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엉덩방아를 찧은 상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많던 B급 헌터들.
그리고 현민을 지키던 경호 인력까지 전부 쓰러져 있었다.
그 모두를 무력화 상태로 만든 라이덴은 현민이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상황 파악을 끝낸 상필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정말! 거짓말 1도 없이, 전 여기 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같이했던 의리와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앙크 모양 검을 지면에 박아 넣은 상필이 검을 90도로 틀었다.
두 손을 싹싹 비는 상필.
용주의 시야 사각에 나타난 크리스털 관들은 하나로 모여 새로운 형태를 잡아 가고 있었다.
‘여기서 배 뒤집고 체포되면, 인생 조지는 거야. 실형 사는 건 둘째치고, 헌터 자격도 박탈당할 게 분명해. 그럴 순 없지.’
지금까지의 전개는 패배로 직결되고 있었다.
항복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인생 다 끝장나는 거였다.
제대로 한탕 해먹은 다음이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라여, 새로운 육식을 입고, 창공을 날아라. 불의 날개로 신의 심판을 내려라.”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상필.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새의 육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불의 날개를 펼친 불사조는 용주를 불태우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짙은 한기와 함께 한 마리의 본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뒤엉키는 불사조와 본 드래곤.
본 드래곤의 꼬리에 맞은 불사조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고, 꼬리에 박힌 파편의 일부는 본 드래곤의 뼈를 검게 그을렀다.
날개를 활짝 펼친 불사조는 본 드래곤을 뒤덮었다.
둥글게 몸을 만 불사조의 모습은 마치 태양을 연상케 했다.
화르륵!
점점 더 강한 빛과 열을 내뿜는 불사조.
승자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는.
“……!”
활활 타오르던 태양이 안쪽에서부터 빠르게 얼어 갔다.
불길은 식지 않았다.
대신, 불길이 그 모양 그대로 얼어붙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구체엔 빠르게 균열이 생겨났다.
까드득-! 쾅!!
갈라진 균열을 찢고 날아오르는 본 드래곤.
그 모습은 마치 얼음과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알을 깨고 나온 것 같았다.
흩뿌려진 얼음과 크리스털 결정들의 모습에선 불사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뒤통수를 치고 싶으면, 다음번엔 좀 더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보좌관이 날개를 펼쳤다.
“뭐, 그게 아니었어도 단서투성이였지만.”
“히익!!”
룬검을 뽑아 드는 용주와 눈이 마주친 상필은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 난 아무 잘못 없어! 아무 잘못 없다고!!”
크리스털 관을 연 상필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용주가 한발 빨랐다.
거친 바람과 함께 찢긴 관의 파편이 흩날렸고, 상필이 입고 있던 갑주에도 상처가 남았다.
급히 방향을 튼 상필은 다른 곳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
그런 상필의 앞을 지나는 치명적인 브레스.
불과 1m 차이를 두고 지나간 브레스는 일직선상에 있던 모든 것을 한낱 얼음덩어리로 만들었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
두리번거리는 그의 시선에 아군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뼈로 된 괴물들과 언노운.
보랏빛 번개와 새하얀 서리.
그게 전부였다.
“애, 앱솔루트 크리스털!”
검을 바짝 당긴 상필이 모든 마나를 이 기술에 집중시켰다.
상필을 감싸며 자라나는 은막의 거울막.
크리스털 돔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공간에서 둘은 서로를 볼 수는 있었지만, 서로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공격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는 극한의 방어술.
이게 바로 상필이 자랑하는 절대 방어의 기술이었다.
“절대 못 뚫어!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 뚫는다고!”
목소리를 높인 상필이 외쳤다.
차분히 존댓말을 쓰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억양과 말투.
그의 다급함 속엔 슬슬 광기 같은 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헛고생이야! 방탄유리는 뚫릴지 몰라도 이건 아니라고!”
그의 자신감은 허풍만은 아니었다.
용주의 풍참은 크리스털에 약간의 생채기를 내는 데 그쳤고, 혈사포 역시 BB탄 자국 하나를 남기는 선에 그쳤다.
