫어.”
뇌수가 떨어지기 직전.
비공정의 정 중앙에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비공정 위로 떨어지는 끈적한 수액.
수액의 정체는 바로 고무였다.
“고무를 뒤집어쓴다라. 키힛! 확실히 그거면 전기 저항을 높일 수 있긴 하지.”
시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임기응변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근데, 뭐 만화를 잘 못 본 거 아니냐? 고무를 뒤집어썼든, 고무로 된 인간이든 벼락을 맞으면 다 죽는다고. 왠지 알아?”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작렬하는 뇌수.
“전류를 피하면 열이 찾아오거든.”
번개에 직격당한 비공정 여기저기에서 화마가 피어올랐다.
고무 타는 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검은 연기가 끝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진화에 나선 슬로스는 당연하단 듯 물을 쏟아 부었다.
불은 물로 꺼야 한다는 1차원적인 계산이었다.
“전도율을 떨어뜨린다고 고무를 감더니, 이젠 물을 들입다 붓는 거야? 똑똑한 거야, 멍청한 거야?”
비공정의 가장 높은 곳에 착지한 시우가 검을 붙잡았다.
“이봐. 내가 문제 하나 내줄까?”
쪼그리고 앉은 시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 배엔 지금 폭탄이 실려 있어. 비공정 전체를 날려 버릴 만큼 거대한 폭탄이야. 그 폭탄이란 지금 어디 있을까?”
“…….”
입을 꾹 다문 슬로스는 조용히 곤충들을 풀어 놓았다.
이건 아까 이그노얼 나이트메어에 찢긴 벌레들과는 결이 달랐다.
이건 슬로스가 몸 안에서 키우고 있는 벌레의 일부.
손바닥에 위치한 작은 입에서 나온 장구벌레들은 물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어난 지 불과 몇 초 만에 번데기가 된 장구벌레.
우화를 준비하는 이 모기들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변이시키고 변이시켜 가지고 있는 개체들이다.
한 방울 주입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작은 살인마들은 피를 갈망하고 있었다.
“땡! 타임 오버야! 정답은 바로….”
정박으로 10번 발을 구른 시우가 비공정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
산소와 수소로 분해된 물을 지난 스파크는 순식간에 비공정을 날려 버렸다.
“발밑이었지.”
자유 낙하 하는 시우.
그런 시우와 교차하며 뛰어오른 수호는 고속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블레이드 스톰.”
화염 속을 치고 들어간 수호는 정확히 슬로스를 강타했다.
응집시킨 나무 갑옷과 벌레 방패.
두 가지 수단을 동원한 슬로스는 수호의 공격을 막아섰지만, 대미지를 전부 상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커스팅 템피스트!”
맹렬한 회전으로 슬로스의 모든 방어 수단을 무력화시킨 수호는 자연스레 다음 공격으로 이어 갔다.
초근접에서 몰아치는 거침없는 참격.
바람 소리보다도 반 발 빠르게 앞서나간 참격은 슬로스를 일방적으로 찢어발겼다.
“이 승부. 내가 가져가지.”
날 선 칼날을 높이 들어 올린 원 오브 아이가 마지막 일격을 내리찍었다.
사선으로 내리꽂힌 슬로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물처럼 펼쳐진 전기 파리채였다.
“누가 보고, 다시 봐도 내가 이긴 거 같지? 축하해. 벌레 1일 차.”
이빨을 드러낸 시우가 키득거렸다.
“하! 뭐라는 거냐, 벌레 자식이.”
어이없단 반응을 보인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승부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이 녀석과의 승부도.
슬로스와의 승부도 말이다.
“녀석은 내가 회수한다. 길드와도 이미 이야기된 거다.”
두어 걸음을 옮긴 수호의 발걸음이 다시 멈춰 섰다.
“…….”
일대를 뒤덮던 숲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상이 생긴 건 숲만이 아니었다.
꺼져 가던 슬로스의 마나가 석유를 부은 듯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워…. 아파…. 뜨거아파!!”
고통스러운 슬로스의 울부짖음.
“프레데터 플랜츠 - 발드르!”
울부짖음을 따라 울려 퍼지기 시작한 음악 소리는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뒤틀린 음악 소리의 정체는 벌레들이 슬로스의 몸 여기저기서 기어 나오는 소리.
몸 안에서 나온 벌레들이 순식간에 슬로스를 뒤덮었고, 모든 숲의 양분을 빨아먹은 날카로운 가시들이 슬로스의 몸을 꿰뚫었다.
가시를 타고 오른 수많은 넝쿨들은 거대한 번데기를 만들었다.
“칫…!”
시우를 흘겨본 수호는 전속력으로 미끄러졌다.
녀석이 하려던 게 뭐든 간에 완성시키기 전에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휘이익! 쾅!!
슬로스가 한 발 더 빨랐다.
지면을 뒤엎는 넝쿨손을 베어 내며 뛰어올랐던 수호는 이어지는 섬광을 맞고 날아갔다.
섬광의 진원지는 번데기를 감싼 세 개의 식물.
