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저기 봐! 저기 다른 곳이랑 좀 다른데?”
부서진 세계의 틈을 발견한 서윤이 외쳤다.
틈을 감추려는 듯 식물은 빠르게 서로 엉겨 붙고 있었다.
“하늘이 부서진 거랑 닮았어.”
“…….”
말없이 집중한 용주는 차원의 일렁거림을 살폈다.
일렁임의 경계면이 확실하게 작아지고 있었다.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어이어이~ 아가씨들. 그래도 사람이 있으면 신경 쓰는 척이라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피식 웃어 보인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함정이라도 무인 함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꽃잎 방주에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아주 게을러터져 보이는 사내가.
“슬로스…. 나태라고 불리는 자인가?”
대검을 움켜쥔 형만이 전투를 준비했다.
외형적 특징.
그리고 능력적 특징 모두 같은 사람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케 찾았네. 녀석이 보이기라도 했던 거야?”
서윤이 물었다.
“감이란 거지.”
어깨를 으쓱한 수호가 슬로스에게 다가갔다.
“어이, 배짱이! 혼자 자빠져서 처자고 있다니. 팔자 참 끝내주네?”
“하암~.”
자리에서 일어난 슬로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왜 여기서 혼자 퍼질러 자고 있는 거냐? 앙? 다른 녀석들은 어디 가고?”
“뭐? 야! 너 바보야? 물어본다고 답해줄 것 같아?”
수호의 물음에 서윤이 즉각 반응했다.
세상에 어떤 바보 멍청이가 적에게 그런 정보를….
“이 문이 닫히기 전까지 지키고 있으라고 했거든. 다른 사람들은 다 먼저 갔어.”
“…….”
축 처지는 슬로스의 목소리.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서윤은 미간을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 이건 비밀인가? 아니지. 비밀이란 말 없었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아마도.”
슬로스의 손에서 자라난 넝쿨들이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혹시 여길 지나갈 생각인 거야? 그런 거야?”
슬로스의 물음에 돌아온 건 강렬한 폭발이었다.
불길에 삼켜진 방주를 버린 슬로스는 곁가지 위에 올라섰다.
문답무용.
형만의 대답은 확실했다.
“음…. 그럴 건가 보네. 그건 안 돼.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그랬거든.”
가위처럼 생긴 검을 꺼낸 슬로스가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땅이!”
순식간에 요동친 땅은 불규칙하게 꿀렁거렸고, 사방에서 피어난 꽃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인페르노!”
“라이트닝 노바.”
작렬하는 불길과 번개.
수지 쪽으로 튄 번개의 파편을 막아선 용주는 흡수한 번개를 다른 쪽으로 흩뿌렸다.
“호오?”
짧은 순간 일어난 일에 시우가 호기심을 보였다.
모든 번개는 당연 자신의 컨트롤 안에 있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단 하나도 통제 밖에 있지 않았다.
용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수지가 대미지를 입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 전 공격이 용주에게 직격한 이유는 딱 하나.
뭔가 신기한 걸 볼 수 있을 거란 변덕스러운 기대감 때문이었다.
“어이.”
까맣게 그을린 재의 한복판에서 수호가 용주를 불렀다.
태영이 펼쳐놓은 실 가닥은 모두에게 발판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발목 잡힐 시간 없단 거 알고 있겠지?”
슬로스를 향해 있던 수호의 시선이 살짝 사선으로 틀렸다.
그는 그 너머에 있는 걸 보고 있었다.
“그래. 안 그래도 전광석화로 끝낼 생각이다.”
“아니. 틀렸어.”
“틀렸다고?”
용주의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 대화의 문맥.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모르겠나? 많고 많은 녀석들 중에 저 녀석을 남겨 뒀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 시간 벌이도 못하고 혼자 뚜드려 맞고 끝날 거였으면 남겨 놓지도 않았을 거고.”
“…….”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설령 버림패로 썼다고 해도, 원하던 목표에 충분하다고 판단됐기에 녀석을 여기 남겨 둔 것일 것이다.
“난 녀석과 맞붙어 본 적이 있어. 왜 녀석을 남겨 뒀는지도 조금은 짚이는 구석이 있지.”