“왜 한 점으로 계속 뚫어 보려고? 어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그건 영화야! 영화니까 된 거라고!”
자신감을 얻은 상필이 외쳤다.
시간이 끌리면, 또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언노운이 쏟아져 나오면 필히 날뛸 것이고, 녀석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때가 바로 기회.
무슨 수를 써서든 현민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다면, 그의 신뢰를 전부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전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테지.
“그래. 그건 영화니까 그렇게 한 거지.”
상필의 말에 동의한 용주의 팔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가볍게 뛰어오른 용주는 있는 힘껏 왼팔을 내리찍었다.
폭발하는 굵은 핏줄기.
놀란 상필은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영화에서처럼 방탄유리에 구멍을 뚫는 수준이 아니었다.
겹겹이 쌓였던 돔 중 일부는 지금 한쪽 면이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부, 부서졌다고?!”
상필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A급 언노운.
그것도 힘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개체에게 둘러싸이고도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버티게 해주었던 앱솔루트 크리스털이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부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아니지. 침착해.’
마른침을 삼킨 상필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방금 그거.
분명 녀석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 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녀석은 이걸 완파해 내지 못했고, 그런 기술은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
또다시 흩날리는 크리스털 파편들을 보기 전까지는.
‘그걸 또?!’
아웃레이지 스내치는 기본적으로 많은 양의 HP를 소모하는 기술이었다.
레벨이 오르고, 능력치가 오르고, 스킬 숙련도가 올라도 HP를 소모하는 리스크는 여전히 용주에게도 부담되는 요소였다.
혈류 재생.
요구되는 HP 소모량이 전체적으로 감소되는 패시브가 생겼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분 광폭화를 사용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아웃레이지 스내치는 기본적으로 광폭화에서 파생된 스킬.
그 때문인지 광폭화 상태에선 소모값이 사라지는 특징이 있었다.
부분 광폭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용주의 경우엔 이견이 없었다.
부분 광폭화 상태에서 사용하는 아웃레이지 스내치는 HP를 소모하지 않았다.
지불해야 하는 건 신체에 축적되는 대미지.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건 용주의 전문 분야였다.
“괴물….”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상필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당장이라도 패닉에 빠질 것 같았다.
‘괴물? 그래. 그거야.’
그런 상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비책이 떠올랐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카오스 게이트를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언노운이라면 여기 이 자리에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재워 놓은 녀석들이.
‘남은 방법은 그거밖에 없어. 하는 거야.’
V자로 펼친 손을 눈가로 가져간 상필이 자신이 잠재웠던 언노운들을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쾅! 쾅! 쾅캉강!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하는 언노운들.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 낸 언노운들은 가장 먼저 보이는 소와 말들을 찢어 놓았다.
처참하게 흩뿌려진 피와 살점 그리고 내장.
“…….”
비처럼 쏟아진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현민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근처에 저 뼈로 된 사슴이 있다는 것.
전화위복이란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꼬옥~!”
“두루르르….”
잠에서 깨어난 언노운들은 이어서 마비되거나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노렸다.
재빠르게 움직인 라이덴과 보좌관은 언노운을 제압하고 나섰다.
라이덴의 등에 매달린 현민은 죽기 살기로 뼈를 붙들고 있었다.
“제일 큰 놈이 깨어나는 건 지금부터야. 아니, 놈이 아니라 년이지.”
세 군데에서 동시에 상황이 일어나는 와중, 네 번째 상황이 발생했다.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A급 언노운.
숨기고 있던 날개를 펼친 언노운은 고속으로 날개를 마찰시켰다.
여왕의 부름에 반응한 알들에선 부화와 우화의 과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르릉!!”
그리고 그중 눈에 띄는 녀석들이 나타났다.
갑피를 두른 네 개의 다리와 칼날처럼 발달한 두 개의 턱.
가시가 무성한 철판보다 두꺼운 등딱지.
코끼리보다도 거대한 체구를 가진 녀석들은 라이덴의 번개에도, 보좌관의 혹한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아핫! 하하핫! 저 커다란 거 안에 들어 있던 게 저거였어?! 대박!”
