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S급 카오스 게이트의 쪽문. 그럼 저 안쪽도 S급 게이트란 뜻일까요?”
안경테를 올려 쓴 태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A급 헌터도 아닌 자신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
그 자체만으로 전력적으로 상당한 페널티고, 특혜였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팬텀에게….
아니, 자신 때문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팬텀을 자기 손으로 쓰러뜨려야만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고.
사신에게 심장을 내어 줘도 좋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목숨 앞에 무릎 꿇고 빌 자격이 생긴다면, 몇 번이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보통의 게이트였다면, 그랬겠지.”
시우가 뻐근한 듯 어깨를 풀었다.
“그렇지만 저건 다르잖아? 팬텀이 평균적으로 A급 헌터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S급 게이트는 버틸 수 없을 거야. 그런데도 팬텀이 여기 없다는 건?”
열린 결말로 마지막을 남긴 시우가 눈썹을 들썩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처럼 들렸다.
A급 헌터가 버틸 수 있다고 해서 B급 헌터인 자신이 버틸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
“눈알 하나 정도 두고 올 자신 있으면, 시도해 보지 그러냐?”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던진 시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장난스러운 그의 말엔 이런 말이 숨어 있었다.
무슨 전조가 일어나면, 죽기 전에 내보내 주겠다는 이야기가.
“그 정도라면, 시도해 볼 만하겠네요.”
“크큭, 깡은 있네. 마음에 들었어. 까짓거 터지면, 나중에 고쳐 달라고 해보라고. 그 아줌마, 할망구처럼 좀 까칠해서 그렇지, 보기보단 괜찮은 사람이니까.”
“모아 놓은 돈이 충분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이번 일에서 다친 거니까 무료로 그냥 고쳐 달라고 해. 돈에 얽매이는 아줌마는 아니니까.”
“가까운 사이신가 보죠? 신서아 헌터님이랑.”
“키힛! 전혀 아니거든. 그런 잔소리 할망구, 나랑 관계없다고.”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잡담은 거기까지만 하고 움직이지 그러냐? 안 갈 거면 길이라도 좀 비키든가.”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용주를 선두로 한 다른 사람들은 카오스 게이트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아? 돌아가면 되잖아? 그것도 못 하면 그냥 돌아가지 그래? 너 어차피 헌터도 아니잖아.”
“TF 쪽에서 받은 명령이 있어서 말이지. 귀찮게도. 선대 눈한테 들은 잔소리도 좀 있고.”
“흐음, 뭐야? 태닝 양아치처럼 생겨 가지곤, 보기보단 꽤 성실하잖아? 금발은 안 해도 되겠어.”
“의미불명. 헛소리할 거면 움직이기나 하지 그러냐? 아니면 내가 직접 치워 줄까, 앙?”
“그거 좋네. TF랑도 언젠가 한번 붙어 보고 싶긴 했거든.”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미소.
그 사이에서 묘한 진심을 느낀 태영은 급히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계단을 모두 오른 용주는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용주를 따라다니던 푸른 나비는.
안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입구 주변을 맴돌았다.
* * *
“…….”
카오스 게이트 내부로 진입한 용주는 주변을 살폈다.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
야광빛을 내는 호롱 꽃들이 흔들리는 이곳을 용주는 알고 있었다.
여긴.
폭군 테이고른의 저택이었다.
‘아니야. 그렇지만….’
왼손을 움켜쥔 용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카오스 게이트가 아니라 퀘스트 게이트였다고?
아니, 그럼 자신과 수지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들어오지 못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용주가 기억하는 풍경과 지금 이곳은 100% 일치하지도 않았다.
깨진 하늘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여 있었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빛이 오로라처럼 물결쳤다.
형태도 모양도 달랐지만,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장면이 오버랩됐다.
인커젼.
히든 게이트에서 보고 경험했던 차원의 충돌과 붕괴가 말이다.
“뭐야? 여기 정말 카오스 게이트 맞아? 상위 게이트는 원래 이렇게들 생긴 건가?”