슬로스.
지난번 녀석과 싸우면서 상당히 특이한 마나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식물이 햇빛을 통해 광합성을 하는 것처럼.
녀석이 만든 식물들이 다른 헌터들의 마나를 이용해 주인에게 마나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흐름이었다.
자신이 본 게 맞다면, 녀석을 여기 남긴 것도 이해가 갔다.
필연적으로 가장 많은 적을 만날 길목에서, 가장 끈덕지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녀석.
팬텀에 남은 맴버 중에 거기 가장 적합한 게 녀석이라 판단한 거겠지.
“다른 녀석들을 이끌고 가라. 녀석은 내가 상대할 테니.”
무리의 최전방에 선 수호가 맨손으로 꽃망울을 베어 냈다.
“칫! 오해는 하지 마. 지난번에 매듭짓지 못한 게 생각난 것뿐이니까. TF에서 내려온 명령도 있고.”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 수호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전개되는 이그노얼 나이트메어.
하늘에 나타난 수많은 눈들은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너흰 어차피 옆에 있어 봐야 방해야. 내 앞에선 힘 하나 펼치지 못하는 벌레 새끼들일 뿐이라고.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버려.”
무너지는 실 가닥에서 뛰어내린 수호가 출렁이는 넝쿨 식물을 타고 미끄러졌다.
소링 블레이드.
빠른 속도로 육망성을 그리는 수호의 움직임은 빠르고 예리했다.
“뭐야, 저 녀석? 갑자기.”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주랑 둘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긴 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가자. 여긴 녀석한테 맡기고.”
속도를 높인 용주는 수호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갔다.
“안 돼. 보내지 말랬어. 잔소리 들으면 귀찮아. 보스. 웃는 거 무서워.”
작은 지진과 함께 수풀 사이에서 수천의 벌레 떼가 날아올랐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독을 품고 있는 벌레들이었다.
“어이,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육망성의 꼭짓점에서 방향을 튼 수호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 순간.
날아올랐던 벌레들이 일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빗방울처럼 쏟아진 벌레들은 지면에 닿으며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멀티탭에 멀티탭에 멀티탭. 그렇게 얇고 보잘것없는 실 가닥으로 내 앞에서 장난을 칠 생각인 거냐? 감히 내 앞에서?”
이그노얼 나이트메어.
슬로스는 이 안에서도 여전히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벌레 쪽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지금 날아오른 녀석들은 식물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들.
그 마나의 형태나 크기는 단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결을 거듭한 멀티탭의 전류가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네 상대는 나다, 배짱이. 개미들은 그냥 지나가게 둬.”
육망성의 마지막 획을 그린 수호가 슬로스를 덮쳤다.
그가 일으킨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일대에 있던 모든 것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후두둑 쏟아지는 가지들과 나뭇잎.
거칠게 몰아붙이던 수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운을 느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용주였다.
이윽고 사라지는 수지, 서윤, 형만.
마지막까지 한 번 더 뒤를 돌아본 태영까지도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남은 건 시우.
장막 앞에 멈춰 선 시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키힛!”
날카로운 번개와 함께 수호의 뒤를 잡았다.
“좀 전에 벌레 새끼들이라고 했지, 분명?”
시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는 하늘에 거꾸로 서 있었다.
“!”
갑작스러운 이상 반응에 놀란 수호는 지면을 길게 베어 내며 미끄러졌다.
적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몸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반응했다.
방향을 바로잡아 착지한 시우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원래대로면, 프라이드란 녀석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그냥은 못 넘어가겠더라고.”
왼손을 펼친 시우가 스파크를 일으켜 보였다.
시우의 힘은.
이그노얼 나이트메어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한판 해보잔 거냐? 여기서?”
TF랑도 언젠가 한번 붙어 보고 싶다.
시우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시우의 지금 분위기와 행동은 그와 전혀 무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고 싶거든. 근데 나도 그 정도 상황 판단은 할 줄 알아. 그러니 이렇게 하자고.”
시우가 뿌린 번개가 여덟 방향으로 흩뿌려졌다.