여왕의 곁을 지키는 언노운을 확인한 상필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태스크 포스 선생! 언노운엔 문외한일 텐데, 내가 친절히 경고해 줄게. 저기 저놈들은 통칭 ‘울트라톱스’라고 불리는데, 신체 능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들이야. 저대로 두면, 분명 대량 참사가 일어날 거라고. 내 쪽보단 저쪽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어?”
포악하게 날뛰는 울트라톱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녀석들의 행동은 놀라울 만큼 얌전했다.
하지만 녀석들의 힘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여왕의 명이 떨어지거나, 여왕에게 위협이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녀석들은 분명 날뛰기 시작할 거다.
A급 언노운으로 분류되는 녀석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다음은 소나 말이 아니라 인간의 피와 내장이 날아다닐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헤치지 않은 녀석이 과연 그걸 두고 볼 수 있을까?
스윽! 스윽!
보좌관이 만든 얼음의 복도.
꿈틀거리며 움직인 여왕은 점점 용주에게 다가갔다.
날개가 있음에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여왕의 곁엔 부화한 무리들과 울트라톱스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얼음벽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마치, 패주가 타국의 황제를 영접하러 나가는 것 같았다.
“하핫! 여기로 곧장 오잖아? 선생! 보여? 선생 지금 큰일 난 거라고.”
상필이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여기서 용주가 물러나면 베스트.
교전으로 돌입하는 것 역시도 나쁘지 않았다.
스윽!
용주와 불과 몇 미터 거리까지 다가온 여왕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왕을 호위하던 여섯 마리의 울트라톱스는 일렬로 대열을 정비했다.
“뭔가 오려나 봐. 뭔가 오려나 본다고. 선생, 어쩔 거야? 나는 안전하지만, 선생이랑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걸? 선생이 죽인 거야. 선생이 죽인 거라고!”
조롱 섞인 일침을 날린 상필은 앙크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상필의 말대로 뭔가가 일어났다.
“!”
동시에 무릎을 꿇는 여섯 마리의 울트라톱스.
상필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의 이런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
복종의 자세를 확인한 용주는 천천히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녀석의 판단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날 이길 수 없다. 스스로 그렇게 판단했기에 이렇게 내 앞에 온 거겠지.”
언노운에게 말을 걸다니.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뭐, 뭐라는 거야! 미쳤어?! 언노운한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언노운이 항복을 한다고? 웃기지 마!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어! 없다고!”
실제로 바로 옆에서도 그런 소릴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고.
하지만 적어도 용주에겐 이건 미친 상황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너희에게 살아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
이 시점에서 이미 공격을 재개했어도 이상한 시점은 아니었다.
항복을 했음에도 죽인다고 말하는 건.
있는 힘껏 꿈틀대 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여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떤 처분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신 네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선택지 정도는 만들어 줄 수도 있다.”
“…….”
“불규칙적으로 열리는 카오스 게이트. 안쪽에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일 거다. 내 명령대로 움직인다면, 여기서 널 죽이진 않으마.”
자리에서 일어난 울트라톱스들이 다시 한번 무릎을 굽혔다.
두 번째 복종의 자세.
용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여왕의 사인이었다.
“인간들에게 일절 손대지 말고, 언노운들을 처리해라. 필요하다면 무리의 규모를 더 늘려도 좋다.”
이 녀석은 아니었지만, 무리 어미 개체를 상대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런 녀석을 부하로 부려본 적도 있고 말이다.
“인간들은 필히 너와 네 부하들을 헤치려 들 거다. 몸을 숨기고, 무리를 부리며 기회를 엿봐라. 수많은 무리를 잃더라도 참고, 인내해라.”
왼손을 들어 보인 용주가 날카롭게 손톱을 세웠다.
“한 번 더 경고하는데, 인간들에게 손대지 마라. 너와 네 무리가 단 하나의 인간이라도 해친다면, 내가 직접 네 목을 찢을 거다.”
“…….”
“가라.”
용주의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여왕이 날개를 펼쳤다.
무리를 이끈 여왕은 용주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