게이트 내부로 진입한 서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 있는 걸로 봐서 뭔가 다른 세계로 온 모양이긴 한데.
카오스 게이트라기엔 뭔가 평온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생긴 게이트. 나도 처음 봐.”
수지가 대답했다.
게이트마다 지형적 차이가 있었기에, 이렇게 생긴 게이트가 있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어라? 저거 집 아니야? 엄청 큰 대저택 같은데? 내가 잘 못 보고 있는 건가?”
언덕 아래 대저택의 존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카오스 게이트라기보다는.
지난번에 용주랑 함께 갔던 퀘스트 게이트에 더 가까워 보였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용주가 수호를 불렀다.
“팬텀 녀석들의 기운. 감지할 수 있겠냐?”
“아니. 유감스럽게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
“그래?”
엔비의 능력으로 다른 녀석들은 감출 수 있어도, 이준만은 예외였다.
그런 이준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건.
녀석이 여기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건.
이곳이 또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상태는?”
뒤를 돌아본 시우가 어깨를 들썩였다.
입구와 최대한 밀착한 태영은 자연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잇몸의 상태를 확인한 태영이 대답했다.
뭔가 몸이 이상을 느끼고 있다면 가장 먼저 이상이 생길 만한 곳임에도 아직까지 특별한 변화나 통증은 느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별일 없다는 건, 괜찮을 거란 이야기일걸? 안 그랬으면 들어오자마자 찌그러져서, 바닥을 기고 있었을 거라고.”
“그런가요?”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편 태영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인형?”
“움직이잖아? 뭐야? 저것도 언노운인가?”
태영과 같은 걸 발견한 서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종아리도 오지 않을 작은 인형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가 뭔진 몰라도, 아무튼 베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작고 귀여운 외모로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인형들과 눈이 마주친 서윤이 재빠르게 치고 나갔다.
그 순간.
“!”
용주가 서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왜 막는 건데? 혹시 가까이서 처리하면 안 되는 뭐 그런 거야? 워커처럼?”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녀석들은 적이 아니니까.”
“뭐?!”
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거기 너희.”
잔뜩 겁을 먹은 인형들에게 용주가 말을 걸었다.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은 인형들은 용주에게 다가왔다.
“너희도 테레사가 만든 인형들이냐?”
“테레사? 그게 누구야? 아니 애초에 왜 이 인형들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건데? 이것들 뭐야? 언노운이 아닌 거야?!”
서윤이 거칠게 용주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명하자면 길다.”
“길어도 말해! 난 꼭 들어야겠으니까!”
용주의 앞을 막아선 서윤이 거치적거리는 인형들을 발로 슥슥 밀어냈다.
서윤의 발길질에 넘어진 인형들은 서윤을 피해 수풀에 몸을 숨겼다.
“테레사. 그게 여기 있는 친구 이름인 거지?”
용주와 나란히 선 수지가 물었다.
“뭐야? 너도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서윤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만 알고 있는 비밀 이야기라니.
뭔가 기분이 별로였다.
“카오스 게이트도 우리가 사는 차원도 아닌 제3의 차원. 맞지?”
반 발 앞으로 나온 수지가 용주와 눈을 마주쳤다.
“제3의 차원이라고? 잠깐만! 그런 이야기 난 처음 들어보는데?”
서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둘 사이에 있으니 꼭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흰? 너흰 들어봤어? 나만 이상한 사람인 거야? 그런 거야?”
반응은 달랐지만, 다른 사람들의 대답은 대체로 비슷했다.
서윤의 상식은 틀리지 않았다.
“뭐야? 너희 둘만 아는 비밀 뭐, 그런 거야? 남들한텐 알려 줄 수 없는 그런 거냐고?!”
순간 욱한 서윤의 감정선이 크게 흔들렸다.
스스로도 놀라 버렸다.
이렇게 다급한 순간에.
고작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컥하다니.
이런 거….
너무 한심하고 볼품없지 않은가?
질투나 하다니.
최악이었다.
“…….”
