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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286화 (286/357)

286화

* * *

테레사의 안내를 받은 용주는 부서진 하늘 아래에 섰다.

전장엔 수많은 뱀파이어들과 인형들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D급 개체 같은데요, 이건.”

“이쪽은 B급 개체야. 뒤죽박죽 뒤섞여 나오나 본데.”

소각을 준비하고 있던 사체 구덩이를 살핀 태영과 시우가 이야기했다.

언노운들의 종류도 등급도 제각각.

주를 이루는 건 대부분 C급 이하의 하급 언노운들이었다.

“웬 놈들이냐!”

“정체와 소속을 밝히십시오.”

“좋은 말로 할 때 말이지.”

사체 구덩이를 어슬렁거리는 침입자들에게 박쥐 떼가 모여들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뱀파이어들.

날카로운 손톱과 송곳니를 드러낸 그들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뭐라는 거야, 이 녀석들?”

“일단은 적어도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크흣! 그렇게 나오면 뭐. 나도 날려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시우의 주변으로 작은 스파크가 번져 나갔다.

“날려 버려도 되는 건가, 이 녀석들?”

“절대로 안 되죠. 당연히.”

“쯧! 알고 있어. 농담 한번 해봤다고.”

혀끝을 찬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힘을 한 번 발휘한 효과는 탁월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주변 뱀파이어들의 경계심은 200% 이상 상승해 있었다.

“팬텀 배일!”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박쥐들의 습격.

“페이탈리티!!”

박쥐 떼를 뚫고 나타난 사내가 거대한 말뚝을 만들어 냈다.

사내의 모습은 지금껏 봐왔던 뱀파이어들과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마네킹이나, 구체 관절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키힛!”

입꼬리를 올린 시우는 말뚝 끝을 붙잡았다.

크고 날카로운 말뚝은 시우와 불과 몇 센티미터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 따끔할 거야. 일렉트릭 쇼크.”

말뚝을 타고 흐르는 전류.

순간적으로 튄 스파크와 함께 사내가 뒤로 물러났다.

말뚝을 잡고 있던 손은 전류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순간 오른발이 크게 뒤틀린 사내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이거… 아무래도 일이 점점 더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요?”

태영이 곤란함을 표했다.

“먼저 싸움을 걸어온 건 저쪽이라고. 걸어온 싸움엔 상대해 주는 게 내 철칙이라서 말이야.”

“먼저 시비를 건 건 우리 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살살했으니, 별문제 없을 거라고.”

“…….”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실 가닥을 펼친 태영이 새장에 자신들을 가뒀다.

“잠깐!”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한 테레사가 서둘러 구덩이 쪽으로 다가갔다.

“군주시여! 이렇게 위험한 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위험한 자들입니다.”

한발 늦게 테레사의 존재를 확인한 뱀파이어들이 그녀를 감쌌다.

“뭔가 오해가 생긴 모양인데, 그쪽은 제 친구들이에요.”

“친구?”

“네. 아주 먼 곳에서 온 친구들이에요.”

“그렇지만 군주시여. 이들이 저흴 공격했습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오해라고. 다들 물러나도록 하세요.”

테레사의 한마디에 뱀파이어들이 손톱과 이빨을 거두었다.

자세를 낮춘 테레사는 방금 쓰러진 인형을 살폈다.

테레사의 손길을 거친 인형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왜 왔냐고 물었죠? 제 친구들이 찾고 있는 게 있다고 해서요.”

“찾고 있는 거?”

“네. 듣자 하니, 이번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자들이 이 이상 현상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뱀파이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에요. 전에도 저를 도와줬었는걸요.”

“군주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니, 저도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겠습니다.”

한발 뒤로 물러난 뱀파이어가 정중하게 경례를 올렸다.

“미안하게 됐다. 괜히 소란을 만들어서.”

테레사와 나란히 걷던 용주가 먼저 사과를 건넸다.

사과를 한 이는 용주였지만, 노발대발 화를 낸 이는 서윤이었다.