나방처럼 잎을 펼친 식물들은 수호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게 말했잖아? 변신할 땐 기다려 주는 게 예의라고. 규칙을 깨니까 그렇게 한심하게 얻어터지지.”
자리를 옮긴 시우가 어깨를 들썩였다.
우화를 마친 번데기는 꽃이 피듯 입을 열고 있었다.
“내 잠을 깨운 걸 후회하게 해줄게. 너흰 날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어.”
완전히 변해 버린 슬로스의 목소리.
슬로스에게선 더 이상 전과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는 색을 잃어 하얗게 새 있었고.
한 쌍의 곤충의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눈을 가린 붉은 V자 가면은 곤충의 겹눈처럼 잘게 쪼개져 있었는데, 사람의 눈으론 감지할 수 없는 여러 방향의 풍경들이 동시에 맺히고 있었다.
기본적인 신체적 특징도 크게 변화했는데, 수호나 시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여리여리하던 체형이 두 사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크고 날렵해졌다.
식물과 벌레가 뒤엉키고 압축되어 만들어진 갑옷은 기괴했고 또 섬뜩했다.
“휘우~ 이번엔 진짜 변신했잖아?”
휘파람을 부는 짧은 순간.
날개를 펼친 슬로스는 시우의 눈앞까지 날아들었다.
“변신이 아니야. 탈태한 거지.”
시우의 면상을 후려갈긴 슬로스는 지체 없이 시우를 따라붙었다.
들고 있던 가위를 펼친 슬로스는 1초 만에 다섯 번의 가위질을 선보였다.
조금 전까지 시우가 있던 자리엔.
자신이 남긴 다섯 번의 상처만이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키힛. 놀랐어. 설마 그 정도로 속도를 끌어 올렸을 줄이야. 역시 다리는 길고 봐야 한다니까?”
번개와 함께 나타난 시우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여유를 보이는 시우였지만, 그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 땀 한 방울은 조금 전 상황이 결코 여유롭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포인트는 그게 아닐 텐데.”
“농담이야. 저 녀석 꽤 강해졌어. 힘도 속도도.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변했어.”
“다 누구 때문인데.”
“크크큭. 그런 얼굴 하지 마. 말했잖아? 과정이야 어찌 되든 결과는 변함없다고.”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다음번엔 진짜로 목이 날아갈 거다.”
“여유는 강한 자의 특권이야. 내가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지.”
“하! 그냥 멍청인 줄 알았더니, 아주 상멍청이였군.”
두 사람의 짧은 대화 사이로 슬로스가 치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휘감는 갈색 넝쿨.
작은 움직임만으로 넝쿨을 잘라 낸 수호는 가위의 왼쪽 하단부를 올려 쳤다.
팡!
분리되어 날아가는 칼날.
날아가는 칼날을 붙잡은 슬로스는 자연스럽게 공격을 이어 갔다.
가위를 구성하고 있던 건 애초에 두 자루의 검.
형태에 따라 사용 방법이 조금 달라졌을 뿐 사용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커스팅 템피스트!”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두 사람의 근접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공방을 이어 가던 수호는 순간 가슴을 옥죄여 오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독 때문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시 그거였다.
증상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긴 했으니.
“라이트닝 서커스.”
둘의 싸움에 난입한 시우가 번개를 흩뿌렸다.
불규칙하게 휘는 번개.
“프레데터 플랜츠 – 쉰(Syn).”
꿀렁거리며 바닥을 긴 넝쿨들이 급속도로 치솟았다.
슬로스를 중심으로 자라난 네 개의 나무.
나무 전체를 뒤덮고 있던 정체불명의 벌레들은 위험을 감지한 듯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끔찍한 소음 사이를 질주한 번개는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사라졌잖아?’
재빠르게 자리를 옮긴 시우는 수호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시우의 도움으로 거리를 벌린 수호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외부에서의 공격을 완전 차단하는 기술인 모양이지?”
수호가 거칠게 시우를 뿌리쳤다.
“뭔진 몰라도 아마 비슷한 것 같은데.”
“귀찮은 걸 숨겨 두고 있었군.”
“근데 몸에 뭘 그렇게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거냐, 너?”
수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시우가 가볍게 전력을 흘려보냈다.
“!”
그 순간 수호의 몸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벌레들.
깨처럼 보이는 작은 벌레들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진드기들이었다.
“뭐야, 이것들? 대체 언제….”
진드기들이 몸에서 떨어지자 녀석들의 존재가 보였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통증도 없었고, 어떤 이질감도 들지 않았었다.
“네 마나를 먹고, 반대로 독을 주입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녀석들이 네 마나로 자기를 숨기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
“…….”
아랫입술을 깨문 수호가 떨어진 진드기를 짓이겼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속다니.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어이.”
“음?”
“다음 호흡에 끝장을 낼 거다. 숟가락 얹을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
“호오~ 그래? 그거 우연이네. 나도 마침 같은 생각 하던 참인데.”
같은 선상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같은 적을 바라보았다.
슬로스의 양팔을 타고 피어오른 벌레의 소용돌이는 기괴한 불협화음을 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