눈꽃 모양으로 떨어진 번개는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녀석을 먼저 끝장내는 쪽이 이기는 걸로. 지는 쪽은 앞으로 평생 벌레 새끼인 거야. 어때? 쫄리면 뒈지시든가?”
“칫. 기어오르기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지면을 뚫고 솟구친 식인 식물들의 입에선 수많은 덩굴손들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으…. 미안하지만, 난 그런 나쁜 취미는 없는데.”
검을 고쳐 잡은 시우가 양 검의 손잡이를 맞댔다.
검 사이에 흐르는 전류는 두 검을 마치 하나인 것처럼 이어 주고 있었다.
“그런 건 저기 저 녀석한테나 하라고.”
회전하기 시작하는 칼날.
자신을 쫓아오던 덩굴손들을 갈기갈기 찢어 낸 시우는 손을 놓았다.
회전력 그대로 날아가는 검.
부메랑처럼 날아간 검은 곧장 슬로스를 향했다.
“귀찮아. 자고 싶어.”
눈을 비비는 슬로스의 앞으로 거대한 수세미가 자라났다.
빠른 속도로 잘려 나가는 수세미의 덩굴과 열매.
칼끝에 베인 수세미에선 다량의 섬유질이 쏟아졌고, 섬유질에 범벅이 된 칼날은 서서히 회전력을 잃어갔다.
“으…. 그건 그거 나름대로 최악인걸?”
인상을 찌푸린 시우는 검을 불러들였다.
검에 남아 있던 끈적한 섬유질은 시우의 전기 쇼크 한 번으로 까맣게 그을려 떨어졌다.
“뭘 넘기려는 거냐, 멍청이?”
넝쿨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진 수호는 원을 그리고 있는 식물을 그대로 타고 올랐다.
중력을 거스른 수호의 눈앞에 보이는 덩굴손.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낸 수호는 마지막으로 원을 그리던 트랙을 잘라 냈다.
스키 점프를 하듯 날아가는 몸.
거꾸로 뒤집힌 채 날아간 수호는 정확히 슬로스를 노렸다.
“왜 이러는 거야?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서로 편했잖아. 당당하게 땡땡이도 좀 치고.”
커튼처럼 닫히는 식물의 장벽.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는 식물들 너머로 날카로운 가시들이 보였다.
선인장.
탱크의 무한궤도로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선인장이 벽을 치고 있었다.
‘겨우 그걸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속도를 줄이지도.
방향을 틀지도 않은 수호가 그대로 선인장으로 돌진했다.
수호를 찌르는 수많은 가시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호는 벌집이 되어 있어야만 했다.
아니, 그 정도로도 부족했다.
꼬챙이에 찔린 물고기처럼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그완 전혀 달랐다.
수호와 부딪친 가시들은 잘리거나, 뚝뚝 부러져 나갔다.
언리시 블레이딩.
몸 전체가 검이나 다름없는 수호였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마찰음.
처음으로 자기 무기를 휘두른 슬로스가 수호의 힘에 정면으로 맞섰다.
“왜 자꾸 날 못살게 구는 거야?”
왼손을 뻗은 슬로스는 넝쿨로 수호를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하! 그게 될 것 같냐, 멍청아!”
수호의 공격이 한발 더 빨랐다.
수호의 뒤를 따르던 원 오브 아이의 칼날은 슬로스의 넝쿨을 전부 베어 버렸다.
“피어싱 블레이드!”
순간적으로 생긴 빈틈의 실.
그 잠깐의 시간을 놓치지 않은 수호는 슬로스의 명치를 올려 쳤다.
충격에 날아가는 슬로스.
“키힛!”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슬로스의 눈앞에 나타난 시우는 엑스자로 검을 교차시켰다.
몰아치는 번개에 날아간 슬로스는 자신이 만든 넝쿨 벽에 그대로 처박혀 버렸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다니. 뭐, 헌터들이 다 그렇지.”
“숟가락을 올리긴 누가 올려? 내가 뚜껑 여는 사이에 밥부터 파먹은 게 누군데.”
“하! 그것도 비유라고.”
“뭐, 어때. 어차피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은데?”
짧은 티격태격을 끝낸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깊게 파인 넝쿨 속을 빠져나온 슬로스의 마나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