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6.25 탑.
목표했던 전쟁 기념관엔 언노운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참전국들의 국기가 걸린 게양대는 몇몇 개를 제외하고 전부 부러져 있었고, 국군상과 탱크들 역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헬 플레어!”
하늘 높이 뛰어올랐던 형만이 언노운 하나를 찍어눌렀다.
그와 동시에 퍼져 나가는 푸른 화염.
일대를 뒤덮은 화염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언노운들을 집어삼켰다.
“블러디 퓨리!”
원을 그리며 흩뿌려진 열여섯 자루의 검.
가속도를 올린 서윤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언노운을 찢는 서윤의 참격.
한 획씩 추가된 서윤의 칼날은 마지막 열여섯 번째 날을 흡수했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던 단 한 마리의 언노운은 서윤의 마지막 일격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굉장해! 저게 서윤 누나의 힘?!”
단번에 수십 마리의 언노운을 처리한 서윤의 움직임에 주원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서윤이 보여 주는 힘은 여기 있는 A급 헌터들에 힘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흐흥~ 더 칭찬해도 좋아.”
“겨우 그거 하고 좋다고 귀에 입이 걸렸네. 애도 아니고.”
“뭐?!”
근처를 지나가는 목소리에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귀찮음에 묻어나는 목소리의 주인은 시우.
두 개의 검을 공중에 띄운 시우는 그 사이에 똑바로 섰다.
작렬하는 뇌명 속에 언노운들은 까만 재가 되어 흩날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좋다고 귀에 입이 걸렸다 했다. 왜? 뭐 틀린 말 했어?”
“뭐?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딱 보니 진각성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때가 제일 위험할 때라고. 자기 실력에 취해서 나대다가 뒈지는 녀석들 한두 명 본 게 아니야. 긴장의 끈은 놓지 말라고.”
“…….”
막무가내로 시비를 거는 게 병규의 모습이 겹쳐 보였었다.
하지만 시우의 충고엔 뼈가 있었다.
“하아압!!”
“버티! 꽉 잡아! 놓치면 안 돼!”
금화 그리고 버티가 언노운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잡아 찢으려는 자와 찢어지지 않으려는 자의 팽팽한 줄다리기.
수직으로 떨어진 예나의 검은 언노운의 정수리에 정확히 꽂혔다.
“지금일세!”
금화의 신호에 언노운이 순식간에 좌우로 찢어졌다.
하지만.
찢어짐이 의미하는 게 죽음은 아니었다.
찢어진 언노운의 안쪽에선, 같은 모습, 같은 생김새를 한 언노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월영식 - 자!”
놀란 예나의 검이 정신없이 움직이던 그때.
세 줄기의 보랏빛 물결이 언노운의 머리를 꿰뚫었다.
“휴~ 무슨 마트료시카도 아니고, 놀랐네.”
쓰러진 언노운의 머리맡에 착지한 주원은 호흡을 정리했다.
“나이스 리바운드네요.”
예나 곁을 지키고 있던 승우가 달려드는 언노운 하나를 제거했다.
승우의 검에 찢겨 흡수된 언노운은 승우의 편에 서서 다가오는 언노운들과 맞섰다.
“준비됐어요. 신호하시면 제가 그쪽에 맞출게요.”
6.25 기념탑 앞에 선 나은이 마나를 집중시켰다.
지금껏 그 많은 전투가 있었음에도 힘을 비축해 두고 있었던 나은이었다.
그건 다 지금을 위해.
이제 자신이 전력을 다해야 할 때였다.
“오케이~ 그럼 당장 저질러 버리자고!”
이안의 발밑에서 뻗어 나가는 차원의 경계.
지그시 눈을 감은 나은은 이안의 색에 자신의 색을 맞추었다.
불협화음이 일 듯 서로 마찰을 일으키던 두 물결은 이내 하나로 이어졌다.
하지만 두 차원은 아직 같지 않았다.
이안의 차원이 풍경과 완전히 동화된 데에 비해.
나은의 차원은 풍경을 완전히 잠식해 버리고 있었다.
“단순히 펼치기만 해선 안 돼. 에고 스피어. 기억하고 있지?”
“물론이에요.”
“너라면 할 수 있어. 미세하게 조율해서 융화시키는 거야.”
“집중하고 있어요.”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는 나은의 차원.