순간 흔들린 서윤의 눈동자에 용주가 자세를 낮추었다.
“말했잖아. 설명하자면 길다고.”
“…….”
평소완 다른 말투와 억양.
놀란 서윤이 눈망울을 깜빡였다.
“일이 다 끝나면, 그때 다 이야기해 줄게. 그러니 지금은 그냥 넘어가 줘. 알잖아?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란 거.”
서윤을 뒤로한 용주가 인형들이 숨은 수풀로 다가갔다.
겁을 잔뜩 먹은 인형들은 수풀 밖으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묻지. 너흰 테레사의 인형들이냐?”
용주의 물음에 인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를 만나야겠는데. 녀석, 지금 저택에 있는 거냐?”
고개를 끄덕인 인형들이 수풀을 빠져나왔다.
저택을 가리킨 인형들은 따라오라는 듯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 * *
“세상에…. 이게 누구야?”
용주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 본 테레사는 자신의 볼을 찰싹 때렸다.
서윤은 그런 테레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마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뭐, 피차 마찬가지지.”
용주가 어깨를 들썩였다.
테레사를 만난 곳은 용주가 테이고른과 일전을 벌였던 그 방이었다.
기둥에 선명하게 남은 말뚝 자국은 그때 일을 아직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네?”
“이 사람이 테레사?”
호기심 가득한 테레사의 눈에 더 호기심 넘치는 수지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전에 봤던 오우거나 랫맨들과 달리.
테레사는 그냥 사람처럼 보였다.
조금 창백한 피부를 가진 미녀 말이다.
“테레사는 뱀파이어다. 뭐, 믿거나 말거나지만.”
용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믿거나 말거나라니. 난 200% 뱀파이어라고.”
테레사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였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지금은 무려 군주님이야. 그렇게 하라고 했었잖아.”
“…그랬었지.”
벌써 오래전 기억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그리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닐 텐데 말이다.
“잠깐만! 너희 지금 이 사람 말 알아듣는 거야? 어느 나라 말이야? 난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서윤이 물었다.
다른 세계이니 언어가 다른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복도와 계단을 지나면서 들리는 소리에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런데 용주는 지금 한글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2개 국어. 동시통역이라도 된다는 건가?
양쪽 다?
“으응.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저쪽만.”
수지가 고개를 저었다.
“뭐, 필요하면 그것도 나중에 설명하마.”
용주가 다시 테레사와 눈을 맞췄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나도 느긋하게 와인이라도 한 잔 대접해 주고 싶긴 한데, 실은 그럴 여력이 없거든.”
테레사가 손안에 있는 실 가닥을 만지작거렸다.
“원인은 역시 인커젼이겠지?”
“인커젼?”
“차원과 차원의 충돌. 하늘이 깨지고, 생전 처음 보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넘어오는 현상을 말하는 거다.”
“아…. 응! 맞아! 그걸 인커젼이라고 하는구나? 처음 알았어.”
인커젼이란 말을 처음 들은 건 물론 테레사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용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인커젼이란 게 일어나고 처음 보는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급한 불은 끄긴 했는데,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아.”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속속들이 보고받고 있는 거겠지?”
“물론이지.”
“혹시 언노운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인간들을 목격했다는 정보는?”
“언노운이란 게 그 괴물들을 말하는 거지? 음…. 잠시만.”
테레사가 기억을 더듬었다.
시우에게 정전기 고문을 받던 인형은 급하게 테레사에게 다가왔다.
“음…. 아! 있었어!”
쪼그리고 앉았던 테레사가 눈을 번뜩였다.
“인커젼이랑 언노운이 나타나기 전에 들어왔던 이야긴데, 엄청 동글동글하게 생긴 사람이 나무건, 풀이건, 돌이건 다 먹어 치우는 걸 봤다고. 동물을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거기가 어디냐?”
“지금 그어 놓은 전선의 앞쪽. 언노운이란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 바로 거기야.”
단서를 잡은 용주는 테레사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테레사와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덕분에 찾고 있던 유령의 꼬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