태영은 진심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정작 반성해야 하는 시우는 귀를 후비고 있었다.

“미안하긴. 그런 걸로 따지면 우리 쪽이 먼저 사과해야지. 다짜고짜 위협부터 했으니까.”

뒷짐을 진 테레사가 용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놀랐지?”

“뭐, 조금은. 설마 그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녀석을 본 용주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테이고른이었다.

심지어는 테이고른과 똑같은 기술까지 사용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그 뒤로 다 처분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 처음엔 그러려고 했었는데, 뭔가 마음이 불편하더라고. 얘넨 아무 잘못 없잖아? 그래서 그냥 휴면 상태로 안쪽 방에 놔뒀었어.”

“위기 상황에 그걸 다시 꺼냈고?”

“응. 다른 건 몰라도 힘은 다른 인형들이랑 비교할 바가 아니니까.”

전선을 가로지른 테레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정리되지 않은 언노운들의 유해가 아직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저 언노운이라는 괴물. 잘 알고 있어?”

“뭐, 조금은.”

“네가 있는 세계도 이렇게 하늘이 갈라지고, 저 괴물들이 습격해 오는 거야?”

“조금 다르지만, 원리 자체는 비슷할 거다.”

“응, 그렇구나. 그럼 저 부서진 하늘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겠네?”

“…뭐, 대충은.”

“좋아! 그럼 안심이야!”

빙글 돈 테레사가 용주와 마주 섰다.

“실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엄청 고민하고 있었거든. 모두가 날 보고 의지하는데, 난 방향도, 방법도 못 찾고 있었으니까.”

“…….”

“그러던 차에 네가 딱 나타난 거야. 나도 모르게 순간 엄청 안심해 버렸지 뭐야? 너랑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테레사가 어린아이처럼 웃어 보였다.

용주와의 첫 만남.

그땐 비록 인형의 모습을 빌리고 있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있잖아, 나 이 괴물들 보고 엄청 이상한 기분 들었었다?”

“이상한 기분?”

“어~ 뭐랄까, 엄청 어렸을 때,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옛날에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이상하지? 이런 괴물들을 내가 봤었을 리가 없을 텐데.”

“…….”

테레사가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망각 속에 잊힌 기억.

그 기억이 언노운 때문에 조금 수면 위로 떠 오른 거겠지.

“헤헷, 그냥 헛소리 좀 해봤어. 너희가 찾는 사람들을 봤다는 건 저 앞이야. 여기서 쭉 직진만 하면 돼.”

“그래. 안내해 줘서 고맙다.”

“고맙긴, 뭘. 나도 마음 같아선 더 가고 싶긴 한데.”

테레사가 뒤를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하늘에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또 인형 속에 들어갈 걸 그랬나?”

“그랬으면, 아까 진작 일이 터졌을 거다.”

“아! 그것도 그렇네.”

테레사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쿠구구궁!!!

엄청난 진동이 차원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괴물이다!”

“녀석들이 또 옵니다!

찢어진 하늘에서 언노운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밤의 귀족들이여! 다시 한번 피에 취하자꾸나. 오늘 밤을 붉게 적시자꾸나.”

박쥐 폭풍과 함께 날아오르는 수많은 뱀파이어들.

땅을 지키던 인형들이 쏘아 올린 마탄환들은 하늘을 가지각색으로 물들였다.

“떨어졌다! 떨어졌어!”

“가자! 가자! 간다!”

땅으로 추락한 언노운을 덮친 인형들은 언노운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는 입 안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적을 찢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주군이시여! 어서 뒤로!”

“군주님이 뫼셔라!”

언노운의 출현과 동시에 테레사를 중심으로 급히 방어선이 펼쳐졌다.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쉰 테레사는 실 가닥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순간,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언노운들의 사체.

“괜찮아요. 제가 한 가니까. 그것들 이제부턴 제 인형이거든요.”

동요하는 뱀파이어들을 진정시킨 테레사는 늘어뜨렸던 실 가닥을 끊어 냈다.