선명함의 빈도가 차차 줄어들기 시작한 차원은 서서히 풍경과 동화되어 갔다.
“오케이~ 이제부터 확 잡아 끌 테니까. 뒤는 부탁할게.”
“최선을 다해 볼게요.”
안정을 찾아가는 에고 스피어.
이 이질적인 차원의 일렁거림은 사방으로 뻗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이안.
고통스러움이 묻어나는 그의 어깨에 서아가 손을 올렸다.
“서아?”
“너희 차원에 숟가락 좀 올릴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계획에 말이야.”
왼손을 든 서아가 나은의 어깨에 마저 손을 올렸다.
바람 한 점 없이 흔들리는 서아의 포니테일.
서아의 마나가 더해진 두 사람의 차원엔 푸른 나비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주원 오빠!”
예나의 다급한 부름에 주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예나의 검이 한 차례 시간을 벌어 보려 했지만 무용지물.
언노운의 칼날 발톱은 주원의 코앞에서 그 날카로움을 빛내고 있었다.
‘아뿔싸!’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 버렸다.
치명상을 피하는 게 그나마 최선.
그렇게 생각한 주원은 어깨를 틀었다.
“큭!”
칼날 발톱에 찢기는 주원의 왼팔.
“오빠!!”
반 정도가 잘려 나간 주원의 왼팔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쿠롸아악~!”
언노운의 입에서 쏟아지는 대량의 분비물.
둘 사이를 파고든 바람을 타곤 작은 풍선 인형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는 풍선 인형.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존재에 놀란 언노운은 칼날을 휘둘렀다.
갈기갈기 찢긴 인형에선 부자연스러운 바람이 불어 나갔다.
승우가 벌어 준 잠깐의 시간.
검을 고쳐 잡은 주원은 손목을 최대한 비틀었다.
“월영식 - 황(黃)!”
언노운의 입안으로 파고드는 칼날.
있는 힘껏 검을 움켜쥐고 있던 주원은 검에 살짝 자유를 돌려주었다.
그 순간, 주원의 손안에서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하는 검.
언노운을 일자로 관통하는 칼날엔 옅은 노란빛이 감돌았다.
언노운의 뒤통수를 뚫고 나온 주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만히! 버티! 주변 좀 살펴 줘!”
다급하게 달려온 예나가 주원의 상태를 살폈다.
너덜거리는 상처 주변으로 피부가 괴사하고 있었다.
‘독이 있었던 거야?’
괴사하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 두면, 독이 전신으로 퍼져 나갈 게 분명했다.
“수지 언니! 여기! 여기 좀 봐주세요!”
예나가 다급하게 수지를 찾았다.
수지는 목소리가 닿지 않을 곳에서 다른 사람을 치료해 주고 있었다.
“급한 대로 제가 응급 치료라도 해볼게요.”
미끄러지듯 멈춰 선 태영이 강철 케이스를 꺼냈다.
항생제, 중화제, 해독제.
태영의 케이스 안에는 여러 약품과 주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
바로 그때.
거대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세 사람을 지나갔다.
“방금 그건….”
“뭔가 거대한 해일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요.”
소독을 끝낸 태영이 해독제를 꺼냈다.
그 순간.
사뿐사뿐 날아온 파란 나비 한 마리가 주원의 어깨에 앉았다.
“나비? 이번엔 파란색이네?”
다시금 날갯짓을 시작한 나비는 주원의 상처 부위를 날았다.
나비에게서 떨어지는 꽃가루.
은은한 빛을 내는 꽃가루에 닿은 주원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상처가….”
“청호(靑蝴)의 헌터. 푸른 나비란 이명이 붙은 이유이기도 해. 의료 헌터 중에서도 이걸 쓸 수 있는 건 딱 한 사람뿐이니까.”
고개를 돌린 예나가 수지와 눈이 마주쳤다.
“이 흐름에 맡겼으면,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일 거야. 무리하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날아온 나비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사방으로 날아든 나비는 각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예나, 수지, 태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주가 만든 황금 나비와 마찬가지로 이 푸른 나비도 보통 나비들은 아니었다.
이건 서아의 마나가 하나하나 형상화된 나비.
하나하나가 치유 능력을 가진 일종의 의료 헌터나 다름없었다.
물론, 모든 게 만능인 스킬은 아니었다.