망가진 육신을 딛고 일어선 언노운들은 살아 있는 언노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놀랐어? 나라고 놀고먹기만 하던 건 아니라구. 군주님이잖아.”

테레사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크게 놀란 듯 보였지만, 용주는 그렇게 크게 놀라진 않았었다.

죽은 언노운이 살아 움직이는 것 정도야 이미 질릴 만큼 봤으니 말이다.

“이쪽 일은 우리가 정리할게. 가서 일을 끝내 줘.”

“…그래. 알았다.”

“있잖아!”

떠나려던 용주를 테레사가 급하게 불러 세웠다.

“가기 전에 손 좀 줘 볼래?”

“손?”

“잠깐이면 돼.”

용주의 손을 잡은 테레사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줍게 웃어 보인 테레사는 용주의 뺨을 쓸어내렸다.

“일이 다 끝나면, 꼭 다시 와.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봐야 할 거 아니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 어리광 피우고 싶은 이야기도.”

“…….”

용주의 머릿속에 순간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에 테레사와 헤어졌을 때의 풍경.

이건.

그때와 비슷한 듯 다른 풍경이었다.

“보…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뭐 하는 거야?!”

둘 사이에 흐른 묘한 기류를 맡은 서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화의 흐름상 대충 문맥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 키스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이상한 전개냔 말이다.

“가자. 여긴 녀석들에게 맡겨 두고. 이쪽이다.”

서윤과 짧게 눈을 맞춘 용주가 먼저 앞장섰다.

테레사의 지시를 받은 뱀파이어들은 용주 일행은 완벽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 * *

“저기 봐! 숲이 있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뒤엎어진 전장 끝에 이질적인 숲이 보였다.

단순히 파괴되지 않은 숲이 있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저 앞에 있는 숲은.

이쪽의 식물이 아닌, 지구의 식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의도적으로 뭔가를 감춰 두기 위한 장치인가?”

형만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역시 이상했다.

나무를 숨기려거든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저건 오히려 숲이 있기에 더 눈에 띄었다.

어쩌면….

“함정인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결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준이라면, 자신들이 추격해 올 수 있다는 계산 정도는 했을 테니까.

“썩은 동아줄이라도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함정이라면 부수고 나가는 수밖에.”

앞으로 치고 나간 용주가 가장 먼저 숲에 진입했다.

‘이건….’

무리의 가장 후미를 지키던 수호는 뼈 소리를 내며 손을 풀었다.

부자연스럽게 우거진 숲과 벌레들.

자신은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

속도를 높이던 용주가 순간 하늘 위로 내던져졌다.

원인은 땅을 이루고 있던 넝쿨의 움직임.

“샤아!”

입을 벌린 꽃망울이 감추고 있던 이빨을 드러냈다.

그 순간.

화르륵!!

예고 없이 발화된 짙은 불길이 식인 식물의 머리를 불살랐다.

화염 속에 몸부림치던 식물은 끝끝내 용주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까드드득!!

이번엔 순식간에 얼어붙어 잘게 바스러졌다.

“…….”

재빨리 다가간 수지는 용주를 살폈다.

분명 화염 속에 던져졌었는데, 용주에겐 화상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역시 함정이었군.”

“아니. 그 녀석 분명 이 근처에 있어.”

수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녀석이라니? 그게 누군데?”

“게을러터진 배짱이 녀석.”

원 오브 아이의 발동과 동시에 수호의 뒤로 갑옷의 형상이 나타났다.

호흡을 멈춘 수호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쉬익!

수호의 손짓과 함께 엄청난 양의 숲과 나무가 잘려 나갔다.

“…….”

고개를 돌린 용주는 잘려 나간 숲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급하게 자라난 식물들이 추락하던 꽃잎 방주를 받아 내고 있었다.

반듯하게 잘려 나간 숲의 틈 사이론.

부서진 세계의 틈이 보였다.

그래.

마치, 시련을 치르면서 마주했던 바로 그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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