S급 헌터 본연의 능력만큼의 치유력은 발휘할 수 없었고, 모든 치유의 부담은 서아 본인이 받아야 했다.
넓은 영역.
더 많은 사람을 커버할수록 그 부담은 배가 될 터.
이안과 같은 배를 탔다면, 그 부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다.
“어찌어찌 시작 페달은 밟은 모양이지?”
네크로 클록을 두른 용주가 6.25 탑 근처에 내려앉았다.
한발 늦게 따라온 수호는 분한 듯 혀를 찼다.
“그래. 아주 퍼펙트하게 진행 중이라고.”
엄지를 세워 보인 이안이 웃어 보였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눈과 이빨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차원을 전개하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어요.”
나은의 목소리에 용주가 귀를 기울였다.
“남산 주변의 차원은 이미 이쪽 세계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마 뭔가….”
이야기를 이어 가던 나은의 얼굴이 순간 찡그려졌다.
피부를 스친 불길함에 고개를 돌린 용주는 저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를 올려다보았다.
타워 꼭대기의 일그러짐이 이젠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금방이라도 저 일그러짐이 임계점을 넘어 카오스 게이트가 열릴 것 같았다.
“차원 압력…. 조금만 일이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겠네.”
두 사람이 만든 에고 스피어를 뒤따르듯 차원 압력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계와 통신을 무력화시키던 이전 것들과는 달랐다.
이건 사람을 찢어발길 수준의 차원 압력.
에고 스피어를 만드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주원을 비롯한 많은 헌터들이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더 시간 끌 게 아니라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일대가 정리된 걸 확인한 서윤이 용주에게 다가왔다.
“혼자 갈 생각이라면 꿈 깨. 절대 혼자는 안 보낼 거니까.”
입꼬리를 올린 서윤이 피로 물든 톱날검을 어깨에 걸쳤다.
다가온 사람은 서윤만이 아니었다.
“응. 같은 생각이야.”
수지, 금화, 예나, 주원, 형만, 태영.
거기에 승우와 시우까지.
팬텀과 맞서 싸웠던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매듭을 짓고 오세나.”
“오빠! 잘하고 와.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서윤 언니랑 수지 언니도 꼭 돌아와요!”
예나, 금화, 주원.
이 세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미 결단을 내린 뒤였다.
여기 남겠다는 결단 말이다.
“용주 형!”
용주에게 바짝 붙은 주원이 결연한 시선을 보냈다.
“국밥 먹으면서 했던 이야기. 기억하고 있죠?”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주원이 했던 이야기를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이 싸웠던 슬로스에 대한 이야기.
다른 하나는 월영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상대가 누구든 월영식을 쓴다면 다 똑같을 거예요. 자세도, 약점도, 공략법도.”
“그래. 명심하고 있으마.”
“비장의 한 발도 잊지 말라고. 우리 준이를 위해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 말이야.”
갑작스럽게 끼어든 이안의 목소리.
“그래.”
뒤돌아선 용주의 망토가 펄럭였다.
“잠깐!”
그때.
거대한 바위의 뱀이 용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릴 빼면 섭하지.”
“맞아. 이미 우린 한배를 탄 전우들 아닌가?”
“한번 헌터는 영원한 헌터.”
“형만 삼촌도 가려는 거죠? 시우랑 수지도. 그럼 끝까지 함께해야죠. 가는 길이 분명 순탄치 않을 거예요.”
용주의 곁으로 모여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헌터들.
같은 전장에서 같은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헌터들이 지금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
용주와 눈이 마주친 형만은 대검을 내리꽂았다.
“알다시피 저기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이준. 류은의 헌터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승산이 없다.”
목소리를 높인 형만이 외쳤다.
“무의 헌터도, 청호의 헌터도 현상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다. 여기 있는 전원이 동시에 덤빈다 해도 가능성은 1% 미만일 거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대검을 하늘 높이 치켜든 형만이 90도를 그렸다.
칼끝은 정확히 용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애송이 녀석을 류은의 헌터 앞까지 데려가는 것. 그게 우리가 녀석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다.”
형만의 대검을 타고 불길이 피어올랐다.
“류은을 쓰러뜨릴 건 녀석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자. 지옥 밑바닥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이 녀석뿐이다. 좀비가 숨겨 둔 이빨이 류은을 무너